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전지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그분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을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전지하심을 믿습니다. 그분이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이나 딱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창선을 지나는 길에 60키로 제한속도인데 그만 75키로로 지나갔습니다. 그날이 일월 일일이었습니다. 정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러나 보다 생각하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 다음주에 시찰회 목사님 자녀 결혼식에 가는 길에 이번에는 그만 신호위반을 했습니다. 비보호가 아닌데 좌회전을 했습니다. 앞에 있는 카메라가 저를 따라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아내가 옆에서 좌회전하라고 했기 때문인지라 제 책임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또 며칠 뒤 이번에는 아들 데리러 학교에 갔다가 오는데 마을입구를 지나면서 30키로 제한속도를 그만 45키로 지나버렸습니다. 한 달에 세 번이나 그랬으니 속이 상하고 화도 났습니다. 세금 냈다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배가 너무 아팠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세 번이나 찍힌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한 번도 고지서가 안 나왔습니다. 미리 당겨서 괜한 염려만 하고 속만 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 걱정 염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돈 있다고, 건강하다고, 자녀들 잘 산다고 염려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수많은 염려와 근심 걱정 속에 살아갑니다. 아이들도 염려가 있습니다. 어른 되면 더 있고, 노인도 염려가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 세대가 제일 걱정이랍니다. 왜요? 취업문제, 결혼문제 때문에.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청년 자녀를 둔 부모는 얼마나 걱정이 많겠습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이 염려하는 것을 보고 그것도 염려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시면 '그러므로'라고 했는데 앞에 한 부자의 이야기를 하고 결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재물을 모으는 것에만 매달리다가 하나님이 영혼을 찾으시면 그 쌓아둔 것이 무엇이 되겠느냐, 라고 책망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염려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너희가 염려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도 염려한다고 안 되는데 큰 것을 염려한다고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안개가 짙고 폭우가 내린다면 그것은 기장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것을 승객이 염려한다고 달라질게 없습니다. 걱정해서 발을 동동 굴리면 승무원이 와서 괜찮으니 염려하지 마시라고, 우리 기장은 30년 넘게 무사고 비행을 한 베테랑이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잠언서는 말씀합니다. 잠17:22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염려는 도리어 우리에게 해가 됩입니다.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해서 35만 명의 전사자가 나왔는데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염려하다 죽은 가족의 수가 그보다 훨씬 더 많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염려는 무익하고 도리어 해가 될 뿐입니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오늘 주님도 "너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까마귀도, 백합화도, 들풀도 염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데도 잘 살고 잘 자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미국의 한 연구기관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우리의 걱정, 근심 가운데 80%는 일어날 수도 없는 쓸데없는 것이며, 12%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고, 오직 8%만이 진정으로 걱정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나머지 8%의 걱정, 근심도 무익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과 같은 내용을 말씀한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벧전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맡긴다'는 말의 의미는 '건네주다'는 말인데 이것은 포기하는, 자포 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말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믿고 넘겨주는 것을 말합니다. 신뢰하니 의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넘기느냐면 '염려'입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부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 맡기랍니다. 모든 염려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사업도, 건강도, 자녀 문제도 다 맡기라고 합니다. 사업 문제는 맡기는데 자녀 문제는 못 맡기는 사람, 자녀 문제는 맡기면서 건강 문제는 못 맡기는 사람이 아니라 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적당히 맡기라는 것이 아니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맡겨야 합니다.
한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 굴렀는데 다행히 나뭇가지를 붙잡았습니다. 밑을 바라보니 천 길 낭떠러지입니다.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잡고 있는 것을 놓으라.” 나무꾼이 말합니다. “거기 하나님 말고 도와줄 사람 없어요?”
우리가 염려를 맡기되 누구에게 맡겨야 합니까? 우리의 염려를 맡길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풀도, 새들도 먹이시는데 너희를 먹이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염려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를 맡길만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본문 30절에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염려를 맡겨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길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래서 누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러자 대통령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왜 그쪽을 염려하십니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를 염려하셔야죠!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과 같이 가고 있는가, 그것만 염려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3.우리 염려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거나, 아니면 악한 영들이 나의 주인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새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이고 그분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분명히 확인시켜 주고 계십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인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이 머리털까지도 다 헤아리고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시고 돌보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새들도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 일까 보냐고 했습니다. 너희가 까마귀보다, 백합화보다, 들풀보다 못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심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 자녀들이 밖에 나가서 얻어맞고 기가 죽어 오면, 그래서 학교도 안가겠다고 하면 비록 아무 힘없는 엄마라도 '엄마랑 같이 가자, 어떤 놈인지 가서 혼내주겠다'고, '엄마가 있는데 무슨 걱정하느냐'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데, 하나님이 너희를 기르시는데 무엇을 염려하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라고 했고 사도바울은 빌4:6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길 때의 자세도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믿고 맡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의심하면서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맡기지 못하는 것이나 의심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죠지 뮬러는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는 염려가 사라지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는 믿음이 사라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염려와 믿음이 동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심과 믿음이 수평이 될 수 없습니다. 맡기는 분량이 바로 믿음의 분량입니다. 우리는 잘 안 될 때도 맡기고 잘 될 때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을 변호사에게 맡길 때 어떻게 합니까. 변호사가 알아서 할 것을 믿고 맡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맡길 때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잠16:3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시37:5에서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시55:22에도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염려도, 행사도, 길도, 짐도 맡겨야 합니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믿고 맡기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주님이 말씀합니다. 28절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요. 좀 더 엄하게 말하자면 '까마귀나 들풀보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이런 지적을 받지 않게 되길 소원합니다.
4. 마지막으로 31절에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들,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이 환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해야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는 데 보탬이 되고 간증이 되길 소원해야 합니다. 이 어려움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먼저 행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먼저 힘쓴다면, 그리하면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라도 주님을 위해 희생하면, 물질로나, 시간으로나 주님의 이름을 위해 포기하면 주님은 더 귀한 것으로, 더 많은 것으로 보상해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을 좇아가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중요한 것은 '염려하지 말라"라고 한 말씀은 내게 맡기면 좋겠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주님의 바람이나 권면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단호한 명령,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이 명령이듯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명령이듯이 염려를 맡기라는 것, 또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