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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고쳐 주셨네.”(마태 4,23)
지독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도는 가을의 문턱에 있는 9월의 두 번째 주일, 전례력으로 연중 제 23 주일인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진리와 그 나라의 참 모습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염원하며 기다리는 약속의 날에 관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왕국의 멸망과 유배라는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 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 하느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어 그곳에서 태평성대를 누리리라 믿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왕국의 멸망과 바빌론이라는 낯선 땅으로의 유배라는 현실이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나락 속에 있던 그들에게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에게 마련된 구원의 약속에 관한 희망의 말을 전합니다. 그 희망에 대한 약속의 말을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 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이사 35,4ㄷ-7)
이사야 예언자는 지금의 현실로 인해 고통과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눈먼 이들과 귀 먹은 이 그리고 다리 절며 말 못하는 이로 표현하며 지금의 현실은 비록 그러하지만 하느님 약속의 그 날이 오면 눈 먼이가 눈을 뜨고 귀 먹은 이가 듣게 되며 다리 저는 이가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가 탄성을 올리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리라 예언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이야기하는 예언자는 그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모든 예언의 말을 진정 믿을 수 있도록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탈출하며 보았던 하느님이 이루신 놀라운 기적들, 곧 사막에서 샘이 터져 냇물이 흐르고 메마른 땅이 늪이 되고 마른 땅에서 샘터가 솟아오른 그 모든 일들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이제 다시 하느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말씀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사랑이 그 분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실현되는 모습을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지역인 티로와 시돈 그리고 데카폴리스 지역을 거쳐 마침내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였던 갈릴래야 호수로 돌아오신 광경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오시자 많은 이들이 그 분께 몰려들고 그 가운데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 그를 낫게 해달라고 청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복음의 주된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과 귀먹고 말더듬는 이와의 만남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 인물은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오늘 제 1 독서의 말씀을 연상토록 만듭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눈 멀고 귀먹은 이들 그리고 다리 저는 이와 말 못하는 이로 표현한 이사야 예언자의 그 의도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께서 실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만나고 그를 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람을 낫게 해 주시는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고 그를 바로 그 자리에서 낫게 해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그와의 단둘의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의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그를 따로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점과 그러고 나서 그에게 행하신 행동 그 두 가지입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은 왜 그를 군중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셨던 것일까? 군중들이 몰려 있는 그곳에서 이 같은 기적을 행하셨더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더욱 놀라워하며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굳이 군중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이 모든 기적들을 행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상황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귀가 먹고 말을 더듬는 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로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원만한 관계는커녕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어 배척과 멸시 속에서 고독에 몸부림쳐야만 하는 그의 상황, 그는 아마도 자신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고통보다 소외와 배척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에 더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의 신체적 아픔 그 이면에 그를 더욱 괴롭히고 있던 그의 마음의 아픔을 바로 보시고 그를 배척하고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 그와 예수님 단 둘이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데려가 그의 아픈 마음과 함께 그의 육체적 고통 역시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통해 만일 우리가 현실적 고통, 곧 육신의 아픔과 마음의 상처들로 인해 아파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주위의 또 다른 누군가의 위로와 위안이 아닌 우선 먼저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단독적 만남, 다른 누구와 함께가 아닌 내 자신이 홀로 주님 앞에 나와 그 분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 주십니다. 그러면 그 분께서 나의 모든 아픔을 헤아리시고 그 아픔을 없애 주신다는 사실, 바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두 번째로 예수님이 그를 낫게 해주시며 한 행동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다른 병자들을 낫게 해 주셨던 것처럼 그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는 일반적 모습이 아닌 다소 생소하고 낯설게 보이는 행동들, 곧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는 행동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평소와는 다른 이 사람에게만 보이는 예수님의 이 같은 특별한 행동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동 속에 담긴 성경적 표징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손가락’ 역시 성경 안에서 ‘성령’과 연관된 표징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한숨을 내쉬었다’라는 표현에 사용된 희랍어 동사(stenazo)는 ‘깊이 탄식했다’라는 의미로서 이 역시 성령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귀를 막으시고, 침으로 손가락을 적신 후 한숨을 내쉬는 모든 동작들은 모두 성령을 이 사람에게 보내주시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모든 치유의 기적, 그 가운데에서도 다른 이들과의 소통의 문제를 갖고 있는 이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아픔 속에 있는 이를 낫게 해 주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기적의 활동은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 분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앞에서 온전히 실현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며 다리 저는 이가 사슴처럼 뛰며 말 못하는 이의 혀가 풀려 환성을 터뜨리는 놀라운 기적이 단순한 예언의 말이 아닌 실현될 현실임을 오늘 복음은 드러내 줍니다.
그렇다면 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편에서 해야 할 것을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이 모든 희망의 약속들이 우리 안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오늘 제 2 독서의 야고보서의 말씀이 바로 그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야고보서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그 분 나라의 완성이 가난한 이들 그리고 소외받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우리 주위의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다음의 말로 설명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 않으셨습니까? [...]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야고 2,5.1)
많은 이들이 현재의 우리의 시대를 일컬어 소통의 부재 시대라고들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을 하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 그래서 도무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사회적 문제들과 더불어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외로움과 고독에 몸부림치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회, 우리가 바로 그러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귀먹고 말더듬는 이의 모습과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귀가 먹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자신이 하는 말조차 제대로 남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말 더듬는 이의 모습, 바로 그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 귀가 멀고 그로 인해 자신이 하는 말 역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귀먹고 말더듬는 이, 그가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은 따로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시고 그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그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들음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들음으로서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한 성령으로 인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말처럼 아픈 우리들을 하느님은 그저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주시는 분,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느님을 믿고 그 분의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우리 삶에 불통이 아닌 소통이, 아픔이 아닌 치유가, 좌절이 아닌 희망이 그리고 죽음이 아닌 부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 2 독서의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그 모든 것은 우리 삶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 내 주위의 가난한 이들, 하느님이 뽑아 믿음의 부자가 되도록 해 주신 그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할 때 그 놀라운 기적이 우리 삶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잊지 말고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겨 여러분 모두가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을 여러분의 삶 안에서 체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 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이사 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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