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읍니다. 사과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읍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읍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플 때엔 너무 드너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었읍니다. 크나큰 축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 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년 전의 단풍잎에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 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늘입니다.
10
한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병(小心病) 환자(患者)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이해인 제3시집, 가을편지 1~30번 중 10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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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의 마지막 날, 10/10 대체 휴일에 중고서점에서 8권의 시집을 모셔왔습니다.
그 중에 한 권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라는 이해인 시인님의 제3시집을 가방에 담아 출근했습니다.
1983년 초판, 1990년 41판, 분도출판사, 당시 책값이 2,200원이더군요.
30년이나 된 이 시집은 낡아서 엷은 황토색입니다.
나에게 책향은 그 어떤 향수보다 더 그윽하고 좋습니다.
마치 구수한 숭늉과 같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
많은 분들은 이야기 합니다.
때묻지 않은 언어의 신선함,
기교에 의해 조작된 언어가 아닌 또는
아름다운 말만 골라서 유창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닌....
수녀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 여기 추려모은 노래들도 어느 것 하나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춘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거짓 없이 살고 싶어 애쓰는 한 수도자의 기교 없는 육성쯤으로 이해해 주십사고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이 시집에 기록된 이해인 수녀님의 약력입니다.
-.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1964)
-. <소년>지에 동시 "하늘", "아침" 등으로 추천 완료(1970)
-. 필리핀 쎄인트 루이스 대학 영문과 졸업(1975)
-. 제1시집 <미들에의 영토> (1976)
-. 제2 시집 <내 혼에 불을 놓아> (1979)
-. 제9회 새싹 문학상 수상( 1981)
-.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1985)
-. 제2회 여성동아 대상 수상(1985)
-. 산문집 <두레박> (1986)
-. 제4집 <시간의 얼굴> (1989)
1983년 맞춤법에는 "~읍니다"였으므로, 시집 내용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이 시집의 제목을(題字)는 박두진 선생님께서 직접 써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30개의 가을 편지 중에 오늘은 10개의 편지를 소개했습니다.
나머지 20개의 편지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인지......
가을이 익어가는 시월에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오늘부터 같이 감상하시지요.
=적토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