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 지금까지 할례의 무효성과 표면적인 유대인에 대해 공격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바울은 이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비록 불법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지 못한 유대인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축복은 일단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의 우선 순위 내지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울 자신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적으로 본절과 2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나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페릿손'은 '넘치는', '남아도는', '두드러진', '필요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정관사 '토'와 함께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고, 부사적 용법으로서 '과도하게 풍부하다'는 의미로도쓰였다. 본절에서는 의문대명사 '티'와 함께 사용되어 유대인이 가진 '탁월성' 또는 '우월성'을 의미한다.
[롬 3:2]"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범사에 많으니 - '많다'라는 말은 1절의 '토 페릿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많았다는 의미는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주어졌다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와 규례 아래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바울이 이와 같이 유익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 '첫째는'으로 번역된 '프로톤 멘' 뒤에는 당연히 '둘째', '셋째' 등의 서수가 기대되지만 바울은 '첫째는' 외에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시키지 않는다. 본절에서는 문맥상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순서상 앞선다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2) 그 중요도나 비중에 있어서 첫째라는 의미로서 유대인에게 가장 첫째되는 유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문맥상 (2)의 견해가 타당하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
바울은 보다 자세하게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즉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그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해석된 '언약'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블랙은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아'를 '예언적인 말씀'으로 번역하여 주로 '구약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구약성경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9:4, 5를 근거로 '말씀'을 '구약성경'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점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맡았음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과 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롬 3: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어떤 자들이 -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있으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라 총칭하지 않고 부분적인 의미의 부정 대명사를 사용했다. 어찌하리요. 빌 1:18에 기록된 '그러면 무엇이뇨'와 같은 감탄조의 어투이기도 하지만 본장에서는 이어지는 두 가지의 질문 형식과 같이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완전히 무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특권 속에서 무한한 것을 기대하며 착각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논쟁적인 문체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서 유대교 랍비들의 논쟁법을 인용한 수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믿지 아니하였으며...그 믿지 아니함이 - 본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다. 본 절에 사용된 동사 '에피스테산'과 명사 '에피스티아' 가 개역성경처럼 '불신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함이나 믿음의 부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주장하지만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합쳐질 수 없다.
영역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불신앙', 이 의미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어감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해석은 하나님을 배척했다는 의미보다 '적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믿음'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믿음의 강도(强度)가 어느 정도 약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이 해석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히 3:12에서 언급된 '아피스티아'는 분명히 '불신앙'을 나타내며, 딤후 2:13에서도 하나님의 '미쁘심'과 인간의 '미쁨 없음'을 대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본절도 그러한 형식을 취해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20의 경우와 같이 해석하기 애매한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은 '믿음의 결여'라기 보다는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것이지 '믿음의 결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히 4:3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도 약속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불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불성실하거나 불신앙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들 특히 메시야 예언 등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롬 3: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3: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히브리어 '할릴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70인역도 '할릴라'를 '메게노이토'로 번역하고 있다. 이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사람 거짓되되 - '모든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시 116:11의 인용구로서 인간의 불의함, 신실치 못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과도 부합된다.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 3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미쁘심', '의'와 함께 연결되어 서로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불신앙과 거짓과 불의는 참되신 하나님을 자기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죄악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약속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사람의 믿음이나 진실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동일하다(시 100:5).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
천상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편 저자 자신의 죄와 무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을 반복적으로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시편에 그리 흔하지 않은 독특한 용법이다. 아마 유대적 관점에서 무법과 불신앙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 같다.
바울은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천상 법정의 공의로움이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고,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상대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미쁘심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말한다. 요컨대 이 인용은 인간의 불의함과 거짓됨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참되심에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판단받으실 때에 - '판단받으실 때'에 해당하는 시 51:4의 히브리 본문이 개역성경에는 능동형인 '판단하실 때'로 번역되어 있으나 70인역에는 바울의 인용대로 수동태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동형이든 능동형이든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판단받는다는 의미로 다윗이 고백하거나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편에 나타난 다윗의 의도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으나 그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하나님의 순전(純全)하심에는 손상을 가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논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죄인된 인간을 판단하시든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순전하심에 한치의 도전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왜곡되지 않고 의롭기 때문에 '이기려 하심이라'는 표현이나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란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기려 하심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세이스'를 제외한 본절 전체가 70인역의 번역과 똑같다. '이기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에서는 미래형 '니케세이스'로 되어 있고 70인역과 몇몇 사본들에서는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인 '니케세스'로 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편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종말의 심판과 사람의 죄를 연관지어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미래형으로 쓴 것 같다.
[롬 3: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4절과 마찬가지로 '메 게노이토'이다.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었으며,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신약에서는 '심판'이 '크리노', '크리마', '크리시스'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구약의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권위에 의하여 판단하는 종말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여졌다.
따라서 본절에 쓰인 '심판'(크리네이)의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룩된 신성한 도덕적 질서,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판단받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조건을 갖춘 자는 전자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전자의 판단 기준 곧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육체의 법을 따라 정죄받으며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종의 자리에서 율법에 의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