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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0일 11시 ~ 2002년 11월 10일 21시까지
冠岳山)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명산(名山) 삼성산과 그곳에 있는 모든 명소, 문화재, 주요 전통사찰을
거의 대부분 답사했으며,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이 후기에 들어 있습니다.
* 이건 여행후기라기 보다는 산행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관악산(
* 어떻게 쓰다보니 완전 삼성산 백과사전이 된 기분이군요. 이것을 읽고 모두들 한번식 삼성산에 가보시길..
★ 배경음악 : 박혜경 'rain'
1.
2002년 11월 10일 일요일..
그날은 날씨가 약간 흐렸다.
그날은 아는 애들과 서울 남쪽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것 저것 준비를 하고 아침 9:50분에 집을 나섰다.
우리집 인근 수락산역에서
서울 지하철7호선(장암↔건대입구↔반포↔온수)을
타고 태릉입구역에서
서울 지하철6호선
(봉화산↔석계↔신당↔이태원↔월드컵경기장↔독바위,연신내,응암)으로 환승하여
10:50분에 삼각지역(4,6호선)에
도착했다.
삼각지역에서 내려서 5번 출구로 나가니 이번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만난 다음 용산방면
삼각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여기서 우리가 갈 곳인 시흥2동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서울 25번 1개 밖에 없다. 그런데 그날따라 버스가 졀라
안오는군..
15분 정도 기다리니
동아운수 소속 서울시내버스 25번(화계사,수유1동↔돈암동↔종로↔서울역↔노량진↔신림동↔
삼성산성지↔시흥2동)이 온다.
25번을 타고 용산을 지나니 서울의 젖줄인
한강(漢江)이
나온다.
한강대교(제1한강교)를
건너 노량진,동작구청,보라매공원,신림동을 지나서 서울대쪽으로 가다가 안양쪽으로 우회전,
미림여자정보산업고, 신우초교를 지나
삼성산 산복도로로
진입한다.
이 도로는
신림동에서 삼성산(호암산) 기슭을 따라서 난곡뒤쪽,시흥2동을 지나 안양 석수동으로
가는 4차선 도로이다.
이 도로는 해발 100~200m 지역을 지나가는 관계로
서울 금천구,관악구,동작구,영등포구 지역과 광명시 지역이
훤히
보인다.
산자락에 자리잡은 국제산장아파트를 지나니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입구가
나온다.
이곳
삼성산 성지는
조선 헌종(재위 1831~1849년)때
조선에 들어와서 천주교(天主敎) 포교 활동을 벌이던 프랑스 선교사
모방신부,샤스탕신부,앵베르신부가
새남터(현재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용산역부근)에서
순교하자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서울 홍익대 뒷산)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4년 뒤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다가 1901년에 그들의 시신을 모두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이장했으며, 이곳 삼성산 성지는 이런 연유로 인해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성지(切頭山聖地)와
더불어 서울지역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삼성산 성지는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음)
삼성산성지 입구를 지나니 도로의 오른쪽으로 서울의 대표적인 산동네인 난곡(蘭谷)이
나온다.
난곡은 서울의 몇 안남은 달동네로 요즘 재개발 때문에 많은 집들이 철거된 상태이다.
난곡 뒤쪽을 지나 산복터널을 통과하여 목적지인
시흥2동 벽산아파트에
도착했다.
2.
시흥2동(始興2洞) 벽산아파트 종점에
도착하니 오전 11:45분..
그런데 아직 일행 1명이 안왔다. 전화해보니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고..
이곳 시흥2동 종점은 해발 150m에 고지대로 종점앞에 벽산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곳도 원래 달동네였지만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모했다.
높은 고지대인만큼 전망이 좋다. 시흥동,독산동,광명시 지역이 한눈에 보인다.
나머지 1명을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삼성산 등산객들이
서울시내버스 25,25-1,289-1번을
타고 이곳으로 오는군.
12시가 되자 동아운수에서 운행하는
서울시내버스 25-1번(시흥2동↔중앙대,흑석동)이
오는데 거기서 나머지 1명이
내린다.
이렇게 해서 일행들이 다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점심시간이라서 부근 벽산아파트 상가 내에 있는 짜장면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3-1. 삼성산(三聖山)은 해발 480m의 산으로 서울 관악구, 금천구,
경기도 안양시에 넓게 걸쳐 있다.
* 삼성산의 유래(由來)는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본명 김법민)때
원효대사(元曉大師),의상대사(義湘大師),윤필대사
(潤筆大師)등 3명의 성인(聖人)이 이 산에서 수도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들은 이 산에서 일막,이막,
삼막 등의 세 암자를 지어 수도했다고 하는데 일막, 이막은 임진왜란 때 쪽발이들이 불질러 버리고 겨우 삼막만
남았는데 이것이 바로 삼막사(三幕寺)이다.
* 삼성산은 오른편에 관악산(冠岳山)과 이웃하고 있는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삼성산은 관악산과 이웃만 하고 있을 뿐 독립적으로 분리된 산이다.
삼성산과 관악산 가운데에 무너미고개가 있는데 이곳을 경계로 왼편은
삼성산 지역, 오른편은 관악산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삼성산의 주요 봉우리로는 삼성산 정상(해발 480m)을 비롯하여
장군봉, 호암산, 깃대봉 등이 있다.
이중에서 호암산(虎巖山)은 산의 있는 바위들이 호랑이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성산은 해발 480m의 낮은 산으로 별로 험하지 않아서 서울,수도권 시민들이 많이 찾아온다.
입장료는 서울대 등산로를 제외하고 모두 무료이다.
∴ 관악산,삼성산 입장료
(서울대정문 못미쳐 관악산입구와 과천시의
과천향교 쪽만 받음, 그외에는 입장료 없음)
☞
어른 500원, 학생 300원, 어린이 200원
3-2. 삼성산의 주요
등산로. (☺
관악산은 제외,
삼성산 정상은
출입금지 지역)
1. 서울대-호수공원
오른쪽 길-성주암-235봉-칼바위-416봉-장군봉(412m)-446봉-삼성산 정상 입구
2. 서울대-호수공원-제2광장-철쭉동산-신선고개-안부-깃대봉(446m)-삼성산 정상 입구
3. 안양유원지-염불암진입도로-염불암-삼막사-삼성산 정상 입구
4. 시흥2동 벽산아파트-호압사-395봉-장군봉(제1야영장)-깃대봉-삼성산 정상 부근-삼막사
5. 신림동 신우초등교-활터-장군봉(제1야영장)-국기봉-삼막사
6. 신림동 삼성산성지-삼호약수-관음사-장군봉(제1야영장)-국기봉-삼막사
* 삼성산 정상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3-3.
삼성산의 주요 사찰, 문화재, 볼만한 곳
* 삼성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산재해 있다.
① 삼막사 : 삼성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이곳은 의상,윤필,원효대사가 수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찰 경내에는 경기도 지방문화재가 5점이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나온다)
② 염불암 : 안양유원지와 삼막사 중간에 위치한 고려시대 사찰.
(자세한 내용은 뒤에..)
③ 호압사 : 시흥2동 호암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 태조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④ 안양사 : 안양유원지 부근에 있는 사찰,
(자세한 내용은 뒤에..)
⑤ 성주암 : 서울대에서 삼성산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사찰로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현재의 절은 근대에 다시 만든 것이다.
⑥ 한우물과 호암산성 : 호암산 정상 부근에 있는 신라시대 석성으로 정상아래에는 한우물이라는
큰 우물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⑦ 삼성산 성지 : 앞에서 언급했음..
⑧ 석수동 석실고분 : 삼성산 정상 근처에 있는 신라시대 석실고분.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⑨ 석수동 마애종 : 안양유원지 부근에 있으며, 승려가 종을 치고 있는 모습을 조각함.
(자세한 내용은 뒤에..)
⑩ 중초사터
: 안양유원지입구에 있는 유유산업뜰에 있다. 신라말기 석주와 석탑들
(자세한 내용은 뒤에..)
⑪ 안양유원지 : 삼성산 자락인 석수1동과 안양2동에 자리잡은 유원지.
⑫ 삼성산 산림욕장 : 안양유원지에서 시작하여 삼막사까지 펼쳐진 산림욕장
3-4. 삼성산 주요 등산로 교통편..
①
서울대 입구 등산로 : 지하철 2호선 신림역,서울대입구역 하차
서울시내버스 52번 '노량진↔신대방3거리↔신림역↔서울대정문↔서울대후문'
서울시내버스 52-1번 '보라매공원↔신림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55-2번 '중구청,스카라↔서울역↔노량진↔숭실대↔서울대입구역↔쑥고개↔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72-1번 '갈현동↔연신내↔모래내↔신촌↔여의도↔신대방3거리↔신림역↔서울대정문↔서울대본부'
서울시내버스 85-2번 '신림8동↔은천길↔봉천시장↔서울대입구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94번 '금옥여중,개봉1동↔고척동↔영등포역↔동작구청↔신림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104-1번'군포시오금동↔산본역↔안양유원지↔시흥동↔신림역↔서울대입구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114번 '구로동↔구로역↔영등포역↔구로공단역↔신림역,서울대입구↔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121번 '광명시철산1동↔광명역↔개봉동↔영등포역↔신대방3거리↔신림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142번 '고양시덕은동↔수색↔연대↔서울역↔삼각지↔용산→노량진→신림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142-1번'고양시덕은동↔수색↔연대↔광화문↔서울역↔용산→상도동→서울대입구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289-1번'시흥2동↔미림여고↔서울대정문↔서울대입구역↔사당동↔고속터미널↔강남역'
서울시내버스 303번 '신정동↔까치산역↔강서구청↔당산역↔영등포시장↔대방동↔신림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413번 '봉천현대아파트↔서울대입구역↔서울대정문↔서울대구내,공학관'
서울시내버스 413-1번'흑석동,중앙대↔숭실대↔서울대입구역↔서울대정문↔서울대구내,공학관'
서울시내버스 496번 '신동아,현대아파트↔서울대정문↔서울대입구역'
서울시내버스 801번 '난곡↔문성터널↔서울대정문'
②
신우초교,삼성산성지,시흥2동 방면 코스 : 지하철 2호선 신림역,서울대입구역 하차
서울시내버스 25번 '화계사↔길음동↔돈암동↔종로↔서울역↔용산↔노량진↔신림역↔신우초교↔삼성산성지↔시흥2동'
서울시내버스 25-1번 '중앙대↔흑석동↔노량진↔신림역↔신우초교↔삼성산성지↔시흥2동'
서울시내버스 289-1번'시흥2동↔삼성산성지↔신우초교↔서울대정문↔서울대입구역↔사당동↔고속터미널↔강남역'
③ 안양유원지 방면 코스 : 지하철 1호선 수원행 관악역 하차
서울시내버스 99번
'구로공단역↔관악역↔안양유원지↔안양시내↔금정역↔군포역↔군포공영차고지'
서울시내버스 103번 '아현동↔신촌↔당산역↔영등포시장↔시흥동↔관악역↔안양유원지↔안양시내↔안양시비산3동'
서울시내버스 103-1번'개봉1동↔고척동↔구로역↔신도림역↔시흥동↔관악역↔안양유원지↔안양시내↔안양시비산3동'
서울시내버스 104-1번'군포시오금동↔산본역↔안양시내↔안양유원지↔관악역↔독산동↔서울대입구역↔서울대정문'
서울시내버스 499번 '시흥3동↔관악역↔안양유원지↔안양시내↔금정역↔산본역↔군포역→군포시대야미동'
서울시내버스 703번 '신촌↔여의도↔신풍역↔시흥동↔관악역↔안양유원지↔안양시내↔관양동↔인덕원,비산3동종점'
안양시내버스 1번 '평촌농수산센터↔범계역↔안양시내↔안양유원지↔관악역↔시흥동↔신림역↔서울대입구역'
안양시내버스 51번 '구로공단역↔시흥동↔관악역↔안양유원지↔안양시내↔관양동↔인덕원↔의왕시내손동'
수원좌석버스 900번 '구로공단역↔관악역↔안양유원지↔호계동↔의왕시↔파장동↔수원역↔영통지구↔경희대'
▲ 호암산의 모습
▲ 호암산의 모습
4.
벽산아파트상가를 나와 길가에서 파는 뻥튀기과자를 하나 구입하고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니 시내방면 버스정류장이 있고, 호압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호압사 일주문(一柱門)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虎巖山門(호암산문)'이라고 쓰여 있군..
일주문 왼쪽에는 호암산 안내도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 호압사 안내도와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산길(자동차 진입가능)을 10여분 정도 올라가니 길 오른쪽에 큰 표석(標石)
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 표석에는
'호암산호압사 대한불교조계종 虎巖山 虎壓寺 大韓佛敎曹溪宗'이라고 쓰여 있다.
▲ 호압사 입구에 세워진 표석
표석을 지나서
3분정도 가니 오른쪽에 호암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하나 나오고, 다시 1분 정도 가니 호압사(虎壓寺)
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호압사 경내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어보고 호압사 경내로 들어간다.
5.
호압사(虎壓寺)는
서울
금천구 시흥2동 호암산(虎巖山)
기슭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사찰이다.
이 절은 조선 태조(조선 태조 이성계, 1897년 太祖高皇帝 로 추존) 2년에 칙명에 의하여
무학대사가 창건한 이래
1841년에 중창하였고, 1935년에 다시 약사전 6칸을 중건하였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인 호압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 태조가 조선을 세우고 서울에 궁궐을 만들 때 일이다. (1394년)
인부들을 독려하여 열심히 짓던 궁궐이 이상하게도 무너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밤 어둠속에서 반은 호랑이고, 반은 모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눈에 불을 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였다. 이때 태조가 괴물에게 화살을 쏘라고 하였고, 화살은 빗발처럼 쏟아졌으나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궁궐을 때려부시고 유유히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 때 어디에선가 "한양은 비할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고
하는 노인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태조가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인이 "그건 아실 것 없고 대왕께서 심려하는 것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무슨 묘안이 있느냐고 묻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호랑이다! 저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다"하고 태조는 노인에게 저
산봉우리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노인은 "호랑이란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하는 짐승이니 저것처럼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다음날부터 무학대사에게 명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사명(寺名)을 '호압사'라고
하였다.
그 이후부터는 궁궐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 호압사(虎壓寺)의
뜻은 말그대로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된 사연은 위의 창건 관련 전설을 참조..
조선 3대왕인 태종(太宗)이 호압이란 현액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 호압사 경내에는 약사전을 비롯한 건물 5~6동이 있으며 약사전 안에는
서울지방문화재자료 8호로 지정된
석약사불좌상이 있다.
▲ 호압사 안내문
▲ 호압사 경내
6.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니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나무이름이
틀릴 수 있음) 한 그루가 우리를 맞이한다.
느티나무를 지나서 호압사의 본전(本殿)인
약사전(藥師殿)으로
갔다.
▲ 호압사 약사전(藥師殿)
약사전
불단(佛壇)에는 아담하게 생긴 불상이 하나 있는데 이 불상은
석약사불좌상(石藥師佛座像)
이 있다.
이 불상은 조선초기 불상으로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넓은 사각형으로 약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양 손은 앞에 모아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약사여래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2000년 4월에 서울지방문화재자료 8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을 돌로 다듬어서 만든 다음에 도금을 입힌 것이다.
◀ 석약사불좌상
7. 약사전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가운데 문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을 통해서 석약사불좌상을 구경했다.
약사전을 둘러보고 오른쪽 높은 대(臺)에 있는 명부전(冥府殿)을 둘러보고,
요사채에 물마시는 곳으로 가서 물
몇모금 마시고 호압사를 나왔다.
호압사를 나오면 바로 왼쪽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그 쪽으로 안가고 표석 쪽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있는
오른쪽 산길로 갔다.
그쪽 길로 3분정도 들어가니 체육시설이 나온다. 여기는 말그대로 간단하게 운동하는 곳..
그곳을 지나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약수터가 나온다. 거기서 약수 한모금 마시고 호암산 쪽으로 가는 등산로로
진입..
올라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다. 그런데 바위가 좀 많다.
10여분 정도 올라가니 신림동, 호암산 쪽으로 빠지는 능선이 나온다.
여기서 호암산 방면인 오른쪽 길로 5분정도 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에 의하면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찬우물, 오른쪽으로 가면
석산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찬우물이 호암산 정상부분에 있는 한우물인줄 알고 왼쪽 길로 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오른쪽 석산으로 가야 되는데...
찬우물 쪽으로 계속 가면 장군봉, 삼성산으로 가게 된다.
갈림길 이정표 뒤쪽에는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행상과 막걸리, 라면등을 사먹는 등산객들로 북적거렸다.
▲ 호암산 갈림길 (여기서 석산으로 가야 한우물,석구상이 나온다)
8. 위에 갈림길에서 왼쪽 찬우물 쪽으로 올라가니 약간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능선이
나온다.
능선을 지나서 10분 정도 가니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 왼편에 약수터가 하나 있는데 약수터 이름이
찬우물이다.
우리가 찾는 한우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목이 마른 관계로 약수를 몇모금 마시고 다시 올라갈까 하다가
좀 이상해서 부근 먹거리 행상에게 한우물이 어디있냐고 물어보니 우리가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내가 시흥2,3,5동 방향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가르키면서 저곳이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는군..
허걱 언제 저기까지 내려가나..?
일이 이렇게 되자 그냥 삼성산으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한우물을 보고 가느냐? 갈등하다가 산도 그렇게 험하지
않고 그래서 다시 한우물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7분정도 내려가서 아까전 갈림길에 도착.. 여기서 이정표 뒤쪽 먹거리 행상에게 다시 한우물에 위치를 물어보니
시흥2,3,5동쪽 봉우리(석산)에 있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이 갈림길에서 석산쪽으로 가야된다는 것이다.
갈림길을 지나 3분정도 가니 바위로 이루어진 내리막길이 나온다.
내리막길을 통과하여 석산(호암산)이라 불리는 봉우리 못미쳐에 이르니 길이 2갈래로
갈라지는군..
왼쪽길은 봉우리 정상으로 가는 길 오른쪽은 약간 돌아가는 길..
그래서 오른쪽 길로 좀 가니 등산로 오른쪽 아래부분에 헬리콥터장이 보이는군..
그런데 등산로 왼쪽 높은 곳에 무슨 석상같은 것이 보인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니 좀 귀엽게 생긴 아담한 석상이 나오는데.
9. 그 석상은 바로 석구상(石狗像), 즉
돌로만든 개의 형상이다. 영어로는 stone dog.. 외우기 쉽군..^^*
이 석구상은 한우물에서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몇년전 까지만 해도 이 석구상은 조선왕조의 도읍설화와 관련된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즉 경복궁
광화문(景福宮 光化門)의 해태상과 마주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누름으로
써 서울시내의 화재를 막기 위해 세운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석상의 모습이 해태로 보기 보다는 개의 형상에 좀 가깝고, (전혀 그렇지 않던데?) 경기읍지(1956년)
등
여러가지 기록을 통해서 요즘은 이 석상을 거의 석구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는 계속 해태상이라고 하지만, 해태상이던 석구상이던 그 형상이 아담하고 귀엽게 생긴지라 부근을
지나가는 시흥동 주민들과 등산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으며, 호암산의 상징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0m 가량으로 석상기법이 세밀하며 사실적이어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고 발과 꼬리부분 또한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별로 개의 모양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태의 모양도 아니다.
얼핏 보기에는 꼭 개구리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은데 다리부분을 봐서는 그런것 같지 않고, 그게 아니면
바둑이의 모습? 바둑이도 개(犬)에 속하니.. 혹시 개의 변종? 허걱~
참 보면 볼 수록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석구상은 돌로 만든 대(臺)위에 세워져 있으며, 석구상 주위에는 돌난간이 쳐져 있다.
석구상은 정확하게 북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 경복궁의 해태상 쪽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참고로 이 석구상의 조성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중기 아니면 후기 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 기이하게 생긴 석구상(石狗像)
▲ 가까이서 본 석구상(石狗像)
▲ 석구상(石狗像)과 그 주변 (석구상 주변으로 돌난간이 쳐져
있다)
10. 우리는 석구상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석구상의 그 귀여운? 자태를 감상하였다.
물론 사진도 찍었고..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이 석구상을 신기하듯이 쳐다보는군..
석구상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 아래부분을 보니 아까전에 언급한 헬리콥터장이 있고 그 왼편에 넓은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래서 석구상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아랫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니 헬리콥터장 왼편에 큰 연못같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다.
11. '한우물'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 호암산 정상(해발 315m)부분에
위치해 있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또는 용초로 불리웠으며, 후기신라시대 때 축조되고
그 이후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다시 축조하였다.
후기신라시대에는 그 규모가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였으며,
조선시대에 축조된 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였다.
이 우물은 가물때에는 기우제를 지냈고 전시(戰時)에는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 호암산 정상부분에 있는 한우물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나라 장군 선거이(宣居怡)가 진을 치고 행주산성의 권율장군과 함께 전쟁에 대비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 양성지, 노사신이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나의 해석
☞ 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1개의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어 가물 때에는 기우제를 지냈음을 알수 있다. 한편으로는 화재를
막기 위한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있다.
그리고 '제2우물터'는 한우물에서 동남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 2m로 1990년에
발굴했으나 아직 복원되지 못했다.
산 정상부분에 있으면서도 늘 물의 양이 변함없고, 항상 맑은 상태로 고여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이 한우물의 다른 이름으로 석구지(石狗池)라고도 하는데 이는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석구상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 정상 주변으로 호암산성(虎巖山城)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 성은 후기신라시대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일부만 산언저리에 남아있다.
한우물 주변으로 돌로 된 난간과 철책난간이 2중으로 쳐져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으며, 우물 안에는
(우물이라기 보다는 연못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물이 풍부하게 고여 있다.
이곳 한우물을 비롯하여 주변에 있는 호암산성,석구상,제2우물터를 모두 포함하여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연도는 1991년이다.
서울에 있는 산중에서 산 정상부분에 이런 거대하고 오래된 연못,우물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부터 산정의 연못,우물인 한우물을 둘러보도록 하겠다.
▲ 한우물
(사적 343호)
▲ 언제나 물이 고여 있다는 한우물
(사적 343호)
12. 한우물에 이르니 우물 주변으로 많은 등산객들이 진을 치고 쉬고 있었다.
마침 거기가 전망이 좋아서 금천구, 관악구 일부지역, 구로구 지역등이 훤히 보인다.
2중의 난간으로 둘러쳐진 우물 안에는 많은 물이 고여 있었다. 깨끗한 물인지는 모르겠다.
산 정상에 그것도 서울에 이런 거대한 우물이 있다니 신기할 뿐이다.
한우물 서쪽에는 절로 보이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는 가지 않았다.
한우물 주변으로 체력단련시설과 벤치등이 조성되어 있어서 쉬어가기는 좋은 곳이다.
시흥2동 버스종점에서 여기까지 도보로 3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이다.
수도권에 사는 이들은 한번 와보기를 바란다.
우리는 한우물을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석구상 쪽으로 올라갔다.
석구상을 지나 아까전에 왔던 능선길을 통해 다시 찬우물 약수터로 올라갔다.
등산로는 그렇게 험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는 않다.
올라가는 도중 먹거리 행상이 2군데 있는데 오뎅이나 먹고 갈까 하다가 그냥 올라가기로 했다.
찬우물을 지나 잘 닦여진 등산로를 부지런히 올라가니 제1야영장이 나오는데 이곳이 장군봉(해발
412m)이다.
여기서 동쪽 길로 가면 삼성산성지가 나온다.
장군봉에서 잠깐 서울시내를 바라보니 멀리 여의도까지 보이는군..
▲ 삼성산 자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서남부지역(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구로구)
▲ 호암산에서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능선
13. 장군봉을 지나서 좀 올라가니 산길가에 먹거리 행상이 나온다. 행상이 파는
음식을 보니 라면, 도토리묵
이외에 20여가지가 넘는 산나물도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군.. 물론 막걸리도 팔고 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은 관계로 아쉽게도 그냥 지나쳐야 했다.
먹거리 행상을 지나서 20분정도 올라가니 깃대봉이 나온다. 그러나 깃대봉(해발 446m)으로
올라가지 않고 삼막사
방면 우회등산로를 이용했다.
깃대봉을 지나서 10분 정도 가니
드디어 삼성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 길로 가면 삼성산 정상과 서울대쪽으로, 서쪽 길로 가면 삼막사와 안양시내가 나온다.
여기서는 가까이로는 서울 관악구,금천구,안양시 석수동 지역,서울대가 멀리로는 광명시, 관악산이
훤하게 보인다.
우리는 삼성산 정상 방향인 동쪽 길로 올라갔다.
그쪽 길로 10분정도 올라가니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등산로로 가면 무너미고개, 관악산 방면이
오른쪽 시멘트도로로 가면 삼성산 정상이 나오는데, 정상부분은 현재 출입금지지역이다.
오른쪽으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 일반인 출입금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오던길로 내려왔다.
아까전 3거리를 지나서 삼막사 쪽으로 계속 내려가니 길가에 무슨 암자가 하나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그 암자의
이름을 잊어먹었다. 허걱~~
그 암자는 길가 왼쪽 언저리에 있는데 건물은 약 3~5동 정도 있다.
암자를 지나 5분 정도 내려가니 삼성산 서쪽 부분에 흉하게 깎여진 산 언저리가 보인다.
깎여진 면적이 상당히 넓었는데 그 곳은 체석장(採石場)이다.
참 보기 흉하군.. 쩝..
삼성산의 경치를 즐기며
부지런히 내려가니 삼막사 못미쳐 길가에 먹을 것을 파는 아줌마들이 있다. 거기서
간식거리 하나 사고 삼막사 쪽으로 갔다.
삼막사로 들어서는 계단 앞쪽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다.
경내로 들어서는 계단을 통해 삼막사 경내로 들어선다.
(* 삼막사는 벌써 3번째 와 본다)
14. 삼막사(三幕寺)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삼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절의 뒤쪽에는 암봉(岩峯)들이 웅치있게 서 있고, 서쪽으로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 이절은 677년에 삼성산에서 수도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9세기 후반에 도선대사(道詵大師)
가 중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고 개칭했는데
삼막사라 부르게 된 것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성상폐하(聖上陛下)
재위 시절 때 중창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그뒤 충숙왕 4년(1348년)에 나옹화상이 여기에 머물렀었고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 절에서
국운의 융성을 기원한 적이 있다. 태조 7년(1398년)에 왕명으로 중건된 이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1880년에
의민(義旻)이 명부전(冥府殿)을 짓고, 이듬해에 칠성각(七星閣)을 세웠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닌 삼막사는 삼성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경내의 주요건물로는 육관음전,명부전,망해루,대방,요사,
칠보각(칠성각),대웅전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5점의 경기도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지금부터 삼막사 경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 삼성산 삼막사 접근 방법 :
삼성산의 주요 등산로인 시흥2동,삼성산성지,서울대,안양유원지,관악역에서 오르면 된다.
그외에 관악역에서 삼막사까지 삼막사 소속 봉고차량이 운행을 하는데 자세한 운행 시간표는 삼막사에 문의 요망..
그리고 관악역에서 삼막사로 가는 도로가 있으며, 서울쪽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신림동,신우초교를 지나 시흥2동에
서 호암터널을 지나면 삼막사4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삼막사로 빠지면 된다.
그런데 왠만하면 도보로 가길 권한다.
▲
삼성산의 대표 사찰 삼막사
15. 삼막사 경내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명부전(冥府殿)이 우리를 맞이한다.
이 명부전은 조선 고종 17년(1880)에 만든 조선후기 건물로 1975년에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붕은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천장은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 안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있다. 또한 유명계의 심판관인 10대왕을 함께 모시고 있어 명왕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막사 명부전의 현판은 명왕전(冥王殿)으로 되어 있다.
명부전 안에는 신자, 승려 서너명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이 건물이 삼막사에 있는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로 지정되었다.
▲ 삼막사 명부전(명왕전)
16. 명부전을 둘러보고 대웅전(大雄殿)을 지나
육관음전(六觀音殿)으로 가는 도중 길 왼쪽 석대(石臺)위에
3층석탑이 높게 서 있군..
이
삼막사 3층석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 기단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탑신의 몸돌에만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다.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놓여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
면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가 고려에 쳐들어와서 개경을 점령하고
처인성(處仁城,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서 고려군과 치열하게 맞짱을
떴는데 이때 삼적사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몽고패거리의 두목인
살리타이의 눈을 화살로 쏘아 보기좋게 명중시키고, 얼떨결에 화살에
맞은 살리타이는 싱겁게 죽었다. 졸지에 두목을 잃은 몽고패거리들은
몽고 땅으로 줄행랑을 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처인성전투이다.
처인성에서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고려시대 석탑으로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로 지정되었다.
◀ 처인성 전승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삼막사 3층석탑
그런데 3층석탑 관련 안내문에는 처인성 관련 이야기가 없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처인성 전승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새로 교체된 안내문에는 그 내용이
없고 그냥 석탑의 특징과 세워진 시기만 나와 있다.
높은 대(臺)위에 세워진 이 석탑은 오늘도 삼막사 경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사람들의 접근이 거의 없다.
17. 3층석탑을 둘러보고 탑 아랫쪽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 좀 마신다음 최근에
새로 건조(建造)한 육관음전
(六觀音殿)으로 갔다.
이 건물은 삼막사 경내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건물이다.
건물 내(內) 불단에는 육관음상(六觀音像)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육관음전을 둘러보고 바로 오른쪽 바위 사이에 뚫려있는 계단길을 통해 칠성각(칠보각)쪽으로
갈려고 했는데
계단 앞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의 조그만 안내문이 있군.. 허걱~
예전에는 그 쪽길로 해서 칠성각에 갔었는데 왜 일반인 출입금지가 되었을까? 쩝..
(* 그 이유는 아래에 나온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삼막사 사적비(史積碑)가 나온다. 그 비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125호로 지정되있는
비석으로 삼막사의 내력(來歷)이 적혀있다.
육관음전을 둘러보고 아랫쪽으로 내려가니 칠성각 쪽으로 새로 뚫린 계단길이 보인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이런 길이 없었는데 그 사이에 새로 만든 모양이다.
우리는 새로 만들어진 돌계단길로 진입.. 좀 들어가니 왼편 언덕으로 건물이 한 채 보인다.
그 건물 왼편에는 아까전에 언급했던 삼막사 사적비가 서 있다.
아까전 육관음전 오른쪽에 계단길이 일반인 출입금지가 된 이유는 사적비 옆에 세워진 건물 때문이다.
건물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아마 수도를 닦는 곳으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이 절의 높은 승려의 거처지로 생각이 된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이 건물은 없었고 그냥 사적비만 서 있었다.
건물 쪽을
바라보면서 좀 올라가니 왼편 바위 앞에 보호철책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안내문이 하나 세워져 있군..
그것은 무엇일까?
18. 그것은 바위에 새겨진 3자의 '龜(거북귀)'이다.
즉 삼귀자(三龜字)이다.
바위에 새겨진 이 삼귀자는 조선후기 종두법(種痘法)을 처음으로 실시한 지석영(池錫永)의 형
지운영이 이곳에
은거할 당시 바위에다 새겨놓은 것이다.
지석영 선생한테 형이 있었다니 처음 알았다.
하긴 그렇게 유명하지 않으니..
지운영 선생의 대한 정보는 내가 아는게 없는 관계로 생략..
그런데 그 각자(刻字)을 자세히 보면 '거북귀(龜)'자 같지가 않다.
무슨 필체로 썼는지는 모르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각자이다.
거의 거북이를 그린 것 같은 느낌이군..
신기하게 쓰여진 삼귀자의 모습은 아래 사진과 같다.
▲
삼막사 삼귀자(三龜字)
(가운데 글자와 오른쪽 글자는 마치 거북이의 모양 같다)
삼귀자를 둘러보고 잘 닦여진 돌계단길을 부지런히 올라갔다.
계단길 아랫쪽은 약간 경사가 가파르다.
계단길 주변에는 단풍으로 알록달록한 나무들이 묵묵히 서 있는데 겨울이 다가오는 지라 상당수 나뭇잎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진 상태...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왔구나...
삼성산의 늦가을 풍경을 즐기며 5분 정도 올라가니
칠성각(칠보각)이 나온다.
칠성각 왼쪽 부분에는 기이하게 생긴 2개의 바위가 있는데, 모습이 참 이채롭다.
19. 그 바위들은 바로 남근석(男根石)과 여근석(女根石)이다.
생김새가 진짜 비슷하게 생겼다. ㅋㅋㅋ
거의 사실적으로 생긴지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 삼아 유심히 살펴본다.
아들이 없는 아줌마들은 이 남근석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군...
이 남근석은 칠성각과 여근석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으며, 여근석은 그 동쪽 구석에 누워 있는 바위인데
바위에는 이상야릇한 모양의 구멍이 패여 있다. 자세한 묘사는 생략..
이런 형태의 바위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드는 성기신앙(性器信仰)은 농사와 고기잡이의 풍요로움과 자식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소망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이 바위들은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토속신앙으로 숭배되어 왔으며 칠성각(七星閣,
장수長壽와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모신 곳)을 옆에 둔 것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서로 어우러진 대표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지금도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동전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면서 아들 낳기를 빈다고 한다. 이 남녀근석은
경기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안양유원지와 안양시내 일부가 훤히 보인다.
우리 일행은 이 유서깊은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 남근석의 모습 보기
☞ 여근석의 모습 보기
20. 남녀근석을
유심히 살펴보고 칠성각(七星閣,
건물 현판에는 칠보각이라고 쓰여 있음)으로 갔다.
칠성각 안에는 마애3존불(磨崖三尊佛)이 모셔져 있다.
이 마애3존불은 자연암벽에 너비 2.5m, 깊이 2m의 공간을 마련하고 그 위에
삼존불(三尊佛)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가운데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네모난 얼굴은 평면적이지만 양감이 있다. 눈·코·입의
표현이 율동감 있으며, 미소를 띠고 있어 중후하고 자비로운 인상이다. 양 어깨를 두른 옷은 두껍게 나타내 신체의
양감을 느낄 수 없으며, 가슴에는 띠 매듭이 보인다.
좌우 보살은 일광(日光)·월광(月光) 보살로 각각 해와 달이 표현된 관(冠)을 쓰고 있다. 합장한 모습의 좌우 보살
은 본존불과 비슷한데 환한 미소를 띠고 있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얼굴이나 상체는 활달한 돋을새김으로 생동감이
넘치지만, 하부는 얕은 돋을새김으로 평면적이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불상 아래에는 1763년에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조선 후기 작품으로, 치성광불(致成光佛)이 마애불로 만들어진
극히 희귀한 작품으로 칠성신앙(七星神仰)과 다산신앙(多産信仰)의 결합 상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마애불은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이다.
* 남녀근석, 마애3존불 접근 방법 :
삼막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칠성각 방면 돌계단길을 따라 10분정도 가면 된다.
(이정표 설치되어 있음)
▲ 칠성각 안에 모셔진 마애3존불
21. 칠성각(칠보각)안에는 어느 아줌마가 108배를 하고 있었다. 108배를 하는건지 다른 배(拜)를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칠성각 앞에 5분 정도 머물렀는데 5분내내 계속 절만 하더군..
불교와 칠성신앙, 다산신앙등의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 마애불에는 언제나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예불을 드리고 소원을 빈다.
칠성각에서 동쪽 방향으로 가파른 암벽이 있는데 암벽 왼쪽으로 가면 삼막사의 부속암자가 나온다. 그러나
그 암자의 이름을 안따깝게도 잊어먹었다.
우리는 칠성각과 남녀근석을 뒤로 한 채 다시 삼막사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10분정도 걸렸는데 내려올 때는 5분밖에 안 걸리는군..
삼막사에서 칠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길은 그렇게 험하지는 않다.
삼막사에 내려오니 관악역으로 내려가는
삼막사 소속 봉고차량이 등산객을 가득 실고 출발준비를 하는군..
우리는 여기서 잠깐 음료수를 하나 사먹고 염불암(念佛庵)을 경유하여 안양유원지(安養遊園地)쪽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염불암 방면
산길로 들어선다.
산길은 처음에는 약간의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그렇게 험하지는 않다. 그냥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구간..
오르막길로 10분 정도 가니 전망이 괜찮은 곳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 벤치가 하나 놓여져 있군..
여기서 뒷쪽인 삼막사 방면을 바라보았다. 삼막사 바로 뒤에 있는 봉우리는 삼성산의 정상부분이다.
못가서 아쉽지만 할 수 없지..
벤치에 잠깐 앉아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가 다시 출발..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되는군..
나무와 바위들로 뒤덮힌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오니 절이 하나 보이는군.
그 절은 바로 염불암(念佛庵)이다.
22. 염불암(念佛庵)은
고려 태조 22년인 936년에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의 처음 이름은 안흥사(安興寺)였는데 얼마뒤 염불암로 이름이 바뀐다. 조선
태종7년(1407년) 한양의 백호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을 누루기 위해 왕명으로 사찰을 중창했으며, 이후 조선 철종(재위
1849~1863년)때에
이르러 승려 도인이 칠성각(七星閣)을 건립했고, 그 이후 승려 청봉에 의해 요사체(療舍體)와 대웅전(大雄殿)이
완공되어 지금에 이른다.
* 이 염불암은
삼성산의 주요 사찰중 하나로 현재 삼막사의 말사(末寺)이다.
이 절에는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선방(禪房)주변에 조선시대 부도(浮屠)들이 서 있으며, 대웅전 뒤에는 높이 8m의
미륵불이 서 있다. 그리고 절앞에는 수령 500년의 보리수나무가 말 없이 서 있다.
절의 건물은 약 4~5동 정도이다.
* 염불암 접근 방법 :
삼막사에서 염불암,안양유원지 방면 등산로로 15~20분 거리.
안양유원지에서 염불암까지 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포장도로가 잘 깔려져 있다.
안양유원지 입구에서 도보로 1시간 거리..
▲ 삼성산 자락에 조용히 자리잡은 염불암
23. 염불암(念佛庵)은 예전에 2번 정도 왔던 관계로 절 경내에는
들어가고 않고 주차장 쪽에 서 있는
보리수 나무만 관람하였다.
이 보리수 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 정도로
안양시 보호수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리수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나무로 석가가 보리수 나무 밑에서 불도를 터득했다고 한다.
나무는 별로 크지는 않고 그냥 아담하게 생겼지만 이 절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전해주는 염불암의 상징적인
나무라 할 수 있겠다.
보리수 나무를 둘러보고 염불암을 나왔다.
염불암부터 안양유원지까지 콘크리트 도로가 잘 깔려져 있다.
염불암을 뒤로 한 채 2분 정도 내려가니 길 오른쪽(내려가는 방향을 기준으로) 숲속에 식당이 하나 있군..
절 바로 아랫쪽에 이런 식당이 있다니...
식당을 지나서 나무로 둘러싸인 조용한 오솔길을 하염없이 걸으니 산채비빔밥, 백숙, 보신탕등을 파는 전형적인
관광지 식당들이 나온다.
식당마다 손님들로 가득하군.. 어떤 곳은 음주가무까지 허걱~~
식당들을 지나니 하천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안양유원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삼성천(三聖川)이다.
삼성천 상류인 서울농대 실습림부터 유원지 입구까지 안양유원지(安養遊園地)가 길게
펼쳐져 있다.
이 안양유원지는 약 50여년의 역사를 지닌 오래된 유원지로 각종
식당,위락시설,휴게시설,숙박시설,수영장,보트장,
연수원,포도농장 등이 있으며 삼성산 뒤쪽에 위치해 있어 경관이 좋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수도권의 널리 알려진 유원지로 수도권 시민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현재는 삼성천 정비 사업을 하는 관계로 하천 양쪽에 높은 둑을 쌓았으며, 계곡 곳곳이 공사 때문에 파헤쳐져 있다.
우리는 삼성천을 옆에 끼고 유원지 입구 쪽으로 1km 정도 걸어가니 안양유원지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쪽을 바라보니 주차장 북쪽에 무슨 이정표가 있군.. 가서 확인해 보니 오른쪽 이정표에는 '안양사
귀부',
왼쪽 이정표에는 '석수동 마애종','석수동 석실분'이라 쓰여 있군.
그래서 우리는 안양사(安養寺)에 먼저 가기로 했다. 많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경내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부(龜趺)가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서 안양사쪽으로 걸어가는데 처음에는 가까운 줄 알았더니만 꽤 멀군..
안양사 쪽은 안양유원지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냥 민가들과 식당들이 자리잡고 있는 산속 계곡이다.
이정표에서 10분정도 걸어가니 절로 보이는 곳이 나오는데 거기가 바로 안양사(安養寺)이다.
그런데 경내가 좀 썰렁하군. 건물은 2~3동 정도 밖에 안보이고 우리가 찾는 귀부도 보이질 않는군..
그런데 동북쪽에 있는 언덕 쪽을 보니 거기에도 사찰 건물이 있군..
여기는 안양사의 입구부분인 모양이다.
입구부분에서 계단을 따라 2분 정도
가니 대웅전을 비롯한 안양사의 주요 건물들이 나타나고,
대웅전(大雄殿) 뒤에는 우람한 모습의 미륵불이 서 있군...
우리가 찾던 귀부는 대웅전 앞뜰에 조용히 누워 있는데...
24. 이 안양사(安養寺)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삼성산 기슭의 위치한 신라시대 사찰이다.
오늘날 안양시(安養市)란 지명의 유래가 된 이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3년(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
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에 능정이란
승려을 만나
여기에다가 절을 세우니 그것이 바로 안양사의 시초하고 한다.
여기서 안양(安養)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세계를 말한다. 조선 세종 때
양성지, 노사신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 후기 최영장군(崔瑩)이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왕이 내관을
통해 향을 보냈으며 승려 1000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태종대왕이 충청도 온양(溫陽)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중
안양사에 잠깐 들렸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한 여러수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사찰건물은 모두 근대에 만든 것들로 약 6~8동 정도 있다.
대웅전뒤에는 미륵불이 위엄 있게 서 있으며 많은 불자들이 찾아와서 소원을 빈다.
* 안양사 대웅전 앞뜰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八角圓堂) 부도(浮屠)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93호로 지정된
귀부(龜趺)가 있다. 이
귀부는 고려중기 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李元符)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귀부만 남아있으며, 귀부의 높이 1m, 길이 3m, 너비는 2.18m에 이른다.
비록 비석은 없고 거북이머리만 남아있지만 고려시대 유물로써 보존가치가 높다.
귀부 주위에는 귀부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0여개가 귀부를 호위하듯 서 있다.
김부식이 지었다는 비문의 내용을 볼 수가 없어 너무 아쉽군..
귀부 왼편에 있는 팔각원당 부도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높이는 약 1.4m이다.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 작품인 안양사 귀부와 부도를
둘러보고 지친몸을 이끌고 안양사를 나왔다.
* 안양사 접근 방법 :
안양유원지입구에서 도보 20~30분 거리.
유원지 주차장에서 북쪽 방향을 보면 이정표가 있으며, 그것을 따라 계곡 쪽으로 10여분 들어오면 안양사가
나온다.
참고로 안양사 뒷쪽에 삼성산 휴양림이 펼쳐져 있으며, 안양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휴양림 쪽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승용차로 안양사까지 접근 가능.. 단 길상태가 별로 안좋음
▲ 안양유원지 부근에 자리잡은 안양사 경내
(뒤에 미륵불이 서 있다)
▲ 안양사 귀부 (비신碑身은 어디로 갔을까?)
▲ 석수동 마애종 보호각
26. 나는 바위에 새겨진 종(鐘)과 종을 치고 있는 승려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것을
암각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서울 근교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애종을 둘러보고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쪽으로
갈려고 했으나 너무 피곤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자락에 해발 300m높이에 있는 삼국시대 고분(古墳)..
안양유원지
주차장을 지나서 유원지 입구로 걸어가고 있는데 삼성천(三聖川) 건너에 유유산업이라는 공장이 있는데
공장뜰에 중초사터(中初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와 3층석탑이 서
있군..
27. 유유산업
뜰에서 잠자고 있는 이 중초사터 당간지주와 3층석탑은 신라후기 작품이다.
중초사(中初寺)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년) 때 창건된 사찰로 그 이후
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싶이한 관계로 알 수가 없다.
1960년에 옛 중초사터 자리에 유유산업이라는 공장이 들어섰고, 지금의
자리에 당간지주와 3층석탑을 옮긴 것이다.
이 중초사터 당간지주는 신라 흥덕왕 원년(826년)
8월 6일에 채석, 다음해
인 827년 2월 30일에 완성되었다.
이 석주(石柱)는 별로 특별한 장식은 없으나 당간지주(幢竿支柱)의 서쪽
석주(石柱) 바깥쪽에 조성연대와 중초사라는 사명(寺名)이 새겨져 있어
중초사의 정체를 밝혀 주고 있다. 특히 이 당간지주는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하게 조성연대(造成年代)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아까전에 봤던 마애종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것이고, 이 중초사터
당간지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조성연대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고,
생각해보니 안양시(安養市)에는 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하고 특이한
문화재들이 많군..
이 당간지주는 이런 점 때문에 보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 창건,조성연대 관련 명문이 새겨진 중초사터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왼쪽 사진 처럼 약간 휘어진 상태로 서 있다.
그리고 당간지주 옆에는 약간 부실하게 생긴 중초사터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기단이 단층으로 되어있으며,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너무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이 석탑은 원래 보물 5호로 지정된 아주 귀한 몸이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
지
1997년에 보물급 문화재에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164호로 격하되었다.
왜 격하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석탑은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보물 5호의 자리가 이 석탑에게는 좀 부담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현재 보물 5호의 자리는 비어있다.
이 중초사터 당간지주와 3층석탑은 '유원지입구↔안양유원지'길가에서 훤히 보인다.
◀ 보물에서 지방문화재로 격하된 비운의 중초사터 3층석탑
28. 중초사터를 둘러보고 안양유원지입구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유유산업에서 유원지입구 정류장까지는 도보 10분거리.. (저녁 6시)
여기서 어디로 갈까 의논을 하다가 신림동으로 가서 각자 집으로 가기로 했다.
뒷풀이도 하면 좋겠지만 자금 사정이 안좋아서........
여기서 우리는 우신버스 소속 서울시내버스 104-1번(군포시오금동↔산본동↔안양시내↔석수역↔시흥동↔신림동↔
관악구청↔서울대)을
타고 석수동,시흥동,금천구청,독산동,난곡입구를 지나 신림4거리(신림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일행들과 작별하고 나는
서울 지하철2호선을 타고 사당,방배,교대역을 지나 나는 강남역에서 내렸다.
강남역에서
흥안운수 소속 서울좌석버스 960번(상계1동↔동1로↔동2로↔삼성역↔강남역↔논현역,영동시장)
을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오니 8:50분..
-> 이로써 삼성산 대등정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29. 마무리
이번 나들이는 서울 관악구,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에 넓게 걸쳐있는 삼성산을 등반했으며
삼성산의 주요 명소와 고찰(古刹)을 거의 대부분 둘러봤으며, 삼성산에 있는 주요문화재를 한개만 빼고 모두
관람하였다.
* 이날 삼성산 등정코스를 다시 요약하자면
시흥2동종점→호압사→찬우물→석구상→한우물→찬우물→장군봉→깃대봉→삼성산 정상입구→삼막사→칠성각→
삼막사→염불암→안양유원지→안양사귀부→석수동마애종→중초사터→안양유원지입구정류장
소요시간 약 6시간. 등정거리 약 45~48리 정도..
* 이 후기는 2002년 12월 1일에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