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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전후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는(10시 반)
발걸음이 영 무겁고
편하지 않음을 애써
억누르며 한 시간
반여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여 수리산역에서
하차(11;25),
2번 출구를 빠져나와
도장초교 좌측면을 통과
초막골 생태공원을 횡단,
그다지 멀잖게 보이는
수리산 통제구역 내
시설물을 향해 눈대중으로
일직선을 긋고,
낙엽이 수북한 덤불숲과
아무도 간 적 없는 경사지를
힘들게 헤치며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수리산 정상에 우뚝 선
조형물(?)과 시설물을
목표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안간힘을 써 거리를
좁혀 가보지만,
가까이 보인다고
가까운 것이 아니며
멀리 보인다고 하여
꼭 먼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함과 함께,
산을 대할 땐 늘
겸손해야 함을
잠시 망각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1시간 20분여를
후회와 더불어 헤맨 끝에,
겨우겨우 매바위 암장
근처에 접근, 아직은 날씨가
쌀쌀하고 바람까지 제법
있는지라 햇빛이 잘 드는
바위틈 평평한 한 곳에
자리하여 준비한 컵라면에
뜨거운 물 부어 닫고,
저만치 로프에 매달려
리찌 타는 동호인들의
아슬아슬한 장면과
주변 경관을 조망하며,
적당히 면발이 불기만을
기다렸다가 곧장
컵라면을 게 눈 감추듯
흡입, 믹스커피까지 말아
느긋이 점심을 때우고,
(13:00)
정상 등반로를 따라
진격을 개시한 후
슬기봉을 경유
수리산 정상을 우회
수암봉으로 가는 도중,
약속 시간을 감안
꼬깔봉 쉼터에서
유턴 후 잰걸음으로
다시 수리산을 경유,
밧줄바위를 거쳐
칼바위를 지나
병풍바위를 넘어
수리산 태을봉까지
숨가삐 도착해서 보니,
(15:00)
햇빛에 윤기가 흐르는
태을봉 표지석은
작년 이맘때나
6년 전 이맘때나
조금도 변함없이
한반도 형상을
온전히 유지한 채
꼿꼿이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건만,
인생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라서
오늘을 확신할 수 없고,
또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들 하지
않던가 만, 하룻밤 새
만리장성을 쌓기도
또한 밤새 안녕이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봐
인간사 허무요~
변화무쌍한 것이었든지?
미식가 못잖으신 맛 객으로
소문난 맛집을 기억해두시곤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면,
아니 가족 중 어느 누구라도
다니러 가 이동 수단 만 운행
가능하면 우리를 앞세워
그곳으로 데려다 계절 입맛을
돋궈주시곤 하시며 주말이면
늘 가족들 모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심을 낙으로 삼으시고
흐뭇해하시던 장인어른이셨는데,
설 전후부터 갑작스레
식욕을 잃어가시는가
싶으시더니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기력이 쇠해지는
바람에 이내 곧 병원 진료
검진을 받으신 끝에,
온 가족 모두가 기절초풍
하고도 남을 노인성
말기질환 진단을 받으시고
힘겨운 투병 중이시라서,
지난 주말에 이어 이번 주
또한, 어제저녁 늦게 아내가
아들을 대동하고 시골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 만을
건넸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려
무겁고 불편한 마음을
못내 떨쳐내지 못했던 것이며,
매월 말이면 월중 행사처럼
일가친척 어른과 초등학교
은사님 등 지인 분들께
안부 전화를 드리곤 하는데,
지난해 가을 무렵부터
외 당 숙부님께서 산본에서
거주 중인 누이동생 내외랑
같이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해 봤으면 좋겠다 시는
말씀을 차일피일 미루고
미뤄오다 지난 연말 무렵에
설이나 쇠시고 날씨가 좀
풀리거든 자리를 마련
해보겠다는 약속 끝에
이번 주말(9일) 저녁 식사
약속을 하고 식당 예약을
해 놨던 터라 이제 와
미룰 수도 그렇다고 맘 편히
함께 가잘 수도 없는 형편이라
함께 하지 못한 채
아내와 따로 각자 역할
분담하게 됨이 미안하고
죄스럽기도 한 반면,
오늘 약속 또한 공경하는
친척의 어른을 처음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라서 매우
맘이 쓰이고 조심스럽기도 하여
뜻깊은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예전에 두어 번 수리산을
다녀왔던 기억을 되살려
겸사겸사 산행도 하고
외당숙님도 뵈려는 욕심에서
미리 출발을 서둘렀던 것.
한산한 등산로를 따라
궁내동 군포시 수도녹지사업소
방향으로 데크계단을
한참 내려가도록(10여 분)
자꾸만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잡아당기는 듯한
미련과, 뭔가 다하지 못한
아쉬움에 후회가 생길 것만
같은 강한 불안에 이어,
또 한편으론 약속 시간에 너무
이를 것도 같은 넉넉한 예감도
들고 하여 방향을 다시 선회,
내렸던 계단을 꾹꾹 눌러 딛고
한참 동안 힘겹게 올라서
다시 태을봉 정상의 표지석
앞으로 돌아오니, 좀 전
두어 팀 너덧 명이 표지석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곤 했었는데,
다 어디론지 들 떠나가고
아무런 인적도 없는 태을봉에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내 내면을 비추어 보듯
밝은 햇볕을 온몸으로 반사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듯
지켜보고 서 있다.
나 자신도 몰래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저 자연스레 깊은 속
간절한 마음이 밖으로
표출되어 나오며
두 손을 정성스레 합장하고
공손히 허리 굽혀
태을봉 산신령님께 소원컨대,
아버님과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당신께서 베푸신 큰 사랑과
은혜에 보은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넉넉한 시간,
아버님과 우리 모두를 위해
서로 마지막 긴 이별을 위한
슬프고 아프지만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 되어주기를,
아무런 고통 없이 그동안
아버님께서 쌓으신 위엄과
삶의 자취와 인격과 품격이
지금처럼 온전히 유지,
기억될 수 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태을봉을 물러나 관모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제야 다소 좀
불편한 마음이 가라앉고
묵직했던 가슴에 밝은
햇빛과 살가운 봄바람이
들이침을 새삼 느끼며,
한결 새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로지 혼자뿐인
인적 없는 등산로를
사박사박 걸어 가뿐히
관모봉까지 이르러(15:30),
암반 정상에 꼰지발을선 채
국기 봉 높이 바람이라도
잡으련 듯 살랑거리는
태극기만 졸음을 쫓는
관모봉 정상을 독차지한 채,
수리산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실 산신령님께
정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도하기를
,
또한 가족 중 해가 지나도록
힘겹게 투병 중이신 두 여인께
강건히 버티고 견뎌낼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기를
정성과 치성을 다 해 빌고,
관모봉 정상 인근을
주의 깊게 돌아보며
안양과 군포 일대를
휘돌아 조망하고 나자,
(15:40)
이제야 내재 됐던 심리적
불안과 우울감이 모두
사라지고 수리산 줄기의
영험한 기운이 내면으로
들어와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
비로소
수리산을 찾아서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거였다는 사실에
새삼 위안을 얻어,
가뿐한 마음으로 관모봉
정상을 뒤로하고
관모쉼터를 경유
수리샘터 방향으로
하산을 시도한 끝에
산본고등학교를 지나
수산로 203번 길로
접어들어 터벅터벅
오늘의 약속 장소인
산오름에 무사히 도착한다.
(16:40)
예약석을 여쭤 살펴본바
창 측으로 동선이 편하고
더 밝아 보이는 널찍한 테이블이
비어 있어 그곳을 지정하여
바꿔 달라고 요청, 자리 배치를
점검한 후 잠시 기다리는 동안,
누이와 매제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고 들어온다.
반가이 인사를 나눔 하며
주변의 안부와 더불어
서로의 근황에 잠시 담소 중,
곧이어
외당숙 내외께서 현관 앞에
도착하시자마자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안으로 모셔 두 분
나란히 창 측 밝은 자리에
드심과 함께 정중히 인사를
올림과 동시 음식이(한식 코스)
올려지며 자연스레 덕담이
시작 되고,
수년 전
친인척 어느 경조사에서
뵌 후 실로 오랫동안 만에
대면해 뵙는 자리라서
궁금했음은 물론 다소 좀
건강이 염려스럽기도
하였지만, 팔순 연세신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참전
용사답게 여전히 건장하시고
당당하시며 외당숙모님
또한 변함없이 밝고
정갈하신 모습에 안도하며,
워낙 달변이신 삼춘(?)의
이야기에 몰입 점점 깊이
그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월남 참전을 시작으로
시골로부터 상경하시게 된
계기를 비롯 서울 적응기 등등
한 말씀만 여쭈면 거미 똥구멍에
거미줄 나오듯 줄줄이 추억이고
한 시대의 한 인생을 조명하는
구구절절한 삶과 고난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숙모님(?)과의 첫 만남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여쭈실 때는 두 분께서 서로를
은근히 바라보시는 눈빛이
아직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듯하여
참으로 존경스럽고 본받아 마땅할
두 어른이시라 칭송을 아끼지 않자
누이 내외께서도 맞장구를 치며
두 분을 칭찬해마지않는다.
숙모님께서는 그 풋풋한 시절과
힘든 시절이 새삼 겹쳐 생각이
나시는지 눈시울이 붉어지시고,
그땐 삼춘께서 너무 고생이
많으시고 힘든 시기셨다시며
애정이 어린 눈으로 위로를
아끼지 않으신다. 그러시는
두 분의 다정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서로 함께하신
삶에 대한 상호 신뢰가 쌓여
천상배필을 이루셨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공경하는 마음과
부러움이 배가 된다.
80년대 초 중반 무렵 무작정
상경 후 서울에 정착해가는
동안 경조사에서 뵙거나
가끔 어렵게 전화 통화할
기회가 생길 때면 성심껏
열심히 살면 어디든 통한다는
말씀과 더불어 기술을 배우 되
한 우물을 파라시며 힘을
북돋아 주시고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나 또한 삼춘 가족 경조사엔
빠짐없이 적극적으로 참석하여
접수를 도맡아 책임지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노력했던,
외삼춘보다도 더 외삼춘
같으신 든든하고 확고한
힘을 주시는 외 당 숙부님
이셨으니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마음과 변치 않은
믿음이 유지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월말에 앞서 대부분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봐 주시니 그 고맙고
황송함을 어찌 소홀히
간과할 수 있으랴?
더구나 나의 오늘이
서울에 정착해 있음에 많은
힘과 용기를 주시며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누이동생네 또한
부산에서 안양으로 이사를 와
자동차 관련 공장을 운영할 시
도움을 주시기 위해 주변의
관련 업체에 홍보 역할을
해주셔 영업에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어,
오늘의 이런 자리가 매우
뜻깊고 유익한 자리라는
점에 모두가 공감 동감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더더욱 유쾌 상쾌 흡족함을
밤이 깊도록 새록새록
누림 한다.
특히
언제 어디서건 즐거운
마음으로 늘 대리운전을
자처하신다는 숙모님의
말씀을 숙연하게 들으며,
나이 드실수록 두 분의
사랑과 믿음과 상호
존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가심이 본보기가 되어
나의 가슴에 깊이 자리함에,
부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삼춘을 행복 남이라 지칭
모두가 함께 소리 내 웃는다.
"오늘
사랑하는 조카들 덕분에~"
"조카들도 사랑한다는
"자네들 숙모님 덕분에~"
"술 잘 먹고~ 밥 잘 먹고~
큰 호강을 누렸어~~"
"고마워^^~"
숙모님께서도
이에 동의하시듯
흐뭇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시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신다.
오늘의 이러할 수 있음을
큰 축복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하고 은혜 하는
마음으로 두 어른께
간곡히 당부드린다.
오래도록 건강히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며 이러한 행복
누림이 더불어 함께 지속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오늘의 나의 삼춘은
아주 오래전 내 나이
천둥벌거숭이던 시절,
내가 닮고 싶은 가장 위대한
나의 영웅이셨다는 사실을
아래 한 장의 흑백 사진에서
그 기억을 더듬어 생생히 찾아
고백하며,
2024년 3월 9일
삼춘^^~
아마
사진 속의 이때가
1960년대 중반 전후 무렵
초겨울 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형제,
자매들한테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이
세상풍파에 곧
스러질 듯 위태롭고
형용키 어려울 만큼
참담한 시기였음을
오롯이 간직한
귀한 추억의 사진이
아닌가 싶습니다.
30대 청상의
가녀린 몸으로
4남매를 혹처럼 매단
한 여인의
가혹한 운명,
돌보고 보호하고
보살펴도 부족했을
숙부님으로부터의
위협과 냉대는 왜
그리도 모질고
혹독했는지----
그때,
노래 가사의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님처럼,
월남전에서 강건히
살아 돌아오신
외당숙께서
마치 우리들의
구세주처럼
모든 외삼촌을
거느리시고
우리 집으로 오셔,
카메라와 녹음기 등
그 시대 상상을
초월한 최 첨단기계(?)
들을 펼쳐 놓으시고
그 비좁은 방에
(아마 이웃분들
20~30명은 족히)
서로서로 무릎을
포갠 채
벽이 물러나도록
등을 밀착하고
둘러앉아,
귀신이 곡할
녹음기의 대단한
위력 앞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며,
한 사람씩 차례대로
쥐여주는 마이크에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주고받다
깔깔깔 박장대소 후
다시 돌려 듣기를
반복하며 기가 차는
흥분과 놀라움으로
밤새는 줄 모르던
그때 그 꿈 같은 날,
의지할 곳,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그 황량한 곳으로부터
모진 삶과 세월을
청상의 몸으로 견디고
지탱해야만 하셨을
우리 어머니,
고단한 삶에
웃음은 사라지고
삶의 의욕을 잃으신
굳은 표정으로
점점 변해가시던
우리 어머니께
당시 그 상황이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이 되셨을지,
그 당시 부엌을
바삐 오가시며
환하게 웃는 모습과
예전에 보지 못했던
그 밝고 흐뭇한 표정에서
어머니의 행복을
봤었고,
이후까지도 내내
흡족해하시던
어머니의 표정에서
항상 외당숙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잊지 않고
깊이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특히 초라한 집
방문 위 벽 높이 걸린
사진 액자 속에
이 사진을 보면서
부정을 모르고 자란
우리 어린 4남매는
든든한 믿음의
부적처럼 큰 힘을 얻어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무난히
잘 견디고 지탱할 수
있었던 사실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으며,
삼춘께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예나 지금이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설날인
오늘 이 아침
이 한 장의 사진에
경애하는 저의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삼춘을 깊이 추억하며
세배를 대신해 올립니다.
삼춘께서도
이 한 장의 사진에서
큰 보람과 위안을
얻으시는 귀한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구요~~
임인년 새해 내내
강녕하시고 주변 두루
건안과 평안을
축원합니다.
2022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