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가게를 보고
임병식
내가 사는 곳 가까운 길모퉁이에 작은 열쇠가게가 있다. 번듯한 간판도 없이 작은 글씨로 '쎄떼'라고 적혀 있다. 전라도 사투리다. 표준어로는 '열쇠'가 맞지만, 그 투박한 이름이 오히려 정겹다.
나는 그 가게를 직접 이용한 적은 없다. 예전에 현관문이 고장 나 출장 수리를 받은 적은 있지만, 그 주인이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는데 출입문에 큼직한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오래전에는 흔히 보던 풍경인데, 이제는 오히려 낯설었다.
열쇠가게에 자물통이라.
묘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가게 안에는 열쇠를 깎는 공구와 여러 종류의 자물통이 있을 것이다. 열쇠식은 물론 번호를 맞추는 다이얼식과 전자식 잠금장치도 함께 진열되어 있을지 모른다.
자물통은 아무나 열지 못하게 만든 장치다. 제 짝인 열쇠가 있어야만 열린다. 그래서 새 자물통에는 대개 두세 개의 열쇠가 함께 들어 있다. 분실에 대비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나누어 갖거나 비상용으로 보관하기 위해서다.
예전 농가의 곳간에는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재산을 지키는 장치이면서 집안의 넉넉함을 은근히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물통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다.
잠가 놓았다는 것은 당장은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열쇠가게 문에 걸린 자물통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침입자는 문을 쉽게 열지는 못하겠지만, 반대로 주인이 없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주는 셈이다. 극단적으로는 자물통을 부수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면 자물통은 안전을 지키는 장치인 동시에 빈 공간을 드러내는 표식이기도 하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인지 옛사람들은 귀한 물건일수록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두었다. 특별한 금고보다 평범한 생활용품 속에 감춰 두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다. 보이는 잠금보다 보이지 않는 은닉이 더 큰 방패였던 것이다.
요즘은 커다란 자물통을 보기 어려워졌다. 잠금 기술이 발전하면서 겉으로는 잠겨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방식이 많아졌다.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보안이 새로운 상식이 된 것이다. 눈에 띄지 않을수록 표적이 될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래도 잠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물통이 전자식으로 바뀌고, 열쇠 대신 번호와 카드가 쓰일 뿐이다. 머지않아 얼굴과 음성만으로 출입을 허락하는 시대가 더욱 보편화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잠금은 결국 사람을 대신하는 장치일 뿐이다.
오래된 '쎄떼' 간판이 걸린 작은 열쇠가게를 바라보며, 나는 문은 열쇠가 지키지만 삶은 사람이 지키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2026)
첫댓글 안전을 위해 걸어둔 자물통이 오히려 부재(결핍)를 증명하는 표식이 된다는 역설적 통찰은 무릎을 치게 합니다. '잠금'이라는 일상적 행위 이면에 숨겨진 모순을 날카로우면서도 차분하게 짚어냈습니다. 아날로그적인 무쇠 자물통과 농가의 곳간 열쇠에서 시작해, 현대의 전자식 도어락과 미래의 생체 인식 기술로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보안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결국 삶을 지키고 책임지는 것은 도구가 아닌 '사람의 온기와 의지'라는 진리를 담백하게 일깨워줍니다.
흔히 지나치는 골목길 열쇠가게 앞에서 '존재와 부재',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따뜻하고 명징한 시선으로 포착해 낸 격조 높은 사유의 글입니다.
이시대의 자물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쎄떼'라는 글씨를 읽는 순간, 그동안 보아온 자물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습니다.
열쇠가게라는 말은 있어도 자물쇠가게라는 말은 없다는 점이 수상해 집니다
자물쇠를 채운 빈집...생각이 얽힙니다
그러고 보니 자물쇠는 빈집 파수꾼이군요 물론 그 속에는 지켜야 할 무엇이 있겠지요 입이 무거운 사람도 그 속에 귀한 보물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물쇠를 가진 사람은 주인이거나 관리인일 테지만 자기 집 열쇠를 남이 관리한다면 그는 영어의 신세겠지요 문득 나는 과연 자물쇠를 채워 둘만한 보물을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됩니다
자물쇠를 채워놓고 있다는 것은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표시이기도 하니 오히려 도둑을 불어오는 구실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쎄떼'라는 이름의 정겨움 속에 이토록 깊은 삶의 통찰이 숨어있을 줄 몰랐습니다! '잠겨 있다는 것은 주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역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네요. 문은 열쇠가 지키지만 삶은 사람이 지킨다는 말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깊은 울림을 주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행복 넘치는 날 보내세요.
열쇠가게를 보고서 문득 떠오른 생각을 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