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감상 / 지교헌 수필 「작은 책꽂이」를 읽고
■ 옮긴이 주 : 유익하고, 재미있고,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가슴을 아리게 하기도 하고, 미소 짓게 하고, 따뜻한 인정이 느껴지는 수필을 발견하면 혼자 읽고 덮어두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집니다. ▲ 좋은 글을 많은 분과 공유하면서 공감하고 싶은 심정은 글 읽기를 ‘일상의 낙’으로 삼는 사람의 과한 욕심일까요? 오늘 또 그런 <글 나눔 욕심>을 가질 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 경기수필문학회 카페 서재방에서 존경하는 지교헌 박사님 수필 옥고를 발견하고 잔잔한 감동이 일었기에 가족대화방에 올려 자식, 며느리, 손자와 나누고 이곳으로도 옮겨 소개합니다. / 옮긴이 윤승원 감상 記
【지교헌 수필 감상】
작은 책꽂이
지교헌 수필가, 철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나에겐 작은 책꽂이가 하나 있다. 가로 78cm, 세로 18cm, 높이 18cm에 4칸으로 구분되고 진한 갈색 바탕에 윤기가 흐르는 아담한 골동품의 모습이다.
내가 먼지를 닦아 간이책상에 올려놓은 것을 본 내자는 자기의 물건인 것처럼 자기의 책을 이것저것 꽂아 놓았다. 무기력한 나는 입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나의 작은 책꽂이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3십리나 떨어진 읍내(청주시내)에 있는 목수에게 특별히 주문하여 큰 형님이 혼자서 등에 지고 온 앉은뱅이책상에 딸려 온 물건이다. 그 때 큰 형님은 어깨가 몹시 아프셨을 것이고 목도 몹시 말랐을 것이다.
책상이 생기기 전에는 작은 궤짝을 대용품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새 책상이 들어오자마자 향기가 집안을 감싸고 마치 훌륭한 선비의 집안을 상상하게 하였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작은 책꽂이가 보기 좋았다. 거기에는 나의 교과서와 공책과 일기와 형님들의 고전소설 몇 권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책꽂이는 내가 6년제 사범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나의 손으로부터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고향의 어느 방구석에 잊혀진 채로 방치되어 거의 버림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책꽂이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 키보다도 높은 신식 서가(書架)를 여러 개 장만하여 동서양의 그럴듯한 책들을 보기 좋게 꽂아 놓고 의기양양하게 시간을 보내 왔다. 서가에 즐비한 책들은 나에게 새로운 지식과 지혜와 총명을 주었고 고뇌가 엄습할 때는 은근하고 따뜻한 위안을 주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책을 귀하게 여기고 혹시 방바닥에 책이 놓여 있으면 절대로 넘어 다니지 않았고, 책을 읽을 때는 먼저 손을 깨끗이 씻고 바른 자세로 목례를 올리기도 하였단다.
책은 사람들에게 지식과 지혜와 교양을 전할뿐만 아니라 고귀한 인품을 갖추게 하여 남에게 존경을 받게 하기도 하고 일정한 시험이나 추천을 거쳐 공직자가 되고 권력을 행사하게도 하였다.
여러 자식들 가운데 한 둘만 공부를 하여도 그 집안이 존귀하게 되고 빈천을 면하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는 몇 권의 책을 물려주는 것이 더욱 값진 경우도 많았다.
어떤 사람은 밭을 갈다 말고 소를 팔아 자식에게 책을 사주기도 하고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스승을 찾아 공부하게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대도시 유학이나 해외 유학과도 방불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사람이 공부를 하는 데는 시간과 정력과 재력(財力)이 필요하고 굳은 의지가 필요하였다. 그 가운데 어떤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 사람도 많겠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간난신고를 감내하여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성공하면 형설지공(螢雪之功)이나 차윤지공(車胤之功)을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나는 일찍이 만권당(萬卷堂, 또는 萬卷樓, 萬卷起書樓)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꿈 같은 이야기로만 생각하였다. 만 권이라는 수량은 너무나 엄청난 것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물질의 풍요와 인쇄술의 발달로 만권당을 몇 십 배, 몇 백 배나 능가하는 거대한 도서관들이 많이 생기고, 내가 그 거대하고 귀중본이 가득한 도서관과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기도 하였었으니 세태는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침상지학(枕上之學)이니 마상지학(馬上之學)이니 측상지학(厠上之學)이라는 말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 같다. 공부하는 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아야한다는 말이다. 마땅히 많은 장서도 필요하지만 누워서 쉴 때나 여행을 할 때나 심지어는 측간에 갔을 때라도 나름대로의 학문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히 털어 놓기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근년에 접어들어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 동안 여기저기로 책을 흩어버리고 말았지만 아직도 나의 서재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수선하여 견디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따금 서재로부터 내 손에 끌려나온 책들의 운명은 매우 암담하다. 아무도 반겨주고 간직할 사람이 없어서 종당에는 초라한 폐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특별히 서가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호흡기질환으로 외과수술을 받은 후의 일이다. 나는 오래 동안 서가에 쌓인 먼지를 호흡하면서 살아왔고 이제는 그로 말미암은 일종의 불안감을 이기기 어렵게 되었다. 서가에 쌓인 먼지는 어떻게 털어내야 하는지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장서(藏書)나마 관리하기가 힘겹고, 집중적으로 읽을 마음과 용기가 잦아든 형편이다. 젊어서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책을 샀지만 이제는 호주머니가 넉넉하여도 사고 싶은 용기가 솟지 않는다. 몸이 늙고 병든 탓이라고나 할까, 학구열이 무디어졌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인터넷 검색창을 과신하는 탓이라고나 할까.
나는 요즘 별다른 연구라곤 하지 않기 때문에 논문이나 저서와는 담을 쌓고, 다만 ‘봉사’(奉仕)라는 이름으로 버스를 타고 강의실을 찾아가 매주 2시간의 고전강의를 진행할 뿐이다.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아름다운 강의실에서 서로 시선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는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찍이 큰 형님께서 땀 흘리며 등으로 저 다 주신 책상과 그 작은 책꽂이가 수 백 배로 불어나고 커져서 나의 학문을 길러주고 직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분에 넘치는 독서종자(讀書種子)의 마지막 길을 걷도록 인도해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형님은 변변치 못한 나를 바라볼 때마다 마치 당신이 출세라도 한 것처럼 대견히 여기고 은근히 즐거워하면서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으로 고향을 지키시다가 만년에는 서울에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저 멀리 피안의 세계로 떠나셨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더라도 형님께서 남겨주신 70년 전의 작은 책꽂이만은 끝까지 아끼고 간직하고 싶다. (2014.4.18)
※ 동촌 선생님이 댓글에 <스잔나>를 언급하셨기에 하단에 추가로 해당 유튜브 영상과 가사를 옮깁니다.
석양을 관조한 노래 가사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가수의 표정이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노래 분위기를 잘 살렸습니다.
♪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너무 짧구나 ♬
https://www.youtube.com/watch?v=alJE6GU1lSY
첫댓글 옥고에 등장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 차윤지공(車胤之功), 만권당(萬卷堂, 또는 萬卷樓, 萬卷起書樓),
침상지학(枕上之學), 마상지학(馬上之學), 측상지학(厠上之學),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의 뜻만 잘 새겨 익혀도
지 박사님 수필을 읽는 독자는 <작은 책꽂이>가 아니라 <도서관 대형 서가(書架)>의 중심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작고 소박한듯 하지만 지 박사님이 골동품처럼 아끼는 <작은 책꽂이> 는 이렇듯 우주를 품은 <대형 서가>의 몫을 하고 있습니다.(윤승원)
"경기한국수필가협회"의 카페에서 졸작을 발견하시고 "올사모"에 소개해 주시고 갖은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으니
감사합니다.
가형은 내가 그 작은 책꽂이에 책을 꽂고 공부하여 8대1의 경쟁을 뚫고 師範學校(교육대학교 전신)에 합격한 것을 기뻐하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牛骨塔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大學입시에도 합격하자마자 거액의 입학금을 마련해주신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지기 직전에 전방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로
소모품장교라는 말이 유행할 무렵, 징집연기의 혜택을 받기위하여 너도나도 덤벼들던 소용돌이 속에
대학입시합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화상리 1.2구와 화하리 1,2구에서 각각 한 사람밖에 합격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나는 형님의 마음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고 생활인으로 성장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작은 책꽂이는 지금도 나의 책상 위에 말없이 놓여 있고 이제는 천국에서 나를 내려다 보시는 형님을 그리워하게 합니다.
졸작을 통하여 마음과 마음을, 時空을 이어주는 댓글을 아끼지 않으신 윤승원작가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지교헌)
큰 형님이 동생을 위하여 30리나 떨어진 청주 시내 목수에게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어 주신 책꽂이.
형님이 혼자서 어깨 아프게 등에 지고 온 물건.
형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학자로, 문인으로 성공하신 지 박사님.
형님이 천국에서 얼마나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수필 한 편에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담겨 있습니다.
형설지공이 담겨 있습니다.
책꽂이를 바라볼 때마다 형님의 사랑을 그리워하시는
지 박사님의 애틋한 정이 명품 수필을 낳았습니다. (윤승원)
동촌 지 교수님의 글을 읽고 본 카페에 올리신 장천 윤 선생께 참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 교수님의 이야기 중 장형 님과의 이야기는 바로 저의 장형에 대
한 이야기로 대치하여도 꼭 맞을 것 같습니다. 지 교수님은 저와 같은 해에 연구원에 함께 부임하여 10년 앞서 퇴임하셨습니다. 항상 제가 존경하는 선배 교수님이었습니다.
현재 올사모 카페를 통해 선생님의 글을 자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논어 등 고전 강의를 하여주신다니 참으로 값진 일을 하십니다. 경하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을 통하여 칭찬을 받는 것이 너무나 과분한 듯 합니다.
실은 제가 느끼는 형제간의 우애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세상에는 더 한층 아름다운 우애가 많고 아름다운 글도 많을 것입니다.
제가 수년간에 걸쳐 해오던 "고전강의"는 코로나19의 창궐 이후로 휴강하여
아직도 개강하지 못한지라 회원들에게 나의 essay를 e-mail로 전해드리다가
요즘은 "경기한국수필가협회"의 카페에 올린 글을 참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엔 그 동안 써 놓은 잡문(수필)을 출판하기 위하여 조금씩 정리하는 중입니다.
책으로 세상에 내어 놓기는 부끄럽지만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살펴보려는 마음입니다.
지난 세월의 솔직한 반성은 그것이 성공이던 실패이던 자신과 후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樂庵선생님과 長川수필가님과
모든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올립니다.
성남시 분당구, 탄천과 운중천이 만나는 二梅洞 아름마을에서 지교헌
동촌 선생님의 수필 집이 나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무르 익은 지혜의 온축이 있는 글이기에 더욱 기다려집니다. 나오는 대로 알려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정진, 청정, 동행이란 표어를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수필집을 준비한다고 하였는데 실은 자서전이나 참회록과 같이
어두웠던 시절과 어리석고 용렬한 시절을 부끄럼없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인생을 마감하는 마땅한 절차라고도 생각되는 것입니다.
원고는 아직 꽤 남아 있어서 웬만하면 더 내놓고 싶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부질없는 추태인듯 하여 주저하게 됩니다. ..................
감춘다고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끄러운 듯도 하여 우왕좌왕합니다.
힘내십시오. 마음으로 만으로도 적극 응원하겠습니다. 건강, 정진, 수행, 동행의 기원을 드립니다.
항상 격려하고 위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석양의 황혼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젊은이의 눈이요,
서글프게 느끼는 것은 늙은이의 눈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은 깨달은 자의 눈이겠지만
깨달은 자가 되기에는 멀기만 하군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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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경이던가요. 낙암선생과 내가 淸溪山 雲中館에서 생활할 때
'사자수'라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지요. 아마도 그때 낙암은 '사비수'라고 말한 것 같군요.
그 땐 그 노래가 은근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스산나"라는 영화의 주제곡으로 알려진 '해는 서산에 지고'가 떠오릅니다.
낙암선생이나 장천선생이나 여러 분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원제는 "夕陽照天空"이라는 李靑이 부른 홍콩의 노래지만 한국에서 번안되어 널리 부르던 노래지요.
해는 서산에 지고 / 쌀쌀한 바람 부네
날리는 오동잎 / 가을은 깊었네
꿈은 사라지고 / 바람에 날리는 낙엽
내 생명 오동닢 닮았네 / 모진 바람 어이 견디리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
봄이 오면 꽃 피는데 / 영원히 나는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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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에도 맞고 늙은이에게도 맞는 노래입니다. ...................(청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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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나 / 유튜브 영상과 가사입니다.
※ 동촌 선생님이 댓글에 <스잔나>를 언급하셨기에 본문 하단에 추가로 해당 유튜브 영상과 가사를 옮깁니다.
석양을 관조한 노래 가사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가수의 표정이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노래 분위기를 잘 살렸습니다.
♪ 지는 해 잡을 수 없으니 인생은 너무 짧구나 ♬
https://www.youtube.com/watch?v=alJE6GU1lSY
PLAY
동촌 선생님이 40년 전 연구원 기숙사 이야기를 하시니 참으로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신 것을 경하합니다. 그리고 저는 전혀 모르는 스산나의 주제곡을 언급하시고 이를 놓지지 않고 그 노래를 유트뷰에서 다운 받아 올려 놓으신 장천선생 덕분에 이청의 원곡과 문주란의 곡까지 감사합니다. 늦게 댓글을 보았기에 이제 답 글을 씁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스잔나"는 일찍이 1970년대에 한국의 대중에게 보급된 노래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어의 원문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한국어번역문도
매우 잘 된 듯합니다.
장천선생님은 u-tube까지 찾아서 올려주시니 모든 회원들이 감상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청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