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12일은 미소 양국의 공군사에 희비가 엇갈린 하루로 기록된다.
미군은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철교와 주변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72대의 B-29 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맡은 F-80 전투기 32대를 한반도의 북쪽으로 출격시켰다.
소련 공군도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아래는 기타 압록강 철교와 관련한 참고자료;
(鴨綠江鐵橋)
압록강을 가로질러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丹東)을 연결하는 개폐식철교다.
압록강 철교는 총연장 944m이며, 압록강 하구에서 상류로 45㎞ 지점에 위치한다.
파괴된 "단교"와 "중조우의교"로 구분한다.
압록강 철교는 길이가 944.2m이고 12개의 다리말뚝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인원 50만 9,319명을 투입한 공사는 1911년 10월 18일 단동(안동) 측의 열두 번째 강철 다리말뚝을 설치하므로 끝이 나고,
10월 27일 시운전으로 열차가 통과했으며, 그 뒤 안봉선(안동-봉천) 개축공사의 준공을 기다려 11월 1일 개통식을 가졌다고 한다.
압록강 철교가 명물이 된 것은 배가 지나갈 때는 다리를 들어 올리는 개폐식이라는 것인데 처음 설계에는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교항(橋桁)은 12연(連)으로 강을 오르내리는 범선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우리 쪽에서 아홉 번째 연을 개폐식(開閉式)으로 만들어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 닫으면 일자(一字)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결빙기(結氷期)에는 여닫지 않았다.
일본이 철교를 만들면서 중국의 정크(중국의 범선)나 기선의 항해를 방해하고,
나아가서는 청국 내 통상에 대한 기회균등을 약속한 일본 정부의 취지에 반하는 행위라며
미국과 영국의 공사들이 항의하고 나서자 1908년 11월 급히 설계를 변경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다리말뚝 가운데 하나를 가동식으로 변경한 것인데, 북한 쪽에서 세어 아홉 번째 다리말뚝 한 가운데다 교각을 하나 더 추가하고,
이것을 축으로 하여 다리를 90도 회전할 수 있게 하여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32년 통계에 의하면 보도통행자만도 연간 260만 명이었다고 한다.
34년 11월부터 교량보존을 이유로 개폐를 중지했는데 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 기념으로 단 한 번 연 일이 있다.
6.25 때 폭격을 맞아 압록강 철교가 불통되자 새로 다리를 놓았다고 하고 있으나
신·구 두 다리는 모두 일제 강점기 때 놓인 것이라고 한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일본과 중국을 잇는 한국 철도의 중요성이 급속히 증대되자
1937년부터 경부선과 경의선을 복선화하고 이어서 압록강 철교도 복선으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한다.
1943년 5월, 재래교에서 상류 70m 지점에 총연장 943.3m의 복선형 신철교를 건설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뒤,
퇴로 차단과 중국의 보급품 유입을 막기 위해 미군 폭격기들이 압록강 철교에 폭격을 가했다.
1950년 11월 9일 폭격을 받은 하류 쪽 구교는 이때 파괴되어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구교도 남쪽만 파괴되고 북쪽은 폭파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압록강 철교가 국제교이기 때문에
교전당사국인 북한측만 공격하는 한정된 전략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재 신철교는 조중친선우의선(朝中親善友誼線 혹은 중조우의교 : 中朝友誼橋)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재래교는 6·25전쟁 당시 폭격된 채로 보존되어 있다.
잘려진 다리를 중국에선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체험을 시킨다.
원래는 중국 측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철교 근처에 접근할 수 없게 했었는데
지금은 재빠른 중국인의 상술 덕분에 입장료만 내면 끊어진 다리 끝까지 가 볼 수 있고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압록강철교 폭격하는 미해군 F4U콜세에어, 그림
첫댓글 새로운 사실 잘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