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여정/靑石 전성훈
5월은 어여쁜 장미를 닮아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이다. 일 년 중 이런저런 모임이나 행사로 몸과 마음이 어수선하고 가장 바쁠 때가 5월이다. 몸이 분주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엄마가 계실 때에는 형제 가족 모두 모여서 즐거운 한때를 가졌는데 이제는 각자 뿔뿔이 흩어져서 집안 어른 노릇하기에 정신이 없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이해 가족 여행을 하기로 오래전에 약속하고 어린아이들처럼 그날을 기다린다.
곤히 자는 손주들을 깨우자 금방 일어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길 떠나는 날 아침부터 비가 쏟아진다. 비가 온다고 이미 숙박비용을 지급한 여행을 그만둘 수도 없고, 손주들의 설레는 마음을 담아 오전 7시 빗속에 길을 나선다. 수락산 입구로 들어서니 길이 막히지 않아 차량 흐름이 원활하다. 춘천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려 30분 만에 화도 I/C로 방향을 잡아들자 드디어 차들이 거북이걸음이다. 연휴가 실감 난다. 차창 밖 산들이 비를 맞아서 푸르름이 선명하다. 길이 막히는 것보다 푸르른 산의 모습이 마음에 여유로움을 풍성하게 해준다. 집을 떠난 지 3시간 반이 지나서 겨우 홍천휴게소에 도착하니 이곳도 장난이 아니다. 어렵게 주차하고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린다. 가까스로 빈자리를 찾아 비좁게 앉으니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이 일행이 많은 우리를 보고 자리를 바꾸어 준다. 오후 1시 넘어 강릉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과학박물관에 도착한다. 박물관에는 각종 옛날 축음기가 즐비하다. 천재 발명가 에디슨의 인류를 위해 빛을 보여준 그의 행적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개인적인 욕심과 욕망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한 에디슨의 일탈 행위는 별도로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족 단위로 구경 온 사람들이 50명도 훨씬 넘는다. 구경꾼의 절반은 어린이들이다. 강릉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덥지도 춥지도 않아 걷기에는 그만이다. 수집 인생 60년, 박물관 45년의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는 설립자 ‘손성목’ 관장의 불꽃 같은 집념과 열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드린다. 에디슨과학박물관을 떠나서 경포해변으로 향하니 비가 조금씩 그야말로 보슬비처럼 내린다.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듣고 커피숍에 들어가 따뜻한 생강차를 마시며 손주들 재롱떠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오후 4시가 지나 오대산 소금강 부근 펜션에 도착하여, 숙소를 배정받고 졸졸 흐르는 탄산수 한 잔 마시고 휴식을 취한다. 몇 시간씩 자동차를 타면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는 세월 따라 몸도 마음도 시들고 삭아가는가 보다. 저녁에 목살을 구워주는 자식들 덕분에 보름 만에 술 한잔 마시니 취기가 핑하고 돈다.
둘째 날, 어제 일찍 잤는데도 피곤했는지 평소처럼 일어나지 못하고 오전 7시 넘어 잠이 깨어 창문을 여니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제법 쌀쌀하다. 거실에 나가 물 한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린다. 아내가 준비한 된장찌개, 계란말이, 파김치와 배추김치로 아침을 맛있게 먹고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보며 숙소를 나선다. 산에는 초목이 파랗게 물들더니 그새 더욱 새파란 모습이다. 늙은이 마음도 동심으로 돌아가 파랗게 파랗게 물들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어본다. 비가 많이 내려 야외활동을 할 수 없어 강릉 올림픽 뮤지엄에 가서 이런저런 영상을 보거나 실제 동작을 해 본다. 손주들이 “영미, 영미”를 외쳤던 ‘컬링’을 하고, 아이스하키 하는 멋진 모습을 찍어준다. 한 시간 정도 구경을 마치고 속초 중앙시장에 간다. 시장 입구도 밀려드는 차량으로 무척 혼잡하다. 음식점을 찾아가는 일조차 번거롭다. 시장에서 떡볶이, 어묵, 새우튀김, 오징어순대, 감자전을 사다가 자동차 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먹는다. 막걸리 한잔하며 감자전을 잘라 먹으려고 젓가락질하다가 잘못하여 그만 간장을 쏟는다. 자리에도 바지에도 간장이 마구 튄다. 손놀림이 굼뜬 늙은이의 동작이, 비 오는 날의 수채화치고는 원하지 않은 그림을 그린 모양새이다. 그 모습을 보고 손주들이 “할아버지 괜찮아요”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렇게 별난 점심을 끝내고 물놀이를 못 해 아쉬워하는 손주들을 위해 꿩 대신 닭이라고 ‘온천’으로 향한다. 빗속에 마땅하게 갈 곳이 없는지 속초 척산온천 휴양촌에는 사람들이 많다. 모처럼 삼대가 어울려 여자끼리, 남자끼리 온천욕을 즐긴다. 솔 향기 풍기는 피톤치드 노천탕,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니 그야말로 극락이자 천당이다. 노천탕은 절반은 지붕이 있고 나머지는 텅 빈 한데다. 지붕이 뻥 뚫린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머리와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를 맞으며 앉아있으니 재미있다는 기분이 든다. 건식과 습식 사우나를 들락거리고, 온탕과 열탕 그리고 고온탕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온천욕을 즐겼더니 기운이 쑥 빠지는 느낌이다. 온천을 나와 비가 개려는 동해안을 달려서 숙소인 ‘리프레시 펜션’으로 돌아간다. 으스름 저녁에 이르는 시각에 파랗게 파랗게 물든 초목이 세상에 이토록 멋지고 아름다울 줄이야.
돌아가는 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고 살며시 귀를 기울이니 밤새 비가 그치고 산에는 물안개가 가득하다.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흠뻑 물을 먹은 길바닥이 촉촉이 젖어있다. 짐을 정리하여 자동차에 싣고 숙소를 나와 강릉으로 간다. 얼마 전 화마가 핥기고 간 경포호수 주변의 숲에는 처참한 모습의 자연이 신음하고 있다. 조금은 착잡한 마음을 안고 경포해변을 찾으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거친 파도가 성이 난 듯 커다란 울음 같은 굉음을 내뱉는다. 흠뻑 젖은 백사장 모래를 만지는 손주들은 정말로 동심이다. 바다 가운데 외로운 작은 바위섬에 부딪히는 파도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하늘에는 물안개가 짙게 끼여서 수평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경포해변을 나와 온 가족이 자전거 마차를 타고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경포호수를 한 바퀴 돈다. 손주들 기분도 풀리고 이제는 집으로 떠나야 할 순간이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손꼽아 기다리는 게 우리 부부의 소망이다. 구김살 없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는 손녀와 손자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다. 여행길에 부모를 초대해주는 자식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3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