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965년 봄이었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이 체결되던 바로 그해였습니다.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가 받은 인상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길거리에는 흙먼지가 날렸고 아스팔트 도로보다 비포장 흙길이 훨씬 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2년이 지났음에도 도심 곳곳에 허물어진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 남짓, 아프리카 가나보다도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동료들 사이에서 한국은 이렇게 불렸습니다. "아무리 도와줘도 스스로 일어서지 못할 나라." 다나카 자신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 보게 된 풍경은 전혀 다른 나라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전국을 잇고 있었고 포항에는 세계가 인정하는 거대한 철강 공장이 연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울산 바닷가에서는 세계 최대급 유조선이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고 서울 도심에는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1965년에 그 흙먼지 날리던 나라가 맞는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2026년, 그 나라의 반도체 기업들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부품을 전 세계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한 기업이 전 세계 인공지능 서버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의 절반 이상을 만들어냅니다. NVIDIA의 그래픽 처리 장치 안에 들어가는 메모리도 한국산입니다. OpenAI의 ChatGPT가 대답을 내놓을 때마다 그 연산의 핵심을 한국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나카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적의 씨앗이 어디서 뿌려졌는지를. 그것은 경부고속도로만도 아니었고, 한국 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훨씬 더 은밀하고 훨씬 더 결정적이었던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다나카는 만년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나는 한국에 대해 틀렸다. 일본도 틀렸다. 미국도 틀렸다. 세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그들은 해냈다. 이 기록은 내가 직접 목격했던 그 비밀을 세상에 남기는 고백이다."
빗소리가 조용히 서재를 가득 채웠습니다.
1965년 6월 22일, 도쿄 일본 총리 관저의 한 회의실에서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한일 기본 조약 그리고 대일 청구권 협정. 식민지배 36년에 대한 한국의 공식적인 청산이 이루어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의 분위기는 묘하게 엇갈렸습니다. 일본 측 외교관들은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의 자금으로 36년의 빚을 정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받아서 뭐라 하겠어요. 먹고 사는 데 쓰다가 다 없어지겠지."
신참 외교관 다나카 겐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조인식 뒤풀이 자리에서 선배 외교관이 건넨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이걸로 한국 문제는 한 세대는 조용해질 거야. 저 돈 다 쓰고 나면 또 와서 손 내밀겠지."
다나카는 그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국 국내 사정은 더 복잡했습니다. 서울 거리에는 협정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굴욕 외교'라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독립운동의 피 값이 고작 5억 달러냐는 분노였습니다. 야당은 협정 무효를 외쳤고 지식인들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고 박정희를 맹비난했습니다.
박정희는 그 모든 비판을 침묵으로 견뎠습니다. 그리고 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용히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청와대 경제 참모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결정이었습니다. 세계은행도, 미국 국무부도, 심지어 협정을 체결한 일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이었습니다. 제철소를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변변한 철강 공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술도 없었고 인력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습니다. 세계은행은 한국의 제철소 건립 타당성 조사를 의뢰받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은 철강 산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투자 대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은행은 차관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일본 철강 업계의 반응은 더 노골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철 업계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제철소를 짓겠다고? 우리도 수십 년 걸린 일인데 지어 봤자 고철 덩어리 될 거야."
그게 일본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었습니다. 다나카도 당시 외무성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청구권 자금의 제철소 투자 계획은 현실성이 희박하며 한국 정부의 무리한 욕심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박정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구권 자금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이미 마음속에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참모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돈을 먹는 데 쓰면 한 번 먹고 끝이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면 그 공장이 영원히 돈을 만들어 낸다."
철강은 모든 산업의 쌀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 배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 건물을 세우려면 철이 필요합니다. 박정희는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이 진짜 산업 국가가 되려면 제일 먼저 철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것이 모래 위의 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포항을 선택했습니다. 바다와 인접한 입지, 원료 수입과 제품 수출에 유리한 항구 조건. 박정희는 이미 지형을 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공장 하나를 짓겠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국 산업화의 심장부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 우리는 박정희가 단순히 돈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아니라 나라의 구조를 설계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5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이 포항 한 곳에 집중됐습니다.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했고 전문가들은 실패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단이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온 세상이 확인하게 됩니다.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포항 영일만 바닷가, 갈대밭과 모래사장밖에 없던 황량한 해변에서 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습니다. 단상에 선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습니다. 축제 분위기라기보다는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의 얼굴에 가까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은 이미 차관을 거부했고 당초 협력하기로 했던 서방 철강 기업들은 하나둘 손을 떼고 있었습니다. 자금도 빠듯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수근댔습니다. "저 나라 망한다."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카드를 꺼냈습니다. 일본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공식 외교 채널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하고 은밀한 방식이었습니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박태준은 일본 제철 업계의 퇴직 기술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이미 현장 경험을 쌓은 숙련 기술자들, 정년퇴직을 앞두었거나 이미 퇴직한 엔지니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제안은 단순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제철소를 함께 지어달라."
처음에는 거절이 많았습니다.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이었고 한국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박태준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설득하고 조건을 높이고 다시 찾아갔습니다. 결국 수십 명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포항행을 결심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이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당시 그는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상부로부터 이상한 보고를 접했습니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포항 공사 현장에 다수 투입되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직접 현장을 확인하러 포항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목격한 장면은 충격이었습니다. 공사 현장 곳곳에서 일본인 엔지니어들이 언어가 달랐지만 손짓발짓으로, 때로는 쪼그려 앉아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기술을 전수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기술자들은 메모지가 부족하면 손바닥에까지 받아적었습니다.
다나카는 그 장면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경쟁심도 아니었고 적대감도 아니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싸워온(쌓아온) 기술이 바로 코앞에서 다른 나라의 것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