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통화 루블의 '디지털화' 시범 사업이 15일 시작된다.
올가 스코로보가토바 러시아 중앙은행 수석 부총재는 "중앙은행이 오는 15일부터 시중은행 13곳과 11개 지역의 30개 기업, 개인 600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루블'화의 시범 사업을 실시한다"고 10일 공식 발표했다. 그녀는 "이번 시범 사업은 중앙은행이 주도하는 '디지털 통화'(CBDC)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며 “QR 코드를 통해 은행과 고객의 디지털 지갑을 열거나 닫고, 개인 간 송금과 지불 시스템 등을 테스트하고 보완한 뒤 기업과 개인의 참가 규모를 확대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중앙은행/사진출처:위키피디아
사업은 구체적으로 △디지털 지갑의 생성 △디지털 지갑 간의 현금 이체 △디지털 루블의 P2C 이체 △자동 결제 청구 △QR코드 결제 등을 중점 테스트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오는 2025년 디지털 루블의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시범 사업에는 모스크바 지하철도 참여한다. 모스크바시 측은 "지하철용의 트로이카 카드와 월렛 티켓의 사용을 테스트할 것"이라며 "그 결과에 따라 디지털 루블로 다른 교통수단 이용 가능성까지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아파트 관리비나 가스 대금 등 공용 서비스 요금을 디지털 루블로 자동 납부하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디지털 루블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디지털 루블 도입 및 전자 플랫폼 구축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에 앞서 중앙은행은 지난 2020년 10월 디지털 루블 프로젝트를 발표했고, CBDC 플랫폼의 프로토타입은 지난 2021년 12월 완성됐다. 그러나 관련 법안은 지난해 말에야 러시아 의회에 제출됐고, 진통 끝에 지난 6월 채택됐다.
◇ 디지털 루블이란
디지털 루블은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지불, 다른 은행 계정으로의 자금 이체, 금융 상품 및 자산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루블 코인'(전자 코드)이다.
현지 매체 가제타루(gazeta.ru)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은행 측은 11일 "지금까지 직접 가지고 쓴 현금과 비현금(은행 예금, 혹은 카드로 쓸 수 있는 한도) 외에 세 번째 화폐로 '디지털 루블'이 발행된다"며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디지털 코드' 형태로 중앙은행의 플랫폼에 저장되며, 스마트폰 앱이나 컴퓨터 웹을 통해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개인 또는 기업(법인)은 중앙은행의 플랫폼에서 디지털 루블 계정 하나를 무료로 개설할 수 있다.
디지털 루블은 지금까지 투자 대상으로 인기를 끈 비트코인 등 다양한 '암호화폐'(코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독점적으로 발행하고, 그 가치를 금과 외환 보유고로 보장하며, 현금 루블화의 가치와 똑같게 유지된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현금이나 비현금, 또는 디지털 중 어떤 형태의 루블을 사용할 것인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다고 강조한 이유다.
실제로 디지털 루블을 자신의 은행 계좌로 이체한 뒤 언제든지 은행 창구나 ATM기기에서 현금으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루블로 저축해 이자를 받거나 대출은 불가능하다. 순수하게 상품 결제나 자금 이체에만 사용할 수 있다. 상속은 가능하다.
디지털 루블의 로고/사진출처:러시아 중앙은행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3일 디지털 루블의 로고를 공개됐다.
가제타루에 따르면 디지털 루블의 로고는 붉은 색 바탕에 원과 루블을 흰색으로 새겨넣은 모양이다. 원은 동전을 뜻한다.
◇디지털 루블화 발행은 왜?
러시아 중앙은행은 상품및 서비스의 결제 비용을 줄이고, 국내 경제의 경쟁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디지털 루블'을 발행한다고 발표했다.
현지 유력 경제지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엘비라 나비울라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 4월 의회(국가두마)에서 가진 디지털 루블 발행 설명회에서 "디지털 루블의 자금 이체 속도는 최근의 그 어떤 이체 시스템보다 최소 3배 이상 높을 것"이라며 "디지털 루블은 접근이 어려운 오지에 대한 금융 서비스가 가능하고, 러시아의 대외 지불 인프라 개발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개인간 자금 이체는 무료이고, 충전 한도는 월 30만 루블"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받은 디지털 루블은 제한없이 무료 이체가 가능하지만, 기업은 거래 금액의 최대 0.3%를 수수료로 내야 한다"고 밝혔다.
중앙은행은 디지털 루블의 발행을 주로 실생활의 편의 제고에 맞췄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국에 대한 서방의 금융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대세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보복 조치로 러시아의 금융권을 국제 달러결제망(스위프트, SWIFT)에서 축출했는데, 디지털 통화를 통해 이를 피해가겠다는 것이다. 디지털 화폐로는 SWIFT를 통하지 않더라도 다른 국가와 직접 결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러시아 중앙은행 총재단. 가운데가 나비울리나 총재/사진출처:유튜브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스코로보가토바 부총재도 지난 7월 말 “디지털 루블 거래의 실제적인 이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면서도 "최소한 은행을 통한 해외 경제 활동 및 결제와 관련된 문제를 디지털 루블은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녀는 "러시아 영토에서 우호국가가 구매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대금 지불 관련 문제(SWIFT 문제/편집자)를 회피할 수 있고, 러시아 기업과 외국 기업 간의 결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니콜라이 주라블레프 러시아 상원 부의장도 “현재와 같은 서방의 대러 금융제재 하에서는 외국 파트너와의 무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독립적 결제 수단과 금융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디지털 루블 발행의 부대 효과는?
결제의 편의성과 서방의 금융 제재 회피라는 장점 외에도 디지털 루블이 갖는 부대효과도 적지 않다.
국영 리야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디지털 루블은 거래의 투명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특히 예산의 유용(流用)이나 사기 거래를 막을 수도 있다. 한 투자회사(БКС Мир инвестиций)의 펀드 전문가 예브게니 칼랴노프는 "디지털 루블은 예산의 오용(誤用)을 막고, 뇌물 및 부패가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 연방 검찰청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1개월 동안 국가의 부패로 인한 피해는 485억 루블에 달했다. 또 러시아의 금융거래 혹은 계좌에서 돈을 빼돌린 건수는 줄었지만, 금액은 오히려 늘어 총 142억 루블에 이른다.
실생활에서도 교과서 대금으로 준 돈을 자식들이 술이나 담배를 사는 데 쓸 수 없게 된다. 또 도박과 같은 금지된 거래에도 돈을 사용할 수가 없다. 한 전문가는 디지털 루블로 지불 계약을 체결하면 자금의 오남용을 최대 40%까지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래가 투명해지는 만큼, 개인 정보 유출이라는 문제점도 우려된다. 지난 1년간 러시아 금융 부문의 기업 데이타 유출 건수는 지난 1년간 1.7배 증가했다.
◇ 러시아 국민의 반응
하지만, 디지털 루블은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다.
현지 매체 rbc에 따르면 러시아 여론조사 기관 브찌옴(VTsIOM)은 시범 사업의 시작을 앞둔 지난 9일 "디지털 루블은 고소득 러시아인에게 더 흥미로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약 70%는 이미 디지털 루블의 도입에 관해 알고 있었으나 30%는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디지털 루블을 사용하겠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자신의 소득을 평균 이상으로 평가한 계층에서는 42%, 평균 이하를 선택한 계층에서는 21%가 나왔다. 또 고등교육을 받은 응답자의 36%가 디지털 루블에 관심을 보였다.
또다른 여론조사(회계법인 Актион Бухгалтерия)에 따르면 러시아 기업의 3분의 2는 디지털 루블의 이점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법인 응답자 10명 중 1명만이 새로운 형태의 돈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응답자의 4분의 1 이상이 디지털 루블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