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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려움의 끝
堂井 김장수
◆프롤로그
삼안(森安) 정동혁 박사. 1992년 3월 4일생. 그는 미국 MIT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는 대학 교수로 취직하여 미국에서 컴퓨터공학을 연구했다. 가끔 조국이 보고 싶을 때는 일기를 씀으로써 그리움을 이겨 나갔다. 아침은 빵과 우유를 먹고, 점심은 초콜릿을, 저녁은 아내가 해 주는 스파게티를 먹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 나간다. 하지만 동혁은 그 그리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동안 한국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 그리움은 어쩌면 동혁에게 삶의 힘인지도 모른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동혁은 생각한다. 조국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통일 한국의 좋은 점들을 두루 느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연구에 바빠서 갈 수 없는 조국. 언젠가 동혁은 통일된 한국에서 한국의 정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가는 보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1992년 3뤌 4일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에서 태어난 그는 아기(4개월) 때 부친을 여의었다. 어린 시절에 IMF를 겪어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양육을 해 주시고,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외갓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무렵까지도 한글을 떼지 못하여서 받아쓰기를 늘 틀리고 방과 후에는 나머지 공부를 했다. 하지만 어린 동혁은 드라마를 전부터 좋아했다. 그 시절에 드라마를 보며 선망의 대상으로 삼은 학교는 다름 아닌 KAIST, 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었다.
‘나도 꼭 저런 학교에 다녀야지.’
어린 시절의 동혁은 과학자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누구나 과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과학자가 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부러웠을 따름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중고등학교 시절
중학교 때의 동혁은 39명 중에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무렵은 학교 업무를 최신으로 전산화하던 시기였는데 ‘컴퓨터 도우미’라는 직책으로 전산실에서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면서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됐다. 인터넷이나 게임보다는 컴퓨터를 조립하고 수리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며 재미를 느끼게 됐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영어 매뉴얼을 가지고 고군분투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진로를 선택하게 한 밑거름이 되어준 것이었다.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어머니께서 직장에 다니시느라 동혁을 돌보아 주실 시간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혁아, 학교 등록금은 엄마가 다 낼 테니까 학교 그만두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렴.”
이 말은 동혁이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도 도중에 자퇴하지 않는 밑거름이 되었다. 동혁은 어릴 적부터 ‘집단’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서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성적을 열거하자면, 처음에는 동혁의 성적은 중간 정도였지만, 중3 때에는 상위권으로 올랐고, 전산 분야의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전교 1등을 했다. 동혁은 졸업하자마자 취직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집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진학했다. 교복 비용은 근처 자동차 정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당했다. 그 이유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어머니께 짐이 되기 싫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도 사장, 직원 할 것 없이 그런 동혁을 아껴 주었다. 그 덕분에 아무런 장애나 단점이 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2013년도 수능에서는 만점까지 기록했다. 이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동혁에게,
“정말로 축하한다, 동혁아. 이제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너는 잘 해나갈 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주변 이웃들도 축하해 주었다. 자동차 정비소 사장님, 직원들, 학교 선생님, 친구들, 교육청 선생님들, 시청 선생님들, 할아버지, 할머니, 외갓집 친척들도 축하하러 와 주셨다. 얼마 후인 2013년에 대학에 진학했다.
◆KAIST에 입학하다
세아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동혁은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학부에서 배우지 못했던 부분들을 더 세부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던 KAIST에서는 현실적으로 최상의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학교인데다가 등록금, 군 입대 등 자신에게 큰 부담이었던 문제들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서 스스로 지원했다. 하지만 KAIST 랩에 대해 조언해 줄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어서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관심 있는 학과와 연구실을 일일이 조사했다.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탐구를 하면서도 실용적인 것과 동떨어지지 않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 신호, 영상, 음성, 등의 분야를 연구하는 전기 및 전자공학과의 수암(修菴) 장형윤 교수님 랩 홈페이지에 들어가 첫 화면을 본 순간,
‘아, 내가 찾던 곳이구나.’
하며 생각했다. 이 랩에서 동혁은 자신을 학생으로 받아준 것이 자신의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얼마 후 장형윤 교수한테 연락이 왔다. 기뻐서 달려간 동혁. 동혁을 반긴 사람은 역시 장형윤 교수였다. 장 교수는 동혁에게,
“이렇게 대학에 졸업하고 이렇게 만나 보는군. 그래, 자네는 원래 무엇을 했나?”“저는 자동차 정비공 아르바이트를 하는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입니다. 하지만 수능에서 만점을 받고 세아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땄습니다. 저는 KAIST에 입학하고 싶습니다. 한국 과학을 빛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동혁의 정성의 감동한 장 교수. 얼마 후 결단에 찬 장 교수의 음성.
“자네의 의욕에 감탄했네. 길을 찾아보겠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제 KAIST에 입학하는 거죠?”
“그럼. 입학할 수 있지, 대신 자네, 열심히 할 거지?”
“물론이죠!”
그 때 동혁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동혁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잘 하고 싶다는 성취욕이 출세의 문을 활짝 연 것이다.
2017년에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7년여의 재학기간(석사 2년, 박사 5년) 동안 교내 연구 실적평가 최우수상, 삼성 휴먼테크 논문대상 대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어릴 때 동경했던 곳에서 공부하게 된 경험과 기쁨을 떠올리면서 지금 하는 것이 얼마나 동혁에게 잘 맞고 재미있는 일인지를 동혁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엔 그것을 이겨내고, 연구 후 성과가 나오고 그것을 해외 학회에서 발표하고 인정받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연구를 좋아하게 되고 즐기게 된 것이었다.
◆사회의 일원이 되어
KAIST에 있는 동안 해외 학회를 다니면서 기업과 협업한 논문 사례들을 보게 된 동혁은 같은 연구라고 해도 대학과 기업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그런 협업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해서 기업이 막강한 자본력과 리소스를 투자해 성과를 내고 있어서 기업과 함께 연구하면 더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 동혁. 장형윤 교수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해외 학회에 가서 자네가 눈여겨본 연구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문의해 보게.”
라고 조언하셨다. 그래서 동혁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해외 연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그들을 만나 여러 가지 연구를 한 결과, 2019년에 중국 베이징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지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처음 정해진 기간은 3개월이었는데, 늘 밤새 일하며 연구 논문 한 편을 완성했다. 그 때 쓴 논문이 삼성 휴먼테크 논문대상에서 금상을 받게 됐고, 동혁의 노력을 신뢰해 준 멘토들이 인턴십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다시 1년으로 연장을 해 주었다. 그 때의 경험이 2023년에는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인턴십 선발로도 이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 아시아 연구소 펠로우십(Microsoft Research Asia Fellowship:마이크로소프트가 아시아 지역의 우수한 박사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선발하는 장학생)’이라고, 국내에서 동혁이 유일했다.
◆박사 학위 취득, 그리고 결혼
박사 과정이 끝날 무렵에 동혁은 자신의 연구와 관련된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많은 이력서를 보냈고, 인터뷰도 여러 번 했지만 채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실용 기술이 아닌 수학적인 알고리즘을 근본적으로 연구하는 동혁의 논문 분야가 최신 트렌드에 맞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그래서 그는 기업 대신 대학의 박사 후 연구과정을 통해 조금 더 커리어를 쌓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다시 수많은 학교에 지원서를 보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90통 가까이 제출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연락이 오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인터뷰를 몇 군데 했지만 최종 합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학회에서 몇 번 얼굴을 뵈었던 것이 인연의 전부인 동광대 조창세 교수님이 동혁의 이력서를 보고는 MIT의 한 연구실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채용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금의 지도교수님은 본인이 박사과정이 다뤘던 원론적인 주제를 최신 트렌드에 접목해 응용하는 연구를 하시는 분이었다. 동혁의 석·박사 논문 역시 실용기술의 근간이 되는 근본적인 연구였는데 그 가치를 알아봐 준 곳이 MIT였다는 것이 동혁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2024년에 동혁은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혁의 동기들은 모두 군 제대 후 취직을 했는데, 아직까지도 취준생으로 사는 동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혁은 그들보다 큰 출세를 했기에 기뻤다. 장형윤 교수님이 축하를 해 주었다.
“정 박사, 축하하네!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어!”
“장 교수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과학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자네 MIT에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면서? 정말 축하하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동혁은 원래 군 장학생으로 직업군인이 될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어릴 적의 꿈이 있었기에 과학자를 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세아대학교와 KAIST를 거치는 동안 수석의 성적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공부에 재미를 두었고, 얼마 후에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해 주는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어느덧 영어와 중국어, 독일어에도 재미를 느껴 심지어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KAIST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졸업 후 같이 연구하던 여자 연구원 김문희와 결혼식을 치렀다. 김문희의 나이는 28세. 동혁보다 4살 아래였다. 주례는 동광대 조창세 교수님이 서 주셨다. 함께 참석해 온 장형윤 교수님과 친척들,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 심지어 자동차 정비소 사장님과 직원들이 참석해 주었다. 동혁은 이제 결혼하여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된 것이다.
◆동혁의 연구 분야
동혁의 연구 분야는 컴퓨터비전과 머신러닝이었다. 컴퓨터비전은 인공지능의 한 분야로 카메라, 스캐너 등의 시각(vision) 매체를 통해 입력한 영상을 컴퓨터가 인지하고 분석하게 하는 연구였다. 무인자동차나 로봇에 눈의 기능을 탑재하고 컴퓨터가 본 영상 속에서 보행자를 감지하고 신호등이나 표지판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실용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또 일반 카메라를 사용해 촬영한 영상을 3D 모션으로 캡처해서 변환시키는 기술도 상용화 단계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 뒤 동혁은 박사 과정 후 연구 과정을 끝내면 미국의 IT기업에서 경험을 쌓고 싶어 했다. 기계가 인간의 일반적인 상식 수준까지 학습할 수 있는 핵심 엔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예를 들어, 탁자 모퉁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물 컵을 본 로봇이 사람의 명령 없이 스스로 판단해서 물 컵을 안전한 자리로 이동하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오며 경험한 물리 현상이나 상식을 로봇에게 내재화시켜 현실 세계의 변수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단계까지 연구해보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충분한 경력을 쌓은 후엔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내 기업의 연구 환경을 글로벌하게 바꾸는 일에도 일조하고, 마지막으로는 교수직에 도전을 꿈꾸었다. 동혁은 어린 시절에 자신을 이끌어주신 어머니 덕분에 아무 장애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동혁은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타인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그 때는 누군가에게 경험을 공유하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동혁의 소망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동혁은 누군가의 고장난 컴퓨터가 있으면 고쳐 주기도 했고 아내와 자녀들의 컴퓨터도 고쳐 주곤 했다.
◆어느덧 두 아들 출생, 그리고 노벨상
2027년 2월 19일에는 장남 정성연이, 2029년 5월 1일에는 차남 정흥연이 태어났다. 장남 정성연은 커서 미국 예일대학 교수가 되었고, 차남 정흥연은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되었다. 두 아들은 각각 컴퓨터와 기계공학에 재능이 있었다. 미국 대학을 졸업하여 과학 연구를 하더니, 아버지의 연구를 널리 알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어느덧 동혁은 두 아들의 재능에 감탄하여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얼마 후 2030년 10월에 동혁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컴퓨터비전과 머신러닝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2054년에 동혁은 드디어 통일된 한국에 돌아왔다. 통일 한국은 철저히 발전되어 있어 가는 곳마다 동혁 가족을 환영했다. 자신이 살던 서울 회현동으로 돌아오니,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어머니, 제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어머니 덕분입니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네요….’
자신이 성공한 것이 어머니 덕분이었다는 것을 안 동혁. 그 후 자동차 정비소 터를 찾아가 보니, 사장님은 돌아가시고,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터에는 빌라가 세워졌다고 한다.
◆에필로그
가는 곳마다 강연을 하며 동혁은 보람을 느꼈다. 2054년 3월 7일, 62세의 동혁은 미국에서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훈장 시상식에서 갑자기 심장마비가 온 동혁. 의료진들이 동혁을 응급처치로 치료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삼안(森安) 정동혁. 그는 비록 허망하게 갔지만, 그의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시신은 한국으로 운구된 후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 후 묘비가 세워졌는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하지만 그 업적은 영원히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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