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쿠퍼(Gary Cooper, 1901년~1961년)

미국 몬태나 주 헬레나 출신이다. 본명은 프랭크 제임스 쿠퍼(Frank James Cooper). 전성기 시절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미남배우였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연기도 호평받은 명배우이다. 또한 존 웨인과 함께 서부극을 상징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몇 년간 학교에 다녔으며, 대학은 아이오와에서 나왔다. 비슷한 시기였던 1925년에 지인의 권고로 이름을 게리(Gary)로 바꿨다. 졸업 후에는 잠시 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관두고 이후 몇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1927년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무성 영화 《날개》(Wings)에 화이트 생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때 190이 넘는 우월한 기럭지와 잘생긴 얼굴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1929년작 《버지니아》에서 인상적인 서부극 연기를 선보였으며 1930년작 《모로코》에서는 세계적인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출연해 스타덤에 오른다. 한때 쿠퍼는 2년 연속 가장 수입이 많은 스타였고 세금도 가장 많이 냈다.
작품
쿠퍼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역 다 합쳐서 115개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IMDb 기준) 대표작으로는 《요크 상사》와 《하이 눈》,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특히 《요크 상사》와 《하이 눈》은 쿠퍼에게 2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겨준다.
그 이외에도 《Mr. 디즈씨, 도시에 가다》, 《양키스의 자존심》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 지명되기도 했으나, 아쉽게 후보에만 데만 그쳤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도 처음에는 게리 쿠퍼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본을 본 쿠퍼가 단칼에 거절했고, 이후 버틀러 역에 동갑내기 미남 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낙점되자 쿠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좆망 할 것이고, 클라크 게이블은 개좆망 할 것이다." 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현실은...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작품 《해외 특파원》과 《사보타주》에 쿠퍼가 출연하길 원했으나, 이 역시 쿠퍼가 거절했다. 허나 이후 개봉된 해외 특파원을 보고 쿠퍼는 "출연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스캔들
쿠퍼는 1933년 샌드라 쇼와 결혼하고 외동딸 마리아 쿠퍼를 두었다. 그러나 쿠퍼는 결혼 전이나 후나 시도 때도 없이 염문설을 퍼뜨려댔으며, 개중에는 동성애자라는 설도 있었다. 쿠퍼가 20대 때 동성애자 배우 앤더슨 롤러(Anderson Lawler)와 수개월간 연인 관계를 맺었고 동거까지 했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진 작가였던 세실 비튼과 연인 관계였다느니, 심지어는 절친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의 열애설도 있었다.
그러나 동성애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여성과의 염문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것이 바로 여배우 퍼트리샤 닐과의 관계였다. 퍼트리샤 닐과는 1949년 영화 《마천루》에서 같이 공연한 것을 계기로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데 끝내 쿠퍼의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러나 아내인 쇼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끝끝내 이혼에는 응하지 않았고 결국 닐은 낙태를 하게 된다.
이 일로 쿠퍼와 쇼는 잠시 별거했고, 닐은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대신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고, 그녀의 여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건 두말 할 나위 없는 사실.
쿠퍼도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색마 기질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듯 보였으나 1957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밀렌 드몽조와 또 한 번 염문설을 터뜨리며 다시금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런 그의 호색한 기질은 그의 딸인 마리아 쿠퍼가 대놓고 깠을 정도.
참고로 쿠퍼는 여성을 유혹하는데 단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이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한다. 이는 짤방으로도 만들어져 있으며 요지는, 정말 저 세마디 말로 유혹이 가능하다기 보다는 그만큼 경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쿠퍼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남에 키까지 컸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알아두면 좋은 얘기인데, 본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옆에서 그를 지켜봤던 빌리 와일더 감독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이다.
쿠퍼는 1960년 4월 자신의 전립선에 암이 생겼음을 알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폐와 뼈로 전이된 상황이었다. 이후 쿠퍼는 요양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1961년 5월 13일 쿠퍼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
쿠퍼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은 절친한 친구이자 배우였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쿠퍼를 대신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던 중 "쿠퍼가 위중한 상태이다." 라고 울먹이면서 알려졌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사석에서 쿠퍼를 가리켜 "제가 만약 대통령 선거를 치룰 때, 그 친구가 나왔다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긴 친구는 생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웃음은 또 뭐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아마 여자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얻었겠죠."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모 정치인은 "저 사람 너무 잘생긴 거 아냐? 이러다 정치인들 인기 다 떨어지겠군." 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적었듯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시나리오 제조기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 작품에서 구축된 것이 많으며, 결정적으로 《요크 상사》에 출연해 원조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대로 각인되었다. 1차대전에 참전했고 공화당 지지자였다가 민주당으로 바꿨다.
좌우간 당시 미국인들이 얼마나 게리 쿠퍼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는지는 Puttin' On The Ritz의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다.
Dressed up like a million dollar trouper
백만장자 배우가 된 것처럼 차려입고
Trying hard to look like Gary Cooper (Super Duper)
게리 쿠퍼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게리 쿠퍼 덕후로 유명하다. 대학 시절 쿠퍼가 세상을 떠나자 추모하기 위해 결석했다고.

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생전에 자동차 만지기를 좋아했고 세차도 자신이 직접 정성들여 손수할만큼 차에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1939년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자 당시 최고급 차인 두센버그를 사서 라이프지에게 자랑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