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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신앙 – 대 그레고리오 1] 세상의 고통 앞에서
위기 속 낯선 세상에서 던지는 질문
코로나19 때문에 세상이 온통 비상사태에 놓인 지도 1년 가까이 되어 갑니다. 학교 수업도 멈추고 미사마저 방송을 통해서 드리는 상황이 되었지요. 작년 가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일들이 이제는 ‘뉴노멀’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이 바이러스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논의도 활발합니다. 인간이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면서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들어왔으며, 운송 수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세상이라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유난히 길었던 올해의 장마도, 위력이 더 커진 태풍도 이처럼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그러진 때문이며 이는 코로나19보다 더 위협적인 ‘기후 위기’를 초대할 것이라는 경고음도 들립니다. 지금껏 살아온 세상이 더는 기능하지 않다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신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라는 촉구
서기 590년 겨울, 대림 제2주일에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임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대 그레고리오)는 루카 복음서 21장 25절부터 33절까지의 내용을 신자들에게 강론합니다. 이것이 기록되어 전해지는 「복음서 강해(40편)」(Homiliae XL in evangelia) 강론 1번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구원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시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지 않도록 하시려고 이제 쇠퇴해 가는 세상을 덮칠 악에 대해 미리 선포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채찍질이 종말이 머지않았음을 예언했는지를 가르치시고, 우리가 평온할 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라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곧 다가올 악들의 무게 아래서 말입니다.
형제들이여, 실상 우리가 방금 들은 복음 구절에 앞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루카 21,10). 몇 가지 다른 말을 덧붙이신 뒤에 우리가 들은 말씀으로 맺으십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25절).
실상 이 모든 예언 중 일부는 이미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나머지도 머지않은 앞날에 이루어지리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온 땅을 덮치는 두려움 속에서, 복음서가 말한 이상으로 많은 민족들이 민족들을 거슬러 일어나고 있음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다른 쪽에서는 지진이 많은 도시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우리는 끝날 줄 모르는 전염병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의 특별한 현상은 아직 분명히 보이지 않았지만 대기의 변화는 그것이 머지않았음을 짐작게 합니다.
이탈리아가 야만족들의 칼 아래 놓이기 전에 우리는, 하늘로부터 불덩이들이 마치 이후 사람들이 흘린 생생한 피와도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와 거센 파도의 표징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많은 예언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그 일들도 일어날 것임은 분명합니다. 벌어진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일어나리라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복음서 강해」, I,1).
대 그레고리오는 그해 9월 3일 착좌한 참이었습니다. 로마 시장이라는 지위에까지 올랐던 그는 아버지를 여읜 뒤 세상을 버리고, 살던 집을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교회의 부름으로 부제가 되었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왔지요.
589년 큰 홍수가 로마를 덮쳐 시민들의 양식을 보관하고 있던 식량 창고가 침수되어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페스트가 창궐하여 펠라지오 2세 교황도 전염병의 희생자가 됩니다.
하늘나라를 맞이하는 예언자의 준비
절망에 빠진 시민들이 대 그레고리오의 거처에 와서 “그레고리오 교황!”을 연호하자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직무를 받아들이게 된 형편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강론에서, 당시의 파국적 상황이 그들에게 고통이지만 이는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는 데 따르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타락한 이들을 향한 것이므로, 뽑힌 이들을 위로하고자 말씀은 바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진리이신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뽑힌 이들이 경계하도록 하십니다. ‘세상에 악이 늘어나고 자연의 무질서한 힘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퍼질 때 머리를 들어라. 다시 말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라. 너희가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 세상이 끝나가고 너희가 찾던 구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머리’라는 말은 곧잘, 마음을 가리킵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따라 움직이듯이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든다 함은 마음을 하늘나라의 기쁨을 향해 들어 올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들이 끝나 가고 그들이 사랑하던 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쁨에 대한 소식을 지녔으므로 온 힘을 기울여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빠른 걸음으로 그 여정을 마치고, 더 빠른 길로 거기 이르기를 바라야 합니다.
세상 삶을 괴롭히는 번민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만한 슬픔과 어려움이 우리를 괴롭힙니까. 끝나고야 말 삶이 여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형제들이여,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며 힘든 길을 걷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좋은 비유로 세상이 대단하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나무들이 열매를 통해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듯이 세상이 황폐해짐으로써 이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봅니다. 이는 세상의 열매가 바로 그 황폐임을 분명히 합니다. 자라지만 그것은 사라지기 위함입니다. 열매를 맺지만, 생명을 얻은 것을 파국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반면 하느님 나라는 여름에 비견됩니다. 우리 슬픔의 안개가 걷히고 생명의 날들이 영원한 태양의 광채 속에 빛나는 때가 그때이기 때문입니다(「복음서 강해」, I,3).
대 그레고리오는 현재의 파국과도 같은 어려움이 새 세상을 낳는 산고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이민족의 침입, 자연재해와 페스트를 겪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예언자의 말입니다. 대 그레고리오는 교황인 자신의 직무를 저 예언자의 직무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예레 1,10).
[교부들의 신앙 –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더불어 살아가는 삶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 이후 교우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성전에 홀로 머물러 봅니다. 이곳을 가득 메우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던 교우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중에서)라는 시구가 겹쳐지면서, 희로애락이 서린 각자의 삶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코로나가 창궐해서 제도적 ‘비대면’이 되고 나서야 사람 얼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니, 사람의 깨달음은 어찌 이리 더딘가.”(김훈, ‘얼굴’, 한겨레신문, 2020년 5월 17일 자)라는 뉘우침처럼, 팬데믹(전염병 세계적 유행) 시대의 거리 두기와 비대면 접촉이라는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웃의 소중함을 깨달아 갑니다.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
신학생 시절 아가페 시간 끝 무렵에 늘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김남주 시인의 시에 안치환 씨가 노래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곡입니다. 요즘 들어 이 노래가 자꾸 흥얼거려지는 걸 보니,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사람 인[人] 자는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입니다.)을 다시 돌아보라는 뜻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90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De pauperum amore)이라는 작품을 통해 어려움 가운데 놓인 이웃 형제들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서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본성을 자각해서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며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상아탑에 갇히지 않은 진정한 신학자
‘신학자’(Theologos)란 별명을 지닌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상 두 번째로 열린 세계 보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의 의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카파도키아의 삼총사’인 대 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삼위일체에 관한 참된 신앙을 굳게 지켜 냈습니다. 작고 아름다운 기도문인 ‘영광송’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그레고리오는 위대한 신학자였기에, 무엇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말장난에 빠지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을 늘 뜨겁게 선포하며, 사회적 약자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으로 피조물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새겨진 그리스도의 얼굴을 읽어내는 그레고리오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오의 메시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 또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며 모든 덕목 중에서 으뜸이자 가장 위대한 계명은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합니다.
한 몸의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움직이듯이, 우리 모두도 서로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공의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결코 외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하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힘들어 하는 형제들을 두고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과 육신의 구원은 형제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가난에는 끔찍한 질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병은 또 다른 악이고, 너무나 참혹해서 온갖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많은 이는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도 쳐다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피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합니다. 자신들의 불행 때문에 거부당하고 미움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질병 자체보다 더 참혹합니다.
저는 형제의 비참함을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으며,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연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눈물로써 눈물을 없애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구이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인 여러분이 이 슬픔에 공감하리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은 여러분은 고통받는 이들의 산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자비와 은총을 받은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뱀이나 야생동물보다 못한 혐오스러운 사람처럼 취급하고 외면하겠습니까? 멸시하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시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양에게는 원기를 북돋아 주시는(에제 34,16 참조)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그런 짓은 우리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연민의 정으로 여기는 인간의 본성과도 거리가 먼 행동입니다.
그들은 고통을 겪는데 저는 자신을 위해서 부를 축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 못하면서 저만 건강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쉴 곳을 제공하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저 또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편안한 보금자리에서의 쉼을 누리겠습니다.
무리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깨 위로 십자가를 진심으로 지고서 예수님과 함께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를 얽매고 있는 지상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한 채 가난함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을 때, 우리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재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진 것을 그들과 나눌 때 우리의 소유도 의로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형제이며 공동 상속자인 여러분, 만물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주님께서는 수만 마리의 살진 양보다 빈곤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에게 행하는 우리의 자선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엎드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우리의 선한 마음을 보여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이 먼저 나서서 영원한 안식처로 우리를 안내하여 그리스도를 마주 뵙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광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아멘(「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참조).
[교부들의 신앙 – 니사의 그레고리오] 선행
현대 사회 종교의 위상
‘종교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오래된 물음을 제기한 어느 종교학자의 칼럼을 얼마 전 읽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드러난,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가진 부정적인 단면을 알려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것이 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코로나19의 확산에 종교(신천지)가 숙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극우 개신교 단체의 집회와 현장 예배 강행은 사회의 위기를 자조하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종교의 위상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칭송받는 이스라엘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험실의 괴짜 몇 명이면 된다. 과거에 죽음이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일이었다면 지금은 공학자들이 그 권한을 인수받았다.”(「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김영사, 2017, 42쪽)라며, ‘신이 된 인간’(Homo Deus, 106쪽 참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기성 종교에 대한 무용론과 더불어 본체론적 위기를 맞은 것이 오늘날 종교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과연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은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온 천지에 ‘빨간 십자가’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도배된 준(准)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밖에 없다.’는 독일의 현대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년, 「안티크리스트」 참조)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천과 행동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이 사회에 다시금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번 호에서는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선행 -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1권(De beneficentia - Vulgo de pauperibus amandis, I, 이하 「선행」 표기)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에 놓인 이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레고리오가 촉구한 실천
그리스도인들은 철학과 사색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악의 유혹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공연하게 악습에 빠진 채 술과 고기만을 멀리하고 물과 야채를 먹는 시늉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언컨대 겉으로 드러난 여러분의 금욕적인 행위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겉과 속은 같아야 합니다.
집도 없이 헐벗은 채로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근래에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대부분 전쟁의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입니다. 곳곳에서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하늘을 지붕 삼아 주랑과 골목과 모퉁이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올빼미처럼 벽의 틈새에 숨어 지내며, 형편없는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연민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식사라고는 사람들이 던져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동물들이 마시는 샘이 그들의 식수원입니다.
잔은 그들의 손바닥이며, 그들의 창고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찢어진 주머니가 전부입니다. 무릎이 그들의 식탁이며, 태양은 식탁을 밝혀 주는 전등입니다.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대자연의 산물인 강과 연못이 그들의 공중목욕탕입니다. 이 잔인하고 방랑하는 그들의 삶은 날 때 정해진 것이 아니라 가난과 시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불행한 여러분의 형제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단식을 통해 아낀 것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여러분과 그들 사이에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의 배부름과 형제의 굶주림이라는 내적 갈등을 스스로 이겨 냄으로써 선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만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놓인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과 선행을 통해 그들에게 빛과 식탁을 마련하고 포근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애정 어린 말로 위로하고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선행은 결국 우리의 생명을 지켜 줄 것입니다. 선행은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부자들의 스승이요, 좋은 간호사이자, 노인 요양 보호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들의 보물이며, 불행한 사람들의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선행은 아품을 지닌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선행을 원하십니다.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선하고 거룩하게 되고, 모든 지성을 뛰어넘어 한처음의 순결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신성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행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구구절절 우리에게 창조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느님을 닮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기쁨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차지하고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쾌락을 누리는 데에 돈을 쓰고,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부를 축적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지금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천상의 진리를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을 지닌 여러분은 선행을 통해서, 현세적인 데 현혹되지 말고, 썩어 없어질 허망한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절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쓰는 대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선행」 참조).
사랑의 선행으로 전하는 복음
코로나19와 경제적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날,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말씀을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옵니다. 비록 종교에 대한 회의와 무용론이 대두되는 지금이지만,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는 예수님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먼저 나서는 선행으로써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신을 비움으로써 영생을 얻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 곧 복음 선포일 것입니다.
[교부들의 신앙 – 니사의 고레고리오] 생명의 길
코로나19 감염증이라는 무서운 역병의 시간을 보내면서 참 많은 것이 변해 갑니다.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고 수많은 사람이, 팬데믹(전염병 세계적 유행)에서 벗어난다 해도 세상이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지금, 인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희망을 비추는 일
이 새로운 길 위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공동번역 성서」, 로마 5,3-5). 왜냐하면 “종교는 …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 주기 위해 생겨났다.”는 어느 노교수의 말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질병의 고통과 경제의 어려움 속에 내일을 걱정하며 고민하는 이웃들에게 희망이라는 생명의 길,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 335?-395년)의 작품, 「너희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2권(In illud: Quatenus uni ex his fecistis mihi fecistis)을 통해서,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모색해 보고 싶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대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년)의 동생입니다. 형을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던 그레고리오는 형의 사회적 가르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이들 형제와 더불어 ‘카파도키아 삼총사’로 알려진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us, 329-390년)와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사회적 연대 의식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2권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도 그 맥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00여 년 전 그레고리오는 다음의 복음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늘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떠올렸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36,40).
니사의 그레고리오가 전한 강론
‘이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길을 바라보며 그 길을 향해 헌신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온정이 담긴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은 특히 지금 이 순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계를 위해 몸부림치는 가난한 이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이웃은 돌보면서 우리 가운데 복음이 실현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보여 주신 일치와 단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저버린 사람들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연적 본성을 따라야 합니다.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된 불행한 이를 최소한의 연민도 없이 길가에 버려두고 온 사제와 레위 사람을 본받을 수는 없습니다(루카 10,30-36 참조). 어려움을 당한 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이런 사람들의 본을 따른다면 우리도 결코 죄로부터 결백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말이 최소한 이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말로써 그들의 상처를 덮어 주고 사랑의 노래로써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은 과연 옳습니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사랑의 실천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림과 현실이 다르듯, 말과 행동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도와야 하는 주님의 계명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다 그들을 격리시켜 놓고 먹을 것을 주었다고 그들에게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자비도 연민도 없는 그저 보여 주기에 불과합니다. 그럴듯하게 선으로 포장은 했으나 결국은 그들을 우리의 삶 밖으로 추방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시작도 끝도 모든 이에게 한가지다.”(지혜 7,6)라는 말씀처럼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게 마련이고 이 법칙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로마 11,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새겨, 겸손하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교만으로 말미암은 첫 번째 희생자가 될지도 모릅니다(「사랑해야 할 가난한 이들」 제2권 참조).
함께하는 삶으로 드러내는 복음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이웃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모습과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빠진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사랑의 나눔이라는 애덕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생명의 길이자, 하느님의 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교부들의 신앙 – 빛이신 예수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빛’을 만드시어 ‘빛과 어둠을 가르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창세 1,3-4 참조). 첫째 날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넷째 날 한 번 더, 빛과 어둠을 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1,16-18).
빛과 어둠, 그리고 식별
두 번 반복되는 ‘빛과 어둠을 가르셨다.’는 말씀을 두고 이런 묵상을 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도 빛과 어둠을 가르시기 위해 두 번이나 노력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빛과 어둠을 가르고 구별하고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또 어떠한 것을 얼마나 쉽게 빛이라고 혹은 어둠이라고 단정 짓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빛과 어둠을 가르신 분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단지 주위를 밝혀 볼 수 있게 하는 데 그치지는 않습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공간도 느끼지 못합니다. 시간 감각을 상실해서 낮인지 밤인지,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공간도 느끼지 못합니다. 더듬더듬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빛이 없으면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때 빛이 밝혀지면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넘어, 새롭게 시간과 공간이 주어집니다. 결국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선물하셨다고 불 수 있습니다.
빛이신 그분과 함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요한 20,19)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잔혹 행위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 제자들은 그들의 집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닫아걸었습니다. 어떤 빛도 그들의 감각에 와 닿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한 채 갈수록 더 큰 슬픔에 젖어 들었고, 밤의 어둠도 갈수록 더 큰 슬픔에 젖어 들었고, 밤의 어둠도 갈수록 더욱 짙게 스며들었습니다. 어떤 어둠도 그들이 느낀 슬픔과 두려움의 어둠과 견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위로와 충고의 빛으로도 그것을 옅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크리솔로고, 「설교집」, 84,2).
빛이 실현하는 쇄신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놓인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두려움에 닫았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변한 것입니다.
빛이신 분을 모셔 들임으로써 제자들은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을,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모두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참조)라는 말씀처럼, 옳게 두려워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자께서 오시어 참빛을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빛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어둠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 어둠이 그들을 눈멀게 하고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해가 눈이 병든 이들을 밝히려고 환한 광선을 내뿜듯이, 지지 않고 밤도 없으며 빛이신 영적 태양도 세상에 오시어 이루 말한 수 없는 당신의 거룩한 기적들을 통하여 신성의 눈부신 섬광을 널리 비추십니다”(오리게네스, 「요한 복음 주해 단편」, 9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21). 이때 ‘기대하였다’라는 말은 ‘기대하였지만, 그 기대가 무너졌다’는 뜻을 내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체념과 절망의 시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되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아마도 ‘아, 이쯤에서 예수님을 만났었지…. 여기서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셨지…’ 하고 기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길, 그 시간이 예수님을 채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길이었지만, 전혀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고, 새로운 시간 속을 걸었던 것입니다. 해가 있었을 때 걸었던 길은 빛 속에서도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에 돌아가는 길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죄와 무지에 눈이 먼 채 오랜 원수의 속임수와 오류에 빠져 있는 우리를’(루카 1,79 참조) 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확실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께서 보여 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존자 베다, 「복음서 강해」, 2,20).
빛을 바라보며 살아갈 이유
새로운 시간, 새로운 공간을 산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없애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생각 안에서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시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두운 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에게 등대의 불빛이 생명줄과 같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빛이요 생명줄이십니다. 빛과 어둠을 가르신 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줄을 던지시고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어둠을 뚫고 빛으로 이끄시는 분, 우리에게 살아갈 빛과 시간과 공간을 주시는 분, 그분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19.21). 빛과 어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두 번이나 빛과 어둠을 가르셨는데, 우리가 빛과 어둠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빛이시며 진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믿는 모든 이들은 빛이지만, 그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는 누구나 어둠에 감싸일 것입니다. 어둠 속에 남아 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온 빛을 믿어야만 합니다. 세상이 본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54,4).
[교부들의 신앙 - 성체성사] 세족례로 완성되는 최후의 만찬
공관 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배경은 ‘땅’입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의 시작 배경은 ‘하늘’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최후의 만찬 장면도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만 언급한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요한 13,4)라고 짧게 언급하고, 예수님의 ‘발 씻김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어갑니다. 그렇지만 요한이 최후의 만찬 내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하신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허리를 굽히시어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모습’에 주목한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당신의 자리는 바로 그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시작한 요한 복음은 이제 가장 낮은 곳, ‘제자들의 발아래’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실 준비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
요한 복음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전례에서 기념하는 두 가지 큰 사건, 곧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별개의 것이 아닌,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하나라는 점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세족례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신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허리를 굽히시고 무릎을 꿇으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례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에,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우리가 겸손해지도록 가르치시려는 뜻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신 일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겸손을 보여 주시는 것을 눈여겨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것은 기대어 앉기 전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앉은 뒤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씻어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겉옷을 벗고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소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시고, 몸소 대야에 물을 부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부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몸소 하심으로써,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면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할 게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요한 복음 강해」, 70,2).
오늘날에도 재현되는 예수님의 삶
둘이 아니라 하나인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2000년 전 단 한 번 행해진 뒤에 끝나 버린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두 사건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현되어 왔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재현됩니다. 그렇다면 세족례는 어떤 형태로 계승되었고, 우리는 어떻게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프랑수와 바리용 신부는 아직 축성되지 않은 제병을 두고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빵을 돌멩이 보시듯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빵에는 인간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빵을 손에 들기까지 씨 뿌린 사람, 밭을 간 사람의 노동이 필요했고 농기구를 만든 사람, 농약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 또한 밀을 수확한 사람들과 제빵업자들, 그들 모두의 수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을, ‘밀’이라는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 많은 이의 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진 이 빵이 제대 위로 옮겨지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으로 만드십니다. ‘인간의 것’을 ‘하느님의 것’(그리스도의 것)으로 변화시키십니다”(「믿는 기쁨 사는 기쁨 4 –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 생활성서사).
인간의 희생이 쌓이고 쌓인 이 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당신의 몸인 성체로 변화시키십니다. 나아가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것을 주시려고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세족례로 완성되는 성체성사
그렇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희생’이라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를 얻으려면 우리도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따라서 성체를 거룩하게 받아 모시지만 겸손해지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성사가 될 뿐입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겨 주려면 발 아래에 자리해야 합니다. 그 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역자요 신성 모독자, 유다처럼 구제할 길 없는 자까지 발을 씻어 주시고 당신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요한 복음 강해」, 71,1).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인은 그런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 스스로 먼저 본보기가 되심으로써 우리를 작은 빚을 진 채무자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분께서 먼저 이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71,1).
성체성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성사입니다. 하지만 세족례의 정신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성체성사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성목요일 전례가 끝나면, 감실이 비워지고 수난 감실로 성체를 모셔 갑니다. 그리고 파스카 성야까지 성체 조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수난 감실 앞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묵상하는 것으로 성체 조배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얻은 ‘성체라는 열매’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고자 나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했는지 가슴을 치고 성찰해야 합니다.
제대 앞에서 세족례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상처를 주고 미워했던 이들의 발을 씻어 주는 ‘마음의 세족례’를 거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겸손과 섬김’을 통해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실 수 있도록 늘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교부들의 신앙 – 참회] 참회의 길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앞두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를 단식하고 기도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이 경건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참회’입니다.
참회의 첫 번째 길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겨라”(에제 36,32).
하느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참회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참회의 구체적인 길이 무엇인지 전하며 그 첫 번째 길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대는 죄인입니까? 낙담하지 말고 참회를 앞당기기 위해 교회로 오십시오.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면 하느님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 죄를 없애기 위해 죄를 인정하십시오. … 죄를 곰곰이 생각하고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참회에 관한 설교」, ‘둘째 설교’, 2,1).
참회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첫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뒤에도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녀였던 카인도 죄를 짓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죄를 지은 이후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회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크나큰 죄악에도 그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성인이 전하는 참회의 두 번째 길은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참회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죄를 슬퍼하는 길입니다. 죄를 지었습니까? 슬퍼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지워집니다”(‘둘째 설교’, 3,10).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 또한 참회입니다. 죄를 짓고서도 슬퍼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같은 죄를 쉽게 반복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곧바로 죄를 지은 자신의 나약함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찾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겸손, 자선 그리고 기도
참회의 세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성인은 성경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이야기를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사이는 의로움을 송두리째 잃고 성전에서 내려왔지만, 세리는 의로움을 얻어 내려왔습니다. … 바리사이는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온전히 망가뜨렸고, 세리는 겸손한 말로 의로움을 얻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의 말은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훌륭한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의 말도 겸손은 아니었으나,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둘째 설교’, 4,25).
참회를 통하여 자신이 비천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바친 기도를 보면 온통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랑밖에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회하는 세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성인이 권고하는 참회의 네 번째 길은 ‘자선’입니다.
“자선은 위대한 것입니다. … 성경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너의 기도와 너의 자선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좋게 기억되고 있다’(사도 10,4). 여기서 ‘하느님 앞’이란, 여러분이 온갖 죄를 지었다 해도 자선을 변호인으로 두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 자선은 죄로 지은 빚을 갚습니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주님께서 몸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니고 있든지 간에, 여러분이 행하는 자선은 그 죄를 모두 없애 줍니다”(‘셋째 설교’, 1,6).
자신의 비천함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신보다 더 비천한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성인은 자선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없애 준다고 말합니다. 자선을 행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도와 드림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지은 죄를 갚아 드리는 것입니다.
성인은 자선의 또 다른 길로 ‘기도’가 있음을 알립니다.
“하루의 모든 순간에 기도하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일에서 용기를 잃거나 게을러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굳건히 버티면,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며 여러분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계속 기도하며 감사를 드리십시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응답받을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십시오”(‘셋째 설교’, 4,15).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뉘우치며 자신의 비천함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드리게 됩니다. 기도가 아니면 또다시 죄의 구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 안에는 참회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야말로 참회의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지상에서만 힘을 지니는 참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태하고 거만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고, 참회를 위한 분명한 기간이 길게 주어져도 게을러서 하느님과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활동적이고 열성적인 사람은 큰 열정으로 자신의 참회를 드러내며 오랜 기간에 걸친 잘못들을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다섯째 설교’, 2,5).
성인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는 참회를 위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과 화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나태하고 거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 큰 열정으로 자신의 참회를 드러내어 오랜 기간에 걸친 자신의 잘못을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인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갑자기 닥치면 참회라는 치료법은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참회는 지상에서만 힘을 지닙니다. 저승에서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주님을 찾읍시다. 훗날 지옥의 끝없는 벌에서 구원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하늘 나라에 합당할 수 있도록 선한 일을 합시다”(‘아홉째 설교’, 7).
[교부들의 신앙 – 요셉 성인의 삶] 곱하기 1과 더하기 1의 차이
성모 성월 5월은 성모님의 배필 요셉 성인을 기념하면서 시작합니다.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마리아와 요셉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할까요? 물론 우위를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친어머니인 마리아에 비해서 예수님의 양부 요셉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성인은 요셉에 관하여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요셉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가장 정당한 길로 오시도록 하느님께서 간택하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았기에 동정녀께 큰 은혜를 입고 있다면, 동정녀 다음으로 요셉에게도 특별한 은혜를 입고 있으며 그에게 감사와 공경을 바쳐야 합니다”(「설교」, 2).
요셉의 봉헌 마리아의 봉헌
사실 요셉은 마리아 못지않게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고백은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요셉의 삶을 통해서도 울려 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고,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자신만큼은 알았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의심하더라도 마리아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배 속의 아기, 곧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결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아무런 확신도, 손에 잡히는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저 천사의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일,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적어도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배 속의 아기를 어루만지면서 주님의 손길을 느꼈을 테고 그렇게 세상의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을 이겨 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속으로 되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게 되지만,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고 그녀를 재판에 거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일이 될 터였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해」 4,4).
태상과 요셉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요한 19,26-27 참조). 그런데 그보다 앞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딸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어도,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 경륜이 펼쳐지는 데에 요셉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17장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임금은 백성이 다만 그가 있음을 알 뿐이고(태상 하지유지, 太上 下知有之), 다음가는 임금은 백성이 그를 친근히 여기고 칭송하는 임금이며(기차 친이예지, 其次 親而譽之), 다음가는 임금은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는 임금이고(기차 외지, 其次 畏之)이며, 마지막은 백성이 그를 업신여기는 임금이다(기차 모지, 其次 侮之).”
가장 훌륭한 임금 ‘태상(太上)’은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려 굳이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임금이 누구인지 아니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게 만드는 그런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태상의 모습은 ‘곱하기 1’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3+1=4’이고, ‘3x1=3’입니다. 더하기에서 1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3을 변화시킵니다. 반면에 곱하기에서 1은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3을 ‘충만한 3’이 되게 합니다.
요셉의 삶을 ‘곱하기 1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3을 성령과 예수님과 마리아라고 본다면, 요셉은 ‘1’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더하기 1’이 아니라 ‘곱하기 1’로 함께했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요셉의 역할은 미미하지만, 그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곱하기 1’이 되어 3(성령, 예수님, 마리아)을 더욱 충만케 했으며,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에 펼쳐지는 기초를 놓았던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요한 12,24), 요셉은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이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길 바라지 않았으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그들이 요셉이라는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는 고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태상과 같은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곱하는 수 1이 되는 삶
곱하기 1의 삶’과 ‘더하기 1의 삶’. 우리는 ‘더하기 1’이 되고 싶어 합니다. 나의 존재와 가치가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묵묵히 ‘곱하기 1’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을 두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던 동안 당신의 아버지로서 요셉에게 보여 주셨던 그 친밀성과 지극한 존경심을 하늘에서도 거부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완전히 보여 주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설교」, 2).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참조).
예수님의 이 고백이 가정 교육의 결과라는 생각은 억측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을 아버지 요셉 밑에서 보내셨고, 아버지에게서 (물론 어머니에게서도) 보고 배우신 것이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아니었을까요?
‘증거 있어? 증거를 대!’라는 말이 일상이 된 사회, 권력과 명예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을 실천한 사람, 요셉. 빛이 되어 주목을 받기보다는 빛을 비춰 주는 거울이 되는 데 만족할 줄 알았던 사람, 요셉.
성모 성월에 성모님과 더불어 요셉 성인이 보여 준 ‘곱하기 1’의 삶을 묵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