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칠한 무덤 같은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마태복음23:27-28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27. "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are like whitewashed tombs, which look beautiful on the outside but on the inside are full of dead men's bones and everything unclean.
28. In the same way, on the outside you appear to people as righteous but on the inside you are full of hypocrisy and wickedness. (NIV)
==================================================================================
회칠한 무덤 같으니!
혹시 ‘겉바속촉’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의 줄임말입니다.
원래 치킨의 식감을 표현할 때 사용했던 말로 등장했으나 요즘에는 치킨뿐만 아니라 통 삼겹살, 돈가스, 감자튀김부터 빵, 전 등 다양한 요리에 사용한다고 하죠.
최근 주부들의 잇템이라는 에어프라이어로 요리하면 치킨, 통 삼겹살, 돈가스 등의 요리들을 ‘겉바속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겉만 보면 딱딱할 것 같은데, 막상 한입 베어 물면 안쪽은 전혀 다른 반전의 식감과 맛이 숨어 있습니다.
이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비슷한 맥락의 부정적인 표현을 찾자면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사람, 실제로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한 척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죠.
오늘 말씀은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시며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보니 ‘회칠한 무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을 꼬집는 말이다(마 23:27). 즉 외모는 깨끗하게 단장하고 있으나 내면은 썩은 시체가 악취를 풍기듯 안팎이 다른 이율배반적이고 가증스런 신앙 자세를 지적한 표현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고인을 추모하거나, 무덤을 눈에 잘 띄게 하여 사람들이 부주의하여 무덤에 접촉함으로써 부정을 범하지 않도록 1년에 1차씩(유대력 아달 월 15일) 무덤에 회(灰)를 칠했다고 한다
오늘 여섯 번째 저주 선언문은 지난 말씀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과 겉을 대조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난 말씀은 잔과 그릇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면, 오늘 말씀은 ‘무덤’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칠한 무덤은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
27.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회칠한 무덤은 당시 들판이나 길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입니다. 에스겔 39장에서 부정한 시신을 피해가는 법에 대한 이야기 합니다. 길가 무덤에 ‘회’를 칠하는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 순례자들이 지나가며 쉽게 무덤을 식별하고 피해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① 길가 무덤을 회칠해 썩고 더러운 시신을 감췄지만 본질적인 죄와 죽음은 여전하다는 것
②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려고 치장을 해도 내면이 바뀌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
이런 유대교 전통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회칠한 무덤’의 위험성은 아주 심각합니다.
무덤인 줄 알고 피해가도록 만든, 그 역할에 충실하다면 좋을 텐데 여기에서 ‘회칠한 무덤’의 의미는 어쩌면 무덤처럼 보이지 않도록 아름답게 포장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답게 포장을 했으니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접촉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교회 안에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 마음이 아픈 것 중에 하나가 교회 안에서 사람에게 속고 상처 받는 일입니다.
대개 사람들에게 속아 상처 입는 일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거룩하고 신실해 보이는 누군가의 겉모양에 속아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회’를 칠했다는 것은 분장을 한 것입니다. 더러운 것을 가리기 위해 덧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러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덧칠을 두껍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상식 이상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유로 조금의 경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인생들 중에 그렇게 거룩하고 존귀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사실 진정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에는 ‘티’가 잘 드러나기 마련인데, 혹시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회를 칠해 가장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성형중독’이라는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오점을 고치고 숨기기 위해 수술을 하지만, 수술 후에 다른 결점이 보이면 또 손을 댑니다. 그런데 우리의 외모는 아무리 고쳐도 완전할 수 없는데, 고치면 고칠수록 부족한 것들이 자꾸 드러나는데,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죄를 가지고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의인’으로 나아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아’ 다 주께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죄인이기 때문에 주께 나아가서 도움을 구하고, 우리가 아프고 병들었으니 하나님께 나아가 치유함을 구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자꾸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우기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티끌만한 오점이 하나라도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짙게 회를 칠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죠.
계속 칠하고 또 덧칠하니 더욱 속이 썩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위선과 독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묵상팀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눴는데, 어떤 분이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문지윤 권사
‘회칠한 무덤’ 하니까 화장하는 것이 생각났다. 화장은 결국 커버하는 것이다. 화장의 본래 의도는 예쁜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피곤하거나 내 마음이 불편할 때에는 화장을 해도 잘 안 먹는다. 가리려고 하다보면 화장이 점점 더 두꺼워지고, 진해진다. 회칠한 무덤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예쁘게 칠하고, 두껍게 발라도 그게 무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의문이 드네요. 화장을 할 때 ‘예쁘게’ 보이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보기 싫은 것을 ‘가리는’ 것이 목적인지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것들이 떠오르나요?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 성직자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영화를 보면 성직자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이미지 보다는 이중인격자들로 혹은 비하하는 역할로 그려지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성직자들은 누가 봐도 성직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입니다. 대개 클러지셔츠(Clergy shirts)나 로만 카라(Roman kara)를 입은 사람이 옆에 큰 성경책을 끼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등장합니다. 그리곤 대개 사기를 치죠.
어쩌면 현대인들의 눈에 비치는 목회자들의 모습이 이런 것은 아닐까요?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잔인하게 전 남편을 살해하고 유기한 ‘고유정 사건’입니다.
그렇게 야리야리한 여성이 어떻게 그렇게 큰 남자를, 그렇게 예쁘고 순진하게 보이는 여성이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요?
남편을 살해하기 전 고유정이 해준 요리가 카레라이스였던 모양이죠. 요즘 남편들은 아내가 카레라이스를 해주면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겉은 번지르르 한데 속은 썩어서 냄새가 나는 회칠한 무덤입니다.
적용 - 너희를 돌아보아라!
오늘 여섯 번째 말씀에서는 이전 것들과 조금 다른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속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함을 질책하시고 어리석은 맹인 같은 그들에게 조언하시지만, 이번에는 대상이 바뀌었습니다.(마태복음 23장 28절)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저는 오늘 ‘너희도’라는 말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혹시 잊어버렸을지 모르겠지만, 23장 처음에 이 말씀을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것인지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3장 1절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부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준엄하게 꾸짖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해집니다. 이들의 잘못된 행위를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썩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 가운데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이유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라는 부분이죠.
우리 안에 외식과 불법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행동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들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죠. 그러니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겉모습만 치장하면 됩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 했지만 겉모습을 치장하고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짙게 덧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옳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외적인 모습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면에서 외식과 불법을 제거해 나가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을 신경 쓰면 우리의 더러운 것을 가리기 위해 애쓰지만,하나님을 신경 쓰면 우리의 연약하고 더러운 부분이 더 잘 보이도록 하나님 앞에 나오겠지요.
사람들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장해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I Surrender All" is a Christian hymn, with words written by American art teacher and musician Judson W. Van DeVenter (1855–1939), who subsequently became a music minister and evangelist. It was put to music by Winfield S. Weeden (1847–1908), and published in 1896.
Van DeVenter said of the inspiration for the text:
For some time, I had struggled between developing my talents in the field of art and going into full-time evangelistic work. At last the pivotal hour of my life came, and I surrendered all. A new day was ushered into my life. I became an evangelist and discovered down deep in my soul a talent hitherto unknown to me. God had hidden a song in my heart, and touching a tender chord, He caused me to sing.[1]
오늘 여섯 번째로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히 지난 말씀과 아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그릇은 먼저 속을 깨끗하게 해야 자연스럽게 겉도 깨끗합니다.
사실은 겉으로 우리가 아름답게 보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가식을 제하고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옳게 보이려고 가식을 떨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올바른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움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거룩은 우리들에게서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거룩함은 늘 사람들 앞에서 증명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둘이 분리 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외식’ 즉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기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보니까, 29절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더군요.
29. 사람들은 너희를 보며 거룩한 사람인 줄 알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너희는 완전히 사기꾼이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 중에 하나가 ‘종교 사기꾼’입니다.
인간의 약한 심성을 이용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등을 처먹는 사기꾼들이죠.
구약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짓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들먹이지만 삶에서 공의와 자비가 사라져 버린 자들입니다.
목자는 양을 돌보는 자들이어야 하는데, 이들이 양을 돌보는 목적은 자신들을 위해 양을 잡아먹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인 혹은 성직자’들이 존재해야하는 이유는 일반 사람들을 하나님께 잘 인도하기 위함이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종교라는 회칠한 무덤 안에서 온갖 더러운 일과 썩는 냄새가 난다면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매일 묵상한다고 나무 생각을 가슴에 끼고 다니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커다란 성경을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을 주의하십시오.
늘 기도한다고 신령한 척 하는 사람을 주의 하십시오.
모든 모임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삶을 경건하게 포장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중요한 것 그들의 내면에 ‘외식과 불법’이 있는지를 가려내는 것 입니다.
NIV 성경에 보니까, 이를 ‘hypocrisy and wickedness’라고 표현하고 있네요.
위선은 악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종교적인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더럽고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행동들이 악합니다. 여기서 악함이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욕을 먹는다면 그것이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종교적 행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를 행하고, 사람들에게 의롭게 비추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의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더 깊은 질문을 한다면,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것이 ‘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어야 할까요?
결국 도덕과 정직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의’가 가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의 행동이 비도덕적입니다.
가끔 목회자인 저도 다른 목회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으며 목회를 하는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르심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보아야 가장 정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위한 정직이 위선이라면 하나님을 위한 정직은 거룩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자유와 양심이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말씀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고뇌하며 결단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비겁함으로 인해 회칠한 무덤과 같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주님!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고뇌하게 하소서.
내가 하는 일들이 나의 의를 위해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속이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이더라도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번지르르한 내 모습이 행여 회칠한 무덤과 같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소서.
예를 들어서)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므로 인해 세상과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벗어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2020년 5월호 월간목회]에 실린 글입니다.
어떤 교회 청년부에서 ‘소개팅 전도지’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전도지는 남자용과 여자용으로 나뉘어 제작되었다.
남자용에는 여자청년 18명의 사진과 이름, 나이 직업이 적혀 있었고 여자용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남자 청년들을 적어 놓았다. 나중에 일간지에 공개 사죄 광고가 실리면서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은 세상화된 교회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방법을 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앞에 서지 않으면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가 있습니다.
선한목적을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과정’부터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진리는 ‘십자가 위에서’ 확증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쉬운 방법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아프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