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기독교 토착화과정에서 배울수 있는 교훈
Ⅰ. 서 론
한 나라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미 그나라가 가지고 있는 종교와 또한 그민족이 가지고 있는주변적이 상황에 따라서 전한 복음과 전해진 복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한 복음은성경을 그대로 전한것 같았는데 그 성경의 개념이 그나라와 민족이 가지고 있는 개념과 전혀 다를 수 도 있다. 여기에서 전한 복음과 전해진복음즉 받아들이는 측에서의 오류는 그나라에 복음의 토착화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미칠수 있다.
'토착화 신학' 에 대한 이해로는 복음이 타문화권에 전해지면서 현지 문화와 만나서 그곳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신학, 즉 복음과 과거와의 만남을 '토착화 신학'이라고 하고, 복음이 현시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만나 그 안에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한 신학, 즉 복음과 현재와의만남 '상황화 신학'이라고 한다. 때로는 이 상황화 신학은 토착화 신학까지 흡수한 개념으로도사용되기도 한다.1) 오늘날 일본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서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토착화되는 과정속에서 일어난 문제점들과 그로인해 형성된 일본기독교의 문제점들을 우리는 생각해 볼필요성이 있다. 지금 일본선교가 안고 있는 가장큰 문제점은 바로 이 출발점에서 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인간 문화적인 소산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령의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므로(딤후3:16f; 벧후1:20f) 임의로 변개할 수 없느 것이다. 복음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나(갈1:6-9)문화는 다원적이어야 한다.(고전9:19-23) 이 둘이 혼돈되지 아니하고 바른복음의 토착화2)를 이루는것이 많은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며 사역해야할 부분이다.
본 글은 일본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역사속에서 일어나 토착화의 과정들과 그로 인한 결과들을 서술하면서 1999년 올해로 450년째를 맞는 카톨릭과 145년의 개신교가 아직1%정도 밖에 안되는 선교의 불모지화 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들을 연구해 보려고 한다.
Ⅱ. 본 론
1. 카톨릭 선교의 토착화과정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 로마교회의 부패상에 도전하였을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형편이 되지 못하고 反종교개혁을 일으켜 새로운 도전에 대처하게 되었는데,이때에 나타나 것이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이다. 이 예수회는 로마 교회에 충성을 다하던 포루투칼 사람과 스페인 사람이 중심이 되었는데, 그 중심 인물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르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였다. 이들은 해외선교만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에 대항하는 길이라고 믿고, 당시 해운력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과 포루투칼의 도움으로 세계 각지에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비에르가 포루투칼 왕의 요청으로 1541년에 인도와 극동으로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1549 8월에 야지로라는 이름의 일본인과 함께카고시마에 토착하여, 예수회파의 카톨릭을 전할 때로부터 그 기점을 잡는다.
-------------------------
1) 이동주, 아시아 종교와 기독교, (기독교문서선교회,1998), pp. 10-11.
2) Ibid., p. 11.
- 1 -
당시 일본의 정치는 명목상의 천황만 존재할 뿐 다이묘, 즉 지방 영주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일본의 다이묘들중에는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서양의 화약이나 무기 특히 조총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카고시마의 다이묘인 시마쯔기히사였는데 그는 이 포루투칼 선교사를 호의적으로 대접하여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신하들에게는 크리스천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할 정도였다.
카고시마의 영주인 시마쯔기히사는 사비에르를 환영하며 그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포교활동을 허락하였다. 그 일행은 카고시마에서 13개월동안 머물면서 약 1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3)
그후에 선교사들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포교허가로 인하여, 1576년에교오또(京都)에 난반지4) 교회당과 1580년에 아즈찌(安土), 야마구찌(山口), 사까이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성장 배경에는 통상무역의 이익을 위해 카톨릭신도를 우대한 영주들의 실리적 자세가 무엇보다 더욱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다이묘 정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과 더불어 끝이났다. 토요토미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일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있던 불교의 세력이 견제해오자 태도를 급변하여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독교 사상이 중앙집권적 봉건체제이 거스리거나 도전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이유는기독교인들이 교리교육을 받고 일본 전통사상에도 없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사상은 인간 평등관, 엄격한 도덕성 및 우주적 교회에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성 의식, 그리고 가난한 사람과 박해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 활복 부정, 권력보다 도리의 중시, 주군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선순위, 순교정신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들은 집권자로서는 대단한 방해거리였다.
결국 1587년 7월 24일 밤중에 갑자기 "기독교 금교령"을 내렸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탄압하고선교사를 추방하라고 호통쳤다.
당시 일본에는 선교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람이 신부 49명, 수도사가 70이 있었는데 갑작스런추방령을 받았던 이들은 한꺼번에 떠날 수 있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일본에 남아서 선교 사업을 계속하기도 했지만 1597년 2월에 나가사키에서 26명의 기독교 신자가처형되면서 부터 할 수 없이 철수 하기 시작하였다. 그후의 도꿔가와 쇼군은 에도에 막부 정권을수립한 이후 250년간 철저하게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금교령으로 인하여 교오또에서는 1619년에 50여명이 화형을 당하고 나가사끼에서는 1622년에160여명 이상의 신도가 사형을 당하는 大殉敎가 벌어졌다. 이 박해는 1623년에 도꾸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도꾸가와 이에미쯔가 등극하자 더욱 격심하게 되었다. 그해 에도(江戶)에서 70명의 신도가 순교하였다.5)
이때부터 카돌릭의 탄압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카톨릭신도를 발견하여 고발한 사람에게 현상금을 주는 상소인(賞訴人), 5명을 한 조로 만들어 누가 카톨릭 신도인가를 감사하여 만일 카톨릭신도가 한명이라도 색출되면 5명이 모두 연대책임을 지는 오인조연좌(五人組連坐), 마리아상이나예수님의 얼굴을 새긴 목판이나 동판, 혹은 놋쇠판을 밟게하여 색출하는 후미에(踏繪), 그리고 카톨릭 신도가 아니라고 등록하고 일년에 두번 정도 심문을 받아 이를 확인하는 종문인별개(宗門人別改)등 이런 탄압과 더불어 개종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순교시키는
-----------------------
3) E. O. 라이사워, 일본은 어디로 갈 것인가, 김기실 역, (서울:기문사,1982), p.206.
4) 당시에는 서양인을 난반인이라 불렀다.
5) 택정언, 일본기독교회사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79) p. 13.
- 2 -
법으로 십자가에 매다는 것과 화형, 구멍에 매달기, 옥사, 익사, 열탕을 붓는 것과 창으로 찌르고톱으로 켜죽이는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였다.6)
카톨릭신도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극심하게 되자 신도들 속에서 난동이 일어났다. 1637년 쿠우슈우(九州) 지방의 시마하라(島原) 반도의 영주는 마찌구라이게지였고 아마구사섬의 영주는 데라자와 요시다까(寺澤聖高)였다. 이들은 백성을 너무 심하게 착취하였고 카톨릭교도에 대한 취급이
너무 가혹하였다. 어느날 교인들이 산굴에서 몰래 예배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포졸들이 덥쳐 난이벌어졌다. 사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12만명의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이 싸움은 거의 100일이 다되었을때 겨우 진압되었다. 이때 주동자였던 마스다시로도끼사다(益田四郞時貞)를 비롯하여 수만명이 학살 당하였고 이 난으로 인하여 전국에 있는 카돌릭신도를 체포하라는 령이 내려져 각처의선교사와 교인들을검거하여 무차별하게 처형하였다. 이 난을 시마하라의 난, 아마구사(天草)의난이라고 부른다.7) 탄압이 극도에 달하자 공공연하게 교인으로서 생활하는 사람은 눈으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맥이 끊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교인들이 신앙을 유지하는대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잠복교인으로 숨어서 신앙을 유지하였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는 불교나 신도속에서 숨어서 카톨릭신앙을 지킨 숨은 교인들의 형태이다.8) 이들을 기리스탄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후미에를 강요 당하면 그들은 밟았다. 불교의 독경에도 참가했다.
또한, 신도의 씨자(氏子)로서 신사참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위장'이었고, 그들은 불교식의 주연(酒硏)을 가장하여 기독교 집회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숨은 기독교인의 경의 위장(僞裝)이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나중에는 본장(本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종교적 혼합(syncretism)에 약한 일본인들의 정신적 특성 때문에 크리스챤으로 부활을 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다.
카톨릭 선교는 신분의 구분을 희석화 하고 종족 및 가족적인 혈통적 유대를 뛰어 넘어서 새로운원리에 따라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던 내적인 힘을 박해로 크게무련화 되었다. 이러한 내적인 힘은 해당 종교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가치 부양적인 활동에 의해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데 선교사 및 능력 있는 지도자를 충원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져 기독교의 지식 체계를 사회적 상황과의 관련성 속에서 체계화시키고 지속적으로 합리화 시킬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민중들이 원하는 구원적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하고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종교성으로 승화시켜 주지 못하여 토착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후 1859년에 체결된 일불(日佛)조약의 통역을 위하여 선교사가 일본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로 인한 근세 카톨릭 선교는 사회의 유효구조가 봉괴되고 있느 전국시대라는 배경속에서 다이묘들의 군비 경쟁과 무역의 이권 등이 선교적 접축점으로 시작되었다 영주들은 선교사들에게 선교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기회를 제공하여 1865년 3월 17일에 나가사끼의 오우라천주당이 낙성식을 올렸으며, 그곳에 프랑스인 신부 쁘띠쨩(M. Pitijian)이 상주하였다. 그후에 잠복교인들이찾아왔고 1868년의 보고에 의하면 나가사끼에 2만명의 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일본 카톨릭선교사에서 "크리스챤의 부활"이라고 한다. 1873년에는 카톨릭신도들이 추방지에서 돌아오고, 1874년에 카톨릭에 대한 금지가 사라지게 되었다.
근세 카톨릭 선교는 그 토착화를 위하여 일본 문화를 경시하지 않고 그 문화 속에서 지식 체계의전달이 용이하도록 수용자 중심으로 용어를 상황화 시켰으며, 유의미한 타자를 통하여 계속적인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공동체를 보전하며 진리를 전수하였다. 한편 이단과 사설을 방지하고, 타종교와의 논쟁에서 교리적 우위를 지킴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9)
-----------------------
6) 片 吉, 숨은 크리스챤, NHK시리즈, 1975, pp. 34-35.
7) Ibid., p. 57.
8) Ibid., p. 64-66.
9) 박현균, "일본선교의 종교사회학적 이해", (석사학위 논문,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1996),
pp. 57-58.
- 3 -
2. 개신교 선교의 토착화 과정
일본 개신교선교의 시작은 1854년 3월31일에 250년간의 쇄국정치의 종지부를 찍고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는 때부터이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우호조약 내용에는 미국인의 일본 거주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기독교 선교에 대한 폐쇄 상태는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개국의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우호 통상 조약을 계기로 하여 미국의 선교사들이 앞을 다투어 일본으로 들어가기 시작하
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선교사 6명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감독 교회의 윌리암스, 리긴즈(T.Liggins)와 미국 개혁 교회의 베르벡(G.F.Verbeck), 브라운(S.R.Brown), 시몬스(Simmons)이며, 미국 장로교회의 햅번(J.C.Heqburn)이었다.10)
이 당시 일본에 온 선교사는 대개가 미국인으로서 이들은 그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근본주의적인신학에 바탕을 두고 개인 구원과 엄격한 경건 생활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사회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허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근본주의의 단점인 편협한 구원관은 일본의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혀 놓아서 250여년전에 카톨릭의 사비에르가 취했던 자세보다 더 웅크려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권위주의적이고 닫혀있는 일본의관료들에 비해 선교사들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또한 쾌활하여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려고 하였다. 이러하 선교사들의 모습에 많은 일본인들이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차츰 선교사들이사는 곳에 일본인들도 밀집하여 살게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갖고 있었던 인간 존엄 사상은봉건적 사고 방식에 젖어 있던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감명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개국과 더불어 새로운 사조의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1873년 당시 일본주미공사 모리는 기리시탄 금제의 철페를 요구하면서 "일본에 있어서의 종교의 자유"라는 건의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에 살면서 체험한 사실을 솔직하게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일본의 편협한 종교 정책을날카롭게 비판하는 선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은 개항도시라는 제한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무사들과 주로 접촉하게 되었다. 이 무사들은 명치유신이후 사, 농, 공, 상의 신분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져서 새로운 소외 계층으로 등장한 몰락 무사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선교사의 집으로 모여 들었다.12)
일본 개신교 선교사로 유명한 요코하마 벤드의 주동자였던 클라크(W.S. Clark)가 있다. 이들선교사들은 배후에 교파를갖고 있었으나, 일본이란 토양에 있어서는 한정된 개항 도시에서 협력하여 선교에 임하여 스스로의 교파를 주장하지 않았다.13)
--------------------------
10) 택정언, op. cit., p. 86.
11) 김광수,아세아 기독교 확장사 (서울:기독교문사, 1981), p.157.
12) 택정언, op. cit., p. 33.
13) Ibid., p. 87.
- 4 -
그리고 일본인 교직자를 빨리 양성하여, 그들이 일본교회를 지도할수 있도록 일본 교회의 自立,自治, 自傳을 권하였다.14)
그들은 교육사업, 성서번역, 찬송가 작성등에 있어서는 각교파 출신의 선교사들이 합심하여 일을하였다.
일본에 온 선교사는 압도적으로 미국인이 많았고, 다음에 영국, 캐나다, 독일의 순서였다. 그래서 일본교회는 압도적으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휼륭한 전통을 지닌 미국 선교사들은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 개인존중을 역설하고낙천적 성격으로 일본인들의 호감을 사도록 했다. 메이지 정부가 조약 개정에 전력을 기울이고있을때, 선교사도 치외법권 철폐, 관세자주권 획득, 등을 요구하는 일본 정부를 지지한 일로 인해, 선교사는 외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관념을 깨뜨렸다.15)
이와같이 선교사들은 열성과 인내로써 그들에게 다가오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고매한 인격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하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스승의 인품을 보고 그리스도를깨닫고 신봉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신자들은 사족계급 출신이 주축을 이룩 있었는데 마찬가지고미국에서 온 교사들 중에는 군인이 많았다. 이것을 중요한 동질감을 주는 요인으로 사제간에 보다 더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며 복음을 무리없이 받아 들이게 했던 선교적 요소였다.
메이지 정부와 비방의 군주들이 우수한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교육을 맏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선교 전략적인 차원도 있지만 개화 초기 에는 교사의 자격을 갖춘 선교사 외에는 파견될 사람이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들은 고용 계약서 상에 기독교 선교를 금한다는 조건을 철폐하지않으며 계약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기독교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들어왔다.16)
미국 선교사의 영향으로 신앙변에서 특기할 만한 것을 들자면, 신앙의 개인주의적 경향(individualism), 리바이벌리즘(rivivalism), 근본주의 신학, 엄격한 도덕관등을 들 수가 있다.
한편 이들의 약점은 교회관의 빈약과 일본의 토착문화에 대한 경시, 카톨릭에의 비판적 태도등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초대교회 발생에 있어서 3밴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3밴드란 요코하마 밴드, 구마모도 밴드, 삿뽀로 밴드, 셋을 말한다. 밴드란 "맹약(盟約)을 뜻한다.
1) 요코하마 밴드
주로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고 후에"일본 기독교회"라는 교단을 형성하는데 그 모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밴드를 통하여 동경 신학대학이 만들어진다.
2) 구마모도 밴드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 태도를 취하면서 사회 구원에 관심을 갖고 또한 "조합 교회" 를 만들어 "일본 기독 교회"와는 차별적인 입장에 섰으며 "토시샤 대학(동지사 대학)을 설립했다.
3) 삿뽀로 밴드
삿뽀로 농학교와 갚은 관련을 맺는 것으로 초대 교장으로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클라크 박사을 초빙하여 그의 지도를 받게 되면서부터 그의 신앙이 함께 전파되었다. 클라크는 삿뽀로를 떠나면서 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r)라는 유명한 말을남겼다. 17)
이 밴드는 무교회 주의적이 경향이 강하며 특히 교회의 교파주의적인 태도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삿뽀로 밴드의 출신으로는 유명한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가 있다.
---------------------------
14) Ibid., pp. 90-93.
15) Ibid., p. 93.
16) 박현균, op. cit., pp. 62-63.
17) 택정언, op. cit., pp. 99
- 5 -
이처럼 일본 기독교는 19세기에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1880년대에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치적인 동기가 많이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 개신교는 자유 민권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을 농촌에까지 확신 시켰으며 기독교 윤리는 사회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89년도에는 일본의 제국 헌법이 제정됨에 따라 기독교는 불교와 함께 공인된 종교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 개신교의 사회 운동은 일본 사회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나 이와 같은 사회 운동의 영향으로 기독교는 일본 사회에서 점차로 도시 중산층과 지식층의 종교로 고정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렇게 일본의 기독교과 꽃을 피우려는 즈음에 또 하나 일본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그것은 일본의 천황으로 중심으로 하는 식민주의의 출현이다.
3. 식민주의의 출현과 일본기독교.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일본을 통일하고 천황제 국가를 형성한 메이지정부는 통일된 민족 국가를 꿈꾸면서 점차 식민주의 양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1889년에는 일본 제국주의 헌법이제정되어 천황제 절대 국가를 선포하였고, 이에 구마모도 밴드를 중심으로 한 조합 교회에서는이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 대두되면서 "일본적 기독교"를 주창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야망을 드러내어 1894년에는 청나라와 청일전쟁을 치루어 승리하였고, 1904년에는 러 . 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을 합병하여 버렸고, 1939년에는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미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에일본정부는 일본 정신을 하나로 붙들기 위해 신사를 건립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여기에 절하도록만들었다. 그러면서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이를 국민생활 속에 침투 시키려고 하였다. 신사에 대한 참배는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에 큰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1939년 일존 정부는 마침내 "정교 단체법"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이의 중요한 내용은 "교회의수가 50, 신자의 수가 5,000명 미만의 교회는 인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로 인해 교단간의 합동이 이루어 졌으며 일본 정부는 기독교를 더욱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간섭 아래 놓인 일본교회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의 만행에 침묵과 순종으로 일관하였으며 심지어 1944년 부활절에는 "일본 기독교단으로부터 대동아 공영권에 있는 기독교단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함으로써, 당시 일본 기독교가 일본국가에 귀속되어 있는 일본적기독교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일본 교회는 진리에서 벗어나서 국가에 대한 저항력을 잃고 정치의 시녀로전락하게 되었다. 즉, 일본교회는 국수주의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서로 용납되지 않는 상태에 잇는 두 주인18)을 섬기려 했고, 일본적 윤리와 기독교를 혼합시키려고 한 것은 결국 진리를 왜곡하고 스스로 세상과 타협한 것을 의미한다. 국가주의자들의 구화주의에 대한 비판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 교화가 국가의 탄압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박해를 재현하고 싶지않았던 이유도 있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신앙의정조를 팔아버린 일본 기독 교회에 대하여 신앙의 독립과 자유를 부르짓으며, 성서연구와 문서활동을 통하여 국가에 대하여 바른 목소리를 내며,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야말로 파괴할 수없고 제저될 수 없는 살아있는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19)
----------------------
18) 우찌무라는 이것을 두개의 "J"로 표현했다. 하나는 예수(Jesus)또 하나는 일본(Japan)이었다. 두개
를 모두 목숨바쳐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개가 대치된 상황속에서 어떤 것을 더사랑한다고 말하지 못
했다. 즉 , 하나님 우선의 신앙의 입장을 목숨걸고 뚜렸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19) 박현균, op. cit., p. 67.
- 6 -
우찌무라 의 무교회 주의는 한편으로 현대 사회의 종교와 개인적인 정체성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개인은 신앙의 자유와 독립의 주체이기 때문에 진리를 깨우치는 데 있어서 교회의 제도나조직에 의해서 제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가의 제도와 조직적 체계로 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 생활에서의 종교는 점차 사적인 일로 밀려나면서, 어느 정도 제도로부터 격리하여 자율적인 성격을 가지고 개인의 사적 욕구에 적합한 것에만 의미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결과와 그의 개인적인 정체성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종교성까지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는 후에 일본교회가 교회론이 약한 문제를 낳았고 교회 성장과 기독교의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0)
선교에는 봉사와 복음 선포와 토착교회 설립으로 재생산을 하게 하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일본교회는 토착화 과정에서 봉사를 통한 선포중심의 선교였기 때문에 기독교 기관에 비해서 교회는 빨리 성장하지 못했다.
4. 2차대전 이후의 선교(1945년이후: 침체기)
1946년 새로운 헌법이 재정되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기독교의 활동이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선교는 계속적으로 침체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교회의 회개가 아직까지 선행되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순수한 복음에 대한 열정보다는 사회 참여에 더욱 관심을 갖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에 열중할수록 파생되는 전도의 무감각이 일본 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 기독교를 대략 분류해본다면, 개신교는 예큐메니칼파(WCC계)와 복음파로 분류가 되며, 그외에 이단이 존재하고 있다. 복음파는 로잔 선언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룹이며, 성령파에서개혁파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교회들이 소속되어 있다.(그러나 극단적인 성령파나 극단적인
개혁파는 포함되어있지 않다.)21)
이것이 현재 일본 개신교의 주류이다. 그리고 전체 현황은 51개의 교단, 1,600개의 교회, 31개의선교단체(Para chruch), 10만명의 성도수를 보유하고 있다. 에큐메니칼파는 대개 일본 기독교단을 가르킨다. 일제시대 종교단체법에 의해 일본교회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 그대로 남아 만들어진 조직으로 초대 지도자인 '도미다 미쯔루이'가 교단을 대표해서 신사 참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신도 아래 강압적으로 통합된 것이기 때문에 전후에는 각 교파가 이 조직으로부터 탈퇴해 버렸다. 지금은 일본 감리교회와 일본 조합교회가 그 중심 세력으로 남아 있고,일본 기독교단으로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교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핵심은 독일 신철학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바르트 신학을 주장하며 동경신학대학이 그 중심이다. 교회수 1,700개, 신도수는 63,000명으로 교단으로는 일본최대 교단이다. 그러나 규모는 크지만 그 역사적인 배경을 볼 때 내부의 갈등이 매우 심하며, 현재는 거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교세도 계속 감소 추세에 있다.
현제 일본에는 총 7천개의 교회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도시에 교회가 있으며, 전국 2,590개의읍 가운데 1,814개의 읍과 마을에만 교회가 설립되어 있을 뿐이다. 무교회 시(市)가 8곳, 교회가하나밖에 없는 곳도 84군데나 된다.
일본은 아직도 미전도 지역이 많은데 교회를 설립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보수성과 강한 인습으로 인해 전도에 어려움이 많고 재정적인 자립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재정적으로 어려운 지역에서는 신문배달과 우유배달 등을 하면서 사역하는 목사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일본선교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20) Ibid., p. 68.
21) 테라다 유이찌 . 데라다 리사, 일본선교의 비밀을 벗긴다, 곽명옥 역(서울:베다니,1995)p.237.
- 7 -
Ⅲ. 결 론
일본선교의 토착화 과정속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일본에서의 선교는 정치적인 영향력이지나치게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초기의 선교의 다이묘들의 정치적인 계산에 따라 기독교를 받아 들이면게 된 것과 선교사들도 이에 공생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후에도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서 탄압이 이루어졌고 또한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교사들을 받아들였고,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 교회가 정치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국가의 하수인이 되는 비극을 맛보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순수한 복음적인 열정보다는 사회참여라는 측면이강조되는 정치성 짙은 사회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이처럼 일본은 정치적인 변화 자체가 기독교의 토착화 를 저해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본선교의 토착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와 정치와의 공생 관계는 그당대에는 많은 선교의 결실을 보는 듯하나 결국은 기독교 혼합주의만을 양산케 되어 결국에는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그로 인해 복음의 힘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우리는 이 시점에서 복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임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선교를 행할 때 그 지역의 지도자를 선교하여 지역 민도 함께 전도하는 집단적인 개종으자칫 잘못하면 집단 지도자의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음을 잘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도자가 바뀌었을 때에는 엄청난 변화와 더불어 핍박으로 바뀔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본의 기독교 토착화과정에서 배울수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