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팔가자 가는 길 (상편)
강 문 석
길은 아득히 멀고 사방으론 황량한 벌판이 연이어 나타났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독립을 찾겠다고 동분서주로 헤매던 파란만장한 땅 만주 벌판이었다. 새천년을 앞두고 지구촌이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에 편승해 나선 성지순례였다. 중국을 찾아가야만 한국 천주교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순례자들을 이끌었다. 한국교회 초기, 신앙 선조들이 걸어서 국경을 넘었던 길은 철책으로 막혀 하늘을 날아서 찾아가야했지만 참가자들은 순례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일행은 고난의 길을 걸어간 신앙 선조들을 떠올리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수시로 주모경을 바쳤다. 그러다가 차량 타이어에 펑크라도 나면 버스를 내려야했고 연약한 흙길에 바퀴라도 빠지면 힘을 보태면서 강행군을 이어갔다. 대륙의 도로는 흡사 반세기 전 우리나라 도로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간 첫 방문지는 소팔가자小八家子였다. 소팔가자는 만주국의 수도였던 장춘 서북쪽에 위치했고 ‘여덟 가구’란 소박한 마을 이름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동네처럼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소팔가자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 오림의 ‘팔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여덟 가구로 시작했지만 한족과 조선족이 4백여 명씩 몰려와 규모를 갖춘 마을로 변했으니 시작은 미미했으나 결과는 창대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소팔가자는 김대건 성인이 부제품을 받고 8개월 동안 머물면서 남긴 영성이 지금도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었다. 주민 95%가 가톨릭 신자로 모든 신자들이 ‘김대건’을 연호하며 기도를 청한다니 신앙의 신비가 이뤄진 동네를 직접 만난 것이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성인이 직접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차에서 내린 순례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마을을 찾아갔다. 부락민들은 소문으로 한국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 골목으로 몰려나온 그들은 김대건 성인의 나라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수줍은 미소들을 지었다. 역사 속에서 언제 우리가 중국 사람들에게 이러한 대접을 받은 적 있었던가. 마을에는 김대건 성인 동상이 서있고 신자들은 오후 3시가 되면 동상 주변을 돌며 기도를 바친다고 했다.
부락민들 행색은 보릿고개 상존하던 시절의 우리 시골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햇볕에 그을렸는지 주민들 피부는 까맣게 반들거렸고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포장공사가 막 끝난 도로에선 아스콘 냄새가 물씬했고 도로 이름마저도 때맞춰 ‘김대건로’로 바뀌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내엔 서울 한강대교 북단에도 ‘대건로’가 있고 제주와 미리내 등 몇 군데 성인 이름이 든 길이 있지만 나라밖으로선 처음 생긴 일이었다. ‘김대건로’는 중국 길림성 농안현 합륭진과 소팔가자 성당을 잇는 왕복 2차선 도로 9.7㎞ 구간이었다.
중국 당국은 지금까지 도로에다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한 전례가 없었지만 ‘김대건로’만은 특별히 허가했기에 더욱 뜻 깊은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팔가자는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사적지라 순례자들에겐 의미가 클 수밖에 없었다. 중국 천주교 역사에서 요동 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이곳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초대 만주교구장에 임명된 베롤 주교가 이 일대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면서 만주 전교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 신부 그리고 김대건 신학생이 이곳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거점이 있어 가능했었다. 순례자들은 김대건이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太莊河에서 백가점白家店교우촌을 방문한 역사적 행로를 따르기 위해 소팔가자를 찾았다. 조선 입국의 길목인 이곳을 당시엔 만주滿洲라 불렀다. 만주는 일찍부터 조선교회의 밀사나 선교사들이 육로로 조선에 입국할 때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요지라 서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조선 신학생 김대건은 1836년 12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말에는 봉황성 변문에 닿을 수 있었고 더욱 전진하여 요녕성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요동반도와 국경지대인 책문과 의주 변문, 두만강을 수시로 탐색해야만 했다. 김대건은 요동반도 북단인 개주 부근 양관 교우촌으로 갔다가 페레올 주교가 있던 이곳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와서 2년 가까이 신학공부를 한 후 24세에 부제품을 받았다. 사제품도 가능했지만 연령이 모자랐다.
당시 베롤 주교의 이러한 결심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골목마다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기도소리였다고 한다. 소팔가자는 김대건 신부에게는 비단 부제품을 받았다는 곳으로서의 중요성보다 그를 있게 만든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페레올 주교를 만났고 사제가 되기까지의 모든 역경을 겪으면서 신학공부를 했던 토대가 된 곳이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이 도착하기 2년 전 펴낸「소팔가자 소사小史」에도 소팔가자와 천주교 그리고 김 신부와의 인연에 대해 자상하게 기록될 정도로 이곳에선 김대건 성인을 받들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마을을 지나 순례기념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소팔가자 성당을 들어섰다. 만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 주교가 1841년 건립하여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성당이다. 미사해설자는 젊은 중국인 형제였고 또래의 조선족 자매가 그를 도와 순례자들에게 우리말로 통역하면서 지역까지 소개했다. 성당 교우들과 합동으로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순교자 찬가’와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를 불렀고 성당 교우들도 이 노래를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았다.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김대건 성인은 조정이 권하는 부귀영화도 뿌리치고 오로지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 당당히 순교의 칼을 받았던 사제였기에 이곳 신자들도 더욱 흠숭하면서 따르는 것이리라. 이들은 유교를 숭상했던 나라에서 대를 이어 천주교 성인을 기리는 신자들이라 더욱 놀라웠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천주교회는 순교로 피어난 꽃이다.
순교로써 신앙을 지킨 신앙선조들의 피와 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춧돌이 되었고 교회발전의 자양분이 되었다.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도 2백여 년에 걸친 모진 박해 와중에 수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만도 1만 명을 넘었다. 신학뿐 아니라 중국어와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에도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였기에 그의 박학다식함을 알게 된 조선의 대신들이 배교를 유도했다.
그런데도 김 신부는 외국인들과 접촉했다는 사실만으로 결국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져 짧은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축복된 천년을 뜻하는 라틴어 밀레니엄. 1999년에 접어들자 지구촌은 온통 밀레니엄 열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새로운 천년을 복되게 맞이하겠다는 뉴밀레니엄 열기는 뜨거웠고 가톨릭신문사도 중국성지순례 대장정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 탄생 2천년의 대희년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의 해를 살고 있던 때였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흘렸던 고난의 피땀이 서려있는 중국 내 성지를 밟으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간 선조들의 신앙을 재현하겠다는 뜻을 담아 한국교회 사상 최초로 순례의 길에 나섰다. 전국에서 뜻을 내어 참가한 78명 순례자는 7박 8일 일정과 절묘하게 겹쳐지는 숫자였다. 순례에 나선 사람들 중엔 성직자와 수도자 부모와 본당 사목을 맡고 있는 책임자도 여럿이었다.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첫 상견례를 가진 순례자들은 모두 순례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톨릭신문 레오 사장신부와 한국교회사 연구소장 야고보 신부 그리고 교회사 분야 전문가까지 참여했다. 당시 신문사 위촉기자였던 가롤로는 중국 땅 심양공항에 내리자 바로 취재팀에 배속되었다. 뜻 깊은 순례를 좀 더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고자 사진작가인 그를 신문사 사장신부가 전격적으로 발탁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앞서 부산교구장 J주교 착좌식 행사사진을 가롤로가 주도적으로 맡아 촬영한 걸 사장신부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롤로는 신문사 안젤로 기자에게 사진촬영을 미루고 자신은 동영상 촬영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부철산 북경교구장과의 간담회엔 유백건 비서장과 젊은 중국인 사제도 두 명 함께 했다. 통역은 한국에서 파견되어 중국에 상주하고 있는 젊은 베드로 신부가 맡았고 그는 평소 교구장과 자주 접촉하는지 서로 친숙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순례단에선 두 사제와 교회사분야 연구원 루카 박사 그리고 취재기자 두 명이 간담회에 참석했다. 교구청 회의실에서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간담회에서 한중 양국 교회를 대표한 관계자들은 마주보고 앉아 중국 녹차를 마셔가며 회담을 이어갔다.
교구장은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띠었고 통역 사제도 그를 따라 밝은 표정이었다. 덕분에 한국 측 참석자들은 중국이란 걸 잊을 정도로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북경교구장은 1200명 성직자 중 1100명은 상당히 젊은 편이라며 중국교회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내다봤다. 회담 말미에 반공포로 출신인 교회사 연구소장 야고보 신부가 북한교회 복원을 위해 중국교회가 나서줄 수 없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도 교구장은 정치상황만 변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며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산화 이후 중국교회는 지상교회와 지하교회로 갈라졌고 지상교회를 애국회로도 불렀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지상교회는 정부를 지지하지만 지하교회는 공산화 후 심한 박해를 받아왔기에 정부에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처럼 교회가 지상과 지하로 양분된 것은 신앙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사상에 기인한 것인지라 서로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감지할 수 있었다. 간담회에서 북경교구와 교황청과의 긴장관계는 감지할 수 없었다. ☞ 중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