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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 학대 받는 백성을 번성하게 하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1-22 요절/ 출애굽기 1:12 | 2025. 3. 9 | |
출애굽기 제 1 강 |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출애굽기는 모세오경 중 두 번째 책입니다. 출애굽기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할 만큼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들이 어떻게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되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백성 삼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학대 받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번성케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 요셉의 초청으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다시 말해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였습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허리에게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칩십 명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70민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야곱과 함께 이주한 70명을 온 인류의 대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탄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비롯하여 애굽에 이주한 1세대는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은 얼마나 늘어났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의 후손은 가족에서 민족으로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나중에 출애굽 할 때 장정만 60만 명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불어나고 번성하게 되었을까요? 환경이 좋았기 때문입니까? 유전자가 우수하기 때문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또한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겠다는 언약의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이주한 지 30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겁니다. 하지만 저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큰 민족’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편에서 보면 결혼하고 자식 낳고 키운 것 밖에는 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무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첫 사람을 축복하신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들에게 복을 주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큰 민족’의 말씀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큰 민족에 대한 약속 성취는 또 하나의 중요한 약속인 땅에 대한 약속도 성취될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과 함께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애굽 땅은 임시 거처이지 이스라엘이 영원히 거할 땅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젠가는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 예배에 참석한 학생들도 이 말씀을 받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복이 되기를 원하고 행복한 인생의 로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이 되는 것은 꿈 속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나는 진짜 복이 되고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내가 많은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복이 나에게 굴러 들어오고 나의 존재자체가 복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이 되는 것은 실제로 내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는 것이요, 매우 강해지는 것이며,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있으나 마나 한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리고 나누어주는 위대한 존재이며, 복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승승장구 잘 나가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이요, 야곱의 가족들에 대한 애굽의 혜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애굽 왕 바로는 요셉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늘어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인구가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들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애굽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과거 바로가 요셉을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애굽을 다스리게 하여 애굽이 축복을 받은 것처럼, 새 왕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잘 대해주면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왕은 요셉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성하는 이스라엘을 위협으로 여기고, 어찌하든지 그들의 기세를 꺽고자 지혜를 짜 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 자기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로 인해 이스라엘은 졸지에 모든 혜택을 빼앗기고 노예 백성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새 왕은 감독들을 세우고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생식 능력을 제한하고 인구를 억제하고자 했습니다. 애굽 왕은 인간적인 지혜로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갔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학대는 인구 억제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학대는 오히려 자양분이 되어 이스라엘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평화의 시대에도 생육하고 불어나고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학대를 통해 더욱 번성하고 퍼져나갔습니다. 학대 받는 기간이 더 폭발적인 성장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애굽 왕의 학대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15: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셔서 좋은 시절도 겪어보게 하시고, 혹독한 시절도 겪어보게 하심으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삼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전도로 믿는 자가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큰 핍박이 있었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초대교회 신자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교회의 씨를 없애고자 앞장 선 사람이 사울이었는데, 그런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는 역사를 통해서 교회는 든든히 서가고 믿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핍박을 통해 믿음이 견고해지고 더욱 왕성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핍박은 교회 성장의 씨앗이요 원동력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우리는 장차 얻게 될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고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을 때 위축되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고난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을 맛보고 하나님의 상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학대할수록 이스라엘 백성이 더 번성하고 퍼져나가자 애굽 사람 바로는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악감정을 갖게 된 바로는 이제 그들에게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사 등으로 일을 엄하게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의 생활을 괴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두셔서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경작하다’는 아바드로서 ‘섬긴다’ 다시 말해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삶 자체가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노예 백성으로 전락하여 하나님 대신 바로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노동은 어려운 노동, 중노동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동은 참으로 가혹했고 그들의 삶은 괴로웠습니다.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내 마음 첫 자리를 차지하고 그런 것들을 예배하고 섬길 때 기쁨이 사라지고 불행이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바로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성공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쾌락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예배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바르게 예배함으로 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중노동으로도 이스라엘 인구 억제를 하지 못하자 바로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히브리 산파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동원하여 히브리 여인이 해산할 때 살펴서 아들은 죽이고 딸은 살려두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손에는 피를 안 묻히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바로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점차 여성들만 남게 되었을 겁니다. 애굽에 대한 반란은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이고 결국 그 백성은 소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놀랍게도 산파들은 애굽 왕에게 항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어떻게 바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히브리 남자 아기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따랐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생명을 살렸습니다.
두 산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여인들입니다.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왕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는데 평범한 산파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속사에서는 애굽 왕이 주인공이고 산파들은 하찮은 민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에서는 애굽 왕이 별 볼 일 없는 존재이고 산파들이 주인공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 명의 산파들이 대제국 왕의 잘못된 정책을 막고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권력자입니까? 돈 많은 부자입니까? 능력이 많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진정 무엇입니까? 권력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능력도 아니요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을 때 길이 보이고 해결책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산과 같은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고 희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즈음 청년들의 취업이 참으로 어렵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대학에 들어왔지만 취업이 잘 안 되는 현실 앞에서 의욕이 꺽이고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며, 영광스런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선배의 안내를 잘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일예배와 바이블 카페와 일대일 성경공부에 초청되어 믿음의 세계로 들어온 청년대학생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제가 보장하건데 이들의 앞 날은 밝고 희망이 넘칩니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은 오늘의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다시 구름이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이제 애굽 왕은 최후의 방법으로 모든 백성에게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방법은 이전 방법들과 달리 공개적이고 전면적입니다. 히브리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한 것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인간 편에서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제로의 상황 속에서도 구원을 창조해 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의 집안,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다는 것은 가정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남자 아이들이 죽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이 무너질 수 있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산파들 때문에 가정들이 계속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한국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저출산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으면 가정이 무너지고 학교가 사라집니다. 마을과 도시가 없어지고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혼하고 출산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을 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결혼할 수 있고,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있고, 생육 번성 충만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한국 교회는 크게 성장했고 우리 모임도 놀랍게 성장하여 전국 주요 캠퍼스를 활발하게 개척하고, 선교사도 1년에 백 명 이상 파송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 년에 한 명의 신자를 늘리는 것도 어렵고, 있는 신자들을 지키는 것도 버거워졌습니다. 암울한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원역사를 준비하시고 이루어가십니다. 나 한 사람이 준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여러 고난 앞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셔서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님,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