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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역사
들어가기
제 1장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깨달음 소통 현대성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깨달음 - 우주와의 합일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기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낳음이 희망이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왜 직관이어야 하는가?
제 2장 이상주의자가 되라
참된 지성이란 무엇인가?
살어리 살어리랏다
섬진강 김용택 다목리 이외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가치란 무엇인가?
제 3장 학문의 역사
과학이라는 이름의 우상
창세기와 출애굽기
만유의 아르케는 무엇인가?
시원이론이 필요하다
다시 동쪽을 보라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어가기
이 세상 소풍 끝나기 전에
이 세상 소풍 끝나기 전에 책 한 권 정도는 남기고 싶다. 그 한 권은 구조론이다.
학문의 역사는 구조론에 대한 안내서 격이다.
구조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구조론적 세계관을 머릿속에 세팅해 두어야 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보되 입자 알갱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하는 식으로 연쇄적인 고리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구조의 세계에서 정과 반은 대립,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받는다. 이어받아 완성시킨다.
정이 반을 낳고 반이 합을 낳아 완성시킨다. 질서가 가치를 낳고 가치가 양식을 낳아 마침내 완성시킨다.
구조의 세계에서 입자는 야구공처럼 동그랗게 생긴 덩어리가 아니다.
내가 주먹으로 벽을 세게 치면, 내 주먹의 치는 힘과 벽의 맞서는 힘이 작용 반작용으로 팽팽한 맞물려 교착되는 성질
그 자체가 입자다.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이 깨졌는데도 아직도 세상은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식계를 지배하는 마르크시즘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결정론적 사고에 빠져있다.
왜 상대성이론의 시대, 양자역학의 시대, 불확정성의 시대, 엔트로피의 시대에 여전히 인간들은 결정론적으로 사고할까?
사람들은 말한다. ‘결정론은 절대로 틀렸어. 상대론이 절대로 옳아.’ 이 말은 자체 모순이다.
상대론이 옳다면 상대론이 옳다는 그 말도 상대적이어야 한다. 상대성의 세계관은 여전히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과 무엇이 상대적이지? 상대의 相은 서로 상이다. 서로는 둘이어야 한다. 무엇과 무엇이 둘이지?
질서와 가치다. 질서는 결정론적이고 가치는 상대론적이다. 질서는 앞에서 길을 열고 가치는 뒤에서 완성한다.
계몽과 소통이 상대적이다. 동기와 보상이 상대적이다. 긴장과 이완이 상대적이다.
이백과 두보가 상대적이다. 결정론적인 거시세계와 상대론적인 미시세계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이 양자를 통일한다.
구조론적 세계관을 획득하기 바란다. 그것은 剛과 柔, 공자와 노자,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코스모스와 카오스, 교종과
선종, 순수와 응용을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들어가기
우리 시대는 해독되고 있는가?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인간들은 무리지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문명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산업화에 이어 정보화로 간다면 정보화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세기가 혁명의 세기라면 혁명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실존주의 등장, 구조주의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인상주의 화풍, 대중문화의 등장, 매스
미디어의 출현.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새로운 징후들이다. 확실히 이전시대와 차별화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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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한 줄에 꿰어 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지적 관점이 필요하다. 전지적 관점에서는 연역추론을 전개할 수 있다.
이 글은 연역적 구조로 되어 있다. 80자 안팎의 문단들이 자체 완결성을 가지고 사슬처럼 연쇄적인 고리로 이어진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를 낳고......’처럼 계속 이어간다.
자연이 인간을 낳고 인간이 공동체를 낳는다. 자연의 진리가 인간의 깨달음을 낳고, 인간의 깨달음이 공동체의 이상
주의를 낳는다. 이 논리가 일반명제를 이루어 커다란 하나의 동그라미가 된다.
‘자연-인간-공동체≫진리-깨달음-이상주의’라는 큰 동그라미 안에 같은 패턴의 작은 동그라미들이 무수히 들어 있다.
이렇듯 연쇄적인 고리로 한 줄에 꿰어내는 연역추론의 방법론을 소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잘 읽어지는 글은 아니다. 내용을 최대한 압축하여 교과서처럼 엮었다. 연역적 구조의 맥락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의
중복이 많다. 또 일반적인 쓰임새와 다르게 필자가 임의로 개념을 규정한 어휘들도 많다.
내가 목격한 사실을 알리는 글이 아니라 내가 바라본 지점을 알리는 글이다. 그래서 각주도 없고 참고문헌도 없지만
인터넷에 올려진 많은 글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두어 페이지로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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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눈과 귀와 코를 비롯한 신체감관으로부터 얻은 무질서한 정보들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인식을 성립시킨다. 그 신체감관으로 얻은 무질서한 정보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게 하는 연결고리가 구조다.
학문은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구조적 접근은 학문적 성과의 유도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지식을 설명하되 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구조의 고리들을 추적하여 인식의 접근경로를
해명하는 것이다.
인식의 유도과정을 추적하면 인간의 인식이 대부분 연역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역법(deduction)은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이를 뒤(de-)로 당겨 개별적인 사실에 적용하는 추론방법이다.
연역법이 교육(education)과 어원이 같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육은 라틴어 educatio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재능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다.
연역과 교육은 어원이 같은 만큼 원리도 같다.
교육은 인간 내부의 잠재성으로부터 끌어내고 연역은 자연의 완전성으로부터 끌어낸다. 인간 내부에 그 끌어낼
잠재성이 있어야 교육할 수 있고 자연의 내부에 그 끌어낼 일반명제가 감추어져 있어야 연역할 수 있다.
연역을 위해 자연에서 찾아낸 무오류의 일반명제가 진리의 완전성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부에도 고유한 완전성이 존재한다.
그것이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는 능력으로서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인식할 수 있다.
일반에서 개별로 가는 연역원리에 따라 인간의 인식은 보편에서 특수로 가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완전에서 불완전으로 간다. 그리고 인간의 일상적인 인식과 판단은 대부분 연역적 직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나 과학의 성과들은 대부분 귀납추론으로 얻어진다.
대부분의 오류는 바로 이러한 연역과 귀납의 혼선 때문에 일어난다.
귀납적 지식을 연역적 지혜로 전환시켜 인식해야 바르다.
연역추론을 전개하려면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내는 전지적 관점을 획득해야 한다.
역사이래 전지에 이른 사람이 없으므로 전지적 관점으로 세상 모든 것을 한 줄에 꿰어 일관되게 설명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없다.
귀납적 지식을 연역적 지혜로 전환시키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내 안의 완전성으로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여 자연의 연역원리와 나의 인식원리를 일치시키는 방법으로
전지적 관점을 획득하기다.
전지적 관점에 기초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한 줄에 꿰어 하나의 기준으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계의 모든 움직임을 그 다양성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전지적 관점으로 보면 세상은 질서와 가치로 이루어져 있다. 에너지는 질서로 나타나고 정보는 가치로 나타난다.
현대과학은 에너지의 질서를 규명하고 있을 뿐 여전히 정보의 가치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정보로 보면 세상은 하나의 근원적인 맞섬 그리고 그 맞섬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2차적인 유도와 그에 따른 무수한
전개로 되어 있다.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근원의 맞섬이 내부에 숨겨진 구조를 끌어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삶이 유도되는 과정을 해명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인식으로 맞서 판단을 유도하고 행동을 전개한다.
환경과 인간 그리고 인식과 판단, 행동이 1 사이클의 동그라미를 완성시킨다.
인식이 철학을 성립시키면 판단이 사상을 유도하고 행동은 이념으로 전개된다.
이념은 공동체 안에서 행동의 일치를 요구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소통이며 소통을 위해서는 양식이라는
무형의 언어가 필요하다.
인간은 언어로도 소통하지만 양식에 의해 근원적으로 소통한다. 양식의 완성을 위해서는 이상주의가 필요하다.
깨달음은 개인을 타자와 소통하는 강한 개인으로 완성시키고 이상주의는 공동체 내에서 소통의 양식을 완성시킨다.
개인이 전지적 관점을 얻는 것이 깨달음이면 공동체가 전지적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 이상주의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역사는 이상주의 역사이다. 이상주의 관점에서 학문의 역사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학문은 질서를 추구하는 역학과 가치를 추구하는 미학으로 구분된다. 가치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이 미다.
미학은 양식학이다. 미학이 소통의 구조를 구축한다. 그것이 우리시대가 요청하는 현대성이다.
19세기 계몽의 시대를 넘어 20세기 투쟁의 시대를 거쳐 21세기 소통의 시대로 간다. 생산력의 진보가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고 생산관계의 역전이 인류의 삶의 양식을 바꾼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최종결론이다.
지식계급이 주도하는 생산력 변화가 19세기의 계몽이면 그에 따른 생산관계 역전이 하층계급의 상승으로 나타난
것이 20세기의 투쟁이고 그 결과로 상승한 대중이 주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21세기 소통의 문화다.
광야에 흩어져 무질서하게 나아가던 군중이 갈림길 앞에서는 하나로 모인다. 그 갈림길 앞에서 계몽으로 인식을
공유하고 투쟁으로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며 마침내 소통으로 어깨동무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인식≫구조≫자연≫진리≫일반명제≫깨달음≫소통≫집단지능≫이상주의≫현대성 이러한 전개는 하나의 유도원리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인간의 인식원리로부터 자연의 구조원리를 유도하고 그로부터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하나의 일반명제를 유도한다.
그 하나의 일반명제로부터 연역하여 유도된 개인의 깨달음이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여 공동체의 이상주의로 발전
한다. 공동체의 이상주의가 개개인의 삶에 투영될 때 현대성이라는 새로운 양식은 완성된다.
제 1장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구조로 보아야 보인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메커니즘으로 보는 것이다. 메커니즘으로 보면 세상은 ‘일’로 되어 있다.
일은 외부적으로 닫혀 있으며 내부적으로 자체 완결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일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다.
일은 원인으로 시작하여 결과로 끝난다. 긴장으로 시작하여 이완으로 끝난다.
동기부여로 시작하여 성과보상으로 끝난다. 계몽으로 시작하여 소통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 사이에 현재진행의 과정이 있다.
일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이루어지는 1 사이클의 메커니즘 구조를 가지고 순환한다.
각각 만나기, 맞물리기, 맞서기, 하나되기, 열어가기가 연쇄적인 사슬구조를 이루며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시계라면 태엽에서 시작하고 바늘에서 끝난다. 태엽과 바늘 사이는 전부 맞물려 있다.
그 맞물려 있는 사슬구조를 추적하면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한 줄에 꿰기의 성공 여부에 따라 일의 미완성과 완성이
판별된다.
일은 진으로 시작하여 선을 거쳐 미로 나아간다. 인식으로 시작하여 판단을 거쳐 행동으로 나아간다. 계몽으로 시작
하여 투쟁을 거쳐 소통으로 완결된다. 일은 두 요소의 대립에 의해 촉발되며 그 대립의 해소에 의해 완결된다.
깨달음 소통 현대성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성’이다. 우리가 완성시켜야 할 ‘문화적 양식’이다. 양식은 인류의 집단지능에 의해 조직된다.
집단지능은 개인 간의 자유로운 소통에 의해 성립된다. 소통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자연의 패턴을 읽는 직관에 의해 얻어진다. 패턴은 자연의 고유한 완전성에서 비롯된다.
완전성은 구조적 완전성이다.
‘구조’가 첫 단추다. 구조의 실마리를 쫓아가다 보면 이 모든 과정과 만나게 된다.
‘구조≫완전성≫깨달음≫소통≫현대성’
존재의 구조를 파악하여 자연의 완전을 포착하고 깨달음으로 하여 그것을 내 안으로 가져오며 그것을 매개 삼아 널리
세상과 소통한다. 소통이 인류의 집단지능을 조직할 때 현대성이라는 양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21세기를 규정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의 이름은 소통일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시대정신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완성하기다. 깨달음과 소통에 의해 가능한 그것이 현대성이다.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재능을 끌어내는 것이다. 교육의 참된 의미는 고립되어 있는 개인의 능력을
보다 넓은 사회로 끌어내어 공동체의 집단지능과 연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류문명의 진보에 기여하게 하는데
있다.
교육(education)은 라틴어 educatio에서 유래한 말이다. 겉(e-)으로 당겨(-duc)서 재능을 끌어낸다는 뜻이다.
‘e-’는 끝(edge) 혹은 밖(exit), ‘duc-’는 밖으로 ‘당겨서 끌어낸다.’
파생어로는 앞(pro-)에서 이끄는 프로듀서(producer), 사물의 가치를 끌어내는 생산(production), 안(in-)으로
끌어들이는 설득하다(induce),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뒤(de-)로 당겨 개별적 사실에 적용하는 연역법(deductio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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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아마를 단련시켜 프로를 만드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의 차이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되 장비를 갖추고 오르
느냐 아니면 아무런 준비 없이 맨손으로 기어오르느냐의 차이와 같다.
정상을 꿈꾼다면 장비가 있어야 한다. 교육은 장비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라는 눈에 보이는 장비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노하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비’도 구비되어야
한다.
목수가 연장을 사용하듯이 베테랑은 장비를 쓴다. 교과서로 전달되는 하드웨어 장비는 누구라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인성교육으로 전해지는 소프트웨어 장비는 훈련된 베테랑만이 가질 수 있다.
오늘날 교육계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한 분야의 정상에 오른 프로페셔널과 베테랑만이 가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장비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다.
그림을 배운다면 연필로 긋고 붓으로 칠하는 기교보다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를 구상하는 단계부터 작품을 완성하고
난 다음 학부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여는 단계까지 1 사이클로 이루어지는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운전자의 옆자리에 동승해서는 같은 길을 열 번 갔어도 막상 핸들을 잡으면 길을 찾지 못한다.
내 손으로 핸들을 잡는다면 길치가 아닌 이상 한 번 가본 곳은 반드시 찾아갈 수 있다. 전 과정의 체험이 중요하다.
전체과정을 체험한 어린이는 집으로 돌아와 그날 하루 동안 겪은 일을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그 ‘이야기’가 내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교육은 실패다.
‘동기유발≫과제실행≫성과보상’으로 이어지는 1 사이클의 완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엄마 앞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중에서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과제실행뿐이라는데 있다.
동기유발과 성과보상에 대해서는 평가가 불능이다. 평가가 가능한 부분만 수업하는 기술교육에서 벗어나 평가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훈련하는 전인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참된 교육이 그것이다.
전인교육을 위해서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다.
교과서나 학교건물처럼 눈에 보이는 장비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비다.
체험과 노하우가 또한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교과서 위주의 하드웨어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문제는 창의력이라는 소프트웨어다.
경험부족에 노하우 빈곤이다. 인간의 창의가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한 번도 선두에 서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베테랑과 풋내기의 차이는 어느 지점에서 발견되는가?
내 안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추어 있는가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카더라’ 말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프로라면 누구나 그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 경험 있는 베테랑들은 다들 그 장비를 하나씩 구비하여 두고 있다.
자유방임이든 스파르타식이든 알려진 교육방법들은 그 장비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교보재나 참고서로 이루어진 하드웨어를 판매할 뿐 체험과 노하우라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없으면 힘을 쓸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있는데 집으로 돌아와 엄마 앞에 털어놓을 것이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요하게 말하려고만 드는 아이가 제대로 배운 아이다.
‘동기유발≫과제실행≫성과보상’이라는 전체과정에 참여한 경험이 없으면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곧 소통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그 분야를 떠나 다른 모든 분야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알아채기다.
그것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그것이 소통이다. 교육은 소통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계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문명과 소통하고 역사와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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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시대 이래 고등교육이 널리 보급된 선진국 중에서 다시 후진국으로 추락한 예는 없다. 왜일까?
한 국가의 운명이 그 집단 전체가 가진 집단지능의 질적 수준에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힘으로 선진국이 된 예도 없다.
침략전쟁이나 매장자원의 발견 혹은 쿠데타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문명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공동체의 집단지능 계발에 의해서만 진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전쟁을 일으킨 나라이든 식민지 지배를 당한 나라이든 어떻게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일시적 좌절을 딛고 재도약에 성공하고 있다.
이로써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육의 최종목표는 공동체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함에 있다.
그리고 소통하기다. 한 사람의 지식은 전체 지구촌 인류문명의 일부로 기능할 때 한해서 유의미하다.
알려진 교육사상들은 그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여전히 계몽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통이 없는 교육은 실패다. 내 머릿속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미술수업을 받아 실력이 늘었다 해도 그 실력은 손가락을 운용하는 하드웨어 장비에 불과하다.
그리고 싶어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노력한 만큼 성과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 소통의 한 단위가 되는 이야기는 완성
된다.
욕망을 일으켜야 하고, 성과를 달성해야 하고, 보상이 따라야 한다.
욕망과 성과와 보상이 한 줄에 꿰어져야 엄마 앞에서 털어놓을 이야기의 요건이 구성된다. 그 이야기를 획득할 때
인류의 집단지능과 소통할 수 있다.
참된 교육은 과제의 수행에 그치지 않고 그 성과를 타인에게 전파하고 타인과 공유할 때 완성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기를 쓰고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말듯이 모두 털어놓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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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에서 몬테소리, 로웬펠드로 이어지는 교육계의 경향도 구호가 그럴듯할 뿐 실제로는 교육포기이기 쉽다.
요즘 유행하는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은 환경을 조성하고 자극을 가하면 저절로 된다는 식이다.
교육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장비가 있어야 한다. 그 장비는 소통의 장비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져 있어야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교육은 실패다.
스승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고 친구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공동체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지 못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모든 교육학자가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기에서 보상까지 전체과정의 체험이 없으면 창발성은 유도되지 않는다.
자연의 진리에 기초한 완성형의 재현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면 장비는 사용될 수 없다.
‘자연의 진리≫완성형 포착≫모방과 재현≫전체과정의 체험≫이야기의 획득’이라는 과정을 거쳐 교육의 성과는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한다. 자연의 진리로부터 완성된 패턴을 끌어내는 과정을 안내하지 않으면 창발성 유도는 실패다.
교육(education)은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밖(e-)으로 끌어내는(-duc)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끌어내려면 장비가 필요하다. 그 장비는 연역의 장비다.
연역(deduction)과 교육(education)의 어근이 같다는 점에 주목하라.
연역은 일반명제를 앞세운 다음 이를 뒤(de-)로 당겨(duc) 개별적 사실에 적용한다. 연역하기 위해서는 일반명제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명제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찾아진다. 창발성은 그로부터 연역하여 유도된다.
창발성은 자연과 접촉하고 자연에서 뒹굴며 그 자연의 완성된 모습 안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
에서 얻어진다. 자연의 내부에 감추어진 이야기와 동조화되는 능력이 직관력이다.
평범한 하나의 바위,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부는 바람, 누워있는 흙들도 다들 자기 내부에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자연의 이야기는 ‘결’이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질 때 자연의 ‘결’을 포착할 수 있다.
자발성과 창의성은 교실에 가둬놓지 않고 막연히 들판에 풀어놓는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자연의 완성된 모델로부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읽는 직관력에 의해 포착되고 거기서 연역적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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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이야기를 준다. 이야기는 가치의 배달이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완전한 자연에서 왔고 이상적인 사회로 간다.
자연과 나와 사회를 가치라는 끈으로 이어주는 것이 이야기다.
창의력에 주목하는 교육이론가들이 많으나, 교육이 끌어내는 것이며, 끌어내야 할 것이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사전에 세팅하고 장착해야 하는 하나의 장비라는 사실을 모른다.
존 듀이 이래 강조되어 온 실용주의 한계이다.
합리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합리주의는 연역법이다.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은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소산에 불과하다.
자연에서 여러 가지를 자유롭게 경험하다 보면 우연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식이다.
우연히 자연의 완전성과 소통할 수도 있다. 직관력이 뛰어난 어린이는 자연에서 뒹구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패턴을
읽어내고 이를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이는 방임할 경우 저절로 PC방에 가두어져 버린다.
교육은 우연에 의해서 가능하지 않다. 엄격한 지도에 의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어린이에게 자유를 주어 여러 가지를 체험하게 하고 온갖 장난감을 던져주면 우연히 교육이 이루어질 거라는 추측은
무책임하다.
시골 어린이들에게 있어 자연은 감옥과 같다. 저절로 갇혀버린다. 시골의 단조로움과 무료함 속에 갇혀 버린다.
자연의 완전성에서 숨은 규칙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동기부여와 성과보상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어린이들에게 도시는 감옥과 같다. 저절로 게임방에 갇혀버린다. 미술관에서 걸작을 본다 해도 그 안에 숨은
미학적 완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내 안에 이야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그 완전성과 공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은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이야기의 획득이다. 그것은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는 것이다.
그것을 갖출 때 공명할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할 수 있고 미술관의 걸작과 교감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반하게 된다. 빨려들게 된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규칙성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써먹고 싶어 하게 된다. 누구에겐가 자랑하고 싶어 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과 소통하게 된다.
동기부여에서 과제수행을 거쳐 성과보상으로 진행되는 전체과정에 참여하는 데서 이야기는 획득된다.
전체과정을 한 줄에 꿰어낼 수 있으므로 다음 단계의 진행을 예측할 수 있게 될 때 베테랑이 되고 프로가 된다.
나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전체과정을 체험할 때 나이테를 품듯이 어떤 일의 전체과정을 체험하고서야 내 안에
결을 품을 수 있다.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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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규칙성에서 패턴을 읽고 그 리듬감에서 진리의 완전성을 포착할 때 인간은 전율한다.
긴장한다. 고조된다. 그리고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여 공명시킬 때 이완된다. 편안해진다. 보상된다.
인간의 행동은 긴장으로 촉발되고 이완으로 보상된다. 그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긴장이 동기유발이면 밸런스가 과제
수행이고 릴렉스가 성과보상이다. 이 셋을 한 줄에 꿰어낼 때 내 안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옛 친구를 만날 때 반가움이 사무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긴장이다. 동기부여다. 집중한다.
마주앉아 허물없는 대화를 나눔이 밸런스다. 그럴 때 엄마 품의 아기처럼 편안하게 이완된다. 릴렉스다. 보상이다.
‘긴장, 동기부여 ≫ 밸런스, 과제수행 ≫ 릴렉스, 성과보상’
긴장과 집중에 의한 동기부여, 밸런스와 교감에 의한 과제수행, 릴렉스의 이완에 의한 성과보상이 한 줄에 꿰어져
행동의 1 사이클을 이룬다. 긴장의 출발점과 이완의 종결점이 다시 만나 동그라미를 완성시킬 때 이야기는 완성된다.
긴장은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고 뇌가 몸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완은 지방이 중앙을 통제하고 몸이 뇌를 통제하는 것
이다.
문제는 이완할 수 있는가이다. 릴렉스하기 어렵다. 릴렉스는 밸런스를 거쳤을 때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긴장은 병사들이 정렬하여 연단 위의 대장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완은 병사들이 넓은 연병장에 자유롭게 흩어져 있
으면서도 대장의 통제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확실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병사와 대장의 교감에서 밸런스가 성립해야 온전히 릴렉스할 수 있다.
병사 1인에게 일어난 일이 대장의 참모부까지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제대로 지방이 중앙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럴 때 릴렉스는 가능하다.
최고의 팀은 구성원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각자 최고의 기량을 펼치되, 주장과 팀원들 사이에 완벽한 교감이 이루어져
최고의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완전히 이완된 상태에 도달해야 팀은 최고의 실력을 발휘한다.
온전한 밸런스가 완전한 릴렉스를 유도한다. 밸런스 없는 릴렉스는 팀을 붕괴시킨다. 반대로 밸런스 없는 긴장은 팀을
경직시킨다. 몸이 굳어져서 팀원들 각자가 가진 최고의 기량을 펼쳐내지 못하게 한다.
완전한 집중의 정신차리기가 완벽한 교감의 밸런스를 끌어내고 완벽한 밸런스가 완전한 이완의 릴렉스를 끌어낼 때
그것이 곧 깨달음의 경지다. 내 안에 이러한 구조를 갖추는 것이 이야기의 획득이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동그라미가 있어야 한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긴장과 소통과 이완의 1 사이클이 이루어지는 전체과정을 유기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은 콘텐츠를 가질 때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고 작가는 이야기를 가질 때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깨달음은 소통의
수단을 얻는 것이다. 자연과도 소통하고 진리와도 소통하고 역사와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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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장비의 획득이다. 자연의 진리와 인간의 문명을 연결하기 위해서 자연과 접속할 수 있는 모뎀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동기부여에서 과제수행, 성과보상으로 이어지는 행동의 1 사이클 구조를 완성해야 한다.
간절한 만남의 기쁨으로 벅차오른 만큼, 나의 전부로 상대의 전부를 끌어내는 막힘없는 대화로 서로를 불태우고
그럴 때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해지는 릴렉스로 가라앉히기가 이야기의 구성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한다. 하드웨어는 학교 건물과 교과서와 수업으로 이루어진 정규교육의 시스템
이다.
소프트웨어는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참여한 체험에 의해서 세팅되는 프로페셔널과 베테랑만의 노하우다.
루소와 듀이 이래 강조되는 묻지마 방임주의는 극소수의 재능있는 천재를 우연히 찾아낼 뿐 체계적인 교육이 아니다.
서머힐 스쿨을 비롯하여 한국에 유행하고 있는 대안학교들도 투입한 비용에 비해서는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들은 주입식교육의 단점을 소극적으로 보완할 뿐 넘어서지 못한다.
참된 교육은 떠먹여 주는 주입식교육도 아니고 내버려두는 방임식교육도 아니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고 이야기를 끌어내는 소통의 교육이다.
소통의 교육이어야 한다. 교육은 내 안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소통으로 끌어내고 이야기로 끌어내고 완성으로 끌어내고 미학으로 끌어내고 깨달음으로 끌어낸다.
동기부여로 끌어내고 성과보상으로 끌어낸다.
한 명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바른 이해가 아니다.
거꾸로 다수의 범인이 세팅해 놓은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장비가 그 한 명의 천재가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천재는 천재가 속한 그룹의 집단지능에 의해 탄생된다. 토대가 부실하고 바탕이 척박하다면 천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 명의 영재를 가르쳐서는 어떻게 가르쳐도 천재가 되어주지를 않는다.
천재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료 열 명의 존재라는 좋은 환경을 조성해줄 때 천재는 탄생한다. 참된 교육은
천재가 숨 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것은 열 명의 대등하게 소통하고 공유하는 동료를 양성하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큰 집을 짓듯이 일 층부터 차례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강변에서 모래성을 쌓듯이 단순한
단계에서 먼저 전체를 완성하고 난 다음 그 완성된 모델에 밀도를 채워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초등교육에서 중등, 고등교육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1층 위에 2층과 3층을 올리는 식이 아니라 초등교육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본형의 내부에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밀도를 채워나가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초등교육 단계에서 이야기의 완성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완성될 수 없다.
자연에서 유도한 것을 내 안에서 재현하여 문명으로 전송하는 본질을 간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류 집단지능의 진보에 기여할 수 없다.
한국에서 어학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유아 수준의 낮은 단계에서 듣기와 말하기의 전체과정을 완성하지 않은 채
알파벳과 단어학습의 높은 단계로 건너뛰기 때문이다. 1백 단어 안팎의 낮은 단계에서 ‘결’이 완성되어야 한다.
알파벳에서 단어≫문장≫문법 순으로 점차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되짚어야 한다.
교육은 밖에서 안으로 하나씩 들여놓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
이다.
자연에서는 부분을 조직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일이 없다. 자연에서는 작은 하나의 씨앗 속에 배아형태로 미래의
완성형이 예비되어 있다. 씨앗 속에 완성된 나무의 모습이 숨어 있다. 유전자 지도 속에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 있다.
자연의 방법은 기술적으로 완성된 배아에 수분과 당분을 집어넣어 크기를 부풀려 겉으로 드러내기다.
어학교육도 이와 같다. 1백 단어만으로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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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단어보다 문법을 먼저 배운다. 낮은 수준의 문법을 익힌 다음 단어를 그 문법의 틀에 집어넣어 의미의 밀도를
높인다. 아기가 비록 ‘엄마’라는 한 단어를 말했어도 맥락으로 보면 이미 문장을 말한 것이다.
자연에서는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아기는 전체를 먼저 배운다.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나 ‘엄마’ 한 마디로
타인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아기의 문법은 완성되어 있다.
단어 위에 문법이 있고 문법 위에 상황이 있다. 가장 큰 전체는 상황이고 가장 작은 부분은 단어다.
전체가 먼저이므로 아기는 먼저 주어진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논리 안에서 문법을 체득한다.
그러므로 상황에 빠뜨려 놓아야 진정한 학습이 된다.
외국인과 맞닥뜨리는 일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이 필요하다. 교육은 끌어내는 것인데 그 끌어낼 상황에 빠지지 않았
으므로 끌어낼 수도 없으니 학습에 실패하는 것이다.
아기는 현장에서 본능적으로 상황논리를 파악하고 그 상황논리 안에서 스스로 문법을 끌어낸다.
그러나 교과서 교육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시뮬레이션이 없으므로 상황논리를 인식할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죽은 교육이다.
자연은 언제라도 완성되어 있다. 진리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포착되는 규칙성이다. 완성이 먼저다. 일반명제가 먼저다.
전체가 먼저다.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운다. 형식을 완성한 다음 밀도를 채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먼저고 소통이 먼저고 이야기가 먼저다. 생각을 조직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기
유발과 성과보상의 일 사이클로 먼저 이야기를 세팅해 놓고 그 안에 사유를 채워넣는다.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이에 전율하면서 그 완전성과 소통하는 능력이 없다면 교육은 실패다.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패턴과 리듬감을 읽는 능력이 없다면 실패다. 상황파악과 상황재현이 안되기 때문에
실패다.
인간의 그릇 크기는 애초에 그 지점에서 정해져 버린다. 감응하지 못하는 작은 그릇에 고등교육으로 밀도를 높인들
한계가 있다. 원초적으로 큰 그릇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내 안에 재현하여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이 이야기를 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모뎀으로 삼아 인류문명의 집단지능과 접속하고 문명의
진보에 기여하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위험한 교육정책은 하나의 획일적인 교육방법을 국가 전체가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선수가 골키퍼가 되거나 아니면 모든 선수가 공격수가 되려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평준화 교육이든 엘리트 교육이든 어느 하나에 올인하면 실패한다.
포지션이 나누어져야 하듯이 사교육도 있어야 하고 공교육도 있어야 한다.
일부의 주입식 교육도 있어야 하고 창의적인 대안교육도 있어야 한다.
다양한 교육방법의 역할분담에 의해 인류의 집단지능은 완성된다.
만약 모든 한국인들이 같은 교과서로 같은 내용을 학습한다면 이상적인 포지션의 조합에 실패하게 되므로 한국형
집단지능 모델의 완성은 실패로 된다.
조중동식 교육은 모방에 능한 후진국형 하급 기술자를 양성하고 전교조식 교육은 선진국형 창의적인 지도자를 양성
한다. 조중동식 교육이든 전교조식 교육이든 어느 하나로 획일화 되는 것이 가장 나쁘다.
가장 좋은 교육은 동료를 양성하는 것이다. 천재는 천재풀에서 확률적으로 나타난다.
열 명의 좋은 동료가 한 명의 천재를 키운다. 그러므로 역사의 많은 시기에 인재는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거나 아니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선조 때 가장 많은 인재가 나타났다. 이순신에서 권율, 유성룡,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무수한 인재들이 한꺼번에 무리지어 쏟아졌다. 그 이후로는 인재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 초만 해도 유교주의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왕조의 창업과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귀족이 벼슬을 세습했던 것이다.
사림계급에 대한 동기부여도 성과보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중종 때 조광조가 뿌린 씨앗이 선조 대에 꽃을 피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상승효과로 인재의 붐이 일어
났다. 그러나 한번 시스템이 구축되고 기성의 학맥이 권위를 갖게 되자 인재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권위적인 유교시스템의 한계로 인해 스승과 제자가 있을 뿐 동료가 없어진 것이다. 창의적인 교육은 유교시스템이
건설되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성립했을 뿐 그 시스템이 건설된 이후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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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기봉씨는 불행해졌는가? 주변에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 한 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철원으로 이주했어도 역시 불행해졌다. 왜 모두들 그를 속이고 이용했을까?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한 명의 지성인이 엄기봉씨 주변에 있었다면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어느 지역, 어느 공장, 어느 구석을 가더라도 반드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어떤 집단, 어느 지역, 어떤 그룹에 지성인이 한 명도 없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난다.
그 사회는 위험에 처하고 만다. 지성인은 시골에도, 공장에도, 도시에도, 정부에도 고루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교육은 이상적인 포지션의 조합이다. 그것은 바깥을 감시하고 방향을 판단하는 리더와, 안을 감시하고 조직
을 통제하는 총무와, 과제를 수행하는 기술자가 제각기 역할을 분담하고 조화롭게 팀을 유지하는 것이다.
강남식 교육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교육포기로 이끈다. 동기부여에서 배제되고 성과보상에서도 밀려난다.
그 경우 어떤 지역이나 집단에서는 엄기봉씨를 도와줄 지식인이 한 명도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공간이 고립된 섬이나 집창촌과 같이 단절된 공간이라면 인권유린이 일어나도 사회가 모르게 된다.
사회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유영철과 같은 사이코 패스가 나타난다. 그 경우 사회는 몇 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 뉴욕타임스는 인구 1만3천에 불과한 수족 보호구역 내에서 지난해 193건의 자살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공식 집계
됐다고 보도했다. 공중위생국 집계에 따르면 대평원 지역에 산재한 인디언 보호구역 청소년 자살률이 미국 전체
평균에 비해 10배나 높았다고 한다.(중략)
2003~2006년 알래스카 원주민의 자살률은 미국 평균보다 5배나 높았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원주민 전통 사회가 붕괴되면서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라는 분석을 전하고 있다.(연합)
교육의 완성은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하는데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고등교육을 받은 친구와 동료를 가지고,
그 동료로부터 동기를 얻고 성과를 공유하는 사회화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강남식 교육이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면 미국 인디언 사회의 붕괴에서 보듯이 국가로부터
유리되어 동기를 상실하고 성과보상에서 배제되어 삶을 포기하는 예가 속출하게 된다.
한국인이 금메달을 따고 한국팀이 월드컵 우승을 하고 한국사람이 노벨상을 받고 한국의 GDP가 두 배로 상승해도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되기 때문이다. 참된 교육은 사회구성원 모두를 상관있게 만드는 것이다.
동기부여를 하려면 성과의 공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것이 나와 상관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성공이 모두의 성공으로 될 때 우리는 서로 상관있는 존재가 된다.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함으로써 가능하다. 모든 한국인이 주변에 고등교육을 받은 동료를 한 명 이상 가지게 하는
방법으로 인류문명과의 접속은 가능하다. 성과의 공유에 의한 동기유발은 가능하다.
한국의 지정학적 구도에 맞는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 미국처럼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면 인적자원이 풍부하므로
어떻게든 집단지능이 형성되어 소수의 천재가 다수의 범인을 이끌어 갈 수 있으나 한국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변에 비교될 나라가 없어 가치판단이 어려운 고립된 반도국가인 한국은 모든 국민이 고르게 일정한 수준에 도달
하지 않으면 작은 내부갈등에도 사회전체가 동요하게 되어 개인의 삶이 극도로 피곤해진다.
한국은 한 명의 전여옥급 사이코 패스가 국가 전체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특성에 맞는 교육제도가 창안되어야 한다. 모든 한국인이 주위에 지식인 친구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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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테이지 A에서 스테이지 B로 상승하게 하는 것이다.
참된 교육은 A와 B 사이를 연결하는 장비를 제공한다. 나는 남들이 쓰지 않는 특별한 장비를 고안하고 있다.
그것은 구조론이라는 장비다.
구조론은 존재의 메커니즘을 규명한다. 어떤 과제의 수행에 있어서 다음 단계의 진행을 예측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물론 예측은 빗나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검증이 가능한 객관적인 장비를 사용하는가이다.
장비를 사용한다면 예측이 빗나가도 보완할 수 있다. 자(尺)를 사용하여 건축한다면 그 자의 운용에 오류가 있더
라도, 그 자의 원리 자체에 오류가 없는 이상 운용상의 오류를 시정하여 마침내 그 건축을 완성시킬 수 있다.
우리가 완성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집단지능 시스템이라는 장비다. 그 장비를 건설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
하게 하려는 것이다. 완성된 개인이 서로 막힘없이 소통할 때 그 장비의 스위치는 켜진다.
깨달음 - 우주와의 합일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노랑제비꽃 화분이다.”
(반칠환의 노랑제비꽃)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의 법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이오?(祖師西來意)” “뜰 앞의 잣나무로다(庭前栢樹子) (조주스님의 공안)
모두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완전성의 경지다. 우주와의 합일의 경지라고도 하겠다.
누구든 한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와 세상이 온통 하나가 된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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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과학의 출발점은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는 요소환원주의 논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을까? 에너지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정보’로 보면 부분의 합은 언제나 전체보다 작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규명하고 있듯이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낮은 집적도를 가진다.
열역학에서는 이를 ‘무질서도의 증가’로 표현한다. 이러한 원리는 특히 스포츠 분야에서 잘 관찰될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의 복잡한 연결동작이나 혹은 야구나 골프의 스윙에서 각 부분동작의 합은 항상 전체동작보다 작다.
부분동작의 합에는 리듬과 타이밍 그리고 호흡과 밸런스라는 핵심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투수가 공을 놓는 순간 타자가 호흡을 멈추면 공이 수박만큼 커 보인다. 반대로 호흡을 들이마시면 그 주변 풍경들이
보인다. 관중석도 보이고 외야수도 보인다. 그 경우 공이 좁쌀만큼 작아 보인다.
이 부분은 에너지의 환원논리로 설명할 수 없고 정보의 집적원리로 설명해야 한다.
하나의 공이 주변의 몇 가지 변수와 동시에 맞물리느냐다. 리듬과 물리고 호흡과 물리고 타이밍과 물리고 밸런스와
물린다.
전체동작에는 부분의 합에 없는 것이 있다. 맞물림이다. 스포츠맨이 이 원리를 터득할 때 선수의 기량은 급속하게
향상된다. 코치들은 보통 릴렉스라는 표현을 쓴다. 야구에서는 이를 두고 ‘힘을 빼고 던진다’는 표현을 쓴다.
프로야구 속설에 ‘힘을 빼고 던지는데만 1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이제 힘 빼고 공을 던질 만하니까 은퇴할 때가
됐어요.”(김일융 선수) “선동렬 코치에게 전수받은 기술은 힘을 빼고 공을 던지는 방법입니다.”(배영수 선수)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팔에서 힘을 빼면 공을 던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힘을 빼고 던지라고 하지?
성철스님의 선문답과도 같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최고수가 되려면 어느 정도는 깨달음의 경지를 통과해야 한다.
교육학에서는 이를 전습법과 분습법으로 설명한다. 분습법은 부분을 학습한 후 이를 연결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
이고 전습법은 서로 맞물려서 이루어진 전체의 맥락을 먼저 이해한 후 부분동작을 가다듬는 것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으므로 전습법이 옳다. 분습법에 의존할 경우 리듬과 타이밍과 호흡과 밸런스의 맞물림을
포착할 수 없다. 프로야구에서 힘을 빼고 던진다는 말은 전습법에서 강조되는 릴렉스 원리를 활용하라는 뜻이다.
피아노 연주라면 손목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전개된 엄지와 비엄지의 균형이 있다.
엄지와 비엄지의 균형이 평형에 도달할 때 손목이 개입한다. 낮은 단계의 대칭이 평형을 이룰 때 높은 단계가 개입
하는 것이다.
손과 손목 사이에서 힘의 배분이 평형에 이를 때 팔꿈치가 개입하고, 팔꿈치와 손목이 균형을 이룰 때 어깨가 개입
한다. 그리고 상체와 하체가 차례로 개입한다. 최종적으로는? 대지(大地)가 개입한다. 그리고 온 우주가 개입한다.
마침내 신(神)과의 합일이 된다. 적어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단계적 개입 과정에 리듬과 타이밍과
호흡과 밸런스의 맞물림이 있다. 전습법으로 훈련해야 그러한 맞물림에 의한 외계의 개입을 깨닫게 된다.
골프선수가 최고의 스윙을 하는 방법은 하체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손과 손목, 손목과 팔, 팔과 상체의 대칭구조
가 평형에 도달할 때 밸런스가 이루어져 하체가 개입한다. 반대로 상체가 무너지면 하체가 받쳐주지를 않는다.
마찬가지로 상체와 하체의 균형이 평형에 이를 때 대지가 개입하고 인체와 대지가 평형을 이룰 때 온 우주가 받쳐
준다. 온통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를 두고 파울로 코엘료는 ‘온 우주가 돕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완벽한 밸런스는 완벽한 힘의 배분이다. 어느 한 부분에 힘이 들어갔을 때는 호흡도 리듬도 타이밍도 밸런스도 느껴
지지 않는다. 지방이 중앙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지방에서 입수된 정보가 중앙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완벽한 릴렉스에 도달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해제될 때 지방에서 피드백된 정보가 중앙에 전달된다.
하체의 정보가 오고 대지의 정보가 온다. 비로소 대지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릴렉스는 막연하게 긴장을 풀고 힘을 빼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긴장에서 인체의 각 부분을 통제하여 완벽한 밸런스의
지점을 통과한 다음에 얻어지는 릴렉스다. 긴장이 긴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밸런스인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른 밸런스 원리가 있다.
어떤 계에 밀도가 걸려 있다면 부분과 전체가 직결로 맞물리기 때문에 계는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한다.
지방에서의 미세한 변화에 대한 정보가 바로 중앙에 전달되는 것이다.
스윙을 한 후 팔로우스루 동작이 완전하지 않으면 인체와 대지 사이의 불균형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켜 임팩트 순간에
떨림을 낳는다. 공을 친 다음의 동작이 공을 치는 순간에 영향을 미친다.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환원논리는 힘의 크기를 판단할 뿐 맞물림을 판단하지 않는다.
풀잎에 매달린 물방울이 떨어진 다음 풀잎에 남은 물의 응집이 물방울의 낙하를 결정한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자동변속기 차량은 수동에 비해 연비가 나쁘다. 그런데 특정 기어비에서는 록업클러치 기능에 의해 엔진구동축과
추진축이 직결로 연결되면 유압에 의한 힘의 전달이 아닌 기계적인 맞물림이 일어나 연비가 좋아지는 특성이 있다.
최고의 투구, 최고의 펀치, 최고의 스윙은 완벽한 힘의 배분에서 얻어진다.
공과 손가락, 손목, 팔, 어깨, 상체, 하체, 대지, 지구 중심축이 록업클러치 기능에 의해 직결로 연결될 때 그러하다.
그 순간 온 우주가 돕는다.
경기장의 스포츠맨과 무대 위의 배우와 산사의 스님들은 공통점이 있다. ‘relax’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relax’의 진정한 의미는 고도의 집중상태에서 얻어진 완벽한 힘의 배분이다. 곧 밸런스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맞물려 있다. 서로 간섭한다. 그러므로 실패한다. 완벽한 릴렉스에 의해 간섭은 해제된다.
그 순간 산은 산이 되고 물은 물이 된다. 한 그루 뜰 앞의 잣나무가 우주와 소통한다. 노랑제비꽃 한 송이 피어난다.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기
깨달음이라는 개념은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언어가 서툴렀던 옛 사람이 덧씌운 신비주의적인 의미를 버리고 본연의
깨달음을 말해야 한다. 깨달음은 완성을 위한 완전의 깨달음이다. 깨달음과 완전성은 동의어이다.
자연은 완전하다. 자연의 완전성을 매개로 삼아 내 안의 완전성을 끌어내고 이를 토대로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하여
소통함으로써 세계의 완성으로 전개하여 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깨달음이다.
대승의 정신에 따라 깨달음의 참된 의미는 널리 대중과 소통함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완성에 있다.
완전한 자연의 밭에 완전한 나의 씨앗을 심어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꽃을 피우고 현대성이라는 열매를 맺기다.
깨달음은 우주와의 합일이다. 자연의 완전성과 감응하기다. 안테나가 있어야 감응할 수 있다. 자연의 완전성에 의해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규칙성을 포착할 수 있는 직관력이 계발되어야 한다.
자연은 밀도가 걸려있는 계 내부에서의 안정성을 지향한다. 그것이 자연의 완전성이다.
그 완전성으로 외부세계와 소통한다.
완전한 한 알의 씨앗을 뿌릴 때 완전한 한 송이 꽃은 피어나고 완전한 한 개의 열매는 맺힌다.
불완전한 씨앗은 싹트지 않고 불완전한 꽃은 나비를 초대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열매는 썩어 없어진다.
외부와 소통하지 못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다. 인간의 행동 또한 언제라도 고립계의 완성을 지향한다.
자연의 완성을 포착할 때 반갑고 내 안의 완성과 교감할 때 자연스럽고 세상과의 소통에 성공할 때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어색함과 떳떳함의 감정이야말로 완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긴장과 이완의 1 사이클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의 고립계를 이룬 것이다. 동기부여와 성과보상의 시스템을 구성하며
행동의 1 단위를 이룬다. 이때 행동을 촉발하는 기쁨과 행동을 종결하는 자랑스러움이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인간은 만날 때 떳떳하고 대화할 때 자연스럽고 받아들일 때 자랑스럽다. 만날 때의 온전한 긴장이 떳떳하고 교감할
때 완벽한 밸런스가 자연스럽고 받아들일 때의 완전한 릴렉스가 자랑스럽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가 여기에 있다. 신(神) 앞에서 단독자로 삶과 죽음을 넘어 실존의 동그라미를 완성함이 자유
라면 삶 안에서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함이 사랑이고 일상에서 오늘 하루의 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이 행복이다.
자유는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넘는다. 나와 세계를 하나의 고립계로 통일하여 완성한다. 사랑은 나의 삶 안에서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완성시킨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나의 행동을 의미롭게 완성시킨다.
오늘 당신의 일상은 자연스러운가? 떳떳한가? 완성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하다. 당신의 일생을 통틀어 일관
되게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온전한가?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사랑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세상 전부와 맞서는 지점이 있는가? 자연과의 교감에서 진(眞)을, 공동체와의 소통에서 선(善)
을, 삶의 양식에서 미(美)를 완성하여 가고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완성시켜야 할 자유다.
깨달음은 당신의 일상을 행복으로 완성시키고 당신의 삶을 드라마로 완성시키고 당신의 실존을 세계정신의 일부로
완성시킨다. 그렇게 끝없이 동그라미를 그려나간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우주로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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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본래 완전한데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해체되어 불완전해진 것이다.
인간에게는 해체되기 전의 본래의 완전성과 감응하는 안테나가 있다.
어색함과 떳떳함,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그것이다.
자신의 일상적 행동 하나하나가 매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창피해질 것이다. 어색해질 것이다.
부끄러워질 것이다. 죽고 싶어질 것이다. 상심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자연이 당신을 통제하는 안테나다.
자기 내부에 ‘이야기’를 품을 때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다. 내 안에 이야기를 품는다는 것은 일의 진행에
있어서 다음 단계의 프로세스를 안다는 것이다. 전모를 보고 일의 전체과정을 안다는 것이다.
길을 떠나온 이가 출발점과 목적지를 알고 나의 현재 위치를 아는 것과 같다. 나침반을 가진 것과 같고 등대를 바라
봄과 같아서 갈림길을 만날 때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언제라도 진로를 바로잡을 수 있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완전한 긴장, 완전한 깨어있음을 연습해야 한다. 그로부터 전개하여 완전한 평상심,
완전한 밸런스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로소 완전한 이완, 완전한 릴렉스가 가능하다.
의식적으로 긴장한다면 깨어있음이 아니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면, 가슴이 답답하고 스트레스
를 받는다면 불완전하다. 그것은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고 명령이 중간에서 반사되어 되돌아온 것이다.
이창호의 침착한 한 수처럼 돌부처의 마음으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전체 경로를 완전히 한 줄에 완전히 꿰어내는
것이 참된 긴장이다. 곧 중앙이 지방을, 두뇌가 몸을, 전체가 부분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는 상태다.
그럴 때 명령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명령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중간에 메아리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의 소통, 나의 내부에서 전체와 부분의 소통, 명령하는 두뇌와 수용하는 몸의 소통이 완벽한 밸런스를
이룬다.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준다면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기합을 넣고 호통을 치고 눈을 부라린다면
전체가 부분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긴장이 자각되고 있다면 불완전한 긴장이다.
0.1초의 찰나에 먹이를 낚아챌 수 있는 맹수의 날렵함을 얻어야 한다. 관절과 근육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반사적으로
몸을 날릴 수 있어야 한다.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어서는 결코 날렵해질 수 없다.
완벽한 긴장은 고흐가 미친 듯이 그릴 때, 연주자가 신들린 듯이 두드릴 때, 작가가 밤을 새우며 원고를 쓸 때의 그
무아지경이다. 중앙이 지방을 완벽하게 통제하므로 명령이 중간에서 메아리를 일으키지 않아 나를 의식할 수 없다.
중앙이 지방에 가하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 두뇌의 명령에 대한 근육의 저항에 의해 나를 의식하게 된다.
그럴 때 어색하고 부끄럽다. 그 반작용을 소멸키는 데서 완전한 밸런스가 얻어진다. 그럴 때 자연스럽고 떳떳하다.
명령이 중간에서 반사되지 않고, 울혈을 일으키지 않고, 결절을 일으키지 않고 완벽하게 전달될 때 그 완벽한 긴장은
완벽한 이완으로 전개된다. 외계로의 완벽한 전달이 외계로부터의 완벽한 수용을 낳는다.
이때 인체는 완전히 무장해제가 된다. 나른해진다. 릴렉스가 된다. 그럴 때 자연에서 전해져온다.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볼 수 없는 그림이 잡힌다. 자연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완벽한 몰입, 완벽한 평정심, 완벽한 릴렉스의 체험이 있다면 화가 났을 때라도, 이웃과 다툴 때라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라도, 언제라도 그런 편안한 상태로 자신의 마음을 리셋할 수 있다. 재부팅할 수 있다.
그럴 때 우주와 내가 직결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투수가 투수판을 밟는 힘이 지구의 중심축까지 전해졌다가 다시
되돌아나온 느낌이다.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순환이 나와 우주와의 순환으로 확장된다.
종교인은 기도에서 그것을 구하고 지식인은 인류의 집단지능과 접속함에서 그런 기분을 얻는다.
우주와 내가 한 편이 되고 세상과 내가 한 팀을 이루고 역사와 내가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기다.
우주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마땅하고 떳떳하고 자연스럽다. 비굴하지 않고 어색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 예술가들은 창작의 몰입에서 그것을 구하고 거리의 사람들은 연인과의 사랑에서 그것을 얻는다.
이미 그것을 체험하고 있느냐이다. 그 일 사이클이 진행되는 각 단계를 알고 있느냐다. 지금 내가 그 동그라미 안에서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아느냐다. 필요한 때 언제라도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이다.
만약 그것을 깨닫는다면, 내 안에서 그것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자연과 온전하게 교감할 수 있다면,
필요한 때 자유자재로 그 상황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세상 모든 문제를 다 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자연의 완전성과 교감하는 능력이다.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이다.
나의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난반사를 억제하고 모두를 한 줄에 꿰어내는 능력이다. 마침내 우주와 하나가 되기다.
그럴 때 귀납으로 얻은 교과서적인 지식을 연역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전지적 관점이 획득된다.
인식을 종합하여 거기서 판단을 유도하고 행동으로 전개시키는 구조를 내 안에 세팅하는데 성공한다.
곧 지식이 지혜로 바뀐다.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세상을 바르게 보는 방법은 구조로 보는 것이다.
구조론은 서로 다른 둘이 맞물리는 접점에서 발견되는 규칙성을 탐색한다. 서로 다른 둘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구조로 본다는 것은 관계로 보는 것이다.
세상의 기본은 관계다. 관계는 ‘맞섬’이다. 그것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대칭논리다.
그곳은 상대성의 장(場)이다. 이때 너와 나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하나로 엮인다.
둘이 엮여 하나를 이루되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그것이 구조다. 인체의 관절부분이다. 힘이 전달되는
부분이다. 외부세계와 대립각을 세운 지점이다.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이별의 장이다.
세상은 구조의 얽힘에 의해 크게 통일되어 있다. 그것이 엮여서 질서로 나타나고 혹은 맞서서 가치로도 나타난다.
구조가 하나의 핵에서 비례로 엮이느냐 두 개의 핵에서 반비례로 엮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 하나의 핵 (▷▷) - 비례로 엮여 질서를 이룬다.
전체와 부분 사이에 성립하며 지배와 종속의 수직적 질서를 구축한다.
요소환원주의, 질량보존의 법칙, 에너지의 환원성질을 성립시킨다.
● 두 개의 핵 (▷◁) - 반비례로 엮여 가치를 이룬다.
별개의 둘 사이에서 성립하며 대등하게 맞서 수평적 질서를 구성한다.
상대성 이론,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정보의 집적도를 성립시킨다.
▷▷로 핵이 하나일 때 전체와 부분, 중앙과 지방의 엮임이 질서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성립시키는 요소환원주의와 인과율이 유도된다.
에너지 개념이 부분과 전체 사이의 환원성질을 설명한다. 근대과학은 이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로 핵이 둘일 때 대등한 둘 사이의 맞섬에서 가치가 성립한다. 상대성 원리, 역설의 법칙이 유도된다.
정보의 일방성으로 나타나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성립된다. 근대과학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구조론은 이 원리에 기반을 둔다. 서로 다른 둘이 만나 서로 엮여서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일 때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 전체가 하나로 되느냐 아니면 맞서서 끝까지 둘로 남느냐다.
세상은 구조에 의해 크게 얽혀 있다. 얽혀서 하나일 때 에너지를, 둘일 때 정보를 성립시킨다.
에너지는 남자와 남자가 힘을 합쳐 이룬 질서이고 정보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성립시킨 가치다.
남자와 남자가 합쳐진 팀에서 결원이 발생하면 외부에서 보충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합쳐진 가족에서 결원이
발생하면 외부에서 보충할 수 없다. 이때는 하나가 역할을 잃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역할을 잃는다.
남자와 남자라면 ▷▷로 뒷사람이 앞사람의 등을 보고 있다. 부부라면 ▷◁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
가치는 자석의 N극 S극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하나가 힘을 잃으면 다른 쪽도 힘을 잃는 것이다.
세상 모든 마주보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한 방향을 보고 있는 열차의 한 량이 이탈해도 나머지는 계속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마주보고 있는 젓가락 두 짝 중 하나가 이탈하면 나머지 하나도 용도를 잃는다.
가치란 서로 마주보고 있던 ▷◁ 중에서 한 짝을 잃어 홀로 남은 ▷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를 만나
다시 ▷◁를 회복함으로써 ▷와 ◁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금이 특별히 가치 있는 이유는 금이 그 변하지 않는 성질로 하여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의 역할을 잘해내기 때문이다.
금은 나머지 한 짝이 손실되어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언젠가 만날 ▷를 기다려주는 미덕이 있다.
세상은 에너지와 정보, 질서와 가치, 한 핵과 두 핵, 집합원리와 대칭원리, ‘한 방향 보기’와 ‘마주보기’로 모두 설명된다.
전자의 에너지는 근대과학에 의해 충분히 해명되었고 후자의 정보는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정보를 이해해야 한다. 맞물림을 이해해야 한다. 가치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둘이 서로 마주보고 상대성을 성립시키
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주본다는 것이다. 완성한다는 것은 마주본다는 것이다.
내 안에 마주보기의 밸런스를 갖추는 것이 결을 품고 이야기를 품고 동그라미를 품는 것이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마주보기로 맞선다. 세상 전부와 맞서고 역사와 맞서고 신(神)과 맞선다.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보아야 한다. 관계로 보고 질서로 보고 가치로 보고 상대성으로 보고 역설로 보고
패턴으로 보고 모델로 보고 포지션으로 보고 소통으로 보고 작용 반작용으로 보아야 한다.
맞섬으로 보아야 한다. 질서와 가치의 맞섬, 에너지와 정보의 맞섬, 질량보존의 법칙 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의 맞섬
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의 맞섬이 하나의 존재가 된다. 있다는 것은 맞서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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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평등한가? 누구나 평등을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도시는 온통 차단된 벽들의 연속이다.
외제차 탄 사람은 당당하게 입장하고 마티즈 탄 사람 문 앞에서 눈치 보며 겉돌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인간은 다 똑같다. 잘 나고 못난 것이 없다.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객관이 아니라 주관, 주관이 아니라 직관으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객관은 불완전한 것을 평가한다. 주관은 완전한 것을 평가한다. 직관은 더불어 소통하는 것을 평가한다.
모든 불완전한 것은 차별되고 모든 완전한 것은 평등하며 모든 소통하는 것은 아름답다.
일에는 일의 ‘결’이 있다. 일의 1사이클이 있고 우선순위가 있고 접근경로가 있다. 동기부여가 있고 과제수행이 있고
성과보상이 있다. 그 1사이클의 결이 진행되는 동안 존재는 불완전하다. 모든 차별은 그 불완전에서 비롯된다.
삶에는 삶의 결이 있다. 각자는 각자의 삶의 결을 따라 자기완성의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 동그라미가 완성되는 지점에서 모두는 평등하다. 우월함도 없고 열등함도 없다. 각자 자기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
진정한 것은 인류가 힘을 모아 함께 그려가는 동그라미다. 집단지능의 동그라미고 공동체의 동그라미고 인류문명의
동그라미다. 함께 가꾸어야 할 21세기 이 시대의 삶의 양식으로서의 현대성의 동그라미다.
존재는 어떤 일의 진행과정에서 그 불완전에 의해 객관으로 차별되고 자기다움의 완성에서 그 완전성에 의해 주관
으로 평등하며 인류가 힘을 합쳐 완성시켜 가는 삶의 양식에서 그 소통에 의해 직관으로 보상된다.
인간은 종속될 때 그 질서 앞에서 차별되고 맞설 때 그 가치 앞에서 평등하다. 하나의 핵을 가지고 하나의 방향을
바라볼 때 앞선 자와 뒤진 자가 차별되고 두 핵을 가지고 서로 마주볼 때 인간은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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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랑을 하게 된다면 민감해진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늘 보던 산도 들도 별도 달도 바람도 풀꽃도
더 빛나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칭찬을 하고 싶어진다. 모든 사물의 움직임에 예민해진다.
그만 바짝 달아오르게 된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고 그 변화의 흐름에 동화되면서 생기를 얻는다.
그것이 사랑의 결이다. 사랑의 호흡이고 사랑의 맥박이고 사랑의 리듬이고 사랑의 밸런스다.
조각가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 마음에 도달한다. 연주자는 최고의 연주를 성공시켰을 때 명상가는 깨달음의
희열에 빠져들 때 작가는 최고의 작품을 탈고했을 때 그 마음에 도달한다.
모든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마음의 의미를 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 하던 일을
성공시켰을 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 그런 감정에 빠지게 된다. 그 마음의 뜰에 고운 달 하나 뜬다.
바로 그때가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지점이다. 작품을 창조한 예술가, 시를 퇴고한 시인, 제자를 길러낸 스승, 아이를
낳은 엄마, 연인을 사귄 젊은이, 그때 그들은 모두 같아진다. 위대한 소통이 그 가운데 있다.
인간은 낳음으로 소통한다. 개인은 자유를 낳아 소통하고 연인은 사랑을 낳아 소통하고 공동체는 이상주의를 낳아
소통한다. 우리는 자유로 평등해지고 사랑으로 동등해지고 이상주의로 대등해진다.
송아지를 낳은 암소는 먹이를 가져다주는 주인에게도 당당하게 큰 울음소리로 경고하여 자신이 낳아낸 새끼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그 낳음의 현장에서 암소와 주인은 대등해지는 것이다.
한송이 꽃을 피워낸 작은 들풀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떳떳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무엇이 인간을 평등하게 하는가?
낳음이 인간을 평등하게 한다. 내 안에서 토하여 낳아낼 때 인간은 떳떳해지는 거다.
그러므로 품음이 있어야 한다. 희망을 품고, 이상을 품고, 꿈을 품고, 씨앗을 품고, 비전을 품고, 드라마를 품을 때 엄마
품 속의 아기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모든 부자유한 것, 모든 고립된 것, 모든 미완성된 것에 차별이 있다. 낳지 못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품지 못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사랑을 품지 못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고 이상주의를 품지 못할 때 그 인간은 실격이다.
그 표정은 비굴해지고 그 포즈는 초라해진다. 어색하고 부끄럽다. 인간은 당당할 때 소통한다. 떳떳할 때 하나 된다.
자연스러울 때 평등하다. 평등할 때 참여한다. 참여하여 완성시킨다. 진정한 가치는 그곳에 있다.
모든 존재는 낳음의 존재이다. 무엇을 낳을 것인가? 가치를 낳고 미(美)를 낳고 사랑을 낳고 소통을 낳고 자유를
낳는다. 낳기 위하여 품는다. 무엇을 품을 것인가? 꿈을 품고 희망을 품고 이상주의를 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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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세상이 있었다. 인간이 그 세상에 왔다. 인간은 세상과 맞선다. 인간은 맞서는 존재이다.
맞섬이 인간의 실존이다. 역사와 맞서고 운명과 맞서고 환경과 맞선다. 그 맞섬의 결과는 인식과 판단과 행동으로
전개된다.
인간은 맞서고 품고 낳는다. 그것이 삶의 결이고 실존의 결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곧 어떤 대상과 맞서 있다는
것이며 그 내부에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이며 밖으로의 낳음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도로와 맞서 엔진의 마력을 품고 주행을 낳는다. 건물은 중력과 맞서 층층이 품고 주거공간을 낳는다.
상대하여 맞섬과 안으로 품음과 밖으로 낳음에 의해 존재는 자기 자신을 메커니즘적으로 구축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은 ‘맞섬’이다. 그것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대응논리다.
다른 말로는 상대성(相對性)이다. 모든 존재는 그 맞서 있는 타자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이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 그 본질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의 누구와 어떻게 맞설 것인지에 의해 상대적
으로 규정된다. 그 상대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 이것이 상대성이다. 수요가 이렇게 하면 상대적으로 공급은 이렇게 한다는 것이
경제학이다. 여당이 이렇게 하면 야당은 이렇게 한다는 것이 정치학이다.
수요는 공급과 맞서 상대성의 장(場)인 시장을 성립시킨다. 정치인은 유권자와 맞서 그 상대성의 장인 민주주의를
성립시킨다. 물질의 작용은 반작용과 맞서 그 상대성의 장인 입자를 성립시킨다.
‘1이 이렇게 하면 2는 이렇게 한다’는 것이 수학이다. ‘산이 이렇게 하면 물은 이렇게 한다’는 것이 지리학이고 ‘솔이
긴장시키면 도가 이완시킨다’는 것이 음악이다. 그러한 대결구도에서 존재의 결이 얻어진다.
시(詩)의 결은 기승전결의 전개로 동그라미를 성립한다. 소설의 결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1 사이클을 완성
시킨다. 모든 학문은 무언가와 상대하여 맞섬으로써 내부에 결을 이루어 자기 존재를 구축한다.
모든 학문분야의 개론을 성립시키는 페이지들의 전개는 그 본질이 되는 하나의 근원적인 맞섬을 다양하게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361로 바둑판의 천변만화가 흑과 백의 맞섬 하나로 귀결되듯이.
낳음이 희망이다
세상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근대인의 사고방식이다. 과연 그러한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세상은 ‘결’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쪼갤 수 없다는 신념은 막연하다.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모든 알맹이는 쪼갤 수 있다. 내부에 결이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방법으로 그 내부에 숨은 결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 두드려 보고 반향을 읽어 그 속을 알듯이 다 알 수 있다.
● 원자론의 아톰 - 쪼갤 수 없다 ≫ 구조론의 결 - 쪼개짐과 합쳐짐의 단위
전근대란 종교적, 관습적, 미신적인 것이다. 근대란 과학적, 합리적,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원자 개념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 근대의 토대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므로 시대구분을 다시 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원자의 근대’를 뛰어넘는 ‘구조의 현대’이다. 원자가 근대를 특징짓는다면 구조는 현대를
특징짓는다. 구조란 무엇인가? 들여다볼 수 없다고 믿어져 온 원자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현대는 상대성이론과 함께 시작된다. 상대(相對)란 곧 맞섬이다. 무엇이 맞서는가? 겉의 작용에는 속의 반작용이
맞선다. 작용과 반작용이 맞서는 1 단위가 ‘결’이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 결이 있다. 구조가 있다.
합리주의는 리(理)를 주장한다. 리(理)는 곧 결이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장인이 옥(玉)을 가공할 때 원석의 결을
따라 커트한데 따른 말이다. 구조란 곧 존재의 결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상대성을 성립시킨다. 상대성에 의해 작용하는 겉의 요(凹)를 보고 이에 맞서 반작용하는 속의
철(凸)을 알 수 있다. 요(凹)와 철(凸)은 정확히 대칭된다. 그 요철의 맞물림에서 정보가 성립된다.
그 정보의 스위치가 켜질 때 화살은 발사되고 자동차는 구동되고 씨앗은 싹이 튼다.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1 사이클이
전개된다. 존재의 작용은 에너지의 운동이 아니라 정보의 촉발에 의해 일어난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으로 기폭한다. 원자폭탄은 TNT로 기폭하고, TNT는 뇌관으로 격발하고 뇌관은 공이로 격발하고
공이는 스위치로 격발한다. 최종적으로는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가 격발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맞물려 있다. 수폭과 원폭, 원폭과 TNT, TNT와 뇌관, 뇌관과 공이, 공이와 방아쇠가 한 줄에 꿰어져 사슬을
이루고 있다. 연쇄적으로 링크가 걸려있다. 그 맞물려 있음이 정보다.
세상은 맞섬이다. 열쇠와 자물쇠의 맞섬, 요(凹)와 철(凸)의 맞섬, 인풋과 아웃풋의 맞섬, 원인과 결과의 맞섬, 부분과
전체의 맞섬, 동기와 보상의 맞섬이 근대 합리주의 사상을 구성하는 합리의 리(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이를 풀어놓은 것이다. 삼단논법은 2개의 전제와 하나의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정보를 전달하는 요(凹)와 수용하는 철(凸)이 두 전제를 이루고 요와 철을 통일하는 정보가 결론이 된다.
동기와 보상이 두 전제라면 양자를 잇는 소통이 결론이다. 곧 삼단논법은 원인과 결과, 열쇠와 자물쇠, 凹와 凸, 인풋과
아웃풋이라는 두 전제 사이에 링크되어 있는 정보를 끌어내는 기술이다.
삼단논법은 이음새를 찾는다. 결을 찾는다. 리(理)를 찾는다. 구조를 찾는다. 요와 철이 만나고 자물쇠와 열쇠가 만나는
접점이 구조다. 건축구조라면 기둥 위에서 주두와 대들보가 맞서는 결합과 분리의 지점이 결이다.
주두와 대들보라는 두 전제 사이에 숨어 있는 중력이라는 정보가 바로 삼단논법에 의해 도출되어야 할 결론이다.
지구 위에서 건축의 본질은 중력이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은 지구 중심을 향하여 수직으로 정렬하고 있다.
쇠사슬은 두 동그라미와 하나의 걸림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구조다. 그 구조가 삼단 논법이 두 동그라미 사이에서
찾아낸 결론이다. 구조는 외부의 작용에 대해서 수용할 것인가 반작용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것이 정보다.
봉건은 가고 현대가 온다. 무엇이 현대적인 것인가? 구조적인 것이 현대적인 것이다.
메커니즘적인 것, 상대론적인 것, 맞서는 것이 현대적인 것이다. 그곳에 정보가 있다.
거기서 갈라질 것인지 합쳐질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렇게 결정된 정보로 하여 세계의 질서를 이룬다. 그 질서로 하여 세상은 크게 이루어진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보아야 한다. 세상은 에너지가 아니라 정보다. 원자가 아니라 구조다.
세상을 구조로 본다는 것은 질서로 보고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시스템으로 보고 체계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맞서련다’는 대응의 논리로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나오면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 대응논리가 없다면 내 안에 이야기를 품지 못한 것이다.
결을 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실존적 삶의 자세를 획득하고 한 사람 몫의 인격으로 독립한다.
그것을 얻어야 사랑할 자격이 주어진다. 소통할 자격이 주어진다. 우르르 몰려다니기 잘하는 나약한 군중에서 벗어나
강한 개인으로 독립한다. 비로소 철이 들어서 한 사람 몫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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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구조로 보아야 한다. 맞섬으로 보고 상대성으로 보고 관계로 보고 접속으로 보고 리듬으로
보고 밸런스로 보아야 한다. 절차로 보고 과정으로 보고 현재진행형으로 보고 메커니즘으로 보아야 한다.
원자는 단단하나 구조는 무르다. 그러므로 강(剛)이 아니라 유(柔)로 보아야 한다. 유가 강을 이긴다는 노자의 역설로
보아야 한다. 물질은 강하고 생명은 유하다. 그러므로 구조로 본다는 것은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다.
생명은 세포가 결집하여 신경망으로 소통하면서 네트워크를 이룬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세상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본다는 것이다. 곧 집단지능으로 본다는 것이며 그 집단지능을 성립시키는 양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질과 생명은 무엇이 다른가? 물질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나타내어 증명할 수 없다. 생명은 물질과 달리 환경의 간섭
에 맞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증명할 수 있다.
존재는 어느 지점에서 완성되는가? 세상과 맞서 독립적인 영역을 주장할 때 완성된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완전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일 사이클의 전체과정을 본다는 것이다. 전모를 본다는 것이다.
원자론의 세계관은 위험하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면? 원래부터 그렇다는 말이 된다. 타고난 본성이 그렇다는 말이
된다. 인종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인종주의 편견을 낳는다. 흑인은 본성이 그렇고 백인은 본성이 그렇다?
원자론에 따르면 한번 흑인은 영원히 흑인이고 한번 백인은 영원히 백인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으니 더 이상 합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진보할 수도 없다. 변화할 수 없다. 상승할 수 없다.
미래가 없고 꿈이 없다.
더 쪼갤 수 없으므로 만유는 본래 그렇게 타고난다는 생각이 원자론이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비난되어야 할 인종주의
를 낳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차별과 불화가 원자론에 기초하고 있다.
걸인은 걸인으로 태어나고 왕자는 왕자로 태어나고 양반은 양반으로 태어나고 상것은 상것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원자론이다. 과연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조로 보면 쪼개진다. 여자와 남자에서 끝이 아니다.
더 쪼개면? 남자와 여자 이전에 인간이 있다. 흑인과 백인 이전에 인간이 있다. 인간 이전에 토대가 되는 자연이 있고
그 자연의 모습을 조직하는 진리가 있고 그 진리의 주인이라 할 완전성의 표상으로서의 신(神)이 있다.
여자도 남자도, 흑인도 백인도, 집시도 유태인도, 도시민도 부족민도 최초의 신의 완전성에서부터 비롯하여 전개된
거룩한 존재이다. 누구든 수십억 년 전 태초의 작은 생명에서 시작하여 진화하면서 거쳐 가는 한 정거장에 불과하다.
구조는 쪼개질 수 있으므로 합쳐질 수도 있다. 쪼개진 개인의 존재는 불완전하다. 씨앗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음으로 완성되듯이 개인은 소통하여 인류문명이라는 집단지능과 접속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구조는 만남으로 보고 과정으로 보고 현재진행형으로 본다. 남자든 여자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먼 생명의 여행길에
거쳐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다. 태초의 작은 생명에서 미래의 인류문명의 집단지능을 건설해 가는 과정의 존재다.
개인은 그 과정에서 하나의 운반체다. 당신은 대한민국이라는 정거장에서 남자 혹은 여자의 포즈로 쉬고 있다.
당신의 진정한 가치는 당신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통하는 60억 인류 공동체의 집단지능에 의해 결정된다.
60억 인류 전체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그것이 당신의 값어치다. 소통할 때 그러하다. 우주 전체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그것이 60억 인류의 값어치다. 진리와 소통하고 신과 소통할 때 그러하다.
세상은 결이다. 결은 만유에 공통된 자신의 내면에 깃든 조형적 질서다. 결과 결이 이어져 세상이라는 네트워크를
이룬다. 당신은 인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작은 하나의 그물코다. 그러므로 소통할 때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는 해독되고 있는가?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인간들은 무리지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문명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산업화에 이어 정보화로 간다면 정보화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세기가 혁명의 세기라면 혁명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실존주의 등장, 구조주의 철학, 칼 포퍼의 열린사회,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인상주의 화풍의 석권, 대중문화의 지배,
재즈와 팝아트, 매스미디어의 등장.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새로운 징후들이다. 확실히 이전시대와 차별화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20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다. 그러나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실존주의, 매스미디어, 인상주의,
대중문화 등은 사회주의와는 다른 흐름이다.
21세기가 가는 길은 계몽의 길이 아니라 소통의 길이다. 20세기의 낡은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
다임이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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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은 하나가 바뀌면 전부 바뀌는 현상이다. 전부를 변하게 하는 하나는 생산력의 변화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가 20세기 이후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생산력의 하나의 변화가 촉발한 ‘전부의 변화’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가?
사실주의가 아니라 인상주의, 고전음악이 아니라 대중음악이다.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가 도리어 탈사회주의화를 촉발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론과 밀접한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도리어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인상주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 이런 경향은 도처에서 감지된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그룹이 주장하는 진보의 전망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진보주의가 기획한 닫힌사회가 아니라 열린사회의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가고 있다.
사회주의는 계몽운동이다. 고전주의는 계몽운동이다. 사실주의도 계몽운동이다.
이는 진보주의의 당초 전망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새로운 모럴은 진보진영의 기획의도에서 이탈하고 있다.
애초에 군주가 궁궐 앞에 광장을 개설한 것은 그 광장을 이용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위력을 과시하여 민중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광장은 지금 무질서한 민중들 손에 접수되고 말았다.
광장은 민중의 창발성에 의해 다른 용도로 전용되고 있다.
장사치와 광대패와 선동가와 이방인이 모여들어 제멋대로 상품을 거래하고 희극을 공연하고 군중을 선동하며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지식인이 고전적 이상주의라는 기획의도로 개설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고전주의라는 계몽의 광장이 민중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인상주의, 대중음악, 팝아트라는 소통의 광장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은 전부 바꾸자는 것이다. 전부 바꾸려면 계몽이 아니라 소통이어야 한다.
고전적 이상주의를 앞세운 지식의 통제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인간의 본성에 밀접한 대안의 패러다임이 제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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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상이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역시 ‘맞섬’으로 풀어야 한다.
철학과 사상과 이념은 인간이 환경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하나의 스탠스에서 얻어진 각각의 포지션들이다.
사상(思想)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로 통일된 인식과 판단의 체계’다. 사상은 체계적인 인식이다. 왜 체계인가?
판단하기 위해서다. 무엇을 판단하는가? 가치를 판단한다. 가치판단에 의해서 전부 한 줄에 꿰어진다.
판단은 갈림길 앞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가는 군중들도 갈림길 앞에서는 질서를 찾는다.
어느 길로 갈지 합의해야 하니까. 선택의 갈림길에서 군중의 아이디어들은 모두 한 줄에 꿰어진다.
인간의 눈과 귀와 코와 몸으로 얻어진 다양한 정보들이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체계가 필요하다. 아이디어들을 전부 한 줄에 꿰어 질서를 부여하기다.
갈림길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식에 체계(體系)가 있어야 한다. 체(體)는 합치고 계(系)는 가른다.
체(體)가 인식을 합치는 몸통이라면 계(系)는 판단과 행동으로 갈라지는 팔다리가 된다.
● 환경과 인간의 맞섬 ≫ 인식과 판단과 행동을 유도 ≫ 인식은 철학으로, 판단은 사상으로, 행동은 이념으로 전개
인간은 환경 위에 내던져진 존재이며 그 환경은 거칠기 짝이 없는 생존경쟁의 생태계 환경이다. 환경의 도전에 응전
하기 위해 인식과 판단과 행동의 체계가 필요하다. 철학과 사상과 이념이 필요한 거다.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여 세상과 맞선다. 목수는 망치와 끌로 세상과 맞선다. 선비는 붓과 먹으로 맞선다.
지식인은 진리와 이성으로 맞선다. 맞서려면 자세를 고쳐잡아야 한다. 인식과 판단과 행동을 한 줄에 꿰어야 한다.
나(我)의 어원은 손(手)에 창(戈)을 쥐고 대적하여 맞선 자세이다. 인간은 맞서는 존재이다. 내가 외부의 환경에 맞설
때 나의 존재는 뚜렷해지고 내가 맞서지 않고 뒷걸음칠 때 내 존재는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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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 시대의 도전에 맞서 응전하는 인간의 실존적 스탠스가 있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시대배경과 맞서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를 사상한다. 우리는 현대를 사상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산업화로 특징되는 20세기 질서의 결이다. 그 결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진보주의 비전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인식을 낳고 판단을 낳고 행동을 낳는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다. 무엇인가? 산업사회의 결은 생산관계의 변화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촉발한다. 진보주의는 진보주의적인 삶의 양식을 완성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인식-생산력의 변화≫ 판단-생산관계의 변화≫ 행동-삶의 양식의 변화’
생산력의 변화가 동기라면 삶의 양식의 변화는 보상이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우리
들 자신이 존엄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진보의 최종결론은 인간 개개인의 존엄이다.
생산력이 변화하는 이유는 지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달 덕분이다. 인식이 생산력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인식의 변화는 삶의 결을 따라 전개되어 판단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로 최종 완성된다.
인터넷의 등장은 정보의 생산력을 변화시킨다. 네티즌 세력의 등장이 그러하다. 네티즌은 웹세계를 인식한 사람이다.
그들은 리플을 통하여 생산관계를 역전시킨다. 정보의 소비자였던 네티즌이 스스로 정보의 생산자가 된다.
네티즌은 쌍방향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다. UCC의 등장이 그러하다. 웹 2.0이라는 개념도 소개된다.
정보를 소비하는 양식이 변화한 것이다. 문화의 변화로 최종 완성된다. 소통의 문화로 양식화 된다.
양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구조주의, 실존주의, 인상주의, 팝아트, 대중문화, 매스미디어.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는?
삶의 양식의 변화다. 생산력이 1라운드면 생산관계가 2라운드고 삶의 양식이 마지막 3라운드다.
● 개인은 인식-판단-행동≫학문은 철학-사상-이념≫사회는 계몽-투쟁-소통
19세기에 보급된 새로운 인식은 과학의 계몽으로 종교를 극복하고 20세기에 보급된 새로운 판단은 사회학으로 투쟁
하여 정치를 정비하고 21세기에 보급된 새로운 행동은 미학으로 소통하여 문화를 완성한다.
● 19세기는 계몽의 세기 ≫ 20세기는 투쟁의 세기 ≫ 21세기는 소통의 세기
르네상스 양식은 이탈리아의 한 도시 피렌체에서 촉발되었다. 그 시대의 시대정신의 정수를 담아내는 미학적 양식을
세련되게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그 이전에 광야에 뿌려둔 씨앗이 있었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다. 그리스 정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완성시켰다.
뿌리가 있었기에 르네상스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근대 계몽주의 사상 역시 르네상스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중국문명은 당송시대가 미학적으로 완성시켰다. 그 이전에 남조문화가 있었다. 당송시대가 로마라면 남조문화가
그리스다. 로마문명이 그리스문명의 표절에 불과하듯이 당송시대의 번창은 남조문화의 답습에 불과하다.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방점을 찍었다. 셰익스피어 이후 다시는 셰익스피어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문명은 양식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스 정신에 맞먹는 미국정신이 없다.
미국에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빈곤한 로마문화가 그리스문화의 표절에 불과하듯이 이상주의가 없는 미국문화는 세익스피어 시대의
영국문화를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21세기의 미국이 18세기의 영국보다 못하다.
이상주의가 축이다. 이상주의가 문화를 한 줄에 꿰어낸다. 이상주의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신의 완전성, 혹은
진리의 완전성에 맞서 각을 세우는 지점이다. 가장 크게 세상과 맞서 대립각을 세워야 한다.
거기서 진리라는 하늘의 질서와 이상이라는 인간의 가치가 유도된다.
하늘의 진리와 인간의 이상이 맞서는 지점이 있다. 그 아슬아슬한 그리고 긴장된, 바늘 끝처럼 첨예한 극한의 밸런스
에서 진정한 완성의 미학이 찾아진다.
8세기 신라 왕실문화의 극성, 12세기 고려 귀족문화의 번성, 17세기 조선 선비문화의 완성에 이어 21세기 이 시대의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은? 진정한 이 시대의 모럴은? 21세기 현대미학의 완성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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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는 ‘빛을 그렸다’고 한다. 햇볕이 비치는 야외로 나가야 빛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야외로 나오면 유화물감이 변질된다. 마침 햇볕에 노출되어도 변질되지 않는 안료가 새로 발명되었다.
인상주의 등장은 과학의 혁신에 기반을 둔다. 과학은 인식에서의 변화다. 인식의 변화가 판단의 변화를 유도하고
행동의 변화를 촉발한다. 곧 사실주의라는 판단의 변화를 거쳐 인상주의라는 행동의 변화로 전개한다.
쿠르베는 ‘머리가 아닌 눈으로 그려라’고 했다. 눈으로 그리기 어렵다. 안료가 변색되기 때문이다.
명암이론과 색채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르베 이전에는 눈으로 그리고 싶어도 그것이 불가능했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인상주의 선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주의가 일구어낸 기교와 형식의 완성이 도리어 그 고전적 형식미를 극복하는 낭만주의를 촉발한 예와 유사
하다.
마네는 빛에 도전한다. 빛은 과학이다. 명암이론과 색채이론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도전이다.
세잔은 형태에 도전한다. 평면 위에 입체를 구현하려 한다. 역시 과학이다. 현대는 과학이 만들었다.
과학의 진보가 테마 위주에서 이미지 위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주의 인식을 촉발했고 그 이미지의 핵심은 빛과
형태라는 인상주의 판단을 거쳐 관객의 마음과 직접 소통하려는 표현주의 행동을 촉발한 거다.
안료 발명, 색채학 발달, 명암이론, 소실점이론이 생산력의 변화다. 사실주의는 확실히 생산력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한다. 인상주의는 생산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관념이 주체가 되는 회화에서 자연의 대상이 주체가 되는 회화로 계급 사이에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산관계의 변화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자극한다. 인상주의에서 표현주의로 진전한다.
사실주의가 동기라면 인상주의는 과제이고 표현주의는 보상이다.
사실주의가 긴장이면 인상주의는 밸런스고 표현주의는 릴렉스다.
사실주의가 계몽이면 인상주의는 투쟁이고 표현주의는 소통이다.
예술은 그 시대의 시대정신에 맞는 삶의 양식을 완성하는데 궁극적인 의미가 있다.
소통의 양식으로 진보는 최종 완성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현대성이다.
현대성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줄기차게 달려온 것이다.
인상주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변혁과 관련이 있다.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지식인이 독점하는 계몽의 가치가 퇴색하고 관객이 주체가 되는 소통의 가치가
확립된 것이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로의 전개이다.
고흐는 10년 동안 무려 879점을 그렸으나 한 점의 그림도 제값받고는 팔지 못했다고 한다. 왜인가? 화가와 평단이
시장의 주체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관객이 시장의 주체로 등장했을 때 고흐의 그림에 제값이 매겨졌다.
관객이 시장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 바로 그것이 현대성이다. 계몽의 시대가 아니라 소통의 시대가 되어야 관객이
시장의 주체가 된다. 그러려면 관객 자신이 시장의 주체가 되려는 욕망을 표출해야 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작가 자신의 조형적 질서에 따라 자연의 완전성을 재현함이다. 쿠르베는 자연의 사실에서 그
질서를 찾아내었고 마네와 모네는 빛의 인상에서, 세잔은 사물의 형태에서 그 질서를 찾아낸 것이다.
고흐는 관객의 내면에 깃든 관객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드러내고픈 욕망에 방아쇠를 당겼다.
관객이 각자 자신의 내면에 고유한 자기만의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때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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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참(眞)된 리(理)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옥(玉)+리(里)로 보석세공사가 옥을 갈아내는 결이다.
옥은 결대로 커트해야 한다. 결대로 커트하지 않으면? 약간의 충격에도 깨지고 만다.
결이란 무엇인가? 나이테가 결이다. 그래서 나이테를 한자어로 목리(木理)라 한다. 나이테는 무엇인가?
나무 자신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조형적 질서다. 나무가 세상과 맞서 밸런스를 유지하는 실존적 스탠스다.
나무의 자아가 그 아(我)의 손(手)에 창(戈)을 쥔 것이 나이테다. 진리는 존재의 나이테다.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나이테를 감추고 있다. 심과 날이 있다. 심과 날 사이에 결이 있다. 진리는 존재의 결이다.
모든 존재는 내면에 자기 자신의 조형적 질서를 감추고 있다. 자기다움이 있다. 내가 나다운 것이 곧 나의 결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떳떳함을 느끼는 지점이 있다. 표현주의가 최종적으로 그것을 찾아내었다.
성경이나 희랍신화에서 베껴온 남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조형적
본성을 찾아 관객과 직접 소통하기다. 비로소 진정한 현대회화의 확립이다.
사실주의 이전의 성경이나 희랍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들은 고전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사실주의가 처음으로 예술을 ‘텍스트의 계몽’에서 ‘이미지의 소통’으로 전환시켰다.
사실주의가 현대를 촉발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자연의 텍스트를 모방하는데 그치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의 메시지를 포착하려 한 것이다. 여전히 메시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근대와 현대의 차이는 텍스트의 메시지 전달에 의한 일방향적 계몽이냐 이미지의 직관에 의한 쌍방향적 소통이냐에
있다. 예술의 본질은 이상주의다. 그 이상주의를 어디서 찾아내는가다.
성경이나 그리스의 신화에 있다고 믿어져온 이상주의를 사실주의가 자연에서 재발견하고, 다시 인상주의가 빛과
형태에서 재발견하고, 표현주의가 마침내 인간의 내부에서 재발견한다. 그리고 재현하기다.
진정한 것이 있다. 진리의 완전성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고 우리 앞에서 그것을 재현해 보여야 한다.
그것이 문명의 의미다. 르네상스의 의미가 재생에 있다면 이 시대 문명의 본질은 역시 재현에 있다.
오래도록 희랍신화나 성경 속에 있다고 믿어져온 그것을 자연에서 재발견한 것이 서구의 계몽주의라면 인간 내부
에서 재발견한 것이 동양의 깨달음이며 이를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 재현하기가 현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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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피카소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회화를 추구하는 조형적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
이다.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인간은 본래 그것을 욕망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거간한다면 진짜가 아니다. 희랍신화에서 혹은 성경에서 베껴온 남의 메시지를 관객들 앞에서 중계방송
한다면 사이비다.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브로커의 짓이고 뚜쟁이의 짓이다.
미학은 사물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찾는다. 결을 찾는다. 리(理)를 찾는다. 나이테를 찾는다. 도공은 흙에서
결을 찾아내고 석수장이는 돌에서 결을 찾아내고 목수는 나무에서 결을 찾아낸다.
추사는 금석학에서 그 결을 찾았다. 이전에 석봉의 글씨는 다만 자와 획의 결을 따를 뿐이었다. 자획의 질서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거다. 추사는 금석학에서 찾아낸 결을 종이와 먹과 붓의 대결로 재현하여 보이고 있다.
마네가 빛에서 찾고 세잔이 형태에서 찾은 것을 추사는 금석학에서 찾은 것이다.
마네의 그림에는 빛들의 전쟁이 숨어 있고 세잔의 그림에는 형태들의 대결이 숨어 있으며 추사의 글씨에는 붓과
종이와 먹의 대결이 숨어 있다.
존재는 맞섬이다. 결은 맞섬이다. 먹은 퍼짐으로 종이에 맞서고, 붓은 날램으로 먹에 맞서고, 종이는 빨아들임으로
붓에 맞선다. 추사의 글씨에는 종이와 붓과 먹이 치열하게 맞서서 고민하고 다툰 흔적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추사의 글씨는 과학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색채학에 기반을 둔 과학이듯이 추사체는 금석학이라는 과학에 기초
한다. 추사는 초기의 금석학적 사실주의에서 말년에 이르러 추사체 특유의 표현주의까지 단번에 전개시켜 버렸다.
추사 초기의 글씨는 밀레를 닮았다. 이위정기(以威亭記)를 쓴 31살의 추사가 밀레라면 명선(茗禪)을 쓴 제주도
유배기의 추사는 마네였다. 마침내 고흐가 되어 판전(板殿)을 쓰고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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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개는 객관적 회화에서 주관적 회화로의 전개다.
고전주의가 객관이라면 낭만주의는 주관이다. 추사의 금석학이 객관적 회화라면 그가 창안한 추사체는 주관적 회화다.
19세기가 ‘머리로 그리는’ 미완성의 객관이라면 20세기는 ‘눈으로 그리는’ 완성의 주관이고 21세기는 ‘마음으로 그리는’
소통의 직관이다. 그러나 지식그룹의 이론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객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평론가들은 머리로 그린 영화를 선호한다. 아직도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의 관객들은 이미 주관주의를 넘어 직관주의를 선호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학의 객관이 생산력의 변화를 낳는다.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하면 생산관계가 역전된다.
공급자 시장의 객관주의에서 수요자 시장의 주관주의로 시장의 질서가 전복된다.
상품의 가치는 비용과 효용이 결정한다. 객관은 생산자가 투입한 비용이다. 그 제조원가는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
하다. 생산자가 상품제작에 100을 투입했다면 그 제품의 가치는 정확히 100이다.
주관은 소비자가 결정하는 제품의 용도다. 케이크 한 조각의 가치는 그것을 혼자 먹느냐 아니면 연인과 함께 먹느냐
에 따라 달라진다. 선물용 상품은 주는 쪽과 받는 쪽 양쪽에서 동시에 가치가 발생한다. 당연히 비싸다.
비용과 효용을 넘어 제 3의 가치가 있다. 직관은 양식의 가치다. 곧 브랜드 가치다. 그 상품의 소비와 무관한 3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전파의 값어치다. 객관의 비용도 아니고 주관의 효용도 아닌 응용의 가치가 있다.
● 객관-비용으로 평가 ≫ 주관-효용으로 평가 ≫ 직관-응용으로 평가
시장의 질서는 공급자의 비용이 지배하는 단계에서 소비자의 효용이 지배하는 단계를 거쳐 브랜드의 파급효과가
지배하는 응용의 단계로 넘어간다.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비틀즈의 음악은 대중이 따라부를 수 있다. 전파할 수 있다. 고흐의 그림이 주는 울림은 더불어 공감할 수 있다.
예술이 대중화 되고 상업화 되는 이유는 전파에 의한 양식화라는 제 3의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나이키 신발 한 켤레의 가치는 제조원가로 검증되는 비용도 아니고 그 신발이 소년의 발을 보호하여 주는 효용도
아니다.
그 소년이 또래들에게 영향을 주는 응용의 가치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한 편의 영화가 직접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작고 먼저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미처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친구에게
간접 전파하는 즐거움은 크다. 함께 그 영화를 본 사람이 공감을 나누는 기쁨은 더욱 크다.
객관과 주관과 직관이 있다. 객관은 비용이고 주관은 효용이며 직관은 응용이다. 응용은 양식화이며 그것은 나와
타인의 행동을 일치시켜 집단지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더불어 함께 나눌수록 가치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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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한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위주의 객관적 회화에서 그려지는 대상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추구하는
주관적 회화를 거쳐 관객과의 쌍방향 소통을 위주로 하는 직관적 회화로 변한다.
무대 뒤의 연출자가 지배하는 드라마에서 무대 위의 배우가 즉석에서 애드립을 보여주는 쇼로 바뀐다.
마침내 객석의 관객이 댓글을 달고 추임새를 넣는 UCC로 뒤집어진다. 가치 창출의 주체가 바뀌는 것이다.
80년대 코미디는 연출자가 지배했다. 90년대 개그쇼는 배우의 즉흥연기가 지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든 관객의 쌍방향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 분야에 공통된다.
이상주의에 기초한 진보주의 애초의 기획의도는 객관이었다. 과학이었다. 사실주의였다.
그러나 그 과학이 촉발한 21세기의 새로운 물결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직관이다. 곧 ‘현대성’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맞이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은 만인이 인정하는 객관의 과학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는 첨단 촬영기술은 판타지와 결합하여 점점 더 주관으로 이행하고 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성공 원인은 피아노줄을 이용한 아크로바틱한 액션기술이었다.
역시 기술의 발전이 성공의 원인이다.
그럴수록 판타지의 비중이 높아진다. 객관의 과학이 도리어 예술을 주관화 시킨다.
CG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내면을 주관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머리로 영화를 보는 60년대의 구로자와 아키라에서
눈으로 영화를 보는 80년대의 스필버그를 넘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21세기의 김기덕으로 간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다. 무엇으로 소통할 것인가? 매개가 있어야 한다. 소리의 매질은 공기다.
예술의 매질은 무엇인가? 고전적 아카데미즘은 텍스트로 기록된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의 메시지를 매개로 삼았다.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자연의 완전성을 매개로 쓴다. 마네와 세잔의 인상주의는 자연의 사실에서 인간의 시선
으로 옮겨온다.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낸다. 결국 정답은 인간의 존엄이다.
고흐와 박수근은 안료의 특성을 활용한다. 추사는 붓과 먹과 종이라는 재료의 특성에서 찾아낸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관객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 것이다.
만인이 공유하는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 그 자체를 매개로 삼을 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미적 본성이 있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평론가들이 강조하는 주제의식 따위는 고전회화가 성경이나 신화에서 끌어온 텍스트를 이용하듯이 남의 것을 매개
삼는 것이다. 관객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끌어내지 않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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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양식을 완성한다. 양식은 구성소 전부를 한 줄에 꿰어내는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다.
그 질서를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그리스의 이상주의에서? 성경의 메시지에서? 자연의 사실에서?
진정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은 존엄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
거기서 조달해야 한다. 왜 인간은 존엄한가?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추구하므로 존엄하다.
모든 존재에 내적 정합성이 있다. 대칭과 평형의 원리가 있다.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대응논리가 내적
정합성이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부끄러움과 떳떳함 그리고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이 내적 정합성을 이룬다.
비틀즈는 노래한다. 네 안에서 내적 정합성을 이루는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의 대결을 포착하라고.
그 둘의 절묘한 밸런스에서 생동하는 그대 마음의 질서를 포착하라고. 그것으로 너의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라고.
고흐와 김기덕은 말한다. 네 안에서 일어나는 떳떳함과 부끄러움의 부단한 대결구조를 포착하라고.
네 안에서 그 둘의 첨예한 대결이 빚어내는 날카로움으로 타인의 날카로움과 소통하라고. 그 방법으로 서로 친구가
되라고.
왜 인간은 존엄한가?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피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로 혹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 하늘의 것을 밀레와 쿠르베가 땅에 심었다. 마네와 모네가 한 떨기 꽃으로 길러내었다.
고흐와 김기덕이 마침내 그 꽃을 피워내고 그 향을 퍼뜨렸다.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존엄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팔 하나만 잘못 만들어져 있다면 당신은 매우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그 작품이 걸작에 가까울수록 약간의 실수는 더욱 크게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황금비례라는 하늘의 진리에 있다면 고전주의다. 그것이 자연의 완전성에 있다고 믿으면 사실주의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교감에 있다면 인상주의다. 본래부터 인간의 내면에 그것이 있었다고 믿으면 표현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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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觀)은 볼 관 자(字)다.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것이다.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곧 평가
한다는 것이다. 평가대상은 가치다. 주관과 객관과 직관은 가치를 평가하는 구분기준이다.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갈수록 가치가 상승한다. 미완성 부품은 자체적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짝을 만나지 못한 부품의 가치는 제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가치는 언젠가 완성될 것을 기대한 잠재적
가치다.
젓가락 한 짝은 쓸모가 없다. 나머지 한 짝을 만나야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젓가락 한 짝의 가치는 객관으로 평가된다. 제조원가로 평가된다. 투입된 비용으로 평가된다.
마침내 짝을 만나 한 벌의 수저를 이루었을 때 그 가치는 사용자의 쓰는 바가 결정한다. 쓰이는 가치가 효용이다.
돼지에게 던져준 진주는 가치가 없다. 올곧게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쓰여야 가치가 발생한다.
습작단계의 학생은 객관으로 평가한다. 학생의 시험이 객관인 이유는 그 공부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완성단계의 작가는 작가 자신의 주관으로 평가한다. 진정한 것은 타인이 평가할 수 없다.
대중화 단계에서는 직관으로 평가된다. 예술의 발달사가 그러하다. 객관으로 평가되고 있다면 태동기다.
주관으로 평가되면 성장기다. 직관으로 평가되고 있어야 예술의 대중화 단계다.
인간 내부에서 존엄을 끌어내는 단계다.
예술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클래식한 흐름에서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인상주의 경향을 거쳐 보다 직관이 강조
되는 표현주의 단계로 넘어간다. 예술은 언제라도 객관≫주관≫직관의 궤도를 따라간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클래식에서 팝으로, 계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며 점차 대중화 되고 상업화 된다.
그 과정에서 양식을 완성시킨다. 진정한 것은 소통의 양식이며 예술은 그 양식을 끌어내는 매개일 뿐이다.
베드로 성당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진실로 말하자면 석가탑과 다보탑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가치는 없다. 진실로 말하면 베드로 성당을 성취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가치 있다.
예술은 양식을 완성시켜 그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유도하는 매개다.
그러므로 양식이 완성되는 시점에 예술은 소멸된다. 양식이 완성된다면 예술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질병이 사라진다면 의사는 필요 없다. 전쟁이 사라진다면 정치가는 실업자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서로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면 예술조차도 부질없다. 그러므로 고려의 청자보다 조선의 백자가
더 뜻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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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품은 태동기, 성장기, 확산기의 1 사이클을 가진다.
상품은 객관으로 태동하고 주관으로 완성되고 직관으로 전파된다. 직관으로 갈수록 보다 인간의 실생활과 밀접해진다.
학문이 객관을 요청함은 실생활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객관일 수밖에 없다. 그 자체로는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객관과 주관을 거쳐 직관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접 사용되기 때문이다.
연필이나 노트나 전화기나 컵은 객관으로 평가된다. 노트와 연필은 불완전하다.
둘이 만나서 글씨를 이룰 때까지 노트와 연필의 가치는 잠정적이다. 객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만나서 완성될 부품
들이다.
연필과 노트가 끝내 만나지 못한다면 둘의 가치는 소멸된다. 객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미완성이며 주관으로 평가
되는 것은 모두 완성이며 직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전파되는 것이다.
조리된 음식, 그려진 그림, 써놓은 글, 잔에 따라놓은 술은 주관으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의 가치와
배부를 때 먹는 음식의 가치가 다르다. 당신은 그 가치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직관은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 한잔의 술이 그 모임에 참여한 백 명의 흥을 돋운다면 그 가치는
증폭된다. 인간의 내면에 숨은 자연스러움과 떳떳함을 끌어내기에 성공한다면 직관의 가치는 무한하다.
● 객관-비용-제조원가 ≫ 주관-효용-소비가치 ≫ 직관-응용-소통가치
진정한 것은 미학적 양식이다. 모든 예술은 최종적으로 소통의 양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며 만족해하는 것은 당신이 그 영화를 보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왜 당신은 영화를 보는가? 재미있으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만들
어진다. 그 공통점이 인간들 사이의 소통을 매끄럽게 한다. 그것이 당신이 영화를 보는 진짜 이유다.
당신이 ‘화려한 휴가’를 보는 이유는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이후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게
된다. 이미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과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둘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통한다.
영화를 보는 진정한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십만 원이나 하는 비싼 돈을 들
여서 재미도 없는 오페라 따위를 관람하는 어리석은 짓을 왜 하겠는가? 효용이라고는 거의 없을 텐데 말이다.
존엄이 진짜다. 양식은 존엄을 지향한다. 자연스럽고 떳떳한 것이 존엄이다. 무엇이 떳떳하고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어색한지에 대한 당신과 나의 판단을 일치시키기 위해 예술은 존재한다.
화려한 휴가를 본 그룹과 보지 않은 그룹의 떳떳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이후 두 그룹 사이의 소통은 어긋나고 만다. 어느 그룹에 속할 것인가?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의 그룹에 속해야
한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미래의 트렌드를 제시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사람과 부끄러움과 떳떳함,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비싼 예술활동이다.
최고의 연주자가 느끼는 섬세함과 그대의 섬세함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추사가 대안목으로 고른 것을 그대의 심미안
으로도 고를 수 있게 한다면 그 예술품의 가치는 무한에 가깝다. 그대의 전부와 교환해도 아깝지 않을 터이다.
인간은 욕망한다. 최고의 인물이 알아본 것을 자신도 알아볼 수 있기를. 최고의 예술가가 반응한 것에 자신도 반응할
수 있기를. 만약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소통의 속도는 급속하게 빨라진다. 모든 갈등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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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들이 비싼 루이뷔똥을 구입하는 이유는 루이뷔똥이 오히려 절약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핸드백은 옷과 어울려야 한다. 대부분의 옷과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는 가방이 구찌와 루이뷔똥이다.
옷장에 걸린 옷의 숫자만큼 가방을 구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비싼 구찌를 구입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일본 여자들의 심미안이 서구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이탈리아에 막대한 벌금을 물고 있는 셈으로 되었다.
만약 일본인들의 안목이 높다면 언제라도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옷에 어울리는 가방을 찾느라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비싼 구찌를 사들일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 예술을 모르면 일본처럼 된다. 양식의 문제에 걸려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예술의 가치는 공동체 내에서 소통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술을 모르면 의사소통에 실패하여 사회의 갈등지수는
높아진다.
물론 사회의 진보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예술은 필요하지 않다. 그 시점에는 지식인이 주도권을 잡는다.
대중은 단지 지식인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회가 일정수준 이상 발전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회가 발전하면 상승한 개인이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그 방법은 친구와 동료들 사이에서 정보의 전파자가 되는 것
이다.
먼저 영화를 보고 먼저 맛있는 것을 먹고 먼저 음악을 듣고 전파하는 데서 주도권이 얻어진다.
미학적 양식의 완성에 실패하면 그 전파에 실패한다. 그 경우 소통하지 못한다. 공동체 내부에서의 마찰에 의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스트레스를 피하려 하다가는 일본처럼 구찌를 사들이며 외화를 낭비하게 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양식이다. 그것은 보다 인간화된 즉 인간의 본성과 밀접한 것이어야 한다.
공동체 내에서 부끄러움과 떳떳함에 대한 판단을 일치시켜 의사소통을 속도를 극적으로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평론가는 객관으로 설명하지만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내고 관객은 직관으로 받아들인다.
비틀즈의 노래처럼 고흐의 그림처럼 추사의 안목처럼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양식을 끌어내는 직관의 소통이 진짜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지점에서 당신도 부끄러워함이 직관이다.
내가 떳떳함을 느끼는 지점에서 당신도 떳떳함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러므로 서로 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전부다.
통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지 않은가.
왜 직관이어야 하는가?
옛날에는 숫자 0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0을 발견하고 이를 주장한다. 새로운 수학적 발견이 학계에 받아들여지는
가는 논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논쟁을 통해서는 누구도 숫자 0의 의미를 바르게 설명할 수 없다.
효용에 의해 결정된다. 허수가 대표적인 예다. 허수가 과연 숫자인가를 논쟁으로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문제는 현장에서 실제로 허수가 널리 쓰이고 있으며 많은 공학적 문제들이 허수 i에 의해 해결된다는 점이다.
직관을 주장함도 이와 같다. 가치를 평가하되 주관과 객관만으로 충분하다면 필자가 거기에 새로 직관을 추가할
이유는 없다. 비용과 효용만으로 충분하다면 필자가 새로 응용의 가치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실제로 직관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응용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관객의 직관이 평론가의 객관보다 옳았던 경우가 실제로 많았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테이블에 장식된 한 송이 꽃과, 나누어진 한 잔의 술이 참여자 숫자에 비례하여 가치를 증폭시킨 경험은 누구나 있
을 것이다.
누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모임의 격이 달라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직관의 의미는 이미 입증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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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의 주체가 누구냐다. 예술의 진보는 평가의 주체를 새롭게 바꿔나가는 것이다. 객관은 누구나 평가할 수 있다.
사지선다형 문제는 정답을 일러주기만 하면 어린이도 시험지를 채점할 수 있다.
주관은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덜 아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이미 경험한 사람이 미처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이 부분을 조금 아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직관은 모르는 사람도 평가할 수 있다. 조금 아는 사람이 더 많이 아는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
관객이 평가하고 독자가 평가하고 유권자가 평가하고 네티즌이 평가한다. 민주주의는 직관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네이버 영화정보 네티즌 평점을 참고할 수 있다. 네티즌의 평가는 지극히 감정적이고 즉자적으로 나타난다.
진지하게 점수를 주는 네티즌은 없다시피 하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10점 아니면 0점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네티즌 40자평은 일방적 비난이거나 아니면 맹목적 찬사로 흐른다. 네티즌 평점란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네티
즌 평점의 신뢰지수를 낮게 볼 것이다. 너무나 무질서해 보이기 때문이다.
군중심리에 의한 쏠림이 발생하여 영화의 질과 상관없이 엉뚱한 평점이 나올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가?
평론가들의 무의미한 별점 셋보다는 네티즌 평점이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네티즌 개개인은 아무 생각없이 10점 아니면 0점을 주지만 평균을 내면 비교적 정확한 점수가 나온다.
여기서 유의미한 대목은 네티즌들의 점수주기가 극단적으로 엇갈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하다는 역설이다.
장고 끝에 악수 두는 법이다. 직관은 생각하지 않고 1초 만에 평가하기 때문에 오히려 정확하다. 요는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본능의 명령이 아니라 잡념이 끼어들어 바른 평가를 방해한다는데 있다.
작품성과 흥행성, 예술성 등 영화를 평가하는 여러 기준에서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지만 다른 부분이 부족할 경우
가중치를 어떻게 줄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전문가들의 실패는 대부분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네티즌의 평점이 극단적인 이유는 영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중 하나에만 반응하는 경향 때문이다.
어떤 네티즌은 작품성만 판단하고 어떤 네티즌은 주제의식만 판단하고 어떤 네티즌은 대중성만 판단한다.
자신의 관심분야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적 평가방법이 도리어 더 정확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장르의 특성상 평가될 여러 항목들 중에서 도드라진 어느 하나가 전체를 대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평가한다면 맛, 양, 가격, 위생, 분위기 등의 평가기준이 있다. 그 식당에 데이트를 하러 온 젊은 연인커플도
있고 점심을 먹으러 온 샐러리맨도 있고 맛을 추구하는 미식가도 있다.
미식가는 맛만 따지고 샐러리맨은 가격만 따지고 연인커플은 분위기만 따지는 게 맞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인가? 젊은 연인 커플을 위한 식당은 교외에 있고 샐러리맨을 위한 식당은 빌딩가에 있기 때문이다.
먹자골목은 맛만 좋으면 되고 터미널 앞 식당은 빠르게만 나오면 된다.
코미디 영화는 웃기기만 하면 되고 멜로 영화는 울리기만 하면 된다. 관객들은 사전에 장르의 특성을 알고 극장을
찾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를 뒤섞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이 물리적으로 반응하는 단 한 가지 분야만 평가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
이다. 본능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본능보다 정확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이것이 동양정신의 본령이며 추사가 말하는 서권기 문자향이고 인상주의 회화의 본질이다.
네티즌의 직관적 판단이 그 전체를 대표하기 위해 발췌된 부분과 즉자적으로 반응한다.
네티즌이 옳다. 다수의 직관이 옳다. 다수 눈팅의 본능적 판단이 논객의 이성적 판단을 이긴다.
물론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관객의 직관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장르의 태동기에 있을 경우 그러하다.
서구의 인상주의도 처음엔 평가받지 못했다. 현대 음악이나 회화는 갈수록 난해해지고 있다.
새롭게 태동하려는 몸부림이다. 관객이 김기덕의 영화를 오해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그 장르가 태동기이기 때문이다.
서프라이즈 노짱방의 점수제는 관객의 직관에 의한 평가다. 직관적 평가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각자가 자신의
본능이 반응하는 부분만 극단화시킬 때 오히려 더 정확해진다는 직관의 원리는 유의미하다.
(김동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