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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신문
‘극빈’ ㅡ 김도은(본명 김정미) 수상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사이로
저기, 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 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데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컷다.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이 극빈도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말들
그래, 함께 헐리면 편하지
지탱이 지탱을 업고 하는 말들은 그마저도
죄다 빌려 온 말들이라는 것
돌려줄 곳도 없는 말들이라는 것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어둑한 한 평의 미궁들엔 다행히도
무더위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
들어올 것도 없이 여미는 겨울보다는 낫다는 것
홀로, 깊은 안쪽이 되는 것이다
<당선 소감 : 김정미>
심사평
<심사위원 : 박영교 시인, 이서빈 시인, 이옥 시인, 이진진 시인>
총 1756편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금방 본 사물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작품으로 승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삭힌 뒤에 그 엑기스를 뽑아서 작품화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다음은 새로운 언어를 가져다 쓴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언어가 그 작품 속에서 한 문장에 들어앉아 적확한 언어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시적인 사회성이나 정치적 이슈 등을 작품 속에 끌어와 쓸 때는 완성도 있게 설정하거나 한다.
마지막으로는 한 작품에 대한 이미지의 형상화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시인이 그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필요한 요소가 두뇌 속에 떠올려져야 하는데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한다.
각 4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 유지가 매우 중요.
신선한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힘
잠깐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나 어휘를 적어놓은 것은 그 진한 맛을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이미지의 형상화가 어렵지만, 독자에게 주는 무게는 있어야 작품의 값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대숲과 새」 이미지가 선명.
‘대숲이 항문을 조이면/ 새들이 침묵의 그네를 탄다’ ‘대나무가 허리를 펴면/ 새들이 알사탕처럼 쏟아진다’ , 결국은 대숲, 바람, 새들 세 명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품.
「검은 고양이」
‘밤의 너그러움을 껴입은 고양이’ 검은고양이를 밤이라는 어둠 즉 밤의 너그러움으로 표현. 이 작품에서는 나와 검은고양이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검은고양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 끝 맺는 작품.
「극빈」
첫 연은 어떤 참사를 겪고 난 후 그곳의 골목에 대한 이미지를 이어 나가는 느낌을 주었다. 이 어려운 가난의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기도 하면서 ‘혁명가의 노래로 그 길을 벗어 날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로 변하여 헐리고 말 것이라는 마음을 갖는다. 가난의 삶은 겨울보다 여름이 살아가기가 낫다는 생각에 접어들면서 끝을 맺고있다.
4편의 작품도 고른 수준.
이미지의 선명함 만날 수 있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적확하게 심으려는 부단한 노력.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려는 노력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작품 「하잠夏蠶」은 지하철 계단참에 누워있는 노인을 통해 하잠의 이미지를 얻어 왔으며 그가 돈 통(바구니)을 앞에 놓고 있을 때도 빈 바구니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푸른 지폐를 한 장(남루도 견본이 필요하다)을 먼저 담아두어야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돈을 넣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노인(걸인), ‘이 세상의 인심’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품 「수동식 낙타」에서는 ‘사막을 달려온 낙타가 온몸을 접는다’로 첫 연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사막에서 살아가는 낙타의 슬픈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 「사슴은 수신중」은 수사슴이 그 뿔을 통해 전파를 찾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것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다. 즉 뿔의 주파수에는 맹수를 먼저 찾아내고 고요를 걸러내고, 초록의 여름을 지탱한다. ‘모두 저녁을 찾으러 간다’는 그 첫 연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날이 새면서부터 모두 저녁을 향해 간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이면 일을 다 마치고 어둠이 오기 전 집으로 퇴근하는 일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더 비약해서 본다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을 살아가며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궁극적으로 마지막에는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을 낮은 비유로 표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일장 부문 : 우수>
세탁기와 오스트리아 ㅡ김주현
엄마, 나는 오늘 세탁기를 돌렸어요
세제를 들이붓고 섬유유연제를 조금 넣고 문을 꼭 닫고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내내 세탁기는 돌아가고 나는 잠을 잤어요
꿈에 빨려 들어갔을 때 나는 오스트리아에 있었고
엄마는 베토벤의 묘 앞에서 가만히
울고 있었다
늙은 엄마가 베토벤에게 말하기를,
미안해, 당신을 듣고 싶었는데 나에게는 음반이 없었어
나의 오래된 꿈,
피아노 피아노 피아노
그 위에 손가락 한 번 놓아본 적 없어서 당신을 만나지 못했어
세월이 흐르고 손이 사막처럼 굳어버린 후에 이제야
내 당신의 묘 앞에서 새파랬던 시절을 속삭인다고
더 젊지 못해 미안하다고
엄마,
왜 당신이 베토벤에게 사과를
젊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엄마 잘못이 아니라
그저 시대와 아픔과 좌절이 있었을 뿐이라고
소리치려 했던 그 순간에 세탁기가 멈췄다
더 이상 탁탁 돌아가지 않는 세탁기가 마지막으로 도솔미도미솔 노래했고
이젠 축축한 옷가지들을 네가 널 차례라고 재촉하는
세탁기의 건조한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머나먼 우주에 있을 당신과 베토벤과 오스트리아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 조금 더 맑고
깨끗하고 아프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채로 당신은 베토벤과 나란히 앉아
루체른 호수에서 달이 지는 게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평생을 궁금해 왔던 것을 그리도 가뿐하게 물어보고
뽀얀 손으로 밤나무 피아노를 치겠지
그건 아마 월광이었을 것이다
저물어 가는 해를 등지고
빨래를 널었다
<백일장 부문 : 장려>
고정하세요 ㅡ김은성
고정문씨는 열려 있다
다 닳아버린 척추를 벌린 채로
나는 그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 넣는다
바람이 뼈를 만졌다
열린 모습으로 고정된 걸까
고정문씨는 뻐근한 소리로
닫혀 버린다
척추에도 기름칠을 하는지 모두의 척추가 열리나
옆에 있는 미시오 아저씨는 힘이 세고 당기시오 아가씨는 단호하다
그저 자리를 지킬 뿐 척추는 굳어있다
고정문씨, 이제 그만 고정하세요
척추를 계속 여닫으면 척추분리증이 올 것 같아 허리를 매만져본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고
한동안 고정문씨의 척추가 열리지 않았다
아저씨 힘이 약히지고 아가씨는 유연해져
척추는 계속 닳고 있었다
그만
고정하세요
영주신문 신춘 ‘백일장’ 심사 총평
첫 회라 응모가 적을까 걱정했는데 많이 응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품이 많아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최우수상 수필 ‘선로’
우수상 김주현 학생의 ‘세탁기와 오스트리아’에서는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꿈을 꾸는 것으로 시를 끌어가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다. 세탁이 끝나면 들리는 도미솔도미솔 알람 소리와 연관하여 풀어낸 솜씨가 좋았다. 순수함으로 글의 뼈대를 짜고 생각을 충분히 한 관찰력으로 엮어내는 통찰력, 기발한 상상력이 합쳐진 시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려상인 김은성 학생의 ‘고정하세요’는 고정문을 의인화하여 쓴 시로 언어 유희하기 좋은 우리말이기에 ‘고정문씨 ’‘고정하다’‘ 고정하세요’등 동음이의어로 표현하였다.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하고 중간 부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갈 것이며 마무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문장을 구사하는 솜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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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중부광역신문
자물쇠 ㅡ 박찬희
안거가 일이라고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오가는 바람도 굳어 서있다
하필이면 벼랑 끝에 걸어놓은 맹약
효험이 낭설이기 십상이기도 하고
굳이 풀어 들여다 볼 상당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잡다한 호기심만 늘어
없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다
맹약의 해피엔딩은 녹슬고 녹아 서로에게 귀속되는 것
애지중지 닫아 걸 별 이유는 없어도
그냥 습관인 까닭에
벽을 치고 들어앉아 음과 양을 저 혼자 맺고 풀면서
맞지도 않는 열쇠를 깎는 일
어쨌든 그것도 수고라면 수고지
결속과 해지는 엎어 치나 메치나 한가지여서
틀림없는 쌍방의 일
자물쇠든 열쇠든 서로에게 맞출 수밖에
옳으니 그르니 해도 꼭 들어맞는 짝은 있게 마련인데
내가 너를 열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는 옥쇄 앞에서
밤낮 우물쭈물, 나만 속절없이 녹슬어간다
- 당선자 약력
박찬희 (59세) 서울신대 철학박사 미국 AEU 대학교의 겸임교수
2017년 계간 ‘문학의봄’ 발표 시작
제1회 한양도성 시공모전 대상, 제16회 바다문학상 대상(시), 제9회 금샘문학상 대상(시조), 제7회 문경문학상 대상(시), 제27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시)
3권의 시집과 1권의 전자책 시집
심사평
(본심: 송찬호 시인, 성낙수 시인)
응모 작품의 경향은 사회나 집단에 대한 관심보다 일상적 삶에 대한 통찰이나 개인 내면의 서사에 집중하는 현상,
‘열의 이동’
인생의 단계를 자전거, 모터사이클, 자동차 등에 빗대 형상화 눈길
‘가족 가득 태운’ 자동차로 쉼 없이 달리다 결국 폐차가 됨으로써,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헌신하다 노후에 이르는 이 시대 가장의 모습을 실감 있게 그렸다. 후반부 평이한 진술에 그쳐 아쉽다.
‘늦은 7시의 속사정’
‘동그라미’나 ‘멜론’ 등의 단어를 자신만의 개성적인 이미지로 표현.
전체적으로 작품이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만큼 언어와 상상력의 운용이 활달하고 주제 또한 깊이가 있다. 작품 중간에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어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물쇠’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작품.
잠그고 풀리는 ‘자물쇠’의 이미지를 통하여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의 이치를 설득력있게 설파하고 있다. 자물쇠처럼 닫힌 너, 이웃, 사회, 세상이 저절로 열리는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그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자물쇠라는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능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된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응모자가 치열한 시정신과 결코 만만치 않은 시적 기량 보유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자물쇠’를 당선작으로 선정,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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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
엄마는 외계인 ㅡ 최서정
엄마는 외계인*
분홍장갑을 남겨놓고 지상의 램프를 껐어요
눈 감으면 코끝으로 만져지는 냄새
동생은 털실로 짠 그 속에 열 가닥 노래를 집어넣었죠
온종일 어린겨울과 놀았어요 어느 눈 내리던 날
장롱 위에서 잠든 엄마를 꺼내 한 장 한 장 펼쳤죠 (우리 막내는 왜 이렇게 손이 찰까)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어린, 을 생각하면 자꾸만 버튼이 되는 엄마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 이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엄마
소곤소곤 곁에 누워 불 끄고 싶었던 적 있어요
그녀 닮은 막내가, 바닥에서 방울방울 웃어요
놓친 엄마 젖꼭지를 떠올리면 자장가처럼 따뜻해지던 분홍
그녀, 마지막 밤에 파랗게 언 동생 손가락을 털실로 품은 걸까요
반쯤 접힌 엽서를 펼치듯 창문을 활짝 열면
어린 마당에 먼저 돌아와 폭설로 쌓이는 그녀
더는 이승의 달력이 없는, 딸기 맛처럼 차게 식은
별똥별 나의 엄마
꼬리 긴 장갑 속에서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든 동생의 손이
주머니 속 캥거루처럼 쑥쑥 늙어가요
*엄마는 외계인 - B회사에서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이름 중 하나
ㅡㅡㅡㅡ
심사평
“문맥을 통솔하는 이미지가 신선, 상당한 습작과정 엿보여”
배귀선 시인·문학박사
도내 거주자 및 출신자 대상으로 공모
「의자」
“오랫동안 말을 다뤄온 언어들”에서 보이는 ‘말[馬]’과 ‘말[言]’처럼 시적 대상과 시적 자아를 동일화하는 동화(同化)적 구성이 돋보였다. 다만, 이러한 감각적 문장들이 확장되어 주제 구현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온에 머문 점이 흠이었다. 이는 주관적 관념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독자를 설득할 만한 이미지 제시의 결여로 이러한 현상은 「의자」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즉, 시의 중심축이 되는 일련의 서사적 구성이 변환 혹은 전환을 통해 확장되지 못하고 평면적 서술에 그친 점이 그것이다.
「엄마는 외계인」
정제된 시어와 절제된 문장이 눈길,
문맥을 통솔하는 이미지가 신선.
“그리우면 손톱이 먼저 마중 나가는” 시행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휘와 문장이 상보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촘촘한 긴장감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주관적 관념을 형상화하는 치밀함도 돋보였다. 아쉬운 것은, 시 전반을 훑는 상실에 관한 암울한 정서의 부유가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미흡했다. 그러나 다행히 ‘~요’체의 경쾌한 어미 작동이 우려의 추(錘)를 일정 부분 상쇄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가운데 주제를 밀고 나가는 힘 또한 심사자의 시선을 붙들었다. 이는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주체가 되도록 한 발 뒤로 물러서 견자의 입장을 취할 때 가능한 것으로, 응모자의 상당한 습작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눈사람처럼 희고 셀러리보다 싱싱한”에서처럼 침윤된 내면의 무게를 서정으로 감량할 수 있는 능력에 더해 나머지 응모작 두 편을 관통하는 직관과 통찰 또한 더 나은 앞날을 기대하게 하여 당선작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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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전북일보 신춘 : 시]
알비노 - 최형만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언어가 따라왔다
불면은 몸의 바깥이어서
색을 찾아가는 혈류에 잠기면
먹구름도 무지개를 그릴 텐데,
뜨겁게 타오른 바람이 굴절되고 있다
한 떼의 컬러가 증발할 때마다
멘델이 나누는 우열의 방식은
멜라닌 색소로 흘러드는 새하얀 비명들
그늘로 가는 누군가를 보면
투명한 홍채로 걸어간 순례처럼
바짝 끌어당긴 어둠을 안고 있다
붉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동안
진짜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
작은 온기에도 날마다 타고 있다
* 유색 동물에서 날 때부터 피부나 머리카락, 눈 따위의 멜라닌 색소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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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시]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
김용택 시인. 문신 교수.
전체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시의 어법과 형식을 무리하게 끌어쓰는 경향이 강했다. 자기 시를 쓰지 못하고 검증된 시 쓰기에 편승하려는 모습은 우려스러웠다. 그런 시는 화자가 시의 언어에 끌려다니다가 결국에는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
용기 있게 자기 시를 쓰려는 작품을 앞자리에 놓았다.
「새점 봅니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시어들이 적재적소에 적중하고 있었다. 차분한 어조 속에 쉽게 휘어지지 않을 이미지의 뼈대를 감춰놓는 수법도 믿을 만했다. 그러나
일상의 순간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그려나가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무심한 어법이 조금 더 팽팽하게 긴장했으면 좋겠다.
「주말 극장」
화자가 시의 서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시상 전개가 활달하고, 언어의 내적 활력이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도 소홀히 읽을 수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그러나
참신하거나 새로운 인지적 각성을 주지 못했다. 기성 시인의 시적 유전자가 너무 많이 발현
「알비노」
시적 긴장이 팽팽한 작품이었다. 시어들이 종횡으로 충돌하는 힘이 좋았다. 언어를 운용하는 폭이 넓고, 그 넓이가 시적 사유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기성의 시 문법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서 좋았다. 내적 서사가 좀 더 긴밀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앞으로 충분히 극복해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최형만
경남 진해 출생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제8회 원주생명문학상,
제14회 중봉조헌문학상,
제13회 천강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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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신문
산벚꽃 피는 달
달을 보면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저 달 언덕에 산벚꽃나무숲이 있었지, 난 날마다 산벚꽃나무숲 언덕에 올라 지구를 바라보았지, 지구를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가슴이 뛰던지, 지구에도 산벚꽃나무숲이 있을 거라 믿었지, 거기 산벚꽃나무숲 언덕에서 누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때는 정말
이제 생각나, 내가 저 달에서 떠나온 거
맞아, 내가 떠나올 때 잘 다녀오라고 기다리고 있을 거리고 손 흔들어 주던 너, 너의 젖은 눈이 생각나, 너와 함께 걷던 산벚꽃나무 숲이 생각나, 저기 산벚꽃 핀 언덕 아래 작은 절에서 날 위해 엎드려 기도하고 있을 네가 생각나, 어서 달빛 동아리를 내려줘, 나 이제 돌아갈 거야
그런데 이를 어째, 나 여기서 한 여자를 얻어 두 아이를 낳았으니…
【심사평】
"상상력 차원 더 높인다면 훌륭한 시인 될 것"
시적 긴장감이 돋보이는 작품이 유독 눈에 들었다.
첫째 모든 작품이 일정한 수준
둘째 시류를 추수하는 감이 있었다
셋째 관념적보다 감성적이었다. 넷째 지적 사유만이 아닌 지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을 잘 조화
단점은 시어 구사나 묘사기법이 다소 작위적이고 시류편승에 너무 민감하다.
자신의 철학을 미학으로 형상화시킬 줄을 아는 시인이다. 요즘 우리 문단의 시류에서 보듯 감각적인 유행풍조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지키면서 상상력의 차원을 높이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앞으로 훌륭한 시인되실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오 세영
【당선소감】
늦은 만큼 온힘 다해 시의 길을 가겠다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류근, 김영산, 하린, 김근, 황인찬 교수님 안현미, 이지아, 이병일, 이병철 선생님께도 감사
〈프로필〉
- 충남 서산 출생
-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창과 졸
-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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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둥근 물집-우정인
골목 어귀 잊을만하면 문을 여는 과일가게가 있다 잊히기 전에 나타나는 젊은 사내 하나와 모퉁이의 걸음 수를 재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욕심이 많은 아이처럼 붉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내는 맛 좀 보라고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들이민다 나는 깜짝 놀라 속살 속에 스미는 쓸쓸한 음각을
혀 밑에 감추었다 아직 바람도 다 익지 않은 가을인데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오래 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 풋잠이 들었을 때 그의 손이 닿으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 상상은 순식간에 과일가게에 퍼진다 상자들이 들썩인다 하룻밤 미쳐서 그의 싱싱한 심장을 베어 먹을 수 있을까 그의 여자로 과연 그러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주춤,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린다 여섯 개 만원이요 붉음이 노랗게 벗겨져 후회로 바뀌는 순간은 아주 크고 둥근 것이라서 나는 하루에 한 알이면 일주일은 먹겠네, 재빨리 지갑을 열었다 사내가 검은 비닐봉지에 사과를 담는다 아랫배가 축 처진 봉지에 담긴 사과가 둥근 물집 같다
나도 터뜨리지 못한 물집 같은 저녁
당선 소감
우정인 “누군가의 마음에 불쑥 찾아들 시 쓸 것”
1966년생 단국대 문창과 졸
심사평
안정적 시 세계 구축… 변용·확장 돋보여
장시ㅡ 매력적인 진술 방식과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이면 굿
주제의 선명도 필수
작위성 응모 작품 간의 편차 x
사물의 이면을 개성적으로 포착하는 시선
감각적 문장 강점
'둥근 물집'
시적 구성과 시어 운용이 소박한 반면, "사과"가 견인하는 식물적 이미지의 변용과 확장이 돋보였다. 또한, 타자와의 소통의 좌절을 통해 현대인들의 소외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응모한 시편들이 고른 수준 ㅡ안정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식물적 이미지들이 매개를 뛰어넘어 시에서 존재의 가변성으로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