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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공으로 가는 자기최면 원문보기 글쓴이: 마인드무브
그렇지만 김씨는 여전히 서울시내를 휘저으며 택시를 몰고 다닌다.
그것도 아주 신나는 표정으로. "올해 10월 말이면 회사택시를 몬 지 꼭 3년이 됩니다.
비로소 개인택시를 가질 자격이 생기는 거지요." 오랫동안 애써 온 끝에 이제 큰 계약을 앞에 둔 사업가 마냥 잔뜩 기대에 차있다.
그는 택시를 몰면서 지금껏 몰랐던 진짜 인생의 맛을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늙어 기운이 다 없어질 때까지" 운전대를 잡을 생각이다. 그가 뒤늦게 낮은 곳에서 새롭게 터득해가는 삶의 행복을 들어 보았다.
얼마 전 택시에 탄 중년 여성이 반색을 하더란다. "어머, 김 과장님!" 20년 전 중앙투자금융에 있을 때 부하 여직원이었다.
"그 때 나이 들면 택시운전 할 거라고 하시더니…. 정말로 이 일을 하시네요." '그랬던가? 내가 택시운전에 '뜻'을 둔 게 그렇게 오래 됐나?'
김기선씨는 오랫동안 금융인, 더욱이 성공한 금융인으로 살았지만 택시운전 또한 그 세월만큼이나 오래 생각해왔던 일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곰곰 생각해보니까 나이 들어서도 몸이 허락하는 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택시운전이더라구요. 자영업자나 변호사도 늙으면 뒷방으로 물러앉고, 의사도 손 떨려서 수술 못 한다면서요?" (따는 그렇기도 하다)
김씨는 은행이 최고의 직장이던 60년대에 서울은행에 입사했고, 단자회사의 인기가 한창일 떼 중앙투자금융과 고려투자금융의 간부를 맡았으며, 증권사들이 전성기를 누릴 무렵에는 동아증권(현 세종증권)에서 부사장까지 지냈다.
능력을 인정 받아 영풍상호신용금고 사장으로 스카우트된 뒤에는 IMF 사태 와중에서도 3년 임기를 세 차례나 연임했다.
주주들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 임기만료를 1년 앞두고 멀쩡한 자리를 홀연히 떨치고 나왔다. 그 이유가 택시운전을 하기 위해서 였다니.
"60살부턴 정말 자유롭게 내 일을 하며 살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인택시를 가지려면 법인택시 근무 3년 경력이 필요하더라구요. 그래서 계산해보고는 사표를 낸 겁니다.
제가 올해 딱 예순입니다. 정확히 계획대로 돼가는 거지요." 아내(56·교회 전도사)는 워낙 오래 전부터 남편의 장래 계획에 '세뇌'돼 왔던 터라 '진짜 저지르는구나'하고 놀라긴 했지만 크게 반대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혹해 하던 두 아들도 곧 아버지의 '용기'를 오히려 성원해 주었다.
(장남은 올 여름 대한항공 조종사로 옮기는 공군 파일럿이고, 둘째는 안정된 기업의 직원으로 각기 탄탄하게 자기 길들을 가고있다. 가정에 별다른 걱정이 없고 당장 생계가 급하지 않은 형편도 그가 쉽게 결심을 행동에 옮길 수 있었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혹 나태해질까 봐 사촌형님이 하는 택시회사를 피해 서울 서초동 집(최근에 경기 죽전의 아파트로 옮겼다) 바로 앞에 있는 생판 모르는 택시회사를 찾아가 취직했다.
그러나 노상 승용차 뒷좌석에만 앉아 다니던 그에게 택시 운전이 처음부터 만만했을 턱이 없다. "일을 시작한 지 한달 만에 몸무게가 5㎏이나 줄었어요.
수동변속기로 운전하다 보니 왼쪽 발목이 아파서 3개월 정도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고요." 그래도 지금껏 월 26일의 규정근무를 한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 업계 용어로 하자면 '만근(滿勤)'이다. "2년 반을 꼬박 만근했다는 거 그거 대단한 기록입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일까. 김씨의 일과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서둘러 차고지로 출근해서는 차를 받아 거리로 나서는 게 5시. 이 때부터 오후 5시까지 12시간 핸들을 잡는다.
운전이 끝난다고 해서 곧바로 퇴근하는 건 아니다. 사납금(하루 8뭔원인데 요즘은 이것 채우기도 힘들다)을 입금시키고 일지를 쓰고 차를 깨끗이 닦고 나면 속옷까지 흠뻑 땀으로 젖는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자칫 떨어질 체력을 헬스클럽에서 좀 추스리고 나서 집에 들어가면 대충 9시30분.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아내와 별로 얘기할 틈도 없이 곧바로 잠에 곯아 떨어진다.
"우선 노동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 큽니다. 노동의 맛, 캬!… 그거 기가 막힙니다." 그이 입에서 맛난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와 같은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예전 사우나에서 억지로 빼던 땀하고 일하면서 흘리는 땀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힘들게 일 끝내고 샤워를 하면 기분이 그야말로 날아갈 듯 하지요.
또 회사 다닐 때는 퇴근을 해도 늘 이어지는 골치 아픈 일이 머리 속에 남아있었지만 노동은 매일매일이 완결입니다. 그러니 내일을 생각할 것 없이 홀가분하게 휴식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지요."
그러나 정작 더 좋은 건 숱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순간순간 다가드는 생생한 생활의 느낌이다. "손님들은 별별 얘기를 다 합니다.
그런데 그게 평소 입밖에 내기 힘들었던 마음 속 진실들이거든요. 다시 볼 사람이 아니니까 툭 털어놓고 한풀이를 하는 겁니다.
제 경우를 봐도 차장, 부장 때까지는 그래도 직원들과 깊은 얘기까지 하고 지냈는데 임원이 되면서부터는 골치 아픈 업무 얘기만 들고 오더라구요."
그래서 그는 손님이 할 얘기가 남았으면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차를 세워놓고 들어주며 인생상담도 한다. 한번은 강남 수서에서 70대 할머니가 씩씩 거리며 타더란다.
이혼법정에 가겠다고 서류준비에 필요할 듯한 돈 10만원을 꾸어서는 무작정 택시를 잡았다고 했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할머니 감정이 좀 가라앉는지 마음을 바꾸십니다."
(차에 남겨지는 사연이야 그가 태운 손님 숫자만큼 될 터이니 그걸 다 전할 도리는 없다, 다만 삶을 불평하는 손님들에게 자주 해주었을 그의 비유가 절묘해 소개한다.
"우리가 밥 먹다가 돌이 한 3개만 씹히면 '이거 돌밥이잖아·'하고 짜증내잖아요. 하지만 쌀하고 비교해 그게 어디 돌밥입니까. 인생의 어려움이나 불평도 결국은 그런
거지요.")
물론 마음 상하게 하는 손님들도 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간혹 사정이 생긴 동료 대신 밤에 일 할 때면 술 취해 행패부리는 사람도 많지요.
그러면 '사는 게 얼마나 힘들면 저러랴'하고 그냥 넘깁니다. 딱이 저한테 감정이 있어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더구나 제가 평생 해온 일이 금융 서비스업 아닙니까. 웬만한 손님 다루는 건 문제없습니다."
그가 행복감을 느끼는 시간은 또 있다. 보통 오후 1시쯤 들르게 되는 시내 기사식당에서의 점심 시간이다. 함께 택시운전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같이 식사를 한다.
역시 D증권 상무와 S식품 부사장 등 화려한 이력을 지닌 친구들이다. (원래는 모두 넷이 의기투합했는데 모 상호신용금고 전무를 하던 친구는 부인이 끝까지 반대해 아쉽게 뜻을 접었다) "된장찌개, 제육볶음 따위를 나눠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을 합니다. 밥이 꿀맛같이 달아서 한 톨 남기는 법이 없어요."
그는 경력이 경력인 만큼 여전히 모모 클럽 등 각종 사회 명사들의 모임 회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곳에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데서의 대화란 게 대개 타워팰리스가 어쩌니, 골프회원권이 어떠니, 아니면 정치인 누구누구와 만나 어쨌다느니 하는 공허한 것들이지요. 은근히 유세들을 하는 겁니다.
서로에 대한 인간적 배려란 것도 없고…. 택시를 해보니까 오히려 열심히 사는 서민들의 마음이 더 넉넉합디다. 복잡한 행선지를 미안해 하거나 거스름돈을 배려해주는 손님도 그런 분들이지요."
1만5,000원 짜리 구두에 회사에서 지급한 남방셔츠, 만원짜리 바지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김기선씨에게서 왕년 금융업계 CEO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전에는 수십만원씩 하는 발리구두도 신고 그랬지만 그게 살아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수입이 10분의 1도 안되게 줄긴 했지만 사실 바빠서 돈 쓸 일도 없어요. 애들도 다 커서 100만원만 벌어도 그런대로 살겠습디다."
아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언론에 소개되는 걸 꺼린다는 그가 그래도 인터뷰에 응한 건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체면 따져서 일 못하는 이들은 용기도 없고 삶의 진정한 행복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눈 높이를 낮추면 또 다른 세계가 보이는 법이지요. 아, 위에서 보면 머리통 밖에 안 보이지만, 아래에서 보면 미니스커트 아래 시원한 다리도 보이지 않습니까." 그의 거침없는 말투와 웃음이 더 시원했다.
임기 1년 남기고 저축은행 CEO 자진사퇴 …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신나면 OK
택시만 몰았다면 잘 모를 일이지만, 저는 39년 동안 직장을 다녀보지 않았습니까? 택시에 타면 자주 접하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처럼 집에만 들어가면 세상만사 모두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하루에 딱 10만원만 벌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우리 부부 충분히 살 수 있거든요. 물론 운 좋은 날도 있죠. 2만원만 더 벌어도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그런 날이면 통닭과 맥주를 시켜 아내와 실컷 먹거든요. 그런 게 사는 재미 아니겠어요?”
김기선(66) 씨는 흥이 나 있었다. 한눈에 봐도 택시기사임을 짐작하게 하는 복장의 그는 “제육볶음이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 중 하나”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제육볶음이 기사식당의 특급메뉴예요. 기사 일을 하고 나서야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입에서 살살 녹아요, 녹아.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밥맛이 그리 좋을 수 없어요.”김씨는 꽤 유명한 택시기사다. 다소 이색적인 그의 경력 때문이다. 2001년 11월1일, 사표를 던지고 운전대를 잡기 전 그의 직급은 최고경영자(CEO), 즉 사장이었다.
광복 한 해 전 충남 온양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했다. 은행원의 주가가 한창이던 1963년 서울은행에 입행해 대리로 승진한 후 중앙투자금융으로 자리를 옮겨 영업부장까지 지냈다. 이후 고려투자금융 이사, 동아증권 상무 등을 거쳐 영풍상호저축은행 대표이사로 취임해 금융권에서는 매우 드문 ‘3연임 수장’을 지내는 기염을 토했다.
한마디로 너무 잘나가던 그였다. 이렇듯 39년간 승승장구하던 그가 임기를 1년이나 남겨두고 CEO 자리에서 갑자기 물러나자 주변에서는 온통 놀란 눈치였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그는 “택시기사로 새 인생을 살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왜 그런 힘든 일을 사서 하느냐”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말이 주위에서 쏟아졌다. 가족의 반대도 거세 몇 개월간 승강이를 벌였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새 직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고이면 썩는다, 박수 칠 때 떠나라
“직장에 다닐 때부터 퇴직하면 택시기사를 할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시작하려니 체면 때문인지 가족 모두 반대하더라고요. 아마도 아내는 친구들로부터 ‘너희 남편, 주식투자 잘못해 망했냐’ 같은 소리를 들을까 겁났나 봐요. 대한항공 기장을 하는 큰아들도 ‘용돈 드릴 테니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리는데, 제가 그랬죠. ‘너나 나나 같은 운전수인데 왜 그러느냐? 나는 배고프면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먹을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있어? 사실 택시가 더 재미있다’고 말이죠.”
이어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 아내 친구의 남편들은 퇴직 후 놀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일을 계속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1억원대 고액연봉자였던 그가 고수입이 보장된 1년을 마다한 채 직장을 박차고 나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소위 박수 칠 때 떠나자는 것.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죠. 높은 자리를 나 혼자 차지하고 있으면 조직은 물론 개인에게 뭐 그리 도움이 되겠어요?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기가 끝나면 ‘이제 나가시죠’ 소리를 들을 텐데, 그 말 듣고 서운해할 필요 없이 멋진 모습으로 나올 요량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꼭 환갑기념으로 개인택시를 마련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개인택시를 몰기 위해서는 법인택시를 3년간 운전해야만 한다. 그 기간을 맞추기 위해 58세에 회사를 그만두고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그 3년이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던 시기였고, 제가 스스로 원했던 일이기에 재미있을 수밖에요. 덕분에 3년 동안 만근(滿勤)할 수 있었답니다.”
그는 왜 택시 운전이 즐거운 것일까?
“어느 직장에 다니든 스트레스가 많잖아요? 의사·변호사와 같은 전문직도 마찬가지이고요. 택시기사도 여러 손님을 태우다 보면 마찰이 일어나는 등 스트레스가 있죠. 하지만 그 스트레스는 직장인의 스트레스와 차원이 다릅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의 질타 등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계속 따라다니게 마련인데, 택시기사는 그 손님만 내리면 금방 잊어버리거든요. 그때만 지나면 그만인 셈이죠. 물론 처음부터 택시만 몰았다면 잘 모를 일이지만, 저는 39년 동안 직장에 다니지 않았습니까? 택시에 타면 자주 접하는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처럼 집에만 들어가면 세상만사 모두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노동 자체가 주는 행복도 언급했다.
“평생 낚시·등산 등만 즐기며 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일하다 쉴 때 해야 더 재미있다고요. 퇴직 후 할 일이 없어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다 보면 별로 재미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직장에 다닐 때에야 ‘큰 거(물고기) 잡았다’며 자랑 삼아 이야기라도 하겠지만, 노는 사람이 어디 가서 자랑거리로 삼겠어요? 휴식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노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택시 운전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을 터. 그가 생각하는 단점을 물었다. 이에 그는 사고 위험과 육체적 고달픔, 두 가지를 꼽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단점이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닌 듯했다.
“사고 위험 때문에 택시 운전을 하지 못한다면 저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있기 전에 어느 누가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했겠습니까? 대구지하철 화재는 어떻고요.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달픔도 마찬가지예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 아내만 봐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로 수백 명분 음식을 만들고 와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안 합니다. 아무리 몸이 힘들고 고달파도 자기가 신나 하는 일이면 즐겁게 마련이죠.”
김씨는 고혈압 약을 복용하기는 하지만 건강에도 자신 있어 보였다. 30년째 거의 매일 운동센터에 나가 탁구와 헬스를 즐기는 데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틈틈이 운동을 한다는 것. 그만의 비법은 간단하면서도 부지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앉아만 있는 직업이어서 택시 운전사들이 허리가 아프다며 직업병 운운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조물주가 만들어준 운동시간이 있기 때문이죠. (웃음) 소변이 마려우면 저는 반드시 지하철역 화장실을 이용합니다. 일부러 역에서 멀리 주차한 뒤 운동 삼아 가볍게 뛰어가죠. 그리고 지하철역 계단이 좀 많습니까? 그걸 오르락 내리락하다 보면 또 저절로 운동이 되죠.”
이어 그는 “손님으로 의사들을 자주 만난다”면서 “덕분에 공짜 상담도 받고 일석이조”라고 택시 운전의 장점을 또 하나 늘어놓았다. 이처럼 택시 운전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는 듯했다.
그는 3년간 법인택시를 몰며 얻은 여러 이야기 등을 모아 2005년 <즐거워라 택시인생>이라는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책에는 그가 운전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그만의 소회 등이 듬뿍 담겨 있다. 책을 내고 받는 인세는 그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운전하며 쓴 책 덕분에 아내와 남극여행
“최근 남극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비행시간만 33시간일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참 남는 것이 많은 여행이었습니다. 아들이 항공사에서 근무하다 보니 항공료는 거의 무료여서 다행히 큰돈은 들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로 여건이 맞아 그런 오지여행도 가능했던 셈이죠.”
덧붙여 그는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며 자리를 비워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어 개인택시가 좋은 것”이라고 빠뜨리지 않고 말했다. 그의 택시예찬론을 듣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자신처럼 ‘제2의 인생’을 멋지게 펼칠 후배들을 위한 조언이 궁금했다.
“3년 전부터 1년에 네 차례씩 정기적으로 포스코 인재개발원에서 예비퇴직자들을 상대로 강연합니다. 그때마다 제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눈높이를 낮추고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은퇴를 눈앞에 둔 베이비붐 세대에게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이어지는 그의 충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퇴직 준비라고 하면 연금·보험 등만 따졌습니다. 즉, 경제적 노후대책만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죠.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옛날과 달리 퇴직 후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점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먹고만 사는 것이 노후대책이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무엇을 통해 먹고사느냐? 이른바 ‘삶의 질’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황혼자살이 느는 이유가 뭡니까? 허무해서입니다. 젊어서는 무엇을 해도 즐거웠으나 지금은 재미없다, 이런 논리죠. 때문에 저는 단호히 노동을 추천합니다. 정년을 앞두고 생각하면 늦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봐야 잘 보입니다. 5~10년 뒤를 걱정하십시오. 돈 안 들이고 힘든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탓인지, 소위 체통을 중시한다. 특히 고위직 관료나 CEO 등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퇴직자라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한 편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대학 총장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잘못된 시선을 꼬집었다.
“외국에서는 대학 총장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학의 수위를 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자신이 그 학교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마음에서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즐거워 하는 일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례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령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어디 마음 놓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보증을 잘못 서서 그러나’ ‘선거에 나가려고 그러나’ 등 온갖 예측이 난무할 것입니다.”
얽매이는 일 없는 1인기업 살맛 나
그는 “퇴직 후에는 일뿐만 아니라 주거환경도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아파트만 봐도 복도식 서민아파트가 훨씬 인간미가 넘칩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즐기는 것이 서민사회죠. 위로 가면 폼만 잡고 거들먹거릴 뿐 인간미가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나이가 들수록 서민층으로 내려와야 살 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퇴직 후 어떤 일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얽매이는 일이 적은 택시기사 같은 1인기업이 좋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굳이 택시기사를 권하지는 않는다”고 정정하며 멋쩍은 듯 웃었다. 택시 운전이 그리도 신날까? 그는 부인 눈에도 자신의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진 점을 귀띔하기도 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옛날에는 매일 술 마시고 찡그리더니 요즘은 못 벌면서도 매일 신나 보인다고요.(웃음) 에어컨이 있다 해도 여름철에는 20분만 차 안에 있어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멀리 손님이 보이면 쏜살같이 달려가 낚아채죠. 그 손님이 장거리 손님이라도 되면 대어를 건져 올린 기분이고요. 오늘은 조금만 더 벌면 목표달성이구나 하는 생각에 시간도 빨리 간답니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들어가 지폐를 세어보며 혼자 신나 한답니다.”
그는 언제까지 이 즐거운 택시 운전을 하고 싶은 것일까?
“서울에도 80세 이상 운전자가 꽤 많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91세가 목표입니다.”
<김기선 씨가 꼽은 택시 운전의 즐거움>
1.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 2. 가정이 화목해진다. 3. 밥은 맛있고 잠은 달다. 4. 육체노동 후에는 상쾌한 기분이 찾아온다. 5. 봉사활동이 가능하다. 6. 80세가 넘어도 일할 수 있으니 정년이 없다. 7. 쉬는 날에는 등산이나 축구 등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8. 자본이 필요 없으니 망할 염려가 없다. 9. 종업원 관리 등으로 골치 아플 필요가 없다. 10. 늘 새로운 손님과 목적지를 만나니 지루하지 않다. 11. 사회 이면을 체험할 수 있고, 인생상담도 가능하다. 12. 나이나 직업의 제한 없이 대화 상대가 다양하다. 13. 혼자 하는 일이니 남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다. 14. 일과가 끝난 후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갈 필요가 없다. 15. 일정한 수입이 있어 자식에게 손 벌릴 필요가 없다. 16. 늘 긴장하고 자극을 받으니 치매도 예방된다. |
첫댓글 생각 해 보게 되었어요.
왕성한 활동을 하며 보다 많은 수입을 갖는 같은 연배 분들과 ,,
그리고 이분의 지나 온 삶과 비교를 해 본다면 금전적인 면으론 좋은 말년은
아니겠지만 행복지수로는 최고의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자격이 몹시도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