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은 작고 투명한 세계였다. 햇볕이 유리벽을 타고 물결 위에 흩어지면 그 안에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은 가재는 그저 가벼운 존재였다. 아이가 우연히 학교에서 받아와 기르기 시작한 것이 열 달을 채워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받아 간 가재는 하루 만에 죽었다는 소식이 다반사였고 꽤 오래 키웠다는 것도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왜 살아남았을까. 장난감 같았던 가재의 무게가 한 생명으로 여겨졌을 때, 이 작은 존재에게서 나는 물음 없는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말도 없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는 가재는 물 밖의 세상에는 무심하다는 듯 조용히 살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왜 이 생명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을까.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밤 물을 갈아주었다. 바쁜 아침에 전등을 안 끄고 나가는 일은 있었어도 가재 먹이는 잊지 않았다. 먹이를 던져줄 때마다 물 밖으로 나와 집게발을 치켜드는 모습을 어느새 즐기고 있었다.
2박3일 가족여행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일이 가재를 차에 싣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재와 나의 세계가 겹치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단지 이틀 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죽어버린 가재를 마주할까 겁이 나서였다. 물이 바뀌면 사달이 날까싶어 집에서 받은 물을 짐칸에 챙기고 어항이 쏟기지 않도록 단단히 여몄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발치에 놓인 가재를 살피느라 여행은 피로하면서도 애틋했다.
그런 것들은 분명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나는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사랑과 책임, 돌봄과 구속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할지 몰랐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게 나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헌신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더 자주 이 생명의 부재를 상상하게 되었다. 내가 바랐던 것은 '버릴' 자유였을까.
돌본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언어, 존재론적 작용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단적인 방식이 바로 생명을 돌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돌봄은 타인을 위한 행위지만 이 세상에서 내 자리를 확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가재가 죽을까 봐 피곤을 무릅쓰고 매일 물을 갈아주며 여행의 일정을 바꾸기까지 했던 것이다. 나를 버려 가재를 지키는 꼴이다. 이 돌봄이 내 일상을 방해하고 지치게 만들 때 , 은근히 가재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이렇게 나를 낯설게 하고 잔인하게 할 줄 몰랐다.
나는 좋은 사람일까. 한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는 인간일 수 있을까. 왜 나는 이토록 쉽게 피로해지고, 그러면서도 그 생명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부지런히 물을 갈아주고 있을까.
손바닥만 한 어항을 경계로 둔 그 안의 생명과 나는 서로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누군가를 버릴 자유, 책임을 내려놓고 가벼워질 자유는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결국 죄책감이나 꺼림칙함이 없는 자유는 이 얽히고 설킨 관계를 얼마나 더 나은 방식으로 엮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삶은 종종 그런 식이다. 결론을 구할 수 없는 걱정거리들, 원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나를 변화시키고 떠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마음의 부피를 감당하기 어렵다. 나는 가재의 죽음을 바란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해방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리라.
누구나 자신만의 가재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은 가족이나 직장일 수도 있고 기억 혹은 물질일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 대해서조차 혼자만의 평화를 갈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리되지 못하고 무겁게 끌려 다닐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주저앉아 버린다.
도피에는 결말이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붕 아래 선 것처럼 달아날 준비를 내려놓지 못한 채 불안해야 한다. 나를 갉아 먹지 않는 방식으로 가재를 살리는 상법을 찾는 것, 살아가는 연습이 될 것이다. 책임을 놓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삶을 무너지게 하지 않도록 관계를 튼튼히 하며 나를 균형있게 지어 올리는 방법이 필요하다. 진짜 자유는 해방이라기보다 무엇과 어떻게 잘 얽힐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력으로부터 얻어질 터이다.
내 안의 모순을 해격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가재를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잖은가. 그 이후의 징벌 같은 자유를 누릴 자신이 내겐 없다. 희생, 잭임, 무거운 의무가 가장 버티기 힘들 때 살아가게 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밥그릇만큼 작은 어항에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던 여러 장치들을 검색해 본다. 값나가는 여과기, 산소 공급기 같은 것들이 가재와 나의 시간을 자유롭게 해줄 듯하다. 염치를 떼어내 두고 잠시 신세 질 수 있는 이웃을 물색한다. 열 달을 함께 살고 나서야 알게 된 이 느린 조율이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일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도 느리게 답을 찾아갈 것이다.완전한 자유도, 완전한 조율도 없을지 모른다. 문득 가재가 어서 죽기를 바란 마음이 들었다는 사실도 나를 나븐 사람으로 만든것은 아니었음을 안다. 그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나는 비로소 손가락보다 작은 생명의 크기를 한 우주로 규정하게 되었다. 진정한 자유는 책임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그 책임 안의 어두운 부분까지 마주하는 일이리라.
언젠가 나도 말 없는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삶 한 귀퉁이에서 물결 따라 흔들리는 작은 추억으로 남고 싶다. 어쩌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는 그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아침 필사를 하면서 우물 안같이 깊은 심연을 느낍니다.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글로 옮겨 적어 모두에게 읽게 해준 영경 샘 감사합니다.
가재를 통한 자기안의 복합성을 내면의 사유로 풀어 낸 참 매력있는 글입니다.
지영작가님!!!
앞으로도 반짝 반작 빛나기를....
저도 감사합니다.
언제 시간 내서 자판을 두드려야지 하고 있던 참에~~^^
감사한 마음으로 복사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