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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어떻게 하던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제가 지금 여기서 발제한 문장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쥬라기 공원(The Jurassic Park)』이라는 영화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한 고생물학자가 읊조린 말입니다.
Life willfind a way(생명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박물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생명이 생존과 번식을 위해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 작동되는지를 밝혀냈습니다. 그의 저서 『종(種)의 기원』의 원제목이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었듯이 생명은 자연 선택에 의해 방법을 찾아갑니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서는 다윈의 이론이 한 고생물학자의 입을 통해 나온 것처럼 이 영화의 원작자나 제작 감독한 사람들은 진화론이나 고생물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일 것입니다.
고생물학자라면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하버드 대학의 지질학과 동물학 교수로 있던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입니다. 『인간에 대한 오해』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라는 뛰어난 저술활동을 했던 그는 메이저 리그 야구광이기도 했습니다. 메이저 리그에 60년이 넘도록 4할대 타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의 진화이론인 “단속 평형설”로 증명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 대하여 과학적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느 공룡 티라노 사우루스나 벨로시 랩터는 쥬라기 시대가 아니라 쥬라기 다음의 백악기 후기와 말기에 나오는 동물이어서 『백악기(白堊期) 공원』이라고 해야될 것같다고 고생물학자다운 지적을 하였습니다.
‘Life will find a way(생명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저는 요즈음 이 말이 저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話頭)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 생명이 생존의 방법을 찾아내듯이 우리의 공동체도 생존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동안 지켜보아 왔지만 문재인 정권이 나라를 끌고 가는 모습이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접어들고 잇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정점에 모든 난정(亂政)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식물 총장이 된 윤석열 검찰총장의 퇴진입니다. 그동안 현 정권은 살아있는 권력도 수사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이제 보니 언론을 향한 립서비스에 불과하였습니다만)에 지난 정권의 적폐청산에 이어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윤석열 총장에 대해 시민들은 전폭적인 공감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태까지 시민들은 하이에나처럼 죽은 권력의 사체(死體)를 난도질하는 검찰을 보아왔어도 윤총장과 그의 측근 검사장같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검찰을 보기 어려웠던 터라 더욱 시민들에게 공명(共鳴)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조국 법무장관의 학종위조에서부터 월성원전 경제성평가조작, 송철호 울산시장 불법선거, 라임·옵티머스 자산운용비리, 최근에는 부동산 불법투자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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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부패에 검찰의 칼날이 점점 권력의 심장부로 다가오자 정권실세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윤석열 검찰총장과 그의 측근들에게 융단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윤석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 정권과 대깨문들은 모두 좀비족이 된 것같습니다.
『대중의 미망(迷妄)과 광기』의 저자 찰스 매케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무리지어 생각하는 동물이다. 미칠 때는 집단으로 미쳤다가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는 한 사람씩 천천히 온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TV드라마를 잘 보는 편은 아니지만, 사극대하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궁금하여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면 일방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게 되면, 국민들은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되어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구속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시대적 구속력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그 시대의 관점에서 오늘의 사회와 비교하여 볼 수는 있어도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지난 시대를 적폐로 몰아가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또한 역사의 본질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태조 왕건』이나 『불멸의 이순신』 그리고 『정도전』같은 성공한 대하드라마는 국민들에게 지나간 시대에 대한 지식의 시야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문제가 어떻게 부각되고 있으며 또한 제작진의 역사해석도 엿볼 수 있습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고려말의 권신인 이인임역을 맡은 박영규의 연기가 일품이듯이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의 역할보다 미륵을 자처하던 궁예의 역을 맡은 김영철의 연기가 압권이었습니다. 드라마는 그의 광기를 통해 말세의식 속에 태어난 권력, 종교로서의 정치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적라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륵(彌勒)을 자처하며 폭압적인 통치를 하던 궁예(弓裔)를 보지못해 승려 석총이 죽기를 각오하고 궁예를 향해 간언(諫言)을 합니다.
“소승은 어려서 불문(佛門)에 입문하여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미륵만 배워왔사오나 폐하와 같은 미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날 거짓말을 말하고 계시오이다. 낙원도 없고 극락도 없소이다. 거리엔 죽은 시체들과 오갈 데 없는 백성들이 유리 걸식하고 있소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속성은 변함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세상에 나타난 지옥의 대부분은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변의 위험을 무릎쓰고 석총은 외칩니다.
“조정에 사악한 간신들만 들끊고 있으니 어찌 폐하의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막히지 읺겠사옵니까. 폐하, 나라가 이미 깊이 병들어 있사옵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속지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저 요원한 ‘북방(北方)의 세계’를 논하지 마시고 죽어가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시옵소서. 그 길만이 살길이옵니다. 더 이상 백성을 속이지 마시옵소서.”
궁예는 석총의 입을 철퇴로 쳐라고 말합니다. 철퇴를 맞고 쓰러져 피투성이가 된 석총이 마지
막으로 내뱉는 말입니다 “거짓 미륵이시여, 그대의 세상은 이미 끝났소이다. 이미 새로운 미륵이 나타나 내일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소이다. 거짓 미륵이시여, 저주를 받을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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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여 이런 장면이 기시감(旣視感)이 든다고 하여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것은 아닙니다. 통찰력이 있었던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적확(的確)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그대로 되풀이 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그 운율(韻律)은 반복한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은 진실이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요즈음 나이가 들수록 그런 세상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늙은 나이에 ‘이런 세상을 볼려고 아등바등 살아왔는가’하는 만시지탄(晩時之歎)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세대는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에 민주화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부끄러움이 언제인가부터는 분노로 바뀌어 있는 걸 보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시민운동을 포함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의 위선을 너무 자주 보게됩니다. 거기 더하여 그들은 국뽕을 맞아서 그런지 민족주의자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문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하여 부산 정치인과 관료들을 만나 담화를 나누는 자리가 해운대 미포의 거북선이라는 횟집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으며 마녀사냥식의 친일분자를 매도할 때였습니다. 거북선은 우리에게 이순신을 상징하는 물화된 이미지입니다.
청와대 안보수석 정의용이 일본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안보실장의 방에도 거북선 그림이 걸려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한 나라의 지도자와 관료가 가지고 있는 삼류 애국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고차원의 외교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가 꾸짖는 외식하는(겉으로 포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사실 위선적인 민족주의자 였습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고 해꼬지 하고자한 말이 “가이사(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였습니다. 예수가 동전인 데나리온을 들어 보이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도 바리새인의 위선을 무척 싫어하였습니다. 요즈음 저의 심정 또한 그러합니다.
제가 우리 동기 홈페이지에 지난번 올렸던 글이 『우리 역사에 각인된 문화적 유전자―밈(meme)』이였습니다. 부족한 지식으로 올린 글이지만 동기들의 격려의 글과 많은 조회에 제가고무된 감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글에서 우리의 뿌리깊은 당쟁으로 인한 진영논리와 주술과 미망에 사로잡힌 우리 종교에 스며들어 있는 샤먼의 유전자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라는 성숙한 시민사회로 진입할 수 없다는 걸 강조한 바 있습니다.
왜냐면 그런 문제의식과 더불어 문재인 정권의 진영논리에 망국(亡國)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절친한 친구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를 가슴에 지니고 다닌다 합니다. 그것을 지금도 가슴에 지니고 다니는지 묻고 싶습니다.
41%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그는 대통령 취임선서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도 가슴에 품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며 협치를 약속했습니다. 그것이 공허한 약속이라는 걸 국민이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협치가 아니라 국민을 반반씩 나누어 서로 원수처럼 대립하도록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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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보니 애당초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것을 잃은 대신 그는 문빠와 같은 열렬한 지지층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한갓 소인배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의 진영논리는 인사정책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인사(人事)는 그의 결정적인 패착이었습니다. 동양의 역사에서는 고래로부터 천하의 인재를 두루 골라 쓴다는 용인술(用人術)이 통치의 핵심입니다. 인사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인사가 그만치 중요하다는 뜻과 함께, 인사가 그 만치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공한 지도자는 천하의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며 또한 인재는 주군을 위해 그의 재능을 공의에 의거하여 사심없이 헌신하는 수어지교(水魚之交)와 같은 사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촉(蜀)의 군주 유비와 재상 제갈량과 같은 관계를 말합니다.
천하의 인재를 두루 쓴다는 것은 성공한 지도자들이 갖는 특징으로 인재풀이 넓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많은 사람과 교유를 할 수 있는 인격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일 것입니다. 인재풀(pool)이라는 말은 인재공급원(人才供給源)이라는 뜻으로 언제부터 사용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진화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유전자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정치학자들이나 칼럼니스트들이 써온 듯합니다.
생태계에서 일정한 물리적 공간이나 자원확보에 성공한 종(種)의 개체들은 유전자풀이 넓으며 유전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통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치풍토에서도 인재풀이 넓 고 다양하다면 그 지도자는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겁니다.
그러니까 유전자풀과 인재풀은 그 속성이 비슷한 걸 보면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입니다.
유전자풀이 넓으면 종의 진화도 유리하며 인재풀이 넓으면 정치의 진화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작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문재인 정권의 인재풀은 진영논리에 갇혀 우리나라의 유수한 기업들이 사용하는 인재풀에도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기업들이 그런 인재풀에 갇혀 있다면 벌써 도태되었을 겁니다.
옛날 이백(李白)은 장진주(將進酒)에서도 인재는 반드시 쓰일 데가 있다고 읊었습니다.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하늘이 내게 준 재주 반드시 쓰일 데가 있으리니.) 정치지도자는 숨어 있는 인재를 넓은 인재풀에서 찾아야 합니다. 김현미 다음에 변창흠 쓰고, 조국 다음에 추미애 그리고 박범계로 이어지는 인사로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것 같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조국 법무장관의 심복이 된 김오수 차관을 감사원으로 추천하자 최재형 감사원장이 몇 번이나 비토를 놓았겠습니까. 저러다가 필시 인사사고가 나지 싶었습니다. 이렇게 좁은 풀은 자기 진영은 정의롭다는 일종의 정신적 폐쇄성인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가 듣도 보도 못한 5·18 역사왜곡처벌법과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입니다. 이것은 역사와 언론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며 5·18을 비방할 때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 한다는 것입니다. 5·18을 견고한 역사적 사실로 보면 되는 것을 그 사실을 신성시하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촌티 나는 역사관입니다.
그것과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을 백두가족으로 신성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국가는 정치공동체입니다.
“국가의 정신은 종족주의라는 낡은 항아리 속에 민주주의라는 새 술을 만들기 위한 효모이다”라고 토인비 박사는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퇴임 시 지지율이 65%나 되었던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는 본래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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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운동가 출신이지만 중도 우파를 포용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퇴임사에서 “나는 내 정원에 증오의 나무를 키우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여 많은 국민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사실 자연상태의 촌락공동체 사회에는 특별한 인재풀이 없으며 교역도 하지 않는 자급자족경제입니다. 인류학자들은 우리 호모사피엔스는 도구와 불을 사용하며 체격도 우리보다 큰 네안데르탈인이 한때 우리와 공존했으며 DNA 분석결과 그들과 짝짓기까지도 했던 것으로 최근에 파악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적지만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멸종했으며 사피엔스만 현생인류로 살아남았습니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사피엔스 종(種)이 사회를 조직하는 사람 수(數)와 대규모 수렵을 하며 자원을 획득하고 교역을 하는 데에서 네안데르탈인을 압도한 것으로 밝혀냈습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촌락공동체는 기껏해야 100명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진화론자이며 문화 인류학자인 로빈 던바 옥스퍼드 대학교수는 많은 원시부족을 비교 연구하여 그 임계점을 150명으로 산출해내었습니다.
그것은 현대의 정보화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합니다. 페이스북의 친구가 수천 명이 된다 해도, 결국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부족은 150명 이상의 조직을 못 만들지만, 호모사피엔스는 수백 명의 조직을 만들어 대규모의 사냥을 했으며 1만 년전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집단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리하여 150명을 사피엔스가 그 임계점을 넘은 숫자이며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이름을 따 던바의 수라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최초의 도시인 여리고와 터키의 카탈후유크는 6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졌으며 그 후 수메르문명의 도시국가 우루크는 5~8만 명의 인구를 가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 초기의 도시국가인 정치공동체가 발생하면서 그에 따른 전문화된 직업의 분화로 사피엔스는 유전자풀만이 아닌 인재풀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현재 세계 10위의 교역 대국입니다.
교역 대국에 걸맞은 인재풀을 만들고 활용 해 나가야 할 나라에서 인사에서 탈선사고가 빈번한 것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좁은 인재풀에 갇힌 대통령을 보면 저는 문화 인류학자인 던바의 수가 자꾸만 떠오르게 되어 민망한 심정입니다.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인사(人事)였습니다. 일설에는 그가 행한 인사에서 가장 잘한 것이 막내아들 이건희에게 경영 승계를 한 것이라 합니다.
물론 자연계에도 생명의 번성과 멸종의 시기도 있고 인간의 역사에서도 문명과 국가는 성장과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질학 연대나 유구한 역사연대는 우리의 능력 밖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건국한 지 고작 70년밖에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서 고생물학자가 “생명은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결국 “우리 국가라는 공동체도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라는 해피 엔드를 만들어 낼까요?
로마인들은 노예를 ‘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우리는 성찰을 담아 이렇게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노예는 ‘제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포기한 자’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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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월 7일 보궐 선거는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2021년 3월 17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
첫댓글 잘 읽고 새기도록 할랍니다. 수고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