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 인터뷰ㅣ'5공 설계자' 허화평이 말하는 '전두환과 나' 그리고 '대통령 참모론'] "최규하 대통령 '광주 충격'에 자진사퇴" 全 대통령 처가 비리 수사로 갈등…청와대 참모는 목숨 걸고 바른 소리 해야 박종주_월간중앙 차장(jjpark@joongang.co.kr) |
청년장교 시절부터 의기투합해 온 군 선배의 대통령 취임. 청와대 참모로 대통령의 의중을 거스르면서까지 소신을 펼치다 낙마해 5년 동안 미국에서 야인생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재기했으나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으로 구속 수감. 옥중출마로 두 번째 당선. 그러나 유죄 확정으로 곧바로 의원직 상실….
허화평 전 의원의 이력은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과도 같다. MBC의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을 계기로 세간의 관심인물로 떠오른 허 전 의원을 만났다.
■ ‘5월 광주’에 대한 정치적 부담 미처 생각 못했다
■ 중위 때 육사 6년 선배 전두환 소령과 첫 대면
■ 이순자 여사의 새세대육영회 활동에 브레이크 걸다
■ 이·장사건 놓고 대통령에 “다 구속해야 한다” 건의
■ 정의사회 구현 위해 금융실명제 반대
■ 5共은 박정희시대의 嫡子, 이제는 정당한 평가해야
■ 한국의 保守, 콘텐츠 보강 필요하다
“5공화국이 아무리 미워도 진실은 진실대로 존재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과장, 왜곡하고 날조해 버리면 진실마저 사라져 버립니다.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나’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5공화국 초기 대통령 정무수석을 지낸 허화평(許和平·68) 전 의원은 요즈음 ‘5공화국 옹호’에 바쁘다. MBC TV의 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을 놓고서다. 그는 12·12, 5·18 등 드라마 초반부에서 다뤄진 상황들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는 모습에서 ‘5공 설계자’로서의 면모를 되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許和平
1937년 경북 포항 출생
포항고·육군사관학교 졸업(17기)
육군 9사단 작전참모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준장 예편
대통령비서실 보좌관
대통령비서실 정무 제1수석비서관
美 헤리티지연구소 수석연구원
현대사회연구소 소장
제14·15대 국회의원(경북 포항)
미래한국재단 소장(現) | | 그는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 당시 검찰이 ‘하극상이자 군사반란’으로 규정한 12·12사건에 대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5·18 광주항쟁과 관련해서는 “계엄사령부를 통해 대통령의 재가까지 거친 정상적 시위 진압작전”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신군부가 집권의 명분을 찾기 위해 특전사 장병을 투입해 강경진압함으로써 고의로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발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5공화국은 민주주의를 거부한 적이 없으며, 경제발전과 단임제 실현 등으로 역사에 기여한 데 대해서는 합당한 평가가 있어야 옳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은 ‘5월 광주’ ‘전두환 비자금’등 몇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5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이미 끝났다고 여기는 듯한 세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드라마가 화제가 되는데다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 ‘소신발언’ 덕분에 그는 각종 포털 사이트의 정치인 검색 순위 상위권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제5공화국> 방영을 계기로 뉴스 메이커로 등장한 그를, 지난 7월7일 오후 서울 효자동에 있는 ‘미래한국재단’ 소장실로 찾아가 만났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미래한국재단은 5공화국 때 정치·사회 전문 연구소로 출범한 현대사회연구소의 후신이다. 교육인적자원부에 등록된 공익재단으로, 한신대 총장을 지낸 조향록 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현대사회연구소 시절까지 치면 17년째 소장을 맡고 있다. 이렇다 할 대외활동 없이 지내는 대다수 5공 인사들과는 다른 ‘현역’인 셈이다. 그는 지난 6월 현대사회연구소를 미래한국재단으로 바꾸면서 서울 서소문에 있던 사무실도 청와대 가까이 있는 지금의 건물로 옮겼다고 했다.
이날 인터뷰의 첫 화두는 드라마 <제5공화국>이었다. 70세를 목전에 두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표정의 허 소장은 기자와 마주 앉으면서 “전체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고 세부적으로는 픽션이 너무 많다”며 <제5공화국>을 걸고 넘어졌다.
- 드라마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십니까?
“박정희 대통령과 5공화국을 망신시킴으로써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합리화하고, 미국이 광주사태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묘사해 은연중 반미(反美) 감정도 부추기는 것 같아요. 당시 신군부 사람들이 북한군의 이상동향 관련 정보를 일본에 흘리고, 이것을 거꾸로 받아들여 5·17 비상계엄 확대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그려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 픽션이 많다고 하셨는데, 대표적인 것을 든다면요?
"어느 한 가지를 손꼽기 힘들 정도로 사실과 다른 대목이 너무 많죠. 이 드라마는 10·26 사건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박 대통령을 시해했고, 정승화 참모총장이나 김계원 비서실장은 거기에 휩쓸렸다는 것이 드라마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집권을 목표로 혁명을 하겠다며 대통령을 시해한 사람입니다. 10·26 후의 혼란을 틈타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데, 그것도 허무맹랑한 얘기죠.”
- 하지만 <제5공화국>은 현지 시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한 가운데 찍은 광주항쟁 장면을 내보내면서 시청자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지 않았습니까?
“광주사태와 관련한 묘사에도 날조와 왜곡이 많았어요. 드라마에는 대검으로 시민들을 찌르고 두들겨패고 짓밟는 특전사 장병만 나왔습니다. 시위대가 방위산업체와 무기고를 습격해 군용 차량과 총기를 탈취한 부분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죠.
시위 진압의 전 과정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지휘한 것처럼 묘사했는데, 그것은 100% 거짓말입니다. 당시 충정작전은 광주 현지의 전교사 사령관으로 있던 윤흥정 씨가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이를 받아들여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한 이후 실행된 것입니다. 전두환 사령관이나 신군부가 나서서 한 것이 아니었어요.”
- 광주항쟁의 결과가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당시의 군은 사태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한테 부담이 된다, 안 된다는 식으로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집권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그런 사태를 유도했다면 당연히 나중을 걱정했겠지만, 결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부담이라는 데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우리 생각과는 전혀 딴판으로 5공화국에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되더군요.”
“중위 시절부터 ‘전두환 선배’와 인연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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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를 통해 방영되는 <제5공화국>의 한 장면. 왼쪽에서 둘째가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역을 맡은 이진우 씨. | | 1937년생인 그는 고향의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국어와 역사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이 조선시대 이래 자주국방을 해본 적 없이 이리저리 짓밟히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자주국방에 생을 바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육사를 선택했다고 한다.
청년장교 허화평은 육사 졸업 후 최전방 부대인 15사단 50연대 수색중대의 소대장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군단 작전처 교육장교를 거쳐 1963년, 1공수특전단으로 옮겨 게릴라전 교관 등을 지냈다. 특전단의 중위로 근무하던 이 무렵, 그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근무하던 전두환 소령과 처음 대면하게 된다.
육사 시절부터 정기 육사 기수 1기 격인 11기의 선두주자였던 ‘전두환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던 허화평 중위는 어느 날 “전 선배가 한번 보자고 한다”는 동료의 전갈을 받고 나가 전두환 소령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훗날 ‘보안사령관-비서실장’ ‘대통령-정무수석’으로 이어진 두 사람 간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 하나회 모임을 통한 만남이었습니까?
“그때만 해도 하나회라는 것이 없었어요. 육사 선후배들끼리 모이다 ‘이왕 시작한 모임이니 이름이라도 짓자’고 해서 ‘하나회’라는 명칭을 쓴 것은 제가 대위로 진급한 이후였습니다. 당시 전두환 선배와의 만남은 서로 관심이 있던 선후배 간의 대면이었죠. 저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좋은 평을 들어온 선배에 대한 호감이 있었고, 전두환 선배는 ‘열심히 군생활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 ‘전두환 선배’의 어떤 점에 호감을 느꼈습니까?
“그분은 군에 있을 때부터 무슨 일이든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후배들에게 관심을 갖고 걱정해 주는 데서는 단연 돋보이는 선배였죠. 그것은 일종의 희생이었는데, 선배들이라고 해서 다 그런 모습은 아니었거든요. 무슨 일이든 복잡하게 생각하는 체질도 아니었습니다. 군인은 그렇게 심플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후배들의 호감을 샀다고 봅니다.”
- 자주 만났습니까?
“제가 김포에서 서울로 외출나올 때면 자주 만났습니다. 저한테 밥도 자주 사고 ‘부하들하고 식사나 하라’며 용돈도 주시고는 했죠. 전 대통령은 같이 식사하며 이야기하다 시간이 늦어지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할 때도 많았어요. 당시 전 대통령은 효창동 처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밤늦게 저를 데리고 가서는 사모님을 다른 방으로 보내고 또 한참 이야기를 하다 같이 잔 적도 많아요.”
- 그렇게 서로 위하는 사이면서도 두 사람이 함께 근무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요?
“5공화국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 장군이나 제 동기인 김진영 장군만 해도 전 대통령과 상하관계를 맺으며 근무한 적이 여러 번 됩니다. 하지만, 저는 군생활 대부분을 전 대통령과 떨어져 했습니다. 1979년 3월 그분이 보안사령관을 맡고, 제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가면서 처음으로 한 부대에서 근무하게 됐죠.”
“최규하 대통령 관련 묘사는 잠꼬대 수준”
-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어떤 계기로 맡았습니까?
“1979년 들어 국내외 상황이 두루 어려워지자 박 대통령은 평소 신임하던 전 장군을 보안사령관으로 발탁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은 군단장을 거친 3성장군이 주로 맡았는데, 전 장군은 별 둘을 단 사단장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사령관에 앉게 된 겁니다. 당시 저는 특검단 소속 대령으로 서울지역 방어계획을 점검하는 검열관 일을 맡고 있었는데, 보안사령관이 된 전 장군이 ‘나를 도와줘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은 선배를 돕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서 두말하지 않고 보안사로 갔죠.”
- 보안사에서 비서실장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시 보안사에는 대공·인사·정보 등 업무 분야별로 처장들이 있었습니다. 사령관의 개인 참모인 비서실장은 그러한 개별 업무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수시로 사령관과 만나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권력기관의 비서실장은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 힘이 생깁니다.
국정원·보안사·경찰 할 것 없이 권력기관은 속성상 최고 책임자에게 잘 보여야 좋은 보직도 얻고 승진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충성경쟁이 심합니다. 비서실장이 최고 책임자에게 ‘아무개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얼마든지 장난을 칠 수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도 비서실장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 있는 자리라고 보면 맞습니다.”
- 드라마에는 허화평 비서실장과 허삼수 인사처장이 수시로 만나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로 그랬습니까?
“그것도 픽션이죠. 참모마다 맡은 업무가 다른데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 붙어 있을 수 있겠어요? 허삼수 씨와 저는 근무하는 방도 달랐어요. 그런데도 늘 함께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둘은 늘 한패가 돼서 무슨 작당이나 했다’는 이미지를 심으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는 육사 동기인 허삼수 인사처장, 육사 1년 후배인 이학봉 대공처장 등과 함께 ‘보안사 3인방’으로 통했다. ‘3인방’은 전두환 사령관이 정국의 실력자로 부상해 마침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들이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압박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장면도 나온다.
당사자가 퇴임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가 정확히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구구한 억측만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한 허 소장의 해석이 궁금했다.
- 신군부가 최 대통령에게 하야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설이 지금도 나오고 있는데요?
“그건 난센스요.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라고요. 전두환 사령관은 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거나 압력을 넣은 적이 결코 없습니다. 아무리 심약한 사람이 맡더라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막강한 자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게 바로 대통령입니다. 아무리 실력자라고 해도 일개 군인이 어떻게 대통령한테 물러나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습니까. 그건 권력의 생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잠꼬대 같은 이야기입니다.”
- 그렇다면 최 대통령이 물러난 진짜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광주사태에 따른 충격과 정치적 부담 때문에 스스로 대통령직을 포기했다고 봅니다. 그분은 절차를 중시하는 외교관 출신으로, 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처지였죠. 광주사태의 비극적 결말은 군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몇 배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어떤 한계를 느껴 사퇴하지 않았나 싶어요.”
청와대에서도 계속된 허화평의 ‘쓴소리’
- 최 대통령 하야 후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에 추대되는데, 당시 군 내부에서 전 사령관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의견을 주도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어요. 드라마에도 그 무렵 전두환 사령관이 노태우·정호용 장군 등 숱한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잖습니까? 어느 한 사람과의 밀담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죠.”
- 비서실장 입장에서 전 사령관에게는 어떤 선택을 조언했습니까?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저는 그 무렵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선택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어요. 피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렸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말린 사람은 아닙니다. 대통령 하시라고 부추기지도 않았지만, 나라가 처한 상황을 볼 때 선택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군인이라면 ‘우리 역할은 여기까지였다’고 선언하고 정치인들한테 국정을 맡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반 대학 출신이라면 지금 말씀하신 것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겠죠. 지금처럼 안정된 상황이라면 또 다른 멘털이 가능했을 것이고요. 그러나 당시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자고 나면 또 무슨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하루하루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거든요. 그것을 보고 저는 ‘이러다 나라가 끝장나는 것 아닌가’ 걱정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육사 교육을 받은 당시의 우리는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열정에 차 있었던 것이죠.”
- 그때 전두환 사령관을 말리지 않은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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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1981년 12월 허화평 신임 정무수석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위 사진) 5공화국 초기 한 행사장에 모인 청와대 참모진. 왼쪽부터 허화평 정무수석, 이장춘 외교안보비서관, 박철언 법률비서관, 이수정 대변인. | | “그것은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책임의 문제죠. ‘당신들 말고도 책임질 사람은 많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의 우리는 책임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고 비겁하다고 본 것이죠. 그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해둡시다.”
1980년 9월 전두환 사령관은 마침내 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허화평 비서실장도 준장으로 예편한 뒤 ‘대통령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함으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다. ‘비서실 보좌관’은 특별한 업무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일을 하려고 들면 무슨 분야든 자기 업무가 되는 자리였다.
허 소장은 초임장교 시절부터 원칙을 놓고서는 좀체 양보하지 않는 인물로 통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눈치보는 성격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상관한테도 ‘입바른 소리’를 자주 했다고 한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하 관계를 떠나 인간적 관계로 시작한 오랜 인연이 있었기에 전두환 사령관에게는 어떤 사안이든 자유롭고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상관이 대통령이 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허 소장은 “보안사 시절에는 인간적 관계가 30%쯤 됐다면, 청와대로 가면서부터는 100% 공적인 관계만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대통령과 참모의 속성이며, 청와대로 갈 때부터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 그럼에도 청와대에서도 대통령한테 ‘싫은 소리’를 계속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대통령의 참모는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언제나 원칙에 입각해 말해야 합니다. 눈치를 보거나 불편해질까 두려워 옆으로 가면 안 됩니다. 권력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 그래서 위태로운 것입니다. 순간순간 자기 목이 걸려 있거든요. 저도 대통령을 겪을 만큼 겪어본 사람이라서 피해 가는 길도 알고 대통령의 기분을 맞추면서 쉽게 가는 길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 5공화국 출범 초기부터 전 대통령의 친인척들 문제로 대통령과 자주 부닥쳤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대통령하고 부닥친 것은 아니고요….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지났을 때 영부인이 새세대육영회를 결성한다는 말이 들리기에 담당 수석에게 ‘그건 안 된다’는 말을 전한 적이 있었죠.”
- 봉사활동 한다는데 굳이 반대하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로열 패밀리가 직접 조직을 만들어 무슨 활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박 대통령 시절 박근혜 씨가 새마음봉사단 활동을 하다 잡음이 일어난 적도 있었잖습니까? 최고 권력자의 가족이 움직이면 권력을 좇는 사람들이 그 밑에 가지, 진짜로 봉사하러 가지는 않거든요. 부작용이 생기게 돼 있다는 판단에서 ‘이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뒤로 늦추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순자 여사가 영부인이 된 후 처음 하는 일에 제가 브레이크를 건 셈이었죠.”
- 그러고도 무사히 넘어갔습니까?
“나중에 영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느냐’며 확인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나도 체면이 있는데, 의욕을 갖고 일하려다 그런 말이 나오니 당황스러웠다’고 하십디다.”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은 1981년 12월 청와대 개편 때 정무수석에 기용된다. 승진이었던 만큼 청와대 내에서의 입지도 넓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으로 기록된 ‘이철희·장영자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입지는 급속히 좁아지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원칙’을 강조하다 그 스스로 입지를 좁힌 형국이었다.
‘이·장사건’은 장영자라는 사채업자가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돈을 빌려준 뒤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었다. 6,000억 원이 넘는 피해액부터 충격적인데다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의 신분까지 논란이 됐다. 장영자 씨는 영부인 이순자 씨의 작은아버지 이규광 씨의 처제였다. 게다가 장씨의 남편 이철희 씨는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친인척 비리이기도 하고 권력형 비리이기도 한 고약한 사건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장영자 씨 부부는 물론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 씨까지 구속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허화평 정무수석이 사건 초기 단계부터 ‘원칙대로’ 처리할 것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킨 결과였다.
- 5공화국 출범 후 처음 터진 권력형 비리라서 청와대의 분위기도 심각했을 것 같은데요?
“당시 저는 정무수석으로 있으면서 대통령의 법률 문제까지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박철언 씨가 내 밑에서 법률비서관으로 있었고, 지금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있는 강재섭 의원이 박철언 비서관을 보좌하고 있었죠. 어음사기사건이 터지자 참모들이 걱정을 참 많이 했습니다. 대통령의 처가 문제이다 보니 어떻게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가 있었죠.
이종원 법무장관이 ‘관련자들은 형사사범이 아닌 경제사범으로 처리하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다뤄 관련자 전원을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 그렇게 강경론을 주장한 속사정이라도 있었습니까?
“대통령 처삼촌이든 누구든 그 사람이 5공화국을 만든 것도 아니고, 5공화국에 무슨 책임을 질 것도 아니잖습니까? 정권 초기이다 보니 모든 반대세력은 ‘이 사람들은 돈을 어디서 갖다 쓰나’ 하고 감시의 눈으로 다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건을 어정쩡하게 처리하면 5공화국은 영락없이 사기꾼의 돈을 받아먹은 집단이 될 판이었습니다.
대충 덮고 넘어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문제가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원칙적인 처리가 불가피하다고 본 것입니다. 참모들에게는 ‘책임은 내가 진다.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가능하도록 보도 통제는 아예 할 생각도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는 전 대통령한테 ‘다 구속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했죠.”
- 전 대통령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그래, 알았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뭐 좀 어떻게 안 되겠느냐’거나 ‘그건 좀 심한 것 아니냐’는 말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사건을 철저히 파헤치도록 한 것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공화국이 끝나고 나서 별의별 비리 이야기가 다 나왔지만, 당시의 어음사기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혹 제기가 없었거든요.”
- 거듭 대통령의 처가를 겨냥한 셈이 됐는데, 내심 부담되지 않던가요?
“대통령의 처삼촌이 구속됐으니 처가 쪽에서 적잖은 소동이 일어났을 것으로 봅니다. 내가 부추겨 언론에 그렇게 크게 보도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요….”
“금융실명제 실시 직전 무산시켰다”
- 어음사기사건에 뒤이어 불거진 금융실명제와 관련해서도 소수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장영자 씨 사건이 발생하자 경제수석으로 있던 김재익 씨와 재무장관 하던 강경식 씨가 나서서 어음사기사건을 막는 방책으로 실명제를 추진했죠. 나중에 대통령을 설득해 사인까지 받아냈더라고요.
하지만 정무수석인 저하고는 아무런 의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실명제가 어떤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지 검토하려면 정무수석과 논의해야 하는데도 그런 절차도 없이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낸 것이죠. 영리한 관료들이 일을 그렇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는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에서 대통령에게 실명제 유보를 강하게 건의했죠.”
- 실명제를 실시하면 안 된다고 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경제관료들이 ‘정의사회 구현하겠다면서 왜 실명제에 반대하느냐’고 저한테 따지더군요. 저는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실명제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실명제를 하면서 권력자만 안 한다면 그건 정직한 것이 아니죠. 저는 ‘정치자금까지 실명화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동의하겠다’고 했어요. 힘 없는 쪽에는 실명제를 강제하고, 힘 있는 쪽은 그냥 넘어가는 실명제는 다분히 정치적 보복의 회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반대한 것입니다. 나중에 반대론이 힘을 얻자 여당까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실명제는 결국 유보되고 말았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대통령이 사인까지 한 사안이 유보된 첫 경우였죠.”
- 실명제에 반대했다고 물러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죠. 대통령이 결재한 사안을 정무수석이 나서서 유보시켰으니 대통령의 권위를 그만큼 깎아버린 셈이죠. 그런 상황이 되면 참모가 떠나는 게 옳아요. 저도 원칙을 놓고서는 어지간해서는 물러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청와대에 계속 있었으면 대통령과 사사건건 부닥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이나 저나 서로 불편해졌을 겁니다.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 시점에서 빠져 주는 것이 옳다고 본 거죠.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비칠 수 있는 상황은 원치 않았던 겁니다.”
- 전 대통령이 만류하지 않던가요?
“대통령이 어느 날 저를 부르더니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고요. 정말 허화평이를 데리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면 ‘너 나가지 마’라고 했겠죠. 그런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 청와대에서 중도하차하게 되어 서운하지 않던가요?
“전혀 서운하지 않았어요. 제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정말 미련없이 떠났습니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권력을 찬탈했거나 권력에 도취해 있었다면 저는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떠납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흔쾌히 물러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떠난 뒤 청와대가 조용해졌다고 들었어요. 제가 물러난 것이 결과적으로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참모들도 처신에 각별히 조심하는 가운데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면서 대통령을 보좌했을 것 아닙니까? 실제로 그 뒤로 청와대 참모들이 무슨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없거든요.”
5년간의 미국생활, 그리고 곡절 많았던 정치인생
1982년 12월 청와대 참모진 개편 때 경질된 그는 이듬해 1월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그는 “5공이 끝날 때까지 귀국하지 않겠다”는 출국 때의 다짐을 지키며 5년 동안 워싱턴에 있는 헤리티지재단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냈다. 이 기간에 그는 민주주의와 역사와 사상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면서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한 것도 미국생활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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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 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허화평 의원이 그해 9월 민자당에 입당한 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등 당직자들과 인사하고 있다.(위 사진)
허화평 의원이 육사 동기인 허삼수 의원과 함께 의정활동을 할 때의 모습. | |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과 재회했다. 전 대통령이 불러서 갔는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아 의례적 얘기만 오갔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과 참모라는 공적 관계가 끝나는 순간 바로 인간적 관계로 돌아갔기 때문에 서운한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86년 봄 전 대통령이 유럽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시애틀에 기착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만났다. 이때는 전 대통령의 일정에 여유가 있어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5년 동안 미국에서 야인생활을 마친 그는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88년 5월 귀국해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1992년 실시된 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고향 포항에서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그해 9월에는 “잘못된 정치의 체질을 바꾸는 데 노력하겠다”며 민자당에 입당해 여당 의원도 됐다.
그러나 그의 정치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1995년 들어 이른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5공에 대한 사법처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사법처리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뒤이어 5·18특별법이 만들어졌고, 결국 그는 1996년 2월 ‘반란 주요임무 종사죄’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기에 이른다.
정치적 재판에 대한 항거의 의미에서 그는 그해 4월의 15대 총선 때 옥중출마를 한 끝에 당선됐다. 그러나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8년 징역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잃고 말았다. 옥중에서 당선됐다 옥중에서 의원직을 상실한 셈이었다. 대표적 ‘5공 인사’로 각인된 탓에 정치적 부침을 겪은 그가 5공화국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했다.
- 5공화국은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5공화국은 6·25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관리한 정권입니다. 그러한 위기를 관리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닦은 정권이 5공화국이었죠.”
- 그렇다면 5공화국 때 제기됐던 인권탄압 논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 무렵의 정치권과 재야가 요구하던 수준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국가적 위기를 감안해 부득이 일부분을 제한하면서 우리 식으로 가겠다는 것이 5공화국이었죠. 그렇다고 5공화국이 독재정권은 아니었습니다. 독재란 인간과 문화를 철저히 통제하는 체제를 말하는데, 5공화국은 일부만 통제했거든요.
5공화국은 부득이하게 제한된 통제를 가하면서도 자유화, 개방화에 필요한 요건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했던 권위주의 정권이었죠. 민주주의 실현에 필요한 토대를 구축하면서 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산업화를 완성한 것도 5공화국이고요.”
“5공은 민주주의 토대 다진 정권”
- 산업화를 완성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박 대통령 서거 당시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이 600억 달러, 외채가 300억 달러였습니다. 국내총생산의 절반이 빚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창원공단 등도 짓다가 말았기 때문에 수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요. 박 대통령이 시작만 해놓은 상태이던 살림살이를 물려받아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게 5공화국이라는 말씀입니다. 10·26 후 김영삼 씨나 김대중 씨가 집권했더라면 나라살림은 바로 끝장났을 겁니다."
- 그것은 지나친 단정 아닌가요?
“그분들은 정치적 사고에 익숙한 경우라서 산업화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민주화를 명분으로 박 대통령이 하던 것들을 무너트리는 데 바빴을 것이라는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5공화국이 없었으면 박 대통령 시대를 상징하는 산업화란 것도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 하지만 5공화국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대세 아닙니까?
“그러한 인식이 형성된 데는 언론통폐합의 역작용이 컸다고 봅니다. 지나고 나서 보면 하지 않는 게 옳았다고 봅니다만, 당시의 통폐합에 대한 반감 때문인 듯 언론은 5공화국 얘기만 나오면 부정 일변도로 흐르곤 했죠. 광주에서의 희생, 정치적 자유의 부분적 제한, 언론통폐합 등으로 인한 부담은 5공화국이 영원히 지고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놓고 볼 때 가난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시절은 5공화국 때였습니다. 진정한 민주화의 토대가 되는 중산층이 형성된 것도 5공화국 때였고요.
그런 의미에서 5공화국은 박 대통령의 적자(嫡子)입니다. 박 대통령을 좋게 평가하려면 5공화국도 합당한 평가를 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전두환 전 대통령은 요즈음 어떻게 지냅니까?
“요 며칠 전에도 연희동으로 가서 만났습니다. 만날 여론에 두들겨 맞느라 바쁜 것 같은데, 그래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 <제5공화국> 드라마는 본다던가요?
“보시는 것 같아요. 열받는 부분이 있어도 봐야죠. 그래야 시시비비를 따지고 코멘트도 할 것 아닙니까.”
- 6공화국 출범 이후 진행된 ‘5공청산’과 관련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이가 상당히 소원해진 것으로 아는데, 요즈음도 그런가요?
“두 분의 화해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봅니다. 그 책임은 노태우 대통령한테 있습니다. 노 대통령이 너무 실수를 많이 했죠. 5공청산이라는 것도 그렇고,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낸 것도 그렇고….”
-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3당합당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전 대통령 문제를 그렇게 처리한 것 아닙니까?
“그것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여소야대라고 해도 그러면 안 됩니다. 대통령 자리를 내놓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어야죠. 그런 점을 생각하면 저는 노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을 버렸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평생 동지로 지내온 전임 대통령을 그렇게 대접할 수 있습니까? 그 때문에 한국정치는 피도 눈물도 없고 원칙도 없게 돼버렸습니다.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극단적 전례를 남기고 말았는데, 국민 보기에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죠.”
“전두환 대통령 버린 노태우 대통령 책임 커”
-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습니다만 ‘허화평식 참모론’은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의 저는 국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구체적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제가 정답으로 여겼던 모델이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해야 옳다는 명제는 지금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의 참모는 길고 짧은 인연이나 친소관계 등으로 인해 할 말을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군사부일체’라는 식의 동양적 가치관의 영향이 큰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철저히 공과 사의 구분이 필요합니다. 청와대의 참모가 되면 철저히 공적 관계로 가야 합니다. 할 말은 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다는 자세도 필요하죠.”
- 노무현 대통령 집권 후 청와대에 대거 진출한 386 참모들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직접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죠. 제 경우만 놓고 보면 정말 겁없이 열심히 일만 했다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청와대 참모란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이 맡으면 잠이 안 올 정도로 무서운 자리거든요. 개인의 실수가 바로 대통령의 실수가 되고, 국민에게도 영향이 가기 때문에 정말 중요하고도 무서운 자리입니다.”
허화평 소장은 2002년 여름 <지도력의 위기>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민주주의, 정치적 리더십, 사회제도 등에 대한 소신을 담은 것으로 1,0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는 올 연말 출간을 목표로 또 다른 책을 집필하고 있다. 이번 책의 주제는 ‘이념’으로 정했다. 그는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적잖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 책을 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재단이 실시한 여론조사 때 이념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해본 결과 상당한 참고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념’에 대한 이해와 논쟁 필요하다”
-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여론 주도층들도 이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수’ 또는 ‘진보’를 이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진보나 보수는 노선이지 이념이 아니거든요. 이념이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이념이 진보나 보수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 그렇다면 ‘좌’나 ‘우’는 이념이 맞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아니죠. 아시는 대로 좌파, 우파라는 개념은 프랑스혁명 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계몽주의 사상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것인데, 당시의 이념은 고전적 자유주의였습니다. 자유주의라는 이념을 놓고도 급진적 성향을 띤 자코뱅당이 국민회의에서 왼쪽 좌석에 앉았던 데서 좌파로 불린 것 아닙니까? 반면 상대적으로 온건노선을 걸었던 지롱당이 오른쪽에 앉았던 데서 우파라는 명칭이 나왔고요. 따라서 좌파나 우파라는 용어도 이념이 아니라 노선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 하지만 마르크시즘은 좌익 사상으로 일컬어지지 않습니까?
“이념으로서 좌익과 우익의 개념이 싹튼 계기가 바로 마르크시즘이었죠. 그것의 폭력성·급진성·혁명성 등이 자코뱅당의 노선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좌익 사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마르크시즘을 좌익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되는 자유민주주의 혹은 자본주의를 우익으로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같은 마르크시즘 안에도 보수·중도·진보가 있고, 자유민주주의에도 보수·중도·진보가 있거든요. 이러한 기본적 이해조차 없이 진보나 보수를 이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는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이라도 이념에 대한 이해와 논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냉전적 사고’라는 비판이 금방 나올 것 같은데요?
“이념 이야기를 꺼내면 수구니 ‘꼴통’이니 하면서 바로 매도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한반도를 민족분단국가나 국토분단국가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념적 분단국가라는 것입니다. 이념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단은 극복할 수 없어요. 너무 쉽게 ‘통일’을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이념에 대한 이해와 논쟁 없이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근래 보수 진영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결사체 구성 움직임이 말씀하신 이념 논쟁의 계기도 될 것 같습니다만….
“‘신자유주의연대’다 ‘뉴 라이트’다 해서 몇 가지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어떤 정체성이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보수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코뱅당 같은 급진적 자유주의를 걷겠다’거나 ‘케인즈적 자유주의로 복지국가 모델을 지향한다’는 식으로 좀 더 구체적 콘텐츠를 담아야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니면 ‘나는 네오콘이다’라는 얘기라도 해야죠. ‘뉴’나 ‘신’자만 붙인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 우파 또는 보수의 역량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뜻인가요?
“역량이 없어서라기보다 이념이라는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익 정권이 계속 유지돼 온데다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굳이 무슨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반공’이라는 슬로건 아래 간첩만 잡으면 되는 줄 알고 지내다 어느 날 좌파가 주도권을 잡는 것을 보고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못 잡는 형국이라고 저는 봅니다. 제가 이념을 주제로 한 책을 쓰기로 한 것도 그러한 흐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16·17대 총선에 연이어 출마했다 뜻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요즈음도 한 달에 한두 번씩 포항으로 내려가 ‘신세졌던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다. “지역구 관리냐”고 묻자 그는 “정치권 밖에서도 할 일은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청년장교 시절의 열정과 신념을 지닌 듯 보이는 여전한 ‘현역’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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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얼마전에 "굽은 길도 바로 간다"를 읽었는데 이책도 조만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역시 허화평씨 이분 굉장히 머리 좋은사람이죠.. 글을 읽어보니 틀린말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