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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모두 57분의 과거급제자(문과응시/16분, 사마시응시/41분)가 있었습니다.
추가 정보
장흥고씨 또는 장택고씨는 제주고씨 장흥백파의 다른 이름입니다.
중시조인 고말로 탐라성주의 세왕자가 고려조에 입조함으로 제주고씨는 장흥백파, 문충공파, 상당군파 등 9개의 파로 나누어졌답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서경(西京)이였읍니다.
제주도에서 서경(개성)까지 가는 길은 탐진(강진)이 가장 빠른 길이였습니다.
탐진이란 명칭은 탐라(耽羅)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이 강 하구의 구십포(九十浦)에 머물렀다고 해서 탐라국의 탐(耽)자와 강진의 진(津)자를 따서 탐진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답니다.
탐진강의 어원을 탐라국의 세 왕자가 와서 놀던 강에서 찾는 분도 있습니다.
억불산의 큰 소나무도 탐라인들이 장흥에 심어논 소나무였다고 하더군요.
장흥고씨(長興高氏 혹은 장택고씨(長澤高氏))는 중시조 고말로의 10세손 고중연을 파조로 모시고 있답니다.
고중연은 일명 복림(福林)으로 자는 수일(壽一)이고 시호는 량헌(良獻)으로 충숙왕 17년(1330년)에 문과에 입격하여 관직이 검교태위(檢校太尉), 군기감사(軍器監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습니다.
남쪽으로는 왜구가 출몰하고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침입해 오는 고려 말 그는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2차 침입함으로써 개경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자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갔고 서경(西京) 수복소식을 듣게된 지역이 문경(聞京)으로 지금까지 문경(聞京)으로 불리우고 있답니다.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공민왕을 수행했던 고중연은 장흥백(長興伯)에 봉하여졌고 본관으로 장흥을 얻게 됩니다.
장흥고씨들이 장흥땅에 살게 된 정확한 경로는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은 이색의 “중령산황 보성기”에 따르면 중령산(장흥 건산 향양일대) 축성에 관한 토성인물에 고중연의 이름이 등장함을 보면 당시 장택현에 장흥고씨들이 세거하였슴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경명은 고중연의 9세손이며 저는 고경명의 15세손입니다.
본관은 신분의 표시이기 때문에 장흥고씨를 장흥인으로도 표기하였습니다.
평화리(상선약수마을)가 장흥고씨의 세거지가 된 것은 고경명의 5세손 고응수가 창평에서 장흥으로 이거한 후 그의 손자 高碩嗛(진해공*鎭海公)이 영조 때의 국지사 이계현(李啓鉉)의 권유로 1770년 평화리에 터를 잡은 후 부터 입니다.
제봉 고경명은 문인으로 60노구를 이끌고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서 말위에서 썻다는 마상격문은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버금가는 명문으로 당시 사대부와 국민들의 마음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시무조선(是無朝鮮)이요 약무제봉(若無霽峰)이면 시무호남(是無湖南)이라고 칭송을 하였던 것이죠.
그것 때문에 고경명의 3부자는 3부자 불천위(不遷位)라는 전무 후무한 명예를 국가로부터 얻게 된 것입니다.
장흥고씨 효열비
이 비(碑)는 시부모에 대한 공경,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유인 장흥고씨의 효열(孝烈)을 추모하고 그의 행실을 널리 알리고자 이 고장 유림들과 김녕김씨문중에서 대술면 이티리에 효열비를 세웠다.유인 장흥고씨는 1900년 대술면 마전리에서 태어났다.임진년(壬辰年)의병장 고경명(高敬命)선생에서 이어지는 충절(忠節)의 가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정숙하여 효녀로 칭송받았고 16세에 김씨 문중으로 출가하였다.
그 가문 역시 단종조 사육신의 한분인 백촌 김문기)혈통을 계승한 충절의 가문이다. 부모 공양과 조상숭배등을 예와 성으서 하였다. 32세에 부군(夫君)이 병을 얻어 3년 신음할 때 지서으로 간병했으나 끝내 세상을 뜨자 순절(殉節)늙은 시부모가 게셔 차마 죽지 못하고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와 상식(上食)을 모두 부군 생전 그대로 하였다. 시어머니께서 병이 나자 밤을 새워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나 별세하자 애통지성(哀痛之誠)은 부군전상(夫君前喪)의 그것과 한결같았다.
이에 시아버지에 대한 공양(供養)만은 지극하였으며 시아버지 또한 급노한(急老患)으로 하세하니 이에 그 예절해하는 모습으로 보는 사람이 모두 함께 눈물 지웠다. 3년간을 하루같이 상복을 벗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성묘와 상식에 대한 애성(哀誠) 다하니 바로 아동효열부(我東孝烈婦)의 표상이었다.
1967년 음력 8월 6일에 세상을 뜨니 고결한 인생 68세 있었다. 1976년 성균관장은 표창과 명륜장을 올렸다.
장흥고씨가(家)의 불타오르는 조국애와 마상격문(馬上檄文)
제봉 고경명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있어 칭송을 들었다. 남평 고을을 다스리던 휴암 백인걸이 고경명을 만나보고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였다. 유의(儒醫)로 명성이 있는 북창 정렴도 여러 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봉은 20세에 사마시에 수석을 하고 26세에 임금이 성균관에 직접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을 하여 전시에 나갈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말 한필을 하사 받았다. 그 뒤 호당에서 사가독서했다. 임금의 총애는 지극했다. 명종은 자주 술좌석을 마련하여 제봉을 불렀으며 시를 짓게 하였다.
1562년 별시에 시험관으로 나가 송강 정철을 장원으로 뽑았다. 이로써 송강과 인연이 깊어졌다. 그 뒤 교리로 승진하고 전적으로 옮겼다가 울산군수로 임명되었다.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유유자적, 19년 동안 자연을 벗삼으며 은거하였다. 이 때 광주목사 갈천 임훈과 함께 무등산을 오르고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이 기행문은 산중의 수려한 경관을 노래하였으며 명문으로 소문 났다. 또한 토정 이지함이 무등산을 유람하고 찾아와 하룻밤을 고경명과 함께 묵었다. 제봉이 재호(齋號)를 요청하자 토정은 불이재(不已齋)라고 붙여 주었다. 제봉은 그 명(銘)을 지었으며 그뒤에 정허명설(靜虛名說)을 썼다. 49세에 영암군수로 다시 벼슬길이 트여 변무사 서장관을 거쳐 직강, 지평, 서산군수, 동래부사를 지냈다.
고경명은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더블어 식영정 4선(仙)의 칭을 들었다. 제봉은 일찌기 식영정에 드나들었다. 식영정은 무등산 계곡을 따라 흐르는 창계천 근처 성산의 언덕에 있다. 이 식영정을 김성원이 건축했다.
이곳에는 문학의 대가 면앙정 주인 송순, 호남의 정신적인 지주 김인후, 퇴계의 예우를 받은 호남의 거유 고봉 기대승, 조광조의 문인으로 스승이 화를 입자 은거하며 학문으로 일생을 마친 양산보가 드나들었다. 또한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칭을 들은 백광훈, 김장생 김집 서성 정홍명 정엽 등 많은 학자를 배출시킨 구봉 송익필, 임진왜란의 의병장 김덕령, 식영정 주인 김성원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시문의 대가인 임억령, 성산별곡을 지어 이곳의 명성을 높인 정철과 제봉 고경명 등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이곳의 수려한 경관을 사랑하며 시를 읊었다. 위에서 보듯 수많은 시인과 문장가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식영정 4선’이라 하였다.
전남 담양군 봉산면 제월봉 언덕 위에 면앙정이 있다. 면앙정은 송순이 지었다. 송순은 면앙정 가단(歌壇)의 창설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칭을 듣는다. 면앙정은 시인 묵객들이 유유자적하며 시짓기를 즐겨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이루었다. 기대승, 김인후, 임억령, 임제, 양산보, 박순 등과 함께 고경명은 면앙정의 노학자 송순을 찾아가 시짓기를 즐겼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소쇄원이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정자를 그 곳에 짓고 정원을 조성한 곳이다. 이 별장은 산수가 수려하다. 소쇄원은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 근처의 대숲 등이 아름다워 문자 그대로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을 풍겨준다. 이에 시인, 문장가들의 사랑이 끊이지 않았으며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마흔여덟 가지로 읊었다. 고경명이 지은 유서석록에 소쇄원의 아름다움이 잘 묘사되었다. 고경명은 호남에 명성이 있는 시인, 문장가이다.
1592년 고경명이 6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4월13일 왜적은 부산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이광은 전라도 관찰사로서 4만의 군사를 모아 나주목사 이경복을 중위장으로 조방장 이지시를 선봉으로 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우고 북상 중 용인에서 왜적에게 대패하였다.
마침내 고경명이 나섰다. 고경명은 사림과 함께 담양 추성관에 단을 세우고 하늘에 맹세한 다음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고경명은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도내에 격문을 띄웠다.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은 삼가 각도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오늘의 나라 운수가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서 왜적이 헛점을 찌르고 기고만장하게 굴며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미친듯이 날뛰고 우리 나라를 마구 유린하면서 북상하여 마침내 서울에 육박했도다! 우리의 장수들은 우왕좌왕하고, 수령들은 숲속으로 깊숙이 도망치는구나.
저 왜적에게 임금과 내 가족의 목숨을 내주는 것이 어찌 우리가 할 짓이냐? 지극히 존귀하신 임금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시게 하면 네 마음이 편안하냐? 수 백년 조국의 품에서 살아온 수많은 백성들 중에 의롭고 용기 있는 남아가 어떻게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 조선에 대장부 없다는 비웃음을 사게 되니 실로 통탄할 일이요,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니냐. 어찌하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북상한 어가는 돌아오지 못하고 상주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왜적에게 함락될 운명에 있는 서울 장안의 백성들은 불붙은 초막에서 날개 짓을 하는 제비와 같은 형상이다.
그렇지만 왜적이 일으키는 자욱한 먼지로 임금의 얼굴에 찾아 든 깊은 근심을 덜어드리고 적을 숙청하는 일은 정녕 그대들에게 기대할 일이 아닌가?
경명은 백발의 늙은이다. 밤중에 놀란 닭울음 소리를 듣고 견딜 수 없어 마지막 남은 조국애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을 갖고 일어섰노라! 강물에 뜬 뱃전을 두들기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나서기로 하였다. 이는 오직 견마(犬馬)가 주인을 위하는 정성일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진 격이라 내 힘을 요량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치닫기로 하고서 옷 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였도다. 이제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모여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이 수레에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가 구름 모여 비 쏟아지듯 하는구나!
이는 누가 강요해서 응한 것도 아니요, 억지로 따른 것은 더욱 아니다. 오직 충의(忠義)의 마음이 생겨 다 같이 지성에서 울어난 것이다. 나라가 존망(存亡)의 갈림길에 처하였으니 감히 하찮은 몸둥이를 아끼지 않았을 뿐이다. 당초부터 의병으로 전쟁터에 나서 마음이 바르고 씩씩한 법이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그래서 크나 작으나 상의하지 않고 의견이 같으며 머나 가까우나 소문 듣고 일제히 분발하는 것이다.
아! 우리 열읍 수령, 각처 인사들아! 충성스런 그대들이여 어찌 내 나라 내 겨례를 잊으리오, 의리는 의당 나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구하고, 군량을 모으며, 말에 올라 남 먼저 전장으로 달리고,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 두렁에서 일어나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義)로 돌아가라. 능히 임금을 위해 난(亂)을 막는 자 있다면 그와 더불어 함께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리 임금이 묵고 계시는 별궁은 멀리 서도에 있거니와 그 곳에 풍속이 아름다왔으며 병마(兵馬)가 강하여 일찌기 수.당(隋唐)의 백만 대군을 무찔렀다. 조정에서는 장차 계산이 있다. 임금이 어찌 한 구석에 주저 앉아계시겠느냐!
밀리는 듯하여도 끈질기게 싸우면 망하지 않는 법이며 복과 덕은 심한 근심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보라! 호걸들이 국운을 바로 잡을 터이니 공연히 눈물 지을 까닭없고, 부로들이 임금을 기다리매 서울로 돌아오시는 날을 기약하리라. 의당 기운을 내서 남 먼저 나서기를 바란다.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 부호군 고경명은 삼가 전라도 도순찰사 절하에게 고합니다.
섬 오랑캐가 작란을 하여 임금께서 북쪽으로 파천을 하셨으니 조야는 오직 호남을 믿고 있습니다. 절하의 심중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만 ‘난에 급히 대처하라’는 어명을 받고도 돌연히 근왕의 군사를 해산했으니 절하의 행동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조정의 호령은 비록 단절되어 있지만 한 도내 사람의 말도 역시 두려운 것입니다.
근자에 용인에서 무너진 일도 실은 선봉의 패배로 말미암은 것이니 절하가 주장이 된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절하는 오늘날에 있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진실로 그간의 잘못을 수습하여 임금의 근심을 위로하며, 기왕의 허물일랑 지나간 일로 돌리고, 단호한 결의로 배가(倍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구국평정의 공적을 쌓을 뿐만 아니라 절하에게도 전화위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본도 의병이 처음 북로로 향하여 왜적을 깨끗이 소탕하고, 어가를 모실 결심이었는데 길에서 들은 즉 윤 상국이 서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양경의 적을 토벌하여, 북방의 일은 거의 염려가 없게 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호서의 적이 금산에 들어 왔는데도 방어사의 군사가 아직 용계에 주둔하고 있으며 한 사람도 군중 앞에 맹세하고 앞장 서 나가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절하가 이 시기에 진실로 군사를 널리 모집하여 크게 형세를 떨치지 못하면 우리 호남지방의 애처로운 백성들이 장차 모두 적의 칼날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절하가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한 지방도 지키지 못하다가 어느날 아군이 적을 다 무찌르고 임금께서 환궁하시게 되면 호남 사람만 천지 간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뿐 아니라 절하 역시 어떻게 과거의 허물을 씻을 수 있으리까?
절하가 혹시 ‘왜적이 너무 악독하여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사수하며 그 요충을 막고 때로 기병을 내어 그 예기를 꺾는다면 적의 습성이 본시 경솔하고 조급해서 오래 견디지 못하리니 열흘이 못가서 큰 공을 이룰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은 왕의 신하이요, 모두 나라 일이라 피차가 간격없이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의 의견을 자세히 듣고서 계획을 잘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고경명의 위와 같은 간절한 호소는 호남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격문을 보고 감동한 이들이 모여 들어 그 수가 6000명에 이르렀다. 참봉 이굉중, 강항, 강락, 임수춘 등은 의병 500여인과 함께 고경명의 의병소에 합류했다. 이들은 군량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이 있는 법성포를 통하여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 여기에는 유영해도 동참했다. 유영해는 고흥유씨로 진사 호의 손자이다. 해주오씨 참판 용로 현손 오윤도 병량을 모아 법성포로 보내고 54인과 함께 영광군성을 지켰다. 직제학 선경의 후손 정국공신 보의 손자 오귀영도 창의하여 군량과 무기를 고경명에게 보냈다. 김해김씨 극일의 후손 세호, 광산김씨 극기의 손자 득종, 광산김씨 교리 윤제의 종손자 독흠 등이 모두 고경명의 의병소로 모여들었다.
고경명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에 이르렀다. 방어사 곽영과 함께 군사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토성에 있는 적병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적의 기습 공격으로 관군이 무너지자 고경명군도 맥없이 무너졌다. 후퇴하자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유팽로, 안영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경명의 둘째 아들인 인후는 싸움터에서 죽고 장자인 종후는 목숨을 건져서 부친의 시신을 거두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복수장으로 자처하고 의병을 모아 진주성 싸움에서 최후를 마쳤다. 선생의 딸과 질녀도 왜적을 꾸짖고 순사하였다. 이로써 일문삼절(충,효,열)을 이루었다. 비록 싸움에서는 패배하였지만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건한 정신은 왜적의 침입을 격퇴시킬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영의정 이덕형이 말하기를 “임진년 6월에 내가 임금님을 호종하여 서도(西道)에 있으면서 제봉(霽峯) 고공의 격제도문(檄諸道文)을 얻어 보고 밥 먹다 저절로 수저를 던지며 일어나게 되었었다.
이윽고 본도 의병이 크게 떨치어 일면은 강도(江都)에 들어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일면은 금산으로 향하여 한창 치성한 적의 세력을 압축시켰으니 이는 모두 공이 선창(先唱)한 힘이었다. 불행히 공의 부자가 서로 계속하여 적에게 죽어, 한 집안에 세 사람이 모두 입절(立節)은 했지만 공을 세우고 치욕을 씻는 일은 다시 바랄 수 없으므로 이에 눈물을 흘리고 애석히 여기며 시운에 돌리면서도 끝내 마음에 풀리지 않은 적이 오래였었다. 적이 물러가자 조정에서 그 충성을 애닲게 여겨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고, 제문을 내렸으니 아! 공은 이제 유감이 없을 것이다.
오성부원군 영의정 이항복이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적부터 호남에 고제봉(霽峯)이란 이가 혼란스런 이 시대에 이름을 날리는 시인.문장가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사모하여오다 예를 갖추어 한 번 면식을 가짐으로써 마치 용문(龍門)의 영광을 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략—
그 뒤 십여년이 지나서 공의 각 군영(軍營)에 전달한 격서(檄書)를 얻어보니 그 민첩하게 글 짓는 솜씨와 호화찬란한 문장이 풍우(風雨)가 모이고, 강하(江河)가 흐를 뿐 아니라 또한 무지개와 노을이 하늘에 떠돌며 걷혔다 폈다 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이 훌륭한 문장에 앞서 유독 대대로 전승한 그 의열(義烈)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다는 그 점이 가장 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공의 여사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지난날 어린 시절에 들은 것이 선정문(宣政門)에서 본 것만 못했고, 선정문에서 본 것보다 실지 행사에서 얻은 것이 더욱 컸으니 마치 황소고기를 먹을 적에 씹으면 씹을 수록 깊은 맛이 나서 더욱더 즐기게 되는 것과 같다.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남긴 말이 있겠지만 그 말이 문장이 아니면 어찌 후세의 칭도를 받을 수 있으랴 이만 하면 참으로 불후(不朽)의 작품이라 이를 것이다.
—후략—
진원부원군 대제학 유근이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서 낳은 것이라 이른바 정기(正氣)는 바로 그속에 있는 것이다. 맹자가 처음으로 “양기(養氣)”란 말을 하고 다시 부연해 말하기를 ‘그 기(氣)가 지극히 크고 강하니 바로 길러서 해침이 없으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차게 된다.’하였다.
사람을 낳을 적에 누구인들 이 기를 받지 않았으리오만 제대로 기르면 자라나고 그렇지 못하면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氣)는 의(義)와 도(道)가 배합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허탈감이 생긴다."하였다.
고태헌(高苔軒;경명)이 임진년 변란에 순절하고 그 두 아들이 뒤에 또 순절함으로써 충효의 대절이 한 집안에 집결되었으니 이야말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받아 나서 평시에는 기르기를 충실히 하고 일을 만나면 태연히 행하며 충효가 있는 것만 알고 자기 몸이 있는 것을 몰라서 마침내 대절에 임하여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부자 세 사람이 이와 같이 우뚝하게 대절을 세웠으니 그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라도 모두 정기에서 발로된 것이다.
—후략—
고경명의 맏아들 준봉 종후도 아버지를 따랐다. 준봉은 어릴 적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다. 임당 정유길이 일찍이 여종을 보내어 데려다 자기 부인을 시켜 머리를 빗겨 주며 “이 아이가 기상이 안온하니 후일에 반드시 독실한 군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17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전적. 감찰, 이조좌랑을 거쳐 임피현령으로 나갔으며 지제교를 지냈다. 임진년 여름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곧장 서울로 쳐들어 왔다. 아버지 고경명과 동생 인후와 함께 의병을 규합해서 국난(國難)에 임했다.
아버지 제봉은 전 부사 박광옥과 더불어 순회하며 타일러서 흩어진 군사를 모아 종후 형제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종후는 수원으로 가서 목사 권율의 진중에 병사를 넘겼다. 그리고 금구 폐현으로 가서 병사를 또 모집하였다. 이어 탐라로 격문을 띄워 전마(戰馬)를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또한 김제, 임파 등 제현(諸縣)을 돌아 군사와 양식을 수집하여 아버지와 여산에서 회합했다. 이 때에 황간, 영동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공격하려 하므로 그곳으로 나가 왜적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방어사 곽영과 더불어 군사를 나누어 좌우익을 만들었다.
의병이 왜적을 토성(土城)에서 무찌르니 적이 사상자가 많이 나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관군(官軍)이 싸움에 협조하려 들지 않고 날도 또한 저물어서 군사를 거두어 진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왜적이 먼저 관군을 공격하니 제군(諸軍)이 다 바람에 쓸리듯 무너지고 의군(義軍)만이 오히려 단독 대항할 계획으로 모두 활을 당겼다. 이때 문득 뒤에서 사람이 급히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군도 역시 따라서 무너져 형세가 마치 거센 물결에 밀리듯 하였다.
종후가 탄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지므로 말고삐를 당기어 일으키려 하는데 집의 종인 봉이와 귀인이 뒤에서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 고경명과 인후의 급박한 소식을 알렸다. 비로소 아버지가 인후와 함께 진중에서 순절한 사실을 알고서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 한참만에 정신이 들자 맨 손으로 적진에 나가 죽으려고 하자 좌우에서 말리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죽기만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더구나 부자의 유체(遺體)가 방금 싸인 시체 속에 들어 있는데 지금 그대마저 죽으면 뉘가 수습하겠는가 하였다 .
종후는 드디어 적이 떠나기를 기다려서 도보로 전장에 들어가 아버지의 유체를 찾아내어 몰래 금산 산중에 묻었다가 그뒤 사람을 데리고 다시 가 아버지와 동생 인후의 시체를 찾아가지고 와서 밤 낮으로 통곡하며 장사지냈다.
그뒤 종후는 400명의 패잔병을 모아 “복수의병군”이라 칭하고 의병을 인솔하여 출전했다. 종후는 원수(元帥)에게 나아가 청하여 정자 조수준으로 계원장(繼援將)을 삼고 본고을 중 해정으로 유격장(遊擊將)을 삼았으며 김린 고경신 등으로 군관을 삼았다. 군사를 일으킨 날부터 종후는 자신을 복수의병장(復 義兵將)이라 일컬었다. 그 다음 정자 오비로 종사관을 삼고 오 유로 부장을 삼았다. 봉이,귀인 등도 역시 종군하였다. 고경형은 고경명의 서제(庶弟)인데 역시 장교로 따라갈 것을 자원하므로 종후가 말하기를 나는 병든 어머니와 어린 아우를 구호해 줄 사람이 없으니 아저씨는 집에 계셔주길 바라오 하니 경형은 형제의 원수 앞에서 뒤걸음질을 할 수 없는 법이다 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리며 따라오므로 다시 말리지 아니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주를 공략하고 난뒤 호남으로 쳐들어 오려하였다. 그래서 진주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 의병을 진주성에 투입했다. 창의사 김천일, 경상병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 사수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주성은 왜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되었다. 공방 9일째를 맞이하여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도망쳐 숲속에 숨어 있다가 살해되었다. 진주 수성장의 비겁한 행동으로 진중이 혼란에 빠졌다. 왜적이 때를 놓치지 않고 성안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와 진주성이 무너졌다. 이 때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이 세 사람을 “삼장사”라 부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의로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충절을 높이 찬양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열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광주 포충사, 진주 충민사에 제향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이 내렸다.
고인후는 경명의 둘째 아들이다. 인후의 자는 선건(善建) 호는 학봉(鶴峰)이다. 1561년에 출생하였으며 157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9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에 이르렀다. 시와 서예에 뛰어났다. 제봉 고경명이 일찍부터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고 학봉 고인후도 총명하여 3세에 능히 글자를 알았으며 6세에 문리를 깨닫기 시작하여 나달로 다르게 늘었다. 장성하면서 뜻이 굳고 행실이 도타왔으며 생활이 검소하였다. 오직 밤낮으로 경서와 사서에 몰두하여 가학을 빛내려 했다.
그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그의 문학은 한원과 호당에 두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임진년에 왜적이 대거 침략하자 아버지 고경명은 박광옥과 함께 본주의 흩어진 군졸을 수습해서 맏아들 종후와 둘째 아들 인후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장차 군사를 전주로 옮기려 하는데 한 선비가 청하기를 “나는 노모가 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게 허락해 주소서, 다음에 계원장(繼援將)이 되어 보답하리라”하자 학봉은 단호히 말하기를 “저 사람을참형에 처해야 한다. 사람마다 가려고 들면 어떻게 군사를 편성한단 말이냐?”하니 온 군중이 두려워 하였다.
소문에 “황간(黃澗) 영동(永同)의 적이 금산으로 넘어들어 형세가 더욱 창궐하여 전주도 조석으로 위급하게 되었다.”하므로 고경명은 휘하 여러 사람과 상의한 끝에 먼저 금산의 적을 쳐서 본도를 구원하기로 하고 드디어 군사를 진산으로 옮기니 의병 모집에 응하는 자가 더욱 많았다.
금산에 당도하여 의병이 먼저 싸움을 걸어 적병을 토성에서 압축하며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이 사상자가 많이 나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데 이 때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한 즐겨 싸움에 협력하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군사를 후퇴시켜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의병은 방어군과 더불어 나아가 싸우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왜적이 먼저 관군(官軍)을 범하니 방어(防禦) 제군(諸軍)이 먼저 무너지고 고경명만이 군중에 공격 명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의병진이 무너지니 고경명이 적의 칼날에 쓰러졌다. 인후는 항상 전열(前列)에 서서 무사를 독려 하였는데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적과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었다.
학봉은 영특하고 세속의 영리에는 항시 담담하여 조금도 동요되는 바 없었다.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우애가 돈독했다
학봉은 어릴 적부터 기억력이 강해서 글을 읽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문장을 만들면 화려하고 민첩하였다. 임진년에 지은 격서와 기타 여러 작품은 고경명이 지은 것이 아니면 학봉의 형제에게서 많이 나왔다.
진중에 있을 적에도 한낱 서생으로서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은 본래 익히지 않았지만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홀로 한 쪽을 담당하되 일찍이 두려워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매양 하는 말이 “오늘의 사세로 보아 비록 자신이 죽는다 해도 단연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의병을 일으킬 적에 아버지 고경명은 자기 성명을 옷섶에다 자수로 기록하였고 인후도 또 한 그렇게 하였으니 대개 이로써 다른 날 시체를 찾는데 한 증거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열(毅烈)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광주 포충사, 금산 종용사, 성곡서원에 배향되고 부조의 특전이 내렸다.
조선후기 175개 가문으로 호남에서는 아마도 세 가지 인물 자랑거리가 있다고 본다. 호남에서 가장 영예로운 대접을 받은 이를 꼽으라면 아마도 문묘에 배향된 울산김씨 하서 김인후를 첫손가락으로 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학문으로는 행주기씨 고봉 기대승과 노사 기정진을 첫손가락에 꼽는 사람들이 호남에 많을 것이다. 그리고 외침을 당해 정충대절(精忠大節)을 보인 경우로 장흥고씨 고경명 3부자를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국난을 당해 정충대절을 보인 가문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고재봉 가문과 같이 외침에 3부자가 창의 순국하여 셋 모두 부조의 은전이 내린 경우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 전쟁에는 한가족이 함께 죽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의로워 나라가 영세불망토록 제사를 지내도록 특전을 베풀고 그러한 국은(國恩)을 입은 충신이 한 가족에 셋이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다.
그러기에 그 죽음이 4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물을 뿌리게 한다. 옛일을 회고해보면 가슴이 아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잔잔한 감동이 호수의 물결처럼 우리 가슴에 출렁인다. 이것을 지금 슬프다거나 아프다기보다 오히려 아름답다거나 숭고하다고 하면 불경스런 표현이 되는가? 슬프다 못해 엄숙해지면서 감격스런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 분명 그 슬픔 속에는 경건함, 고귀함, 아름다움이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3부자가 순국했고 경명의 딸과 그 남편도 왜적을 꾸짓고 칼에 엎드려 순절했으며 고경형 등 두 동생도 전사했다. 심지어 충복 봉이와 귀인도 주인따라 싸우다 목숨을 바쳤다. 이 의로운 죽음들로 인해 촉발된 구국의 출전 행렬에 가담한 의인(義人)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충남 금산의 ‘7백 의총’을 남겼다. 모두 내 나라를 위해 후회 없이 죽었다. 장한 선열들이다. 조국에 대한 그 사랑, 그 절의! 백세를 두고도 변치 않을 아름다움이다. 지금도 우리 모두가 눈물을 숨길 수 없다. 그 비통했던 그 때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몰래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구나!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기에 그러한가?
무엇이 이토록 참극으로 얼룩진 가문의 비통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는가?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뭣보다 이 가문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제봉 3부자 뿐만 아니라 이 가문의 학문이 호남을 울렸다. 그 중에서 특히 고제봉의 문장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제봉은 국난을 당해 나라를 구하자고 호소한 한 장의 글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이게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건지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의병대장으로 말 위에 올라 쓴 글을 “마상격문(馬上檄文)”이라 한다. 문장이 구구절절이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찼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에 나가는 용맹심으로 넘쳤다. 이 격문은 너무 유명하여 제갈량의 출사표, 최치원의 황소격문과 함께 널리 애송되어 온 3대 격문의 하나이다. 이 격문이 한 집안에서 10명 가까운 사람이 함께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효 의열로 세상에 의(義)를 드날리게 한 원천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6000명의 의병을 구국의 전열에 서게 한 고제봉가의 정충대절의 징표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고경명가, 호남에서 문풍(文風)의 위세를 떨치다.
고경명은 여섯 아들이 있다. 맏아들 종후와 둘째 아들 인후는 앞에서 봤듯이 임란에 아버지와 함께 순국했다. 셋째는 준후고 넷째가 순후다. 순후는 임진왜란 때 24세이었지만 부형과 같이 나라를 위하여 죽지 못하였음을 통분하였다. 인조조 이괄의 난에 조카 부천과 함께 창의하였으며 난이 끝난 뒤 군량을 모두 전주영에 납입했다. 정묘호란에 의병장이 되어 조카 부립과 함께 충성을 다했다. 난이 평정되자 어가를 호종하여 여산으로 돌아왔다. 문장과 덕행으로 사림에 중망이 있었으며 도산사에 배향되었다. 다섯째 유후는 임난 때 19세이었고, 여섯째 용후는 16세이었다. 용후는 경명의 제일 끝에 아들로 다섯 형을 대신해 각고면려(刻苦勉勵)하였다. 막내둥이가 임란으로 비통한 가문의 장래를 열었다. 학문이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좌랑으로 이듬해 호당에서 사가독서했다. 남원부사, 고성군수를 거쳐 판결사. 지제교 등을 지냈다. 그 뒤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 김자점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는 것을 통탄하였다. 계축옥사 때 무고를 당한 김상헌, 이정구 등의 신원을 위해 힘을 많이 썼다. 장흥고씨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고경명의 여섯 아들 중에서 둘째 인후의 죽음이 가장 애닲았다. 젊은 나이에 나라와 아버지를 위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 죽음을 가엾게 여겼는지 그 자손이 불타 오르듯이 번성했다. 고경명의 여섯 아들 중 가장 많은 인물이 인후 집에서 나왔다. 문행(文行)이 있는 선비가 고경명 가문 6형제 자손 통털어 약82명이다. 이 중 48명이 인후의 자손이다. 6형제의 하나인 인후집에서 선비가 60% 가까이 나온 셈이다. 이것 하나만 봐도 장흥고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 거의 인후의 자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경명의 아랫대 6형제가 모두 아들을 하나 아니면 둘 두는 것으로 그쳤는데 인후는 다섯 아들을 두어 그 자손이 모두 번창하였다. 고부천, 고택겸, 고시신 , 고시홍, 고정주, 고필상 등 여섯 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시민, 고용진, 고시량, 고언진, 고시좌 등이 경술로 뛰어나 암행어사나 도백 등의 천거를 받았다. 고부천 고두강 부자와 고재량은 사우에 제향되었으며 고시철 고후진은 충효로 정려가 내렸다. 독립운동가로 고광순, 고제량이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현근대 인물로 동아일보 사장 고재욱, 대법관 고재호, 변호사 고재량 고재순, 보사부장관 고재필, 국회부의장 고재청, 대창석유 사장 고광표, 서강대 학장 고재기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고재욱 동아일보사장을 기려 동아일보 사원들은 다음과 같이 명(銘)을 돌에 새겨 묘소 앞에 세웠다.
天命의 붓 한자루로 겨레의 살길을 밝히다.
심강 고재욱 선생은 1903년 음 5월 3일 전남 창평에서 태어나 1931년 일본 京都帝大를 졸업하자 동아일보의 기자로 뜻을 세워 1976년 6월 22일 명예회장으로서 終命하기까지 동아일보와 일생을 같이하였다. 편집국장 10여년 주필 20여년의 營爲속에서 옥고의 시련도 무릅쓰면서 天命의 붓한자루로 겨레의 올바른 살길을 밝히기에 심혈을 쏟았던 선생의 경륜은 사장과 회장에 이르러 더욱 빛났다.
선생은 동아일보의 총수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장 한국신문회관이사장 한국신문연구소이사장 등으로서 한국 언론을 이끌었으며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장으로서 한국언론의 국제유대를 두텁게 하였다.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서울시문화상 숙명여대 명예법학박사 학위 등이 선생의 평생노고를 어찌 다 보상할 수 있었으랴. 아세아신문재단이 고재욱추모금을 창설하여 아시아 언론인의 국제교류를 도모하게 되었음은 선생의 遺光이다. 여기 동아일보의 後生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기는 뜻으로 선생의 1週忌에 즈음하여 이 碑를 세운다.
인후의 부인 함평이씨는 인후가 순국하기 전에 죽고 네 아들이 외가 창평에서 자랐다. 이 아들들이 외가 재산을 물려 받아 장성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장흥고씨를 창평고씨로 부르기도 한다.
고부천은 인후의 아들이다. 부천은 창평 외가에서 자랐다. 부천은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지혜로왔다. 부모와 같이 누어서 말하기를 세 사람이 누었으니 내천자와 같다고 하였다. 부모가 그 말을 기특히 여겨 내천자를 넣어서 이름을 부천(傅川)이라 지었다.
부천은 조부 경명에게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해 명성이 자자했으며 풍채가 준수하였다. 15세 때 임진왜변을 만나 주야로 애통 망극하여 죽게될 지경에 이르렀다. 중부 순후, 계부 용후 두 사람이 설득하고 극진히 간호하여 회생시켰다. 그뒤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가 폐모론을 통박했고 오리 이덕형이 강상(綱常)을 세우자 주장하는 것을 죄 주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언관의 직에 있으면서 강직하게 부정을 규탄하였다. 1620년 동지서장관으로 연경에 가서 황제의 칭찬을 들었으며 화보 4권 은배 한쌍을 하사 받았다. 중국을 다녀와 복명할 때는 정세가 크게 변하여 조정에 더 있을 수 없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 창평으로 내려와서 기옹 정홍명 등과 더불어 도의를 탁마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매 부천은 중부 순후와 같이 창의하여 태인까지 출정했다.그뒤 공조좌랑에 이어 병조정랑, 정언을 지냈다. 흥양현감으로 나가 치적이 결백하였다. 난이 평정되지 않아 호소사 사계 김장생의 종사관으로서 동궁을 모시고 전주까지 갔다. 또한 통어사 유비연의 종사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 뒤 “주욕신사(主辱臣死)의 때를 당하여 티끌 만한 보답도 못 하였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보고 진충행의(盡忠行義) 망신보국(忘身報國)할 만한 마음이 평소부터 축적되어 있다고 칭송했다. 그뒤 장령, 영암군수, 시강원 필선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부천은 자질이 순후하고 가학을 이어받아 문학이 빼어났다. 일찍부터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나가니 기대가 커 낭묘재보(廊廟宰輔)의 그릇이라 하였다. 부천은 평상시에는 과묵하여 사람의 과실도 말하지 않았다. 늘 겸손하여 군자 같으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용기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효의덕행(孝義德行)은 가풍에서 나왔다. 가르침을 이어 받아 명성을 후세까지 크게 전 했다. 정충대의(精忠大義)가 우주에 찬연히 빛나 장하다하고 했으며 절열(節烈)의 가문, 충효(忠孝)의 집안이라 칭송했다. 죽자 김상용, 장유, 최명길 등 명사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창평 도장사, 장성 도산사에 제향되었다.
고두강은 부천의 아들로 겨우 말을 배울 때부터 글을 깨우쳐 당시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다. 다섯 살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범절이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또다시 아버지 상례 때 애통함이 과도함을 보고 한성의 명류들이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창평으로 반장할 때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 현주 이소한 등 제현들이 애통한 마음을 표했다. 그후 학문이 깊어져 장계 오이정과 산사에서 주역을 강론했다. 오이정은 고두강이 친구가 아니라 사표라 칭했다. 당시에 유일로 천거되어 유론으로써 선친 월봉과 함께 창평 도장사에 배향되었다.
고택겸은 제봉 경명과 인후의 후손이다. 178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입시의 명을 받고 나가 정관개요에 대해 강의하여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정조는 특별이 주자사운(朱子四韻)을 차운(次韻)하여 금문원에 걸어 놓으라 명했다. 조정에서 제주 삼을라(三乙那) 묘호(廟號)를 삼성사(三姓祠)라 어필로 써내리고 뒤에 행할 절목을 정하여 택겸을 예관으로 명하여 치제하였다.
고정헌은 제봉 경명과 종후의 후손이다. 1783년에 문과에 급제하자 왕이 충렬공의 몇대 손이냐고 물으며 꽃을 내리고 정자 벼슬을 제수하였다. 차가주서(差假注書)로 성정각에 들어가자 임금이 어선(御膳) 일기(一器)를 하사하였다. 예조정랑, 정언, 지평, 흥양현감을 지냈다. 사간이 되자 임금에게 경계(境界)를 바르게 정하고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시키며 학문을 권장할 것 등을 아뢰니 임금이 가납하고 호조참의로 승진을 시켰다. 그뒤 우부승지에 이르렀다. 관계에 나가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며 물러나는 것을 쉽게 하였다. 또한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를 즐겼다. 성리에 깊고 문장이 뛰어나 당대 유림의 중망이 높았다. 문장실학이 당세 으뜸이라 했다. 만록 5권이 전한다.
고정봉은 충열공 경명과 유후의 후손이다. 1798년에 공령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돈녕도정이 되었다. 임금이 고충열 부자의 정충특절(精忠特節)이 온 세상에 알려져 있음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다시 그 후손 정봉이 공령과(功令科)에 장원 합격하였다고 치하해 마지 않았다. 문청공 서영보, 극원 이만수 등과 강론하며 여생을 보냈다.
고광순은 제봉 경명과 인후의 후손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상소하고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광주에서 송사 기우만과 더불어 북상하던 중 왕명으로 해산되었다. 을사보호조약 후에 고제량과 함께 면암 최익현의 순창 의병소에 합류, 능주와 동복에 집결한 적과 격전하였다. 다시 호서 의병장인 김동신을 응봉에서 만나 구례 연곡사로 행군하며 머지않아 광복을 찾는다는 뜻의 깃발을 앞세우고 싸웠다.
문수사와 화개에서 전투 중에 전세가 불리함을 알자 좌우를 불러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었다. 그대들은 나를 염려하지 말고 살 길을 찾으라. 그리고 광훈은 군부(軍簿)를 태워 후에 걱정이 없게 하라고 말했다. 이에 제량은 흥분하여 “죽으면 함께 죽어야지 어찌 혼자 살겠느냐”고 말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이때에 임홍준이 시신을 옮겨두었다가 4일만에 광훈이 관을 갖추어 염습할 때까지 그의 안색이 변함없이 성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뒤에 매천 황현이 사람을 시켜 성분하기 수일전에 절 앞의 고목나무에서 큰 뱀이 떨어져 죽었고 밤이면 여우가 슬피울며 까마귀 떼가 모여 흩어지지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고필상은 의열공 학봉 인후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단정하고 영특하였다. 5세에 취학하여 장성하며 제자백가서를 섭렵(涉獵)하였고 문장으로 명망이 당세에 높았다. 1876년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 지평 수찬 겸 지제교 경연검토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병 구완을 하다가 병이 옮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고제량은 월봉 부천의 후손이다. 병신년 국모의 변에 녹천 고광순과 송사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켜 광주에서 모의하고 나주로부터 북상하는 중에 왕명으로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광순과 합의하여 다시 의병을 모아 순창에 있는 면암 최익현 의병소에 도착하자 면암은 적에게 붙잡혔다. 고제량은 고광순의 부장으로 양한규와 함께 남원성을 공격했다. 그뒤 저산에 기지를 구축하고 능주 동복에 있는 적을 격파한 후 구례 연곡사에 이르러 진을 쳤으며 고광순 , 고광훈 등은 적을 포위하고 호서의병 김동신과 같이 결전하던 중 전세가 급박해졌다. 날아오는 탄환속에서 항전하다가 고광순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유체(遺體)를 임준홍이 보호하였다가 광훈이 임시로 장례를 마쳤다. 그 뒤에 매천 황현이 사람을 데리고 와 가토성분하였다. 진안 이산사에 제향되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고광선은 제봉 경명과 정헌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크게 촉망을 받았고 처음에 나덕암(羅德岩) 문하에서 학업을 닦다가 노사 기정진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경전(經典)과 이학(理學)을 연구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원리를 깨달았다. 경(敬)과 정(靜)을 위주로 위기지학에 침잠했다. 올바르게 행동하고 지도함으로 뭇 사람들에게 감화준 바 컸다. 한일합방 후 봉산정사에 은거하였는데 원근의 학자가 문하에 모여들어 학문을 닦았다. 더러운 풍조에 물들지 않겠다 하고 그 재호(齋號)를 엄이재(掩耳齋)라고 하였다. 송사 기우만, 난와 오계수 등과 함께 도의를 강마했다. 사후 문인들이 봉산사에 고광선을 배향하였다.
고정주는 학봉 인후의 후손이다. 한장석에게 예학을 배웠다. 18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독에 승진하였다. 이때에 간신들이 국권을 농락하여도 대신들 중에 감히 이를 말하는 이 없음을 분개하고 상소하여 간신들의 목을 자르고 국맥(國脈)을 바로 잡아야 한다 하였다. 나라 운명이 위기에 처하였음을 통탄하고 구국할 인재를 기르고자 고향인 창평에 창흥의숙을 세웠다. 아들 광준과 사위 인촌 김성수(부통령, 동아일보사장), 송진우(한민당수 동아일보사장) 등을 중국으로 보내어 유학시켰으며 김병로(대법원장)를 이곳에서 공부시켰다. 황자(皇子)에게 수책(授冊)할 때 비서감승의 명을 받았다. 당시에 일본과의 굴욕적인 5조약이 체결되자 매우 격분하여 상소하였다. 1906년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득인산 기슭에 정자를 지어 녹천정이라 이름하고 은거하였다. 1907년에 호남의 유생들이 서울에 모여 호남학회를 만들고 정주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고언주는 학문이 깊고 널리 통했으며 예학에도 밝았다. 칙령으로 정헌대부에 오르고 경술국치에 동지를 모아 광복을 도모하니 고종이 특별히 의대조(衣帶詔)를 내려 격려했다. 이 기밀이 누설되어 초야로 돌아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고시신은 제봉 경명과 인후의 후손이다. 17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 전적을 거쳐 필선이 되어 왕명으로 동궁을 보좌하였으며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종부시정으로 옮겨 특별히 홍문관 교리가 되니 언로를 틀 사람은 오직 고시신 한 사람뿐이라 하였다. 병조참지,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왕세자가 서거하자 지향관(進香官)이 되어 평소에 받았던 은총을 슬퍼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을 쉬고 재호(齋號)를 소암(素菴)이라 하였다.
장흥고씨는 두 가지가 풍성하다. 그것은 사람과 글이다. 1985년 인구 센서스 결과 행주기씨는 약 2만명, 울산김씨는 약 3만명, 장흥고씨는 약 4만명이다. 호남 3대 명문 중에 단연 일가친척이 제일 많다. 행주기씨는 전국에 있는 씨족을 다 합쳐 2만이다. 장흥고씨는 제주고씨의 한 개 지파에 불과한데 4만이고 행주기씨 전체 인구의 두 배이며 울산김씨보다 만명이 더 많다. 이만하면 호남 명문 중에서 사람 많다 할만하다.
위에서 이 가문의 글 잘하는 인물의 면면을 살펴 보았다. 족보상에 문집이나 유고, 유집이 있는 사람의 수를 살펴보면 울산김씨는 약 16명이고 행주기씨는 약 39명인 반면에 장흥고씨는 약 82명이다. 고경명 가문만 쳐서 82명이다. 고경리 후손이나 고경훈 후손에도 글잘하는 선비까지 치면 훨씬 더 많다. 고경명 가문의 이 숫자는 조선조 후기 175개 가문 중에서 대략 7위 안에 든다. 문행이 있는 선비 숫자 82와 그 순위 7이라는 숫자는 고경명 가문이 차지하는 유림사회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 문집의 숫자는 족보상의 것이기에 실재와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장흥고씨 고경명 가문이 전국 유림의 상위권에 들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8도에서 6도가 7위 안에 든 가문이 하나도 없다. 그 유명한 4대 최고문형 가문도 못끼인 자리에 고경명 가문이 들었으니 호남의 체면을 장흥고씨들이 세웠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울산김씨 김인후 가문은 문과급제자가 5명, 행주기씨의 기대유, 기대승과 기대항 종형제 가문, 즉 행주기시 6개 가문이 합쳐 문과급제자를 15명 낸 반면 장흥고씨는 고경명 가문만 16명을 냈다. 장흥고씨 고운 이래로 치면 대략 30명 가까운 문과급제자를 냈다. 문과급제자를 호남 명문 중에서 제일 많이 냈다. 이 숫자는 영남에서 문과급제자를 제일 많이 낸 퇴계 이황 가문에 육박하는 숫자로 영남에 가도 당당히 2위는 굳히고도 남는다. 내앞 의성김씨 학봉 부친 김진 가문이나 풍산유씨 서애 유성룡 가문이 20명 안팍을 드나드는 정도이었으니 호남 장흥고씨의 위력을 알만하다. 지방에서 문과급제자 수가 많다는 것은 글잘하는 선비가 많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엘리트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는 것은 문신으로 큰 영예였다. 대제학은 호당 출신으로 뽑았던 것 하나만 봐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사가독서를 한 이가 울산김씨는 김인후 1명이고 행주김씨는 기대승 기자헌 2인이며 장흥고씨 고경명 가문은 고경명 고용후 2인이다. 고경명은 1533년생이고 기대승은 1527년 생이다. 고경명이 5년 아래이지만 호당 등용은 고경명이 기대승보다 3년 빠르다. 고경명 가문이 호당에 들어간 2명이라는 숫자는 175개 가문 중 8위 안에 드는 기록이다. 2명을 낸 가문이 15개 정도 있으니 정확하게 표현해서 공동 8위 안에 든다. 문중8강, 문중16강, 기호19대 명문, 영남 10대 사족 등 175개 가문이 겨우 한 명 있거나 거의 못낸 실정이니 호당 2명이라는 기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3품 당상관도 울산김씨는 1명에 그쳤으며 행주기씨 6개 가문이 3명 정도를 낸 반면에 고경명 가문은 6명을 배출했다. 정3품 당상관은 요즘으로 말하면 중앙청 국장이다. 차관 장관이 정치 바람을 타는 자리라면 국장은 실무 책임자로 능력이 있으면 올라 갈 수 있는 관리의 별이라 할만한 요직이다. 이로 미루어 봐도 고경명 가문의 글과 능력은 여러 모로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하서 김인후가 문묘에 배향되어 호남의 위상을 높인 것과 DJ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을 받아 호남의 위상을 높인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높였는지는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강도가 후자보다 전자가 더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이 건국 500년 되는 시점에서 호남에 DJ보다 더한 기록이 여럿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500년 역사상에 호남인으로 문묘 배향된 이는 하서 하나 뿐이다. 그 당시 문묘 배향은 대제학 수십명, 더 과장하면 100명 나온 것보다 더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국민이 대통령을 보통 사람으로 여기고 모두 내가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이며 대중이 영웅인 시대라 대통령이나 노벨상도 뭐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를 않는다. 이것은 만민이 평등을 외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누가 호남에서 더 대접을 받는지는 접어두더라도 하서 김인후가 울산김씨를 호남에서 조선조 3대 명문의 반열에 올려 놓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울산김씨는 문묘 배향의 영광을 안았고 행주기씨는 상신 판서를 많이 냈다. 상신 1명, 정2품 2명,종2품 4명을 배출했다. (기자헌 영의정 , 기언정 공조판서 기대항 한성판윤, 기정진 호조참판 기우현 병조참판, 기령 관찰사 기협 관찰사 등) 그런데 장흥고씨 고경명 가문은 상신 판서는 고사하고 참판 하나 못냈다.
그런데 이 집에서 글잘하는 선비가 많이 나와 한양의 명문대가와 전국 유림에서 쩌렁쩌렁한 소리를 지르는 양반들의 높은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이것은 조선조 문중사에 빛나는 기록이며 호남의 자랑이고 조선8도 좌우의 경사다. 영호남은 조선 8도의 두 축이기 때문이다. 한쪽이 기울면 역사가 소용돌이 치고 혼란이 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경명 가문이 조선 8도 좌우의 균형을 잡아 준 셈이다. 이로써 고경명 가문은 조선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기 때문에 조선조에 비중이 있는 선비 가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호남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선비 가문으로 조선조 유교 가문의 전형이라 일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