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02/200302]친구집 ‘잔디공원’ 울력
때는 숙종대왕 즉위 무렵. 그 이름도 유명한 이몽룡 어사가 남원부사 변사또의 ‘악행’을 징죄懲罪하려 한양에서 졸개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겠다. 모월 모일 남원 인근에서 집합, 사전에 작전논의하기로 한 지역이 오수 근처 ‘구홧뜰’마을. 유서깊은 마을에 사는 친구가 일요일 오후 SOS를 쳤다. 집앞 30여평에 약소하나마 나무공원을 조성했는데, 바닥에 잔디를 심으려하니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뜻의 순우리말. 운력雲力 또는 운력運力이라고도 하나 울력을 많이 쓴다)을 해줄 수 있겠냐는 것. ‘당근’ 오케이이지만, 울력성당成黨이 끝난 후 산닭 백숙파티를 하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닭고기 알레르기로 드시지도 못하는 친구 형수의 수고로움이 떠올라서였다. 번번이 ‘민폐’가 아닐는지.
아무튼, 익산에서 한 트럭 가득 사온 질 좋은 잔디가 1평에 6000원(장흥산은 1평에 1만원)이란다. 기계로 착착 떼낸다는 가로 1m, 세로 20cm의 반듯반듯한 직사각형 잔디를 차에서 내리고, 심고, 발로 밟는 등 다지고 하는 작업이 어찌 만만하랴. 그것을 양주兩主(친구부부)가 하루종일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울력을 미끼로 인근 친구들을 불러낸 것이다. 나의 ‘자연인친구’를 은근슬쩍 우리 팀의 울력에 동참시켰다. 경험이 많은 ‘프로일꾼’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찌 빈손으로 가랴. 참이슬 두 박스, 오수찐빵 한 박스, 이백막걸리, 병맥주를 들고 모인 게 오후 2시. 서너 시간 정신없이 노동에 몰입을 했다.
잔디는 넉넉하다못해 남았다. 지난해 1월 꾸몄으나 잔디가 잘 자라지 못해 헤성헤성한 가운데 잡초들만 기승을 부리는 어머니 봉분이 생각났다. 오지랖 넓은 친구가 먼저 “혹시 우천도 잔디 필요한 것 아냐?” 아, 이럴 때 무어라고 할까? 숫제 ‘감동’이다. 울력 도중에 자기 트럭으로 가자는 것이다. 5분여 거리의 가족산소 아래에 잔디를 퍼놓았다. 내일은 어머니 봉분에 ‘이불’을 다시 덮어드리려는 생각에 가슴까지 설렜다. 지난주 잔디 성장을 북돋아주는 농약 ‘두둑탄’과 산소 주변의 잡초를 죽이는 ‘동장군’을 뿌리니 대단한 일을 한 듯,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또한 어머니 생신이 화요일이 아닌가. 금상첨화이다. 1년만에 새 이불 덮으시고 영면하시라.
운봉 친구도 마당에 잔디를 깔겠다고 남은 잔디를 실었다. 게다가 이웃집에서 마침 폐품으로 내놓은 200년도 더 되게 보이는 쌀뒤주(80kg 두 가마가 들어가는)도 덤으로 얻었으니, 울력 조금 하고 가외의 소득이 더 많은 셈. 큰 뒤주는 사도세자의 비극을 떠올리게 생겼다. 거기에다가 산닭백숙의 만찬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남원에서 갓지(갓김치)를 담그다가 긴급호출에 달려온 친구부부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은 듯하다(막 담은 갓지도 맛보는 행운까지). 친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맥소(맥주와 소주의 짬뽕)’로 얼굴이 붉어졌으나, 도인道人같아 보기에 좋았다. 지난해 우리집 상량을 멋들어지게 써주는 등 붓글씨 내공이 만만찮다. 친구집 공원 이름을 그의 호를 따 ‘소천공원素泉公園’으로 하고, 그 글씨를 써주면 좋겠다는 얘기도 오갔다. 목백일홍, 모과나무, 팽나무, 소나무 등을 상당히 신경써 심어놓은 고향집 앞 작은 공원. 올해 여름부터는 언제든 가족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할 공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문구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 공원 이름을 ‘기쁨이 샘솟는 집’이나 ‘즐거운 우리집’이라고 새겨도 좋으리라. 언제나 친구들의 좋은 일에는 우리의 박수가 뒤따르고, 덕담이 이어진다.
친구의 형수는 닭죽 두 그릇을 챙겨 운봉친구와 나의 손에 쥐어준다. 둘다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에 신경써주는 마음씨가 너무 곱고 예쁘다. 효자孝子도 아니건만, 주변에서 이런저런 배려를 해주는 친구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갸륵한가. 경로우대敬老優待, 동방예의지국의 미덕은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닐까. 흐뭇한 일요일 밤, 돌아오는 어둑한 밤길, 봄비가 또 내린다. 무조건 잔디는 백퍼(100%) 잘 자라리라. 친구여, 수출입 포장재로 쓰이던 원목 판자로 평상平床 잘 만들어놓으시라. 우리 올 여름, 그 공원 나무그늘에서 바둑도 뒤고 술잔도 기울리세나. 우리가 마시는 게 어찌 ‘술’이겠는가? ‘정情’이지.
부기付記: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자기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서예가 친구가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분이 고교 3학년때의 ‘한문漢文선생님’이란다. 나 역시 그러하기에 이름도 확실히 기억하는 ‘안성호 선생님’. 그분이 들려주던 구수한 삼국지 이야기(적벽대전, 계륵, 삼고초려 등등등등. 한문으로만 된 원본 삼국지를 세 번 독파하셨다고 했다), 계명구도鷄鳴狗盜 등 숱한 고사성어들, 낭랑하게 암송하시던 한시 구절 등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태백의 한시를 얼마나 멋지게 해석해 주시던지. 이제 생각하면 당시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던 것이다. “살아계실까?” “물론. 한 친구가 매일 아침 집근처 공원에서 운동하는 선생님을 뵌다던데” “그래? 그럼 우리 둘이 빠른 시일내에 한번 모시자” “좋지. 내가 당장 그 친구에게 부탁해 놓을게” 선생님도 얼마나 좋아하실까? 이래서 40년도 넘었지만, 존경하는 고교 은사님을 만날 수 있게 되다니? 화제가 만발한 국평(구홧뜰)마을의 밤이 특히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