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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일(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요한복음 9:1~12
세상의 빛, 예수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엄마와 딸이 기차를 타기 위해 대전역 광장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광장 한쪽에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측은히 여긴 딸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며 다가갔습니다. 이때 엄마가 황급히 딸의 팔을 잡아당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 아저씨처럼 된다.” 엄마의 경고를 들은 딸은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이야기는 자기 생각의 틀에 갇힌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 줍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의 틀에 갇히면, 마치 딱딱한 갑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해서 좀처럼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경멸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딱딱한 자기 생각의 틀을 깨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길을 걸어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2절, 우리말 성경)
제자들이 예수께 이처럼 질문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인간이 겪는 질병이나 불행의 원인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모태에 있는 갓난아기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자기 죄든, 부모의 죄든 그 누군가의 죄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관점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왜 제자들의 질문이 잘못된 것입니까?
먼저, 제자들의 질문은 과거 지향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들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미래 지향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교리와 전통이라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과연 저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가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눈으로 눈먼 사람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과연 예수님 당시에 눈먼 사람이 한 둘이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으시고,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았다(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6절).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14절). 또한,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장 삭게오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삭게오야 속히 내려오라”(5절)고 부르셨습니다. 사랑 많으신 예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은 때가 아직 낮”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아직 활동하실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밤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그때는 일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더욱이 이 사건은 초막절과 수전절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때는 7월과 9월 사이인데,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약 6개월 전이였습니다. 자기 죽음의 때를 알고 계신 예수님에게 남은 6개월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을까요?
그런 소중한 시간에, 예수님은 더 많은 사람,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시고,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말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눈먼 자를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자기의 눈을 씻자,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먼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요한은 이 못이 ‘실로암’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었습니다(7절).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보내신 분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 받고, 병 고침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후 우리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병든 몸을 건강한 몸으로 회복시켜 주셨다면, 우리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오히려 죄짓는 데 앞장선다면 하나님께 책망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리를 다쳐 걷지 못하게 된 열 살가량의 사내아기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탁월한 의사를 만나 적절한 수술을 받았고, 재활 훈련을 거듭해 몇 달 뒤 서서히 걷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15년이 지난 후, 아이를 수술한 의사가 재활 훈련을 담당했던 간호사를 우연히 만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은 청년이 되었겠군요. 어떻게 사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간호사는 얼굴이 굳어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교도소에 있어요. 저는 그 아이에게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가르쳤지만,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한기홍, 「오늘을 만족하라」(두란노, 2015); 「생명의 삶」(두란노, 2020년 1월호), 125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님의 치유는 온전한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치유해 주셨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라는 새로운 인생 사명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주변 사람들은 이번 치유사건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며 이를 이상히 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눈먼 자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며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눈먼 자의 부모를 불러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처럼 냉담한 주변 사람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눈먼 자는 예수를 증언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절)”
날 때부터 눈먼 자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언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증언했습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어떻게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를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했기 때문이었고,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증거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향해 욕을 하며 “너는 예수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먼 자는 치유를 경험한 이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자는 이 일로 유대교에서 출교당하게 되었습니다(34절). 이미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이 난다면 우리의 마음이 굉장히 착잡했을 것입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변호하다가 출교를 당했으니 왠지 우리의 마음이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박해당하는 성도를 외면하지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눈먼 자가 출교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왜 예수께서 그를 다시 찾아오셔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저는 여기에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그의 믿음을 양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듣고 눈먼 자였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36절, 우리말 성경).”
이에 예수님은 “네가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37절, 우리말 성경).”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에 눈먼 자였던 사람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하고, 예수께 절하였습니다(38절).
이전까지 그의 신앙은 눈이 밝아지는 체험중심의 신앙이었지만, 이제 그는 입술로 예수님을 고백하며 예배하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박해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박해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출교시킬 것이고, 때가 이르면 그들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16:2). 이러한 박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할지라도,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분은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핍박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큰 위로와 소망을 안겨 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로마를 방문했을 때,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지하 무덤, 카타콤을 찾았다고 합니다. 지하 무덤 앞에는 한 소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동상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대대적인 핍박이 있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무덤을 예배 처소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지하 무덤은 쫓고 쫓기는 살벌한 살육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리스도인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더 깊은 곳으로, 더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동상의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길을 인도해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어떻게 어린 소녀가 지하 무덤의 통로를 로마 군사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소녀에게 주신 선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시각 장애입니다. 소녀는 시작 장애인이었기에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에게는 지하 무덤이 전혀 새로운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시력을 가져가신 하나님이 다른 신체 감각을 탁월하게 하셔서 지하 무덤길을 다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위험이 닥칠 때마다 믿음의 공동체를 피할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병락, 「쏟아지는 은혜」(두란노, 2019);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0년 2월호), 7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핍박을 아시고,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육신의 눈이 멀쩡해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눈먼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이 멀어 있다 하더라도, 영적인 눈이 열려 있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 앞에 엎드려 예배할 수 있다면, 그는 영적인 눈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자는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위로를 얻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빛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