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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산악회 /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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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산행 후기 스크랩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엔지 추천 0 조회 318 06.03.09 11:3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루브르 박물관  : 늑대에 대항한다 라는 뜻

 

1190년 필립 오귀스크가 성체로 지었다가 샤를르 5세, 프랑수와 1세를 거치면서

증 개축을 거치며 역대 왕들이 수집한 명화나 조각들을 전시하게 되었고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루브르를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은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루브르 하면 이집트와 나폴레옹을 빼놓을 수 없다.

입구로 사용되는 유리 피라미드는 이러한 역사를 잘 반영한다.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 정책'이후 1989년 완공된 유리 피라미드 덕에

루브르의 외관이 새롭게 바뀌었다.


루브르는 ㄷ 자 모양이며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었다.

드농, 리슐리에, 쉴리관이다.

지하 1층과 지상3층으로 각 층은 10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전시품은 고대 이슬람 미술, 고대 이집트 미술, 고대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미술,

공예품, 조각, 회화, 드로잉, 판화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

- 모나리자

   이름도 성도 주소도 업적도 없는데 유명한 것은 레오나르드 다빈치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자산 1위가 루브르이고   그중 1위가 모나리자다.

   천조를 줘도 안판다는 모나리자 덕에 수만명이 먹고 산다. 700억 상당의 입장료 수입.
   현재 모나리자는 자외선 차단은 물론 방탄유리 안에 있다.

  

   모나리자는 피렌체에서 직물업을 하는 조콘다의 부인이었다.

   35살에 19살 소녀에게 장가간 조콘다가 첫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부인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림은 4년간 계속되었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모나리자가 여행도중 죽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남편에게 주지 않고 갖고 있다가 64살 때 프랑스로

   도망쳐 프랑스 왕에게 팔았다.

 

 - 모나리자의 미소

   남편있는 여자가 딴 남자를 쳐다볼 때 나타나는 최대한 절제되고 최소한표현된 미소,

   모델이 실제 미소일 수도 있고,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마음속 미소일 수도 있다.

   모나리자의 눈은 각각 사시여서 보는이로 하여금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모나리자가 가능한 것은 유화물감이 나온 덕이다.

 

- 레오나르드 다빈치

   36가지 분야를 연구한 종합대학을 혼자 운영할 정도의 실력자이다.

   동물학, 식물학, 해부학, 군사무기, 항공,   기계 설비, 원예, 요리, 건축, 회화, 조각 등...
   다빈치가 죽고나서야 발견된 원고도 거울에 비추어서야 해석되었다.

   혼자서 27구의 시체를 해부해 정확하게 해부도를 남겨 놓았다.  

  

-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까닭

  1) 1911년 이탈리아의 화가노동자의 도난 사건,

  2) 1968년 미국 케네디가 드골에게 빌려달라 간청해 최대형 유람선에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붉은 카페트위로 내려 방탄리무진 8대가 호위해

      2,000평 건무에 모나리자 한 점 걸어 1달 동안 전시하니 170만명이 다녀갔다고. 

      이어 동경 모스크바에 빌려주면서 유명세가 더해짐.

  3) 방탄유리는 10-50  살 남자들의 동경심리를 자극하고 

  4) 원작을 대할 때 느끼는 짜릿함이 여전히 모나리자를 찾게 하는 이유가 된다.

 

- 비너스


- 시모네케스의 니케

  돌로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을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했다.

  이 없고  니케의 왼쪽 날개가 가짜라는 것이 아쉬움이지만 지금 남아있는 그대로도

  완벽하다.   나중에 발굴했다는 손도 옆에 전시되어 있다


-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교황을 불러놓고 교황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나폴레옹의 자신감과 오만함이 묻어 나왔다. 

  다비드는 실제 상황을 지켜 보았지만 실제와 달리 나폴레옹의 마음에 쏙 들게 그림을

  그렸다 한다. 
  주문제작이었던 당시 그림시스템으로 보았을 때 주문자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화가의 양심사이에서 작가들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결혼 이혼하고 추방당한 조세핀 이지만 대관식 그림속에 있을 때 그녀는 권력의 정점 이었다.

-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상

-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들라클루와의 '사르다나파아루스의 죽음'

- 램브란트 방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삼았다는 램브란트의 그림 램브란트에 비해 루벤스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에 아첨하고 그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린 화가였다고 혹평했다. 
   재무성 건물이 이전하면서 생긴 가장 큰 방에 루벤스 그림이 걸렸다 한다.

- 반 아이크의 성모와 주교 그림

  66*62cm 크기의 그림인데, 너무나 세밀하다. 원근법을 완벽하게 표현한 창문 밖에

  마을 풍경이 너무나 섬세하다

- Jean Clouet 부자의 '프랑스의 왕'

- Fontainebleau School 의 ' 목욕하는 두 자매' 

- 나폴레옹 방 : 응접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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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6.03.14 11:09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 06.03.17 10:29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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