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정호 옥정호(玉井湖) 朋友傳言玉井景(붕우전언옥정경)-친구로부터 전해들은 옥정호 아름다움 第一風光願觀光(제일풍광원관광)-언젠가는 호남제일 풍광을 구경하리라 寫眞湖上神秘雲(사진호상신비운)-사진으로 본 호수위의 흰 구름 신비와 湖上櫻影移民魂(호상앵영이민혼)-맑은 물에 벚꽃그림자는 이주민의 넋인가 旅客湖水美麗醉(려객호수미려취)-나그네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淡水魚湯發歎聲(담수어탕발탄성)-민물고기 매운탕에 탄성을 지르지만 此景有存過痛苦(차경유존과통고)-이 경치가 있기까지 지나간 아픔을 望塔默言着玉井(망탑묵언착옥정)-망향탑은 말없이 옥정호를 바라본다 농월(弄月)
지금의 행복과 아름다움은 지난날 고통과 슬픔이 쌓인 것 ! 필자는 친구들이 여행을 할 때에 여행지의 좋은 풍경을 사진 찍어 보내 줄 것을 부탁한다. 카페에 가능하면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올리고 싶기 때문이다. 직접 가보지 못하지만 친구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중에 답사할 자료도 되기 때문이다. 전주에 있는 친구가 “전주 운암호(雲岩湖)”의 사진을 보내 왔다. 이 사진들이다.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 이 글을 쓴다.
그런데 필자는 “전주 운암호”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을 하였다. 친구가 말한 “전주 운암호”는 임실 “옥정호(玉井湖)”를 말한 것이다. 이 호수(湖水)이름이 운암호(雲岩湖). 옥정호(玉井湖)로 불리기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니다. 먼저 “임실 운암호(雲岩湖)는 전국 사진작가들이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의 사진촬영명소(出寫名所)로 옥정호(玉井湖) 풍경 1호”라는 기사다. 아래 내용은 인터넷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 호수의 위치는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 458(운암호(雲岩湖)는 운암면 이름을 딴것) 전라북도 임실군과 정읍시에 걸쳐 있는 호수다. 섬진강댐으로 인해 상류에 생긴 인공호수다. 호수 명칭의 유래는 섬진강댐의 근처에 옥정리(玉井里)가 있다. 조선중기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머지않아 맑은 옥(玉)같은 호수가 될 것” 이라고 예언하여 동네이름을 옥정리(玉井里)라 하였고 호수(湖水)이름도 옥정호(玉井湖)라 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옛날 운암호(雲岩湖) 또는 섬진호(蟾津湖)라 부르던 것을 “옥정호(玉井湖)”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옥정호(玉井湖)는 전북 임실군과 정읍시에 걸쳐 있는 호수로, 섬진강 상류에 있는 인공호수다. 옥정호(玉井湖),운암호(雲岩湖), 갈담저수지(葛潭貯水池)라 불리고 있다. 옥정호(玉井湖)가 아름다운 것은 자연환경과 생활터전이 어우러져 있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함과 순박한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자연속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옥정호를 “어머니를 닮은 호수”라고 말한다. 옥정호 주위는 곳곳에 이주 전 주민이 살았던 마을을 표시하는 빗돌이 서 있다. 물속으로 잠기게 된 고향을 떠나면서 대대로 살던 흔적의 돌을 세우고 마음도 묻어버리려 했을 이주민의 아픔을 상상하니 푸른 옥정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이주민들의 눈물이 고인 호수 같아 마음이 아린다. 논밭을 일구고 곡식을 거두며 사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가족과 이웃이 모여 살았을 집, 골목길 당산나무 멱 감고 고기 잡던 계곡의 물과 서로 나누던 자잘한 정(情)들이 몽땅 옥정호에 잠겨 버렸으니 진정 “사람과 농사를 위한 댐”이라는 것인가 되묻게 된다. 섬진강댐의 건설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동진 농지개량조합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일제(日帝)는 정읍 김제 지역의 곡창인 호남평야의 부족한 농업용수를 개발하기 위해 대규모 농업개발에 나섰다. 1927년 임실군 강진면에 운암제(雲岩堤)를 건설하고 터널을 뚫어 동진강(東津江) 으로 물을 끌어 들였다. 운암제(雲岩堤)의 건설로 섬진강의 물은 지금까지 호남평야의 땅을 적시어 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댐은 운암제(雲岩堤)가 아닌 1965년 12월에 준공된 것이다. 지금의 섬진강댐이다. 섬진강댐으로 인해 옥정호(玉井湖) 운암호(雲岩湖)라는 이름이 붙은 아름다운 풍경의 호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일제가 1941년 8월에 섬진강댐을 착공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 그후 1948년에 조선전력주식회사(현 한전)에 의해 재 착공되었으나 한국전쟁(6.25)으로 다시 중단된다. 그후 섬진강댐 사업은 1961년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공사가 다시 시작되어 1965년 12월 국내최초의 다목적댐으로 완공됐다. 일제(日帝)가 건설한 운암제의 7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로써 일제가 건설한 운암제는 역사와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섬진강댐 건설로 수몰되게 된 주민들이 농토와 생활 터전을 잃고 섬진강 유역의 임실,운암,강진면 일대로 수몰주민이 이주해왔다. 수몰주민이 이주되는 과정에는 눈물겨운 고통과 애환이 숨어 있다. 섬진강댐이 건설을 시작한지 13년이 지나서야 완공을 봄으로서 그 기간에 수몰주민은 수몰 지역인 고향을 떠나 정착하지 못하고 집을 떠난 유랑자(流浪者)가 되어 불안정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불안정한 생활을 감당하지 못한 상당수의 수몰주민은 이주할 때 받았던 이주증서를 헐값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고 고향땅을 떠났다. 더구나 이주민에 대해서는 1938년~1939년 일제시기에 용지매입이 완료됐다는 이유로 낮은 보상금이 지급되어 타향에 정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고향은 이미 물에 잠겼다. 고향을 잃고 헤매는 한 많은 고난의 삶이였으리라 옥정호 중간 비죽이 튀어나온 입석리 마을에 “양요정(兩樂亭)” 정자(亭子)가 있다. 전라북도문화재 137호다. 임진왜란이 때 난을 피해 낙향한 충현공 양요당(兩樂堂) 최응숙(崔應淑)이 세운 누각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양요(兩樂)는 논어(論語) 옹야((雍也) 21편에 있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知者樂水(지자요수) 仁者樂山(인자요산)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긴다”에서 두 “樂樂(요요)”를 따와 “두가지 즐거움”이란 뜻으로 “양요정(兩樂亭)”이라 한 것이다. ※락(樂)-즐거울 락. 풍류(風流) 요. 두가지로 읽는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산을 둘러 흐르며 앞쪽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있어 주위의 풍치가 뛰어나다. 많은 풍류객들이 찾아와 시(詩)를 지었다. 망향탑과 양요정
그 양요정(兩樂亭) 옆에는 300여 호 수몰 이주민들이 고향이 그리워 세운 망향탑(望鄕塔)이 서 있다. 지금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 주는 옥정호(玉井湖) 아름다움의 밑바닦에는 수몰이주민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 수몰 후 43년이 지난 뒤에야 지어진 망향의 탑에는 수몰 세대주 명단이 적혀 있다. 옥정호의 아침 저녁 안개는 수몰로 사라진 마을과 떠나간 이주민들의 애환의 삶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호수와 정자를 감싸며 피어오른다. 그 속을 걷는 우리에게 안개는 말한다. -괜찮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니 살아야 하지 않겠나 !-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옥정호(玉井湖)를 찾아갈 것을 친구에게 말했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