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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5일 목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 히브 5,7-9
복 음 : 요한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또는 루카 2,33-35
그때에 예수님의
33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상처를 준 사람일까요? 아니면 상처받은 사람일까요?
이런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형제님이 계십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해서 술자리를 자주 가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아내를 집에서 때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 좋은 사람인데, 집에서는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술 마셔서 실수한 것뿐인데,
이 정도도 이해해주지 못하냐면서 화를 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 큰 문제가 있을까요?
그리고 상담을 청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원래 문제 있는 사람이 상담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내가 상담받으러 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아내가 찾아와서 눈물을 흘립니다.
상담받으러 온 분이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본인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존감이 심각하게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랑받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모든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배척하고,
무엇이든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고통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걷는 죽음의 길을 함께 걷는 어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을까요?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지키셨던 성모님의 삶 안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힘든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에게는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으로 몰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이긴 것처럼 착각에 빠져있었고,
아무런 잘못이 없었던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큰 죄를 지은 듯이 숨어 있습니다.
그만큼 자존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숨어 있는 삶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높여주시기 위해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삼아 주신 것이 아닐까요?
구원을 위해 계속 숨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성모님을 받아들이고, 성모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용기 있게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비움의 훈련, 비움의 여정
-“축제 인생을 삽시다! 고해인생이 아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동정 성모 마리아님, 복되시나이다.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
오늘 복음 환호송이 우리 믿는 이들의 소망을 대변합니다.
바로 영원한 우리 삶의 자리,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성모님과 함께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는 것,
바로 이것이 참으로 믿는 우리들의 궁극의 소망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사는 것은 먹는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먹고자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라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을 사는 데는 인색하지만 먹는 데는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식사는 물론 가끔 간식할 때마다 먹는 것이 죄요, 사는 것이 죄란 생각이 듭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무공해의 동식물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먹고 나면 어김없이 남아 쌓이는 쓰레기들입니다.
수도원 쓰레기장에 갈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이요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옛날 보다 급격히 증가한 택배도 거의 먹는 것과 관계되며
나가는 쓰레기들도 여기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1회용으로 버려지는 비닐, 병, 종이,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러다 보면 나라가, 세계 전체가 쓰레기장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어렸을 때 50-60년대는 가난했지만, 버려지는 쓰레기들은 거의 없었고,
있어도 다 자연으로 돌아가 썩어 없어질 거름이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기는 맑고 자연은 아름답고 어디를 파도 샘솟는 우물이요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는 고기도 많았습니다.
전기가 없어도 가능한 삶이고 문명이었으며,
중학교 시절까지 밤에는 호롱불과 남포 석유 등불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자연 속 어디나 일터나 놀이터였고, 쉼터나 배움터이자 샘터였으며
자연과 일치된 ‘이야기들(stories)’과 ‘사실들(facts)’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이었습니다.
대학 가서 비로소 손목시계를 가졌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파도 건강하고 행복했습니다.
마을은 살아 있었고 모두가 가난했지만, 함께 나눴기 때문입니다.
안경 쓴 아이들이나 정신 질환자들은 한둘뿐이었습니다.
채소들은 거의 모두가 텃밭에서 나왔습니다.
결코 감상적 퇴행의 회고나 미화나 찬양이 아니라
당시의 거울에 오늘을 비춰 보기 위함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어제 9월14일 ‘성 주님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과
오늘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이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참으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 모자분으로부터
자발적 금욕과 절제, 순종과 겸손, 극기와 인내의 순교적 삶을 배웁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오면서 ‘주교대의원회의 범아마존 특별 회의 후속 교황 권고’인
‘사랑하는 아마존’을 읽었습니다.
한결같이 주옥같은 명문에 현대의 소비주의 광란狂亂의
눈먼 자본주의 시대에 주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깊은 가르침이 가득했습니다.
순교자 성월, 비상한 삶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생태적 회개에 걸 맞는 순교적 실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랑의 아마존’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에 이어 책의 끝부분 결론에 나오는
마리아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의 얼굴,
곧 하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드님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인 한 여성 마리아의 얼굴을 통하여
당신의 권능과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여성은 성모 마리아의 온유한 힘을 드러내면서
여성 고유의 방식으로 교회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에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교회의 가장 내밀한 구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왜 여성이 없으면 교회가 무너지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중심부의 자리잡고 있는 마리아 성모님이요,
또 하나의 성모님들인 여성 신자들입니다.
끝으로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이라 의미가 새롭습니다.
“생명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존재하는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고
부활하시어 주님 빛으로 어머니를 변모시켜 주시어
모든 피조물의 모후가 되게 해 주셨나이다.
성심이 창에 찔리신 어머니,
핍박받는 자녀들과 자연의 상처 속에서
어머니도 아파하시니
아드님과 함께 다스리소서.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작품을 두고
그 누구도 주인으로 자처하지 못하게 하소서.
생명의 어머니,
이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에
어머니를 믿고 의지하는 저희를 저버리지 마소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론 모든 교황님들의 성모신심은 참 각별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번 38차 해외 사목활동 차 여행에 오를 때도
출국과 입국할 시는 꼭 성모 성당에 가서 인사드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교회의 사람들은
성모님과 그 아드님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성모님과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늘 함께하셨습니다.
성가 248장 그대로입니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하셨네.
십자가 지신 주님 뒤따라가시며 지극한 고통 중에 기도드리셨네.”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수난 현장에서 주님과 고통을 함께 하는 성모님에게서
비움(케노시스)의 절정을 봅니다.
피에타의 성모님, 죽은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이 연상됩니다.
또 여기서 제1독서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성모님도 이런 예수님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비움은 예수님의 비움처럼
그대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탄원이었음을 봅니다.
정말 이런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은 비움을 통해 하느님 연민의 사랑으로 채워
‘텅 빈 충만’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 고통에 압도되어
완전히 파괴되어 무너져 폐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복음의 예수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가 있습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애제자를 요한이라 말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구상해 낸 상징적 인물인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여기 나오는 애제자는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삶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언제나 함께하는 우리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믿는 남자인 아들만이 아니라 믿는 여자인 딸들도
모두 성모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우리 모두요, 이제부터 우리 하나하나는
각자의 집에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영원한 어머니가 되시는 마리아 성모님을
평생, 영원히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고통이, 슬픔이, 절망이, 어둠이,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참으로 믿는 우리들은 주님을 닮아, 주님을 따라 파스카 신비의 삶을 삽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늘 함께하시기에 고통 중에도 평화를, 슬픔 중에도 기쁨과 감사를,
절망 중에도 희망을, 어둠 중에도 빛을, 죽음 중에도 생명을 삽니다.
결코 어둠과 죽음의 세력에 압도되어 고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감사, 기쁨과 희망의 축제 인생을 삽니다.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부정적 체험을 그대로 짐으로 받아 안아
상처를 입고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즉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순종의 계기로 삼아 부단한 자아 초월로
주님을 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감사, 기쁨과 희망의 축제인생을 살아갑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물론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영원히 언제나 살아 계신 ‘구원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생명과 사랑, 평화와 감사, 기쁨과 평화가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성모님과 함께 축제 인생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성모님을 닮아
일상의 모든 부정적 체험을 비움의 계기로 승화하여
비움의 훈련에,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로 강론을 마칩니다.
순교자 성월이라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렇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코로나 신속항원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동안은 한 줄인 음성이 나왔습니다.
3년째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줄인 양성이 나왔습니다. 드디어 ‘확진자’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큰 증상이 없이 지나갔습니다.
목이 약간 불편했지만 말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확진자가 될 기회가 많았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신부님들, 수녀님들이 한 번씩은 확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증상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며칠씩 심하게 몸살을 앓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지나갔습니다.
증상의 유무와는 달리 ‘확진자’가 되면 불편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격리입니다.
다른 이웃들에게 코로나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격리가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자책감입니다.
건강관리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다른 확진자들이 가졌을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지만 별 증상 없이 잘 지나간 것을 감사드립니다.
개신교회에는 없고 성당에는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제대 뒤편에 있는 십자가상입니다.
요즘은 ‘승천, 부활’의 십자가상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당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자는 다짐인 것입니다.
성당 양옆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따라서 지고 가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시고, 승천하셨으며, 천주의 모친이 되셨지만,
많은 고통을 간직하고 사셨습니다.
교회는 성모님의 고통을 ‘성모칠고’라고 이야기합니다.
‘괴로움을 당하리라는 시몬의 예언을 들었을 때, 이집트로 피난 갈 때,
예수를 잃고 찾아 헤맬 때, 십자가를 진 예수를 만났을 때, 못 박혀 죽은 예수 앞에 섰을 때,
십자가에서 예수의 주검을 내렸을 때와 묻을 때 겪은 고통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당신의 어머니십니다.’
사랑을 받던 제자는 이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다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갈등, 고통과 절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힘들지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희망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저를 위해 상처 입고 수난 하신 주님 고통 제게 나눠 주소서.
사는 동안 십자 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 울게 하소서.”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축일이 오늘로 확정되기 전에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카 2,35)
시메온 예언의 예리한 칼의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리므로 시작되었다(루카 2,41-52).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이다.
마리아의 침묵 외침은 당신 아들의 버림에 대한 피조물의 메아리이다.
이 순간에 그녀의 참 정체성이 실현되었다.
당신 아들의 동반자가 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고,
이제 마리아의 처신이 무엇인지 깊은 곳까지 계시가 되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예수 앞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으신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는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한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삶을 함께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시메온이 이렇게 말하였네.
보라,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리니,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리리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입당송
동정으로 잉태하셨을 때부터 이미 많은 고통을 견뎌내신 성모님은
예수님을 봉헌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영혼이 칼에 찔린다는 예언을 듣습니다.
실제로 성모님의 삶은 은총으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고통도 가득했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범이신 성모님의 삶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기적과 고통, 기쁨과 슬픔이 신비롭게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던 아드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성모님의 고통은 신앙인에게 큰 도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아드님 곁에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소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본기도
여러분은 이 기도문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고 노래하지만,
많은 신앙인들이 같은 상황에서 ‘나를 버리셨다’고 부르짖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셨다’고 노래하지만,
많은 신앙인들이 ‘당신은 무관심’하다고 절망을 외칩니다.
성모님께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지만,
많은 신앙인들이 ‘시련과 고통’ 속에서 죄만 더해만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6-27
성모님께서는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으셨습니다.
원죄의 타락에서 해방된 ‘새 하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던 분이
서서히 질식하여 죽어가는 잔혹한 현장을 지켜보는 고통을 겪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을 겪으시며
영혼이 칼에 찔리듯이 예수님의 고통과 하나가 되십니다.
성모님은 고통 가운데,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듯 예수님을 안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눈 성모님의 고통과 함께한다면
누구보다 먼저 죄에 대한 승리와 부활의 기쁨을 품에 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 된 성모님의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얻게 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성모님을 사랑해야 하고,
성모님의 고통까지도 사랑하며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셔야 합니다.
성모 칠고 – 하느님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 순간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는 교회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심으로써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며,
나아가 부활과 생명, 구원과 해방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 안에는 말 못 할 고통이 묻혀있다.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한 여인의 고통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일생을 통하여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받으신 도통을 기억하면서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한다.
아울러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그 고통이 그분만의 고통이 아니라 아직도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세상 구원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고통임을 각오하려 한다.
그러므로 오늘 기념일이 어제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직접 연결 되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성모께서 겪으신 고통에 대한 구원사적 反省은
이미 중세기 이전부터 있어 왔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
즉 聖母七苦를 일부 지방 교회에서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1600년대에는 수도회로 확산되었고,
1814년 비오 7세 교황이 전체 교회에 보급 시켰다.
성모님께서는 평생을 두고 아들로 말미암아 마음 쓰시고 속을 태우셨겠지만,
그 가운데 일곱 가지 고통을 알아보자.
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 :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카 2,34-35)
② 성 가정의 이집트 피난 :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하고 일러 주었다.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마태 2,13-15)
③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사흘 동안 찾아 헤맴 :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하고 말하였다.”(루카 2,41-52)
④ 골고타로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母子 서로 상봉하심 :
“예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손에 넘어가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 밖을 나가 골고타라는 곳으로 향하셨다.
골고타라는 말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요한 19,16-17)
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 :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마태 27,35)
⑥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품에 안으심 :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아리 마태아 사람)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요한 19,38)
⑦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심 :
“그 시체를 내려다가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 만든 무덤에 모셨다.”(루카 23,53)
성모칠고 중 ④ ~ ⑦에 관한 성서상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던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 27,55-56; 마르 15,40-41; 루카 23,49)
성모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성모님에 대한 유일한 성상의 언급은
요한 복음사가의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어머니 마리아와 愛弟子 요한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있다.
복음서를 종합하여 보면 성모 마리아는 과월절을 시작하던 새벽시간에
예수께서 붙잡혔다는 소식을
도망쳐 나온 제자들로부터(마태 26,56) 전해 듣고 달려와,
줄곧 아들 예수 근처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아는 아들의 십자가 길을 동행하였고, 가능한 십자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마리아는 어떻게 이 모든 시간들을 이겨내었을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을 에는 비통 중에 하염없이 우시네.”(부속가)
인간의 어떤 말도 표현도 성모님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이 어디 七苦 뿐이겠는가?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고통이 늘 그분과 함께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26절)
오늘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당신이 어머니 마리아와 하나임을 획인하신다.
그리고 애제자에게도 말씀하신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이렇게 성모님은 마음을 에는 고통 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탄생 되는 교회의 어머니요,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우뚝 서신다.
그분은 일생을 고통으로, 그러나 포기나 좌절함이 없이 아들과 하느님의 뜻을 좇아
끝까지 인내와 겸손으로 구원사업에 협력하셨다.
그러기에 성모께서 받으신 고통과 아픔은
하느님 크신 은총과 자비의 물리적 순간이었을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