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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자 먹자, 마시자, 죽자!”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웃고 있었다. 서로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로 며칠 뒤 목숨 건 전투를 앞둔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더욱더 즐기는 것일 수 있다.
‘오늘부터 3일은 동양의 어느 나라의 중요한 명절 추석이라고 해요. 사실 그동안 우리는 쉼 없이 너무 달려오기만 했어요. 물론 그 덕분에 적 군단장 5명을 쓰러뜨리고, 뭉칠 수 없을 것 같았던 국가들이 힘을 합쳤죠. 그리고 이제는 적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구세주가 이끄는 본대와의 결전만을 앞두고 있죠. 그렇기에 지금은 잠시 쉬어갈 때라 생각해요. 앞으로 3일간 휴식을 취하고 장비를 준비하세요.’
창문 밖으로 사람들을 바라본, 공주는 오전에 자신의 한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홀로 방에 들어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13년 전, 침공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세계를 향한 인베이더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여러 왕국은 제대로 방어해 내지 못하고 차례차례 함락되어 갔다. 캔터베리 왕국도 그중 하나였다. 여왕은 사로잡혔고 꼬마 공주는 행방불명되며 왕국의 희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생각되었다. 그러나 꼬마 공주와 그녀의 가디언, 기사가 여러 왕국에서 나타나며 인베이더에 대한 저항의 등불이 되어갔다. 티탄 왕국, 마술 왕국. 사막 마을, 등등 인베이더의 영향을 끼친 곳에서 그들과 챔피언들의 활약은 엄청났고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승리는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라 제국에서 기사가 행방불명되고 저항 세력들은 곳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시 사람들이 절망에 빠졌을 무렵 꼬마 공주는 챔피언들을 이끌며 저항을 시작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며 꼬마 공주는 이제 전장을 이끄는 공주이자 리더로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가며 그녀에게 인류의 미래가 되었다는 의미인 미래 공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베이더 역시 더 이상 미래 공주를 두고 볼 순 없었고 최강, 최악의 군단장인 13군단장 베스를 시켜 미래 공주가 이끄는 레지스탕스를 소탕하기로 했다. 베스에 의해 모든 레지스탕스가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10년 전 사라진 기사가 돌아왔다. 기사와 미래 공주는 베스를 쓰러뜨렸다. 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기사와 미래 공주가 이끄는 레지스탕스는 세계 곳곳에서 인베이더를 무너뜨려 왔다. 그리고 이제 레지스탕스와 인베이더의 총력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거야.’
똑똑똑!
눈을 감고 있던 공주는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천천히 일어났다.
“누구….”
“저예요 공주님.”
공주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기사의 목소리에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숨어야 해, 근데 어디로 숨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야 하나?’
“공주님, 이곳에 있다는 거 다 알고 왔어요. 도망가지 말아요. 들어갈게요.”
끼익
천천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환하게 웃는 기사와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공주가 서로를 마주했다. 기사가 팔짱을 끼고 불평 가득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참, 요즘 얼굴 보기 힘들었어요. 좀 이야기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바쁘거나, 급한 용무로 안 보이시고 말이에요.”
공주는 시선을 돌린 채 대답했다.
“미안, 좀 바빴어.”
“일부러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니고요?”
기사가 웃으며 말했지만, 공주는 웃지 못 한 체 어색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기사 역시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한 채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결국 기사가 어색하게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때 제가 말한 것에 대해 대답 해줄래요?”
기사가 말했던 것은, 마리안과 이야기한 후에 공주를 만나 고백했던 일이다. 주위에서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둘이 답답했는지 마리안이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때 기사가 용기를 내 말했지만, 공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날의 시간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 공주는 기사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철저히 피해 왔다. 다 같이 있을 때도 공적인 대화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든 좋아요. 공주님이 절 싫다고 해도 괜찮아요. 다만 대답이 듣고 싶을 뿐이에요.”
기사는 공주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제가 싫은가요?”
“...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기사가 말해줬을 때. 정말 좋았어. 고마웠어. 그런데….”
공주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찮아요?”
“무서워.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면 죽은 친구들이 떠올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떠올라, 앞으로 죽어갈 사람들이 떠올라. 그들이 매일 원망에 찬 얼굴로 나를 보고 있어. 나한테 말하고 있어. 너무 아프다고. 왜 지켜주지 못 했냐고? 너만 행복할 수 없다고.”
떨던 공주는 이제 자기 머리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미안해, 미안해. 싸워 나갈게. 지킬게. 행복해지지 않을게.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마, 그렇게 바라보지 마, 제발 용서해 줘.”
기사는 그런 공주를 보며 마리안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그냥 농담 같은 것이었어. 네가 사라지고 혼자 많이 울고 했지. 그러다 어느 날 웃으며 우리 앞에 나타났어. 자기가 네 몫까지 싸울 거라고. 그렇게 싸우다 보면 반드시 네가 올 거라고. 그런데 일 년, 이년 시간이 지나도 너는 나타나지 않았지.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며 공주는 더 이상 우리 뒤에 숨지 않았어. 직접 무기를 들고 우리를 이끌었지.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르고 공주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어. 대신 점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 마빈과 샤피라 일행이 죽었을 때 더 이상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어. 다만 우리는 알고 있었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공주가 잘 못한 것도 아닌데. 공주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자신을 갉아 먹었어. 공주가 전장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공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을 지켜주는 승리의 여신이었겠지만 공주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발버둥 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어.’
마리안은 기사를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공주를 멈추지 못했어. 공주만이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기에, 공주만이 우리의 희망인 것을 알기에. 공주가 썩어 문드러져 갈 때도 그걸 외면한 채 자신을 합리화했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미안해, 참 못난 어른이지.’
기사는 대답하지 못한 채 살짝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런데 네가 왔을 때 공주가 다시 미소 짓더라. 그리고 너와 함께할 때, 표정을 다시 짓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지금 말하는 거야.’
기사도 알고 있었다. 그만이 공주에게 미소를 짓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공주가 있기에 그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기사는 두려웠다. 혹시라도 공주에게 거절당한다면, 어떤 이유로도 공주에게 부정당한다면, 온전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항상 마지막 선을 넘지 못했었다.
‘알겠어요. 이제 그 선을 넘어 볼게요.’
기사는 괴로워하는 공주를 힘껏 안았다.
“괜찮아요. 아무도 공주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공주님을 저주하지 않아요.”
기사는 공주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공주는 더욱 거세게 몸부림쳤다.
“아니야, 보이지 않아? 날 원망하는 눈빛이… 마번이… 샤피라가… 메이가… ”
기사는 조금 더 힘껏 껴안으며 천천히 말했다.
“공주님,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요. 공주님은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에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거예요. 한번 그들을 보세요.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표정?”
“네, 마빈, 샤피라, 메이. 그리고 그들이 아니더라도 공주님과 함께했던 그들은 결코 공주님을 저주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들을 바라봐 주세요.”
기사의 말을 들은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그녀가 맨 처음 바라본 것은 마빈이었다.
“마… 빈…”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했었던 마빈, 죽음 앞에서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쳤던 그는 예전처럼 쑥쓰럼이 많아 크지는 않았지만 공주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마빈이 보이는군요. 그가 공주님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웃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요.”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맨 처음 사람이 보인 이후에 두려워서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한 명씩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들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어. 이제 그만 하면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 괴로워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상처 주지 말라고 말하고 있어.”
“공주님. 아무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만약 공주님이 없었으면 십 년 뒤 이곳에 나타난 제가 본 것은 인베이더만 남은 세계 그 자체였을 거예요. 공주님이 있었기에, 모두가 희망을 놓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자신을 괴롭히세요.”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 나 행복해져도 될까?”
“네, 행복해져도 돼요.”
“나와 함께 싸웠던 수많은 사람은 이제 행복해질 수도 없는데, 좋아하던 모든 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나만 행복해져도 될까?”
“네, 공주님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기사 나 부탁이 있어.”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말해보세요.”
“나 아직 무서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무서워. 그러니까 기사가 대답해 줘. 기사가 좋아, 기사는?”
눈물로 뒤덮인 채 웃는 공주를 보며 기사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네, 저도 공주님이 좋아요. 제가 평생을 지켜드릴게요.”
공주는 환하게 웃으며 기사를 꼭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체중이 뒤로 실려 기사는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발에 힘을 주고 버티며 공주를 안았다.
“기사, 이젠 사라지지 마.”
예전처럼 자신을 향해 말하는 공주를 보며 기사가 대답했다.
“네, 항상 공주님 곁에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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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추석편에 맞추어 올리려고 한 특별편이 이제 나오게 되네요. 이번주 엄청 추운데 다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첫댓글 메리크리스마스 !
매리 크리스마스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