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월간지에는 최근 국내 대중음악 가요계에 가수를 찾아보기 힘들어진 대신 연예인만 널렸다는 내용의 '당신도 가수인가?'라는 글이 실렸다.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진 '맨발의 여왕' 이은미가 쓴 이 글은 제목에서도 유추되듯 시종일관 직설적이며 격한 어조로 쓰여졌다.
가수로서의 공통분모는 당연히 가창력이어야만 한다는 이은미의 주장은 가요계를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과 대중에 대한 서슴없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몇 가수를 등장시켰고 비록 이니셜을 사용했지만 이니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인기 절정의 한 가수가 음주운전으로 연행되자 경찰서의 서버가 다운되는 판국이니 이제는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되지만, 이은미의 홈페이지(user.chollian.net/~sunnlee) 게시판은 금세 북새통을 이루며 양분됐다. 이은미의 글에 대한 항의와 이은미의 글에 대한 지지의견으로 대략 나눠지는 의견들을 보면 양측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주체적 소비자로서의 대중의 자각과 그 실천을 절감하게 된다.
일단 그 일갈의 통렬함에도 불구하고 이은미의 태도가 아쉽다. 이론가가 아닌 음악가인 이은미의 뇌리에까지 대중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그것을 너무도 태연하게 표현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대중음악판은 폐수가 하수구에서 역류하는 것을 보면서도 개선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는 알 수 없는 집단최면에 빠진 것처럼 어디론가 끌려들어가고 있는 존재로서의 대중을, 그리고 그들의 취향을 미친개나 럭비공쯤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름지기 대중가수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존재다. 노래로서 대중의 아픔을 치료해 주거나 기쁨을 주면서 이 땅의 대중과 함께 서있던 존재가 바로 대중가수다. 조용필이 그랬고 이미자가 그랬다. 김광석도, 들국화도 모두 그런 가수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인기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천박함이 없었고, 대중 위에 군림한 채 고결한 음악세계를 지향한다는 식의 허위도 없었다. 대중의 삶과 그것의 가치를 읽어내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기호나 취향을 읽어내려는 얄팍한 수싸움에 집중하지 않았다. 때문에 대중을 대상화하여 격하시키지 않았고, 대중의 인식수준을 탓하기보다는 그들 삶으로부터 갖가지 감성을 발육시켜 줄 수 있는 감동적인 노래로서 대중과의 밀착을 모색했다.
이은미가 손수 미친개나 럭비공으로 묘사했을 만큼 유아기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대중에게 자신의 노래로 감동을 선사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대중가수이지만 이미 대중과 유리된 채 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은미에게 있어 그런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 의무감이나 책임감, 또는 성취감 같은 것이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은미가 대중의 교화를 위해 몸바치는 실천가나 혹은 과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계몽주의자라도 된 것이 아니라면 있을 리 없다.
게시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서태지의 팬들에게도 아쉬움은 마찬가지다.
직설적으로 언급하자면 글 속에 서태지가 거론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처럼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반향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 리 없다. 그들은 서태지를 평가하는 자연인 이은미의 견해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크게 문제삼아야 할 부분은 역시 대중에 대한 격하발언이었다.
서태지를 ‘교주’로 모시는 맹신도들이 아니라 실력 있는 뮤지션인 서태지의 음악을 사랑하는 진정한 팬이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 대중음악판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대중음악판의 발전을 위한 단체 결성과 실천방안에 노심초사하고 대중이 대중음악판을 책임지는 생산자, 배급자, 소비자의 삼각구도에 당당한 한 축으로 자리잡게 노력하고 있다면, 서태지에 대한 이은미 개인의 평가에 핏대를 세우기보다는 대중을 말초적이고 단선적인 자극에 크게 반응하는 단세포적인 어떤 것으로 규정하면서 격하시킨 이은미의 표현에 발끈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반응이 아닐까. 이것이 소위 말하는 팬클럽의 한계인가.
대중음악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당당한 한 축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로부터 미친개나 럭비공으로 격하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로부터는 언제나 마음껏 조종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대중, 아편인지 아닌지는 전혀 관심 없고 그저 흐느적대기만 하는 대중, 바야흐로 그 무지몽매한 대중이 장바구니를 든 현명한 대중으로 변모할 시기가 왔다. 대중음악판이 아닌 대중음악시장의 한복판에서 당당한 주인으로 자리매김될 시기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