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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6일 금요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1코린 15,12-20
복 음 : 루카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의 로마 황제였습니다.
옥타비우스로도 잘 알려진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의 뜻인 ‘존엄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장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76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 아우구스테움을 짓습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유골을 영원히 안장하기 위해 지은 영광스러운 능입니다.
자기를 비롯하여 후손들까지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의 능이 폐허가 되고 도굴까지 당할 것을 또 그 능이 포도밭이 되고,
르네상스 정원, 투우장, 화약 창고, 콘서트홀로
계속 바뀌게 될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위 잘나간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영광이 과연 영원할까요?
끊임없는 격동과 변화의 물결 속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그 자리에 계실 뿐입니다.
과거 유다인들은 율법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부녀자들과 함께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부녀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교 활동에서 식생활과 기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일들을 시중 들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필수 요원으로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고 복음을 전해줍니다.
당시의 유다 공동체는 부녀자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율법을 익히는데 부적당한 사람으로 여겨
공동체 모임에 참석할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는
부녀자들이 그 창설자 중의 중요한 요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 난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는 율법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심이며 사랑 중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율법 중심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또 예수님과 함께했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녀자들과 다른 제자들을 통해
율법 중심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중심,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직접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 중심의 삶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나요?
영원하지 않은 것에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두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섬김의 여정
-순교 영성, 파스카 영성, 섬김의 영성-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새벽 잠깨는 순간 감사의 감정이 가득했습니다. 새삼 육신의 기능에 감격했습니다.
제가 잠든 순간에도 몸은 잠들지 않고 계속 살아서 부지런히 기능을 다 했던 것이며,
그러기에 제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그러하십니다.
묵묵히 침묵 중에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부지런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이런 감격을 노래한 최민순 신부님이 번역한 시편 121장 전문을 인용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 한테서
네 발이 휘둘림을 아니 버려두시리라.
너를 지켜주시는 님 졸지 않으시리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네 오른쪽의 그늘이시어라
낮이면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고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주께서 너를 지켜 모든 액을 막으시고,
당신이 네 영혼을 지켜주시리라.
나거나 들거나 너를 지켜주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러하시리라.”
얼마나 좋은 시편이요, 얼마나 좋은 하느님인지요!
그렇게 많이 노래했어도 이렇게 한밤중 감동해보기는 처음입니다.
시편 그대로의 하느님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은 몸의 기능입니다.
그러니 어찌 부지런히 섬기며 착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메모해뒀던 깨달음도 생각났습니다.
“아, 죄를 짓지 말자!
육신이 병으로 무너지는 것보다 영혼의 죄로 인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약을 먹으면서 은총으로 사는 이 몸, 죄를 짓지 말자.”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인생 가을철에 들어선 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하느님
마련해 주신 계절 중의 계절이 가을입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든 분들, 정말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신망애信望愛 삶의 영적 열매는 잘 익어갑니까?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잘 익어가는 가을의 열매 향기는
더 그윽하고 깊어 마음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요즘 가을철 배 수확 때가 다가오니 배밭 산책 중 익어가는
은은한 배 열매 향기가 마음을 참 편안하고 넉넉하게 합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까치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이렇게 까마귀, 까치와 나눠도 수도원 살림에 지장이 없을지,
하느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살펴보려 합니다.
1/10의 십일조는 피조물 형제에게 봉헌한다 생각했는데
농장 책임 수사님의 말은 30%를 넘어설 것이라 하니 1/10 십일조가 아니라,
3/10 십삼조 이상이 되도 수도원 살림에 지장이 없을지
결과를 ‘예의 주시(銳意 注視)’하게 됩니다.
배밭 곳곳에 까마귀와 까치들의 쪼아 먹다 떨어진 흰봉투의 배들이 즐비합니다.
멀쩡하게 잘 익었다 싶어 잘 들여다보면 손상입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배가 참 크고 둥글게 맛 좋게 익어 수확하게 되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이런 성공적 인생보다는 파(破) 배 같은 실패 인생이 많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솔로몬처럼 부패한 성인은 없다고 합니다.
회개(메타노니아)-친교(코이노니아)-섬김(디아코니아)
인생 여정 중 우리 가을 인생 영성의 궁극의 마지막 열매는 섬김입니다.
잘 익어가는 섬김의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부패 인생을 막아주는
끊임없는 회개가 동시에 이뤄져야 함을 봅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섬김의 여정이요
이래야 섬김의 열매 풍성한 가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 종과 섬김의 영성이 있을 뿐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종과 섬김의 영성에 투신하는 것이니
결국 파스카 영성과 종과 섬김의 영성은 둘이자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섬김의 여정에 섬김의 직무, 섬김의 훈련, 섬김의 권위, 섬김의 영성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참 영성의 최종 잣대가 사랑의 섬김, 겸손한 섬김, 한결같은 섬김입니다.
베네디도 성인도 당신 제자들인 수도승들에게 주신 규칙서에도
섬김이란 말마디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수도승의 삶은 온통 섬김의 삶으로 규정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깁니다.
그대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복음인 섬김의 삶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이웃을 섬김은 바로 주님을 섬김으로 직결됩니다.
그리하여 당신 수도승의 공동체를 섬김의 학교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교를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극단의 광적狂的 상태를 경계하는 중용의 대가,
분별의 지혜를 지닌 현자가 바로 성 베네딕도입니다.
섬김을 핵심 덕목으로 제시합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섬김의 학교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정말 섬김의 학교,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 섬김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기도와 사랑에 영원한 초보자이듯 섬김에서도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섬김의 공동체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고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고 있었다.”
참으로 디아코니아 섬김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필히 전제되는바 메타노니아 회개의 공동체요,
코이노니아 친교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온통 바오로 사도의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열렬한 믿음의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 영성’은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파스카 영성’과 ‘섬김의 영성’에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순교자들입니다.
평생 파스카의 삶에 섬김의 영성을 살다가 순교한 성인들입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3세기 동시대, 친구 관계의 두 순교 성인을 기념합니다.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입니다.
두 분의 영적 우정도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치프리아노 주교가 고르넬리오에게 보낸
아름답고 품위 있는 깊은 우정의 편지를 일부 나눕니다.
“나 치프리아노는 고르넬리오 형제께 문안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귀하께서 신앙을 용맹히 또 영광스럽게 증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귀하께서 보여준 영예로운 신앙 고백의 소식을 큰 기쁨으로 접수하고
우리 자신마저도 그 공로와 그 영예의 동참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또 한마음 한뜻을 이룬다면,
동료 사제가 칭송받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칭송받는 듯
즐거워하지 않을 사제가 있겠습니까?
또 형제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하지 않을 형제가 있겠습니까?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은 당신의 섭리로써 시련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우리에게 훈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우애에 대한 배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시련에 대해 필요한 권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상호 사랑으로 서로 도와주며 인내하도록
모든 백성과 함께 단식과 밤샘 기도 안에 항구 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우리를 용감히 서 있게 하고 인내하도록 도와주는 천상의 무기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두 영적 친구 순교자 사이의
아름답고 깊은 우정의 사랑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주님의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을
충실히 한결같이 섬겼던 두 순교성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순교적 삶에,
파스카의 삶에, 섬김의 삶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은 아직까지는 입국하기 위해서는 ‘코로나테스트’를 했었습니다.
검사 결과 음성이면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지만,
양성이 나오면 음성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가벼운 감기 증상이 있었던 동창 신부님은
코로나테스트를 받은 후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양성이 나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은 음성이 나와서
다른 동창 신부님들과 함께 비행기에 탑승하였습니다.
미국은 ‘코로나테스트’를 입국의 조건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With Corona’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입국의 조건으로, 비행기 탑승의 조건으로
‘코로나테스트’를 하지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혹시 코로나 증상이 있더라도 입국해서 치료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입국해서 격리하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다고 집에 오는 가족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빨리 와서 치료받으라고 할 것입니다.
정부의 결정으로 혹시 코로나 증상이 있더라도
입국해서 치료를 받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세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여자들도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 형제님이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질문을 받으면서 ‘부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고백했던 것처럼 신앙 안에서, 신앙의 신비로
우리 모두는 죽지만 언젠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또 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메마른 땅에 봄이 오면 파란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땅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활은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걱정과 근심에서 용기와 담대함으로 일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일어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일어서는 것이 부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헤로데도, 빌라도도 모두 그대로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도, 바리사이도 그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두려워서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제는 박해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두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의 사건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일어서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나의 삶이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헌신 봉사하며 따랐던 여자들이 나온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라는 여인이다.
이 여자들과 수산나는 복음에 그 이름이 전해질만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자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자가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복음 전파를 도운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주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아무 사심 없이 주님과 사도들을 도왔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도와왔고 지금도 여성들이
그러한 열성을 보이는 것은 또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여인들과 같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봉사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시작한 일이니 잘 해봐!’라고 하면서 협조도 하지 않고
골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 자세는 없었는지,
그래서 그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여자들의 수가 더 많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여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살아있을 수도 죽어갈 수도 있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듯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가 깊이 일치한 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역사의 인물 속에서나 지금에도 그러한 역할, 그러한 도움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봉사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 자기 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영예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봉사를 통해 주님께 항상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부르심을 받고도
가까운 사람마저 미워하는 사람으로
용서하라는 부르심을 받고도
분노에 사로잡혀 비난과 불평을 일삼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고도
스스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이 믿고 희망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는
원수가 우리를 사랑을 알아보고 변화되어 보답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부활에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용서하는 이유는
용서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정신적인 이득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하신 일이 죄인들의 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현세에 희망을 두눈 순간 그는 실제로 가장 불쌍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면서도 대접받지 못해 섭섭함이 쌓이고,
인내하면서 보상이 없어서 실망과 분노가 쌓이고,
용서하면서도 돌아오는 것이 없어서 억울함과 미움이 쌓이고,
기도 하면서도 응답과 열매가 없어 우울과 원망이 커지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1코린 15,17-1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이 죄악의 세력에 쩔쩔매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지혜에 기대어 부활에 대한 믿음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죄에 죄를 더하는 패배와 우울 속에서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마치 부활이 없는 것처럼, 성령께서 사라진 것처럼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1-3)
사도들보다 믿음이 강하고 사랑으로 타오르던 세 명의 여인과 많은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세 명의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까지 함께 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여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시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여성들에게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셨습니다.
당시의 여론과 관습을 거스르면서까지 여성의 존엄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여성들은 왜곡된 신념으로
자신들의 여성성과 모성애에 맞서고 있습니다.
남성성을 원하고 아기를 제거해 버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사랑하고 책임지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고 서로를 음욕과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과 모성애가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매 신자들께 감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선교활동의 日常에 관하여 짧지만,
종합적인 내용을 들려주면서 활동에 함께 다니던 동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는 오늘 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열두 제자와 십수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 치유된 여인이며,
요안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차의 아내였다.
이 여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까지 동행한 사람들이다.(루카 23,49)
참으로 진정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예수님의 동반자들이 어디 이들뿐이었겠는가?
예수께서는 선교활동의 시작부터 많은 동행자를 얻으셨다.
예수께서 직접 제자로 불러 곁에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친지와 고향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心琴을 울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치유와 구마기적에 마음을 뺏겨
그저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감사의 마음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감찰반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를 선별하셨던 내용이나(루카 6,13),
일흔 두 제자들을 뽑아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신 내용(루카 10,1)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동반자는 적어도 100명은 훨씬 넘어 2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 마태 8,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집도 절도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와 그 복음에 관하여 遍歷설교를 하셨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편력설교자에게 고정된 주거지란 있을 수 없다.
발 닿는 그곳이 그날 묵을 곳인 것이며, 거저 그때 주어지는 음식이 그날의 양식이다.
이는 예수님의 동반자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다.
특별히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카복음이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되인들, 여인들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주제로 보도하는 고유의 특수사료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카 복음은 특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언자 안나, 나인의 과부, 마르타와 마리아, 어떤 부인의 성모 칭송, 곱사등이 부인,
잃은 은전과 부인, 재판관과 과부의 청,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의 마지막 십자가 길을 동행하는 부인들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의 비교적 낮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감안할 때,
예수님의 관심이 여인들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인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디를 가든 신학교만 빼고 항상 자매님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활동하며, 하느님 사업의 중심에 서 있다.
이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제공하는 2003년 교세통계자료,
전체 신자 수 4,481,490명 중에서
자매들이 2,614,773명, 형제들이 1,866,717명인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도 같은 통계일 것이 뻔하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여인들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 형제 신자분들이 마냥 놀고만 계신 것은 아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12 사도 만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일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공동체의 이런저런 필요를 채워주던 협조자, 후원자들도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 완전 매료되어,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뒤 따라다니던 추종자들까지 합하면 엄청난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녔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엄청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알량한 권력이지만 쥐고 있었던
헤로데를 비롯한 권세가들의 우려도 컸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설교하는 회당은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엄청난 수효의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시기 질투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특별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복음 8장 2~3절)
참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개방적인 예수님을 태도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여성들이 당하던 차별대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평범한 여성들이 아니라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치유받은 여성들,
그 어디에서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여성들까지도
당신의 공동체에 들어오게 허용하셨습니다.
피정집을 운영하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큽니다.
피정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프로그램도 중요합니다.
시의적절한 명강의도 필요합니다. 쾌적한 환경과 숙소도 요구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더군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 깔 진 식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식사 준비는 남자인 제가 아무리 백방으로 노력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머니의 정성스런 손맛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하던 복음 선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뒷전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여성들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산마저 팔아가며 공동체를 뒷바라지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큰 매력과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세상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활짝 열려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와서 기쁘게 헌신하고 봉사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매력을 갖춘 우리 공동체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든든한 기초요 기반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는 여성들의 존재에 깊이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