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라인하르트는 꼭 나하고 싸우고 싶은 모양이다.
그걸 피한다면 그는 영원히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조금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통찰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얀은 자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얀으로서도 라인하르트와의 단판 승부를 회피할 수가 없는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율리안이 부어준 홍차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맛이 뛰어났다.
패밀리언 전투 이후, 라인하르트는 꼭 한 차례 얀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신하가 되어 따른다면 최고의 관직으로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얀은 즉석에서 단호히 거절했다.
고 뷰코크 장군처럼, 얀도 전제주의자의 휘하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유혹이 아무리 달콤하고 따뜻한 것이라 하더라도. 즉, 라인하르트는 라인하르트
나름대로 개성이 존재하듯이, 얀도 역시 개성이 뚜렷한 존재였다.
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율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를테면 그것이 숙명이라는 것인가요?"
얀 웬리는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율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사용한 숙명이라는 단어는 깊게 사유(思惟)한 흔적이 전혀 없이
일시적으로 튀어나온 말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숙하고
유치해도 그것이 율리안의 말이라면 얀의 반응은 언제나 따뜻하고 진지했다.
"운명이라면 혹 모르겠다만 숙명이란 말은 듣기에 좀 거북하구나.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인간을 모욕하는 말이니까. 첫째는 상황을 분석하는 사고를
정지시키고, 둘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치없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숙명이란 말은 좋지 않아.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결국 선택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지,
숙명에 끌려가는 법은 없단다. 알겠니, 율리안?"
이러한 말은 얀 스스로에게 일러주는 말이기도 했다. 얀은 자기의 선택을
'숙명'이라는 그럴싸한 어휘로 정당화시키는 일이 몹시 언짢았던 것이다.
그러나 얀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더욱 좋은 방법', '좀더 올바른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얀의 사고방식의 원칙이었다.
사관학교 생도였던 당시에도, 대군을 지휘하는 정상의 위치에서도 그 원칙은 한결같았다.
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와 자신을 비난하는 자가 모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자신을 대신하여 판단해 줄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얀 웬리는, 자신의 재능과 기량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뇌해 왔던 것이다.
'숙명'이라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끝낼 수만 있다면 오죽 좋겠느냐 싶었지만,
얀은 그렇게 어리숙하지도 쉽게 타협하려 하는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첫댓글 양과 라인하르트의 만남은 운명(運命)일까요? 숙명(宿命)일까요? 여러분들에게 운명과 숙명이란 단어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시나요?
처음 은하영웅전설을 읽었을 때 깊숙히 와닿았던 대사이로군요...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라서 피할수 있지만...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라서 피할수 없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숙명.......숙명여대....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ㅈㅅㅈㅅ 농담입니다..또 돌던지지마삼...ㅜ.ㅡ
숙명.. 내가 이과를 강요당하던 그때..ㄲㄲㄲ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