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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향유
2014년 04월 14일 월요새벽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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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듯이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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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2:19-25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아멘
1. 우리로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해서 선한 일에 열심 내게 해서 그날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주시려는 최종목적으로 주님이 죽으신 것이니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 받음이 나를 위하여, 나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내 죄값을 치러 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고난을 받아주심으로 그렇게 담당하셨습니다.
. 그렇게 해서 내 죄에 대해서 죽고 주님이 내 죄 대신 못박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곧 내 죽음이 되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것이니 곧 내가 죽은 것이니 이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고 다시 말해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 같지만 우리가 죄를 안지었으면 주님이 죽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 그래서 내 죄가 주님을 죽인 것이니 내가 주님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내 죄가 아니면 주님이 죽어주실 필요가 없으니 내가 죽인 것이니 또 그런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 살다보면 죄와 허물을 짓지만 주님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중한 죄를 습관적으로 계속 지으면 안되겠다 이는 은혜의 성령을 모독하고 십자가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시한 것이고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 죄의 삯은 사망인데 육신대로 산 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어주셨는데 다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 내 죄를 다 못받아 버렸으니 지난 죄, 지금 죄, 앞으로의 죄를 다 못박았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고 죄 지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면 왜 회개하라고 하시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흘려지지 않게 하라 하시고, 토해버린다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함이라! 의에 대하여 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나라를 위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렇게 살도록 해주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선한 일에 열심 내게 해서 그렇게 해서 그날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주시려고 최종목적이 그래서 죽으신 것이니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2.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이 선입니다.
. 참고 선을 행하라는 것은 불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세상 일에 바쁜 이땅에서 깨어서 열심내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기가 힘듭니다.
. 또 마귀가 신앙생활 잘하도록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고 역사하니 참아야 합니다.
. 어떤 박해지역에서는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영주관자들로 마귀가 잡아서 거기서는 신앙생활이 정말 힘듭니다.
. 정말 애매히 고난을 받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거기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죄가 됩니다.
. 하나님께는 예수님을 안믿는 것이 죄인데 거기서는 예수님 믿는 것이 죄라고 하는데 불법이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죄를 지어서 고난받는 것이 아니고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자유지역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있고, 마귀의 역사받아서, 은혜 못받아서, 넘어지고 쓰러져서 혼자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 그분들은 애매히 고난을 받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 참으면 아름답다 하셨습니다.
. 그리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수치, 능욕, 조롱을 당하셨어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같이 잠잠하셨는데 우리 대신 받아주신 벌이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성도들이 고난받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빛의 자녀답게 행동하여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입니다.
. 주님도 너희를 위해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는데 주님이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악을 악으로 하지 않고 당하는 것인데 죄가 있어 당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미워해서 내가 그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주의 말씀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고, 슬픔을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날에 칭찬과 존귀 영광을 주시려고 이는 하나님 볼 때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이 선입니다.
. 어제 영상을 보셨는데 북한에서의 여러 실질적인 정황과 요즘 그런 장면을 찍어오기도 하고 탈북자의 증언에 의해서 되어진 일에 제가 볼 때는 70% 정도도 반영한 것 같은데 실상은 그보다 더합니다.
. 초대교회 때 250년 동안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면 로마 황제에 따라 강하게 핍박받기도 하고, 덜 받기도 하는데 거기에서 고문당하고 순교당한 사람의 일기를 읽어보면 사람이 그렇게 잔인하고 무자비할까 북한보다 더 했습니다.
. 어떤 의미에서는 대환난의 그림자일 수 있고 예표일 수 있는데 창세 이후로 없는 대환난은 어떻겠습니까!
. 그때는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고, 교회가 시작되고 하는데도 그 정도였다면 한때 두 때 반 때 성도의 권세가 깨지고, 어둠의 권세가 발동할 때이고, 캄캄함이 온 땅을 가리울 때인데 이를 통해 추론해 보는 것입니다.
. 기도 중에 환난이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는데 어마어마하겠죠!
. 마귀가 하나님께는 직접 대항을 못하니 하나님 자녀들에게 역사하는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과 충성과 인내를 보시고 또한 순교자의 숫자를 채우시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순교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고, 조금 고난 받은 사람도 있고... 사도들도 거의 다 순교를 했습니다.
. 돌에 맞아 죽고, 창에 찔려죽고, 거꾸로 매달아 죽고, 목베임 당해 죽고, 사도요한도 박해 때 끓는 가마속에 넣었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어 안죽고 살아났는데 초대교회 박해역사를 보면 사도들만 아니라 그런 역사들이 있습니다.
. 사도요한도 그런 형태인데 안죽으니 밧모섬에 유배를 보냈습니다. 사도요한만 순교를 면하게 했는데 그래서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받아쓰게 되었습니다.
3.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와 사도들의 고통, 초대교회 믿음의 선진들의 피거름 위에 자라난 교회이기에 지금 평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 기독교의 역사!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와 사도들의 고통, 초대교회 믿음의 선진들의 피거름 위에 자라난 교회입니다.
. 지금 교회가 능력이 있어서 평안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피맺힌 눈물의 기도로 된 것이고,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너무너무 간절하게 간구하고 계십니다.
. 그래서 그런 은혜로 우리가 지금 그래도 평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날이니 그것이 없어집니다.
. 대환난! 그래서 이 모든 환난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견딜 수 없으니...
. 그 전에는 주님이 아직 성령의 때고, 구원의 때고, 은혜의 때이기에 이렇게 하지만 마지막 때는 교회의 구원이 끝나는 때고, 대대적인 성령의 역사가 중지되는 때고, 말 그대로 환난 때입니다.
. 환난 전의 박해 때도 그 정도라면 환난 때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우리가 이길 수 없으니 주님이 위로 부르신 것입니다. 공중 피난처로, 최고 안전한 피난처로, 위로 올라가버렸는데 마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 그러나 그 전에도 우리가 고난을 받는데 믿음대로 살면서, 경건하게 살면서, 세상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힘든데 이것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하느냐에 따라서 영광과 존귀의 상을 주십니다.
4. 기독교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 기독교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는데 이것으로 내가 자유와 평화와 행복과 건강함과 풍요로움과 영광을 얻게 되었는데 그러면 편하게 살아야 되느냐?
. 물론 마음은 평안해야 됩니다. 그런데 너희는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 편할 수도 있고,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편해버리면 상이 없습니다. 힘쓰고, 애쓰고, 수고하고, 의를 위해 박해받고 해야 상이 큽니다.
. 이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도 넓은 길로 갈 수 있고, 좁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세상소망을 두고 살 수 있고, 위에 소망두고 살 수 있고, 깨어 있을 수 있고, 안깨어 살 수 있는데 선택입니다.
. 살기 위하여, 더 영광스럽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밝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메시지를 통해서...
. 우리가 고난을 받게 될 때 금이 풀무불에 단련되어 정금이 나오듯이 고난을 받아야 신앙이 정결해지고, 아름다워지고, 강해지고, 겸손해지고, 세상소망이나 미련이 없어지고 세상이 안맞습니다.
5.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죄에 물들지 않고 세상문화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극히 절제를 해야 합니다.
. 박해받은 성도들은 세상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예전에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 때문에 그것 피할려면, 신사 앞에서 절하지 않을려면 산으로 들어가든지 어떤 사람은 감옥을 택한 사람이 있고 이것이 고난입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 절을 안하려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죄에 물들지 않고 세상문화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세상문화를 너무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 이는 우리 영혼을 황폐하게 하고, 더럽히고, 쇠약하게 하니 극히 절제를 해야 합니다.
.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케 하느니라! 정결케 하고 개인적인 연단을 통해서든지 그러는데 시대적인 연단은 없는데 개인적인 훈련을 하든지 해서 그런 것을 참고 고난을 받으며 이렇게 선을 행할 때 핍박을 받는 자와 똑같이 참아서 주의 뜻대로 사는 악에 굴복하지 않는 우리 한국의 믿음의 초기 선진들처럼 그 일제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그럴려면 고문도 당하고 순교도 당하는데 이것이 참는 것입니다.
. 기도하면서 좀 힘든 것을 참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너무 편해 그것도 힘들다고 무릎이 아프니 하는데 이것을 참는다는 것이 아니고 박해를 말합니다.
. 모욕당함, 박해당함, 재산을 뺏기게 되고, 매를 맞고, 뺨맞고 이것을 참는다는 것입니다.
. 박해를 참고, 심한 모독을 참고, 집에서 예수님을 믿으려면 집 나가라고 하고 밥도 안주고 쫓아내도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 그것을 견디는 것이고 그것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그렇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 기도는 당연히 하고 교회 봉사도 당연히 해야 하는데 이를 참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수준으로 보는데 순교자의 수준으로 봐야 하고, 예수님 수준으로 봐야 합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많은 의사들이십자가를 연구하는데 숨 한번 쉬려면 얼마나 고통이 온다고 합니다. 숨 쉬려면 몸을 들어야 되고, 발에 힘주어야 하고, 손에 찢기고, 숨 한번 쉴 때마다 그 고통을 6시간 참으셨습니다.
. 그 앞에 채찍도 어마어마하고 가시관도 참고 조롱도 참으셨는데 주님의 수준은 그 수준입니다.
6.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복락으로 하시고 참으면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 박해받은 사람들이 잠시만 참으면 천국 간다고 참는 수준과 우리의 수준에서는 피곤함을 참고 지루함을 참고 놀고 싶은 것을 참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들을 참는 아주 약한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 다른 분들은 더 어마어마한 것도 참는데 자기 눈앞에서 자기가 고문당한 것은 어느 정도 참는데 자기 자식을 자기 앞에서 짓이기는데 그것을 참는 것입니다.
. 그런 일이 실지로 있는데 자기를 고문하면 안되니 자식을 데려다 자식을 때립니다. 그것까지 참아야 합니다.
. 그날에 공산당이 아주 비열하고 간악합니다. 봐라! 이것이 너의 엄마다 너를 버렸다 자녀가 신앙이 얼마나 깊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엄마가 찾아와도 그런 엄마는 필요 없다고 안만나 줍니다. 내가 얻어맞고 있는데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참고 있을까! 참을성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참을성이 없는데 예배시간 긴 것을 못참고 기도응답 한 두 번 해서 안오면 그만두는데 모든 것이 편리하고 풍족하고 빠르고 신속해야지 조금만 지체하면 못참습니다.
. 추위와 더위가 정확히 맞아야 하고 누가 말하는 것 못참고 성질내고 속에서 올라오고 불편을 못참고 조금 가난한 것도 못참고 그러니 주님께 원망 불평합니다.
. 슬픔을 참으면 고통을 참으면 하나님 보실 때 아름답습니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복락으로 하시고 참으면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 너희는 모든 시험 중에서 항상 나와 함께 하였은즉! 처음에는 제자들도 못참았지만 성령을 받고는 잘 참았는데 감옥에 가는 것도 기쁘게 여기고 살기등등한 위협도 잘 참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 주여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 그리고 박해 순교 때 참으니 순교하는데 사도바울은 매 맞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번하고 사십에 감한 매는 너무 아팠던가 본데 기억나는데 다섯 번 맞았다고 했습니다.
.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는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사십을 넘지 말라고 한 율법을 지키려고 하나 덜 때리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 넘을까봐 자기를 위해서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 사도바울은 이를 다 참았는데 참았기에 사명감당이 가능했고 달려갈 길을 다 마쳤고 믿음을 지켰고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했습니다.
7.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엇을 참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십자가도 참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고 그 자취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엇을 참고 있습니까!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려는 천국이 있으니 약간 절제합니까!
.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마음껏 놀기도 좋고 죄짓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조금 참는 것이고 조금 덜 하는 것입니까
. 그러니까 성경을 잘 봐야 합니다. 정말 믿으면 정말 천국을 믿고 약속을 믿는다면 어떤 굴욕도 박해도 조롱도 능히 참아야 합니다.
. 주님이 다 보고 계시니 주님이 참으라고 했으니 참고 선을 행하면 그날에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 평소에 화도 잘못 참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 저분은 믿음이 좋다 믿음이 강하다 어려움을 당해봐야 아는데 애매히 고난을 받아봐야 압니다.
. 남에게 무시를 당해봐야 알고 심한 조롱을 받아보고 뺨을 맞아봐야 알고 옷을 뺏겨봐야 내가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 우리 주님은 십자가도 참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고 계시는데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함이라!
.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지금 박해지역의 성도들이 이 자취를 따르느라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고난을 참는 것입니다.
. 그날에 많은 사람이 점점 왜 쫓겨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 점점 그렇구나 그러니 쫓겨나겠구나! 이해가 됩니다.
.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또 이것이 신앙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인데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지 않으면 나와 합당치 않다고 하십니다.
. 무거운데요, 힘겨운데요,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데요, 글쎄 그러면 그날에 십자가 무게만큼 상을 주시고 고난받은 만큼 상을 줄텐데 편해버리면 상이 없습니다.
8.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영광이고 고난만큼 영광이 있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으니 고난에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 어떤 분의 영적간증에 힘들다고 고난을 없애달라고 해서 자기는 편히 갔는데 남들은 힘든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무게만큼 상을 주는데 자기는 너무 쉽고 편히 와서 상을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 고난에 비할 수 없는 영광이고 고난만큼 영광이 있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으니 고난에 없으면 영광이 없습니다.
. 현대 편한 물질만능의 세상에서 다른 사람은 편안함, 쉬운 것 대우받고 칭찬받는 것을 택하는데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 불편하고 고생하는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그 나라를, 영광을, 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 좁은 길을 주와 함께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함이라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 그래서 때로는 너무너무 힘들면 안아주시고 업어 주십니다. 주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고 너무 힘들면 안아주시는데 신명기에는 주 품에 내가 너를 안으사!
.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우리자신을 돌아보고 이전의 믿음이 선진들이 박해받고 지금도 박해받는 형제들을 생각해보면서 주님의 고난의 의미가 우리 신앙에 깊이 젖어 들어서 왠만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입에서 불평 원망 힘들다는 것이 안나올 정도로 늘 감사하며 찬송함이 넘쳐야 합니다.
. 사도바울은 옥중에서 찬양했는데 기뻐함이 이것은 당연합니다.
. 이 땅에서 고난 받은 것은 당연한데 어차피 세상은 고통스런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하는 삶은 극소수이고 대부분 힘든 삶 절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 그런데 그 삶을 산 후에 소망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 우리의 힘든 것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 보실 때 아름다운데 조금이라도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충성하고 수고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 덜 수고할 수 있는데 더 수고하면 힘이 더는데 주님이 더 기뻐하셔서 더 큰 상을 주십니다.
. 참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멘.
지극히 아름다우신 우리 주님!
오늘도 주님과 함께 이 세상죄악 탐욕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지금도 박해받고 있는 우리 형제들과 함께 그날에 서기 위하여 우리도 뭔가 참는 절제하는 충성하는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안일에 빠진 영혼들을 위하여서 정말 간절히 중보하는 늘 깨어 있는 이런 믿음으로 하루하루 영광중에 뵐 때까지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4년 4월 14일 월요새벽 말씀중에서~
첫댓글 음 난 그냥 성령세례받고 휴거되고싶습니다...그뿐입니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아멘! 주님을 따라 살아야 부활도 있고 휴거도 있습니다.
주님 없이는 휴거도 부활도 영생도 면류관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