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예배의 경계>
교회 예배가 지난 수십 년 사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찬송가 대신 CCM이 들어왔고, 오르간 대신 밴드가 들어섰다. 조명이 어두워지면 회중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들어 올린다. 많은 이들이 이런 변화를 가리켜 '살아있는 예배'라고 말한다. 그 표현이 틀렸다는 게 아니지만, 그 말에는 전제 하나가 조용히 숨어 있는 것 같다. 살아있다는 것을 감정으로 측정한다는 전제 말이다.
결코 감정이 예배의 '적'은 아니다. 시편에는 기쁨과 탄식, 분노와 간청이 날것 그대로 쏟아진다. 초대교회의 예배도 침묵과 정적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문제는 감정이 예배의 '목적'이 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예배를 잘 드렸다'는 말을 '예배에서 감동받았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 등호가 문제다.
4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위험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던 인물이다. 그는 『고백록』에서 음악이 가져다주는 감동이 때로는 말씀 자체보다 더 강하게 영혼을 사로잡는다고 고백한다. "노래가 노래되는 내용보다 나를 더 움직일 때, 나는 그것을 죄스럽게 고백한다"(Confessiones X.33.49). 그가 음악을 싫어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음악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감동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동 자체에 머무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었던 것이다.
개혁자인 루터도 다르지 않다. 그는 예배에서 음악의 역할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날 때 여기저기서 오르간을 박살내고 예배 음악을 구습이라며 거절하던 때에 '음악이야 말로 하나님이 주신 신학 다음가는 최상의 선물'이라고 했을까(Luther's Works, vol. 53, 321–324). 그러나 그렇게 음악을 사랑하던 개혁자 역시도 예배의 모든 요소는 반드시 회중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일에 복무해야 한다는 원칙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감동은 예배의 목표가 아니라 바른 예배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결과였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의 성공 여부를 감동의 강도로 측정한다. 찬양 인도자는 회중의 감정 곡선을 조율하며 곡 순서와 콘티를 짜고, 설교는 마지막 몇 분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채워야 한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예배 팀은 리허설을 통해 감동의 흐름 자체를 미리 설계한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인간의 감정이란 게 본래 변덕스럽고 소비적이기 때문이다. 매번 더 강한 자극 없이는 같은 감동을 느끼기 어려워지는 것, 이것은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감각의 둔화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흥분하고 영화관에서 눈물 흘리는 것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은 경험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올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좋은 예배'를 '좋은 감정 경험'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예배학자 로버트 웨버는 이 현상을 '예배의 소비화'(consumerism in worship)라고 불렀다. 예배자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게 아니라 관객으로 전락한다는 경고다(Worship Is a Verb, 12–14). 그의 말이 1990년대에 나왔다는 것이 씁쓸하다. 30년도 훌쩍 지났지만, 미국이나 거기를 따라가는 한국이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앙이 얕아지는 일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감동이 없으면 집중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찬양 스타일이 취향에 안 맞으면 예배가 공허하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그 변화는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시작된다.
이쯤에서 반론이 나올만 하다. '감동 없는 예배가 더 낫다는 말이냐?' '형식만 남은 차갑고 건조한 예배 의식이 신앙을 깊게 만드느냐'고 말이다. 그것도 아니다. 형식주의는 감정주의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또 다른 함정이다. 어쩌면 교회 역사는 늘 이 두 극단을 오가며 균형을 찾아온 기록이다. 종교개혁은 형식에 갇힌 예배를 흔들었고, 18세기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은 메마른 정통주의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어느 쪽도 홀로 완전하지 않았다.
핵심은 방향이다. 예배 안에서 감정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감동과 감정이 예배의 동력이 아니라 예배의 열매로 자리할 때 그 감동은 신앙을 깊게 한다. 반면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를 설계하기 시작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의 응답이 아니라 개인적 종교 경험의 플랫폼으로 변질하고 만다.
우리가 초대교회라고 부르는 시대,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기록한 예배의 모습을 보자. 『제1변증서』 67장에 묘사된 순서는 단출하다. '성경 읽기-권고- 공동 기도-빵과 포도주-봉헌'. 이게 전부다(Apologia Prima, 67). 콘티도 없고 화려한 것도 없고, 교인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조차 없다. 그런데 그 예배에 함께 자리했던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 돌아간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목숨을 걸었다. 물론 그 예배가 감동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감동은 '말씀과 성찬, 기도와 나눔'이라는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왔지, 정교하게 기획된 예배 프로그램이 좋은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양한 예배 형식은 얼마든지 존중받아야 한다. 찬양 예배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전통 예전만 옳다는 말도 아니다. 어떤 형식을 택하든 우리는 이 질문 하나 앞에 정직해야 한다. 나는 지금 '예배'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 아니면 예배라는 경험을 소비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가장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자리는 아무 감동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예배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킬 때가 아닐까. 혹시 당신은 마지막으로 그런 예배를 드려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는가.
#아무도안물어보는예배이야기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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