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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 : 아모 8,4-7
제2독서 : 1티모 2,1-8
복 음 : 루카 16,1-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6월에 코를 수술받았습니다.
코안에 물혹이 생기면서 냄새를 맡지 못한지가 자그마치 6년이나 되었었지요.
그러다가 코를 수술하고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제 방에서 그렇게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얼른 향초를 계속 켜 놓고, 매일 아침 방 청소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좋지 않은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며칠 뒤에 아는 지인들이 사제관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곰팡내가 나요.”
사제관 건물에 이상이 생겨서 비가 내리면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빗물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서 곰팡이가 피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냄새를 맡지 못했기에 곰팡내를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원인을 알게 되니 해결책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가 새지 않도록 지붕에 비닐을 덮었고,
제습기를 계속 틀어서 습기를 제거했습니다.
얼마 뒤에 이상한 냄새는 사라졌습니다.
방법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모르면 방법은 찾을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상황의 극복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은 집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부자의 집사가 의무를 게을리하고 부정한 일 처리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인은 해고를 통보하지요.
그러자 관리인은 빚진 사람의 빚을 줄여주는 간교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릅니다.
이상한 것은 이 사실을 알고도 책망은커녕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약삭빠르게 일 처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집사는 앞날의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당한 수단까지 동원하는 약삭빠른 꾀를 썼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돈을 다루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능수능란합니다.
그 수법과 재주를 천상 보화를 얻는 데 쓴다면 얼마나 거룩한 일이겠습니까?
그 재주를 발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남을 돕는 일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동원해서 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얻어내야 할 목표라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요점입니다.
방법이 없다면서 주님의 일 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저는 지난 9월4일 주일,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聖下에게 시복된 제263대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1세를 기억하시는지요?
너무 감동적이라 오늘 새벽 기사를 자세히 읽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재위기간은 놀랍게도 1978년 8월26일-1978년 9월 28일, 겨우 33일이었지만 감동적인 일화는 차고 넘칩니다.
‘미소의 교황’이라 불리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님의 사목표어는 ‘겸손(Humilitas)’이고,
고 김수환 추기경은 “바오로 6세가 사람들을 위해 혼자 운 교황이었다면,
요한 바오로 1세는 사람들을 많이 울린 교황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자기 고백적 내용의 편지(가톨릭평화신문, 9.18일 15면)가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드디어 간절히 원하던 사제품을 1935년 7월7일, 제 나이 23세에 받았습니다.
”앗숨!(Ad sum, 예, 여기 있습니다)“ 힘차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온전히 저를 하느님께 바치며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항상 제 사제직의 중심 모토로 삼았습니다.
아 나중에 주교, 추기경, 교황이 되었을 때까지
저는 사목표어를 겸손이란 한 단어만 선택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선종하시고 콘클라베에서
제가 263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요한 23세 교황님처럼 현명한 마음도,
바오로 6세 교황님처럼 준비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분들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와 함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두 분 교황님의 이름을 제 교황명으로 선택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1세로요. 아, 교황직 33일 동안, 저는 수요 일반 알현을 매주 4번을 했습니다.
겸손,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을 주제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하느님의 미소’ 혹은 ‘교회의 미소’, ‘9월의 교황’이라고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혼란속에서도 교회는 의연하게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미소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미소를 잃지 마세요.
2022년 9월4일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주례로 저의 시복이 있었습니다.
부족했지만, 저는 평생 제 가슴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 힘으로 여러분을 위해, 우리 성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1978년 9월27일 수요 일반 알현 때,
저의 마지막 지상의 삶에서 여러분을 만나며 했던 기도가 생각나나요?
저는 지금도 이 기도를 바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가 담긴 이 기도는
제가 어렸을 적부터 가르쳐 주신 제 어머니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느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선이시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제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오 주님, 제가 더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가상적이지만 정말 감동으로 와닿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자기고백적 편지입니다.
얼마나 철저히 완벽히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40대 초반의 자매로부터 받은 편지도 충격으로 마음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받은 글과 답신을 소개합니다.
“신부님, 저 안나예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척박할 것 같아 절망이 찾아왔어요.
어쩌죠.
신부님 더 외롭고,
더 가난하고,
더 아프고,
피려다가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처럼---
모든 게 끝나나보다
지금도 시시한데
지금보다 좋을 날이 없겠구나 싶어서 슬퍼요.”
아마 꿈과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이런 심정의 젊은이들 참 많을 것입니다.
마침 위의 내용을 비슷한 나이의 자매에게 보여 줬드니 바로 자기 심정도 그러하다 했습니다.
제가 즉시 드린 답신입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두고
최선을 다해 힘차게 사시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내일이 아닌 오늘부터 웃으며
활짝 핀 꽃처럼 행복한, 아름다운 삶을 사세요!
행복도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화이팅!
오늘 사랑하는 안나 자매님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이 절실,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어제 오늘 공동전례중 내용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말마디들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수 없단다.”-주일 성모 후렴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아침 초대송 후렴
“가난한 이들,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모두들 찬양하라.”-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벌써 30년전 1992년 왜관 수도원에서
피정지도후 종신서원 미사때 한 강론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절실한 물음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요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쁨이십니다. 하느님의 우리의 감사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이십니다.
하느님 대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넣어도 무방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 자리에
그 누구를, 그 무엇을 놓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택하여 살려고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말은
생명을, 사랑을, 희망을, 평화를, 기쁨을, 감사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탓없이 타고난 것들, 바꿀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여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지옥체험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선택하여 지옥과도 같은 세상 우상의 노예살이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은 이점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 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할 때 행복에로의 천국문이,
재물을 선택할 때 불행으로의 지옥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재물로 인해 부자지간, 부부지간, 형제지간이 풍비박산 원수가 되는 경우,
주변에서 많이 목격하지 않습니까?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느님 믿음임을,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절감합니다.
둘째, 기도의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기도와 삶의 일치가 바로 답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의 기도가 날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바로 여기 수도자들의 삶을 보면 단박에 드러납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하느님으로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기도와
하느님은 수도자는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눈먼 맹목의 무지의 삶이고,
삶이 없는 기도는 공허할 뿐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주님을 닮은 기도한 얼굴인가, 주님을 닮지 않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일 것이며
그대로 그 얼굴로 심판과 구원이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온통 기도에 집중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당부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서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매일, 평생 저녁성무일도시 독서후 응송 다음 아름다운 계응송이 생각납니다.
“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제사같게 하옵소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가
참으로 향기롭고 아름다운 분향같은 삶으로, 저녁제사같은 삶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셋째, 지혜로운 삶입니다.
기도의 열매가 사랑과 회개요 지혜와 겸손입니다.
기도할 때 탐욕에서 해방되니 무욕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이 됩니다.
그의 사기수법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했을 때
민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에도 신속 민첩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 지혜도 빛납니다.
삶의 위기에 처한 그의 미래에 대한 대책에 주인도 내심 묵인하며 흡족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할 수는 없고, 약은 집사는 스스로 알아서 눈치 빠르게 살길을 타개하여
주인인 자신의 부담을 덜어줬으니 내심 고마운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불의한 집사가 미련하여 해고당한 후의 미래 대책이 없었다면
주인의 마음도 몹시 불편했을 것입니다.
묵상하건데 이 약은 집사는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깊이 알고 믿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상징하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했으니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니,
빛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지혜롭게 관리할 것을 조언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맏아들에게 하여라.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을 잘 관리하여 가난한 이들이나 불우한 이들과 나눔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충고며, 바로 이것이 참 지혜로운 사랑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부자라면 구원의 천국문은 너끈히 통과할 것입니다.
바로 1독서에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개탄하는 부자들,
탐욕에 눈먼 참 회개가 절박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어 주님은 부자들의 만행을 지적한 후. 이들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예나 이제나 우리의 절박한 물음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분명히 나왔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과 기도, 그리고 지혜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없는 이들,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사랑입니다.
바로 날마다 바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평화방송을 운영하는 동창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동창 신부님입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샘솟는 동창입니다.
팬데믹 기간에 많은 분들이 평화방송 미사를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방송을 시청하면서 번호를 누르면 후원금이 들어오는 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평화방송에도 번호가 있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번호였다고 합니다.
번호를 천사(1004, 5004, 9004)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천사는 1000원, 오천사는 5000원, 9천사는 9000원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방송을 보던 많은 분들이 후원번호를 통해서 후원금을 보냈다고 합니다.
방송국은 그 후원금을 모아서 가난한 이들, 어려운 기관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동창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매주 직원미사를 하는데 참석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근 시간은 9시인데 직원미사가 8시 30분에 있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직원미사 시간을 9시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미사도 엄연한 근무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시간을 바꾸었더니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직원들의 만족도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모두 평소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 고쳤으면 좋은 것들을 적었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님은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들어주었고, 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유흥식 추기경님의 서임식에는 직접 기자를 로마로 파견했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성지순례에도 기자를 파견하겠다고 합니다.
비록 비용은 들겠지만 직접보고 체험한 기사를 위해서,
직원들의 견문을 넓히는데도 필요하기에 결정했다고 합니다.
저는 신학생 때,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하였습니다.
학교 판매부에서 봉사자를 뽑는다고 해서 자원했습니다.
신학교에 학생 자치 신협이 있었고,
신학교에서는 신협의 학생들이 매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매점을 운영하는 거였습니다.
매점의 운영시간은 저녁 먹고 묵주기도 시간까지 대략 30분이었습니다.
판매 물품은 음료수, 담배, 과자, 학용품이었습니다.
방학 때는 과자는 식당과 빨래를 담당하시는 자매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 매점 운영을 했고, 기억나는 물품은 당시에 등장한 ‘불티나’라는 라이터와
직접 제작한 학교 편지지와 노트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학교 매점 운영은 어렵지 않았는데 신문사의 운영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저도 동창신부님처럼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좋은 지면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재물은 감정이 없습니다. 재물은 발이 없습니다. 재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재물은 하늘은 나는 연과 같습니다.
연은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손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왼쪽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의 손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연의 줄이 끊어지면 연이 땅에 떨어지듯이
사람이 재물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재물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잃어버립니다. 가족과도 담을 쌓게 됩니다.
함께 한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난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듭니다.
불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싸우고, 돈이 헤어짐의 이유가 되고,
돈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유가 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장학 재단은 힘들고 어려운 학생에게는 희망의 빛이 됩니다.
선교지에 보내지는 돈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난민에게 지원 되는 돈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줍니다.
가난한 이에게 전해지는 돈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심한 악취가 날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아름다운 향기가 날 겁니다.
지금 우리의 지갑에는 어떤 향내가 날까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 사용법에 대해 몇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재물을 잘 사용하여 진정 하늘나라에 자신을 개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아모스 예언서의 내용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전형적인 착취 형태로서,
이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모스의 외침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 재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라고 하는 촉구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는 어떻게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주인에게 들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나쁜 짓이 틀림없다.
당시의 청지기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자신들의 보수를 챙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를 감해주고, 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를 감해준다.
이렇게 이 약은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줌으로써
개인적인 이익을 거둘 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의 환심도 산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8절).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우선은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8절)는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울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9절).
이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알라는 권고로 맺고 있다.
여기에서 친구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막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카의 사상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 행위 및 선행을 의미한다.
이것이 루카가 볼 때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제물이 되고 만다.
재물은 나눔이 있을 때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던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일으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저주만이 있게 된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루카 6,24).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다.
그 재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재화이다. 참고로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12절)
하시는데,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 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은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13절).
재물은 사람의 모든 관심을 당겨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 하므로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태도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교부들도, 교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재화의 대부분이 인류의 1/3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곤궁에 처해있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달린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티모테오 전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듯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 2)라고 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 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였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는
“저희가 저희에게 빚진 이의 빚을 탕감하오니, 저희의 빛을 탕감하소서.”(루카 11,4)라는
'주님의 기도'를 떠 올려줍니다.
오늘도 우리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면서
형제를 용서하고 주님의 용서를 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 곧 재산과 지혜와 관계 등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가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은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곧 재물로 인하여 하느님과 이웃과 어긋나고 다투고 멀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영리하게 처신한 執事’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재물을 인생의 목적과 같이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오늘 복음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의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집사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불의하게 낭비하였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발견하고, 그 집사에게 해임을 통보합니다.
그러자 집사는 약은 기지를 발휘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빚 문서를 위조하여 채무를 줄여주거나, 없애줍니다.
그는 그가 해직되었을 때, 그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해임되면서도 배임과 횡령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급된 주인은 주님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자기를 속여먹은 집사를 그 주인이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비유 이야기의 주인공 집사를 칭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주님과 주인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 동기야 어디에 있든, 그 집사는 빚진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재물은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여 불의한 짓을 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이웃에게 좋은 일을 행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비유 이야기는 집사의 부정직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부각 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주인의 재산을 훔치던 집사가
이제는 빚진 사람들에게는 베푸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관리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집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은 본시 우리의 것이 아니고, 관리하라고 맡겨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재물입니다.
그 동기야 무엇이든 오늘의 집사는 베풀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서
자기 주위에 기쁨이 발생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 중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이 가르친 청빈에 특별히 주목합니다.
재물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쌓아 놓고 자기의 위상을 높이고, 자기의 안락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루카 복음서는 인간이 삶의 보람을 재물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루카 복음서 12장(16-21)에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많은 수확을 올려서, 새 창고까지 지어 재물을 쌓아 두고,
이제부터 즐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느님은 그날 밤에 그를 데려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재물만 욕심내어 쌓아 놓고, 이제는 즐길 수 있겠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요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이웃들에게는 베푸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재물의 위력은 큽니다. 재물은 사람들을 쉽게 노예로 만듭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국민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정치지도자들도 우리는 과거에 보았습니다.
재물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재물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불목하고, 부부가 갈라서고, 형제자매가 등을 돌립니다.
서로 믿고 가까이 지나던 친구도 쉽게 배신하게 하는 재물입니다.
그런 불행한 일은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면, 하느님도, 이웃도,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난 진지한 종교들과 사상은 모두 재물을 경계하라고 권합니다.
불교는 무소유를 해탈의 절대 요건으로 가르칩니다.
유교 이념을 실천하던 옛날 우리의 선비들도 淸貧樂道를 제일의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재물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들입니다.
예수님도 재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를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자유로운 경지에 사셨는지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얽매인 사람에게는 튼 위험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다.”(마르 10,25)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루카 6,20)고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의 집사는 불의하게도 재물로 친구를 만드는 순발력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자물은 ‘불의한 것’이고, 재물로 얻을 수 있는 것은‘아주 자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하지 않은 다른 재물이 있고, 아주 작지 않은 큰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관련된 일은 ‘남의 것’이라고 말하고 ‘너희의 몫’이 따로 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의 욕심에 허덕이면, 그것은 ‘불의한 재물’이며, ‘아주 작은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인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말씀이니다.
재물로써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에 휘말리면, 사람이 속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도 이웃도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시 살다 가는 생명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 앞에 그것만 가지면, 마치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처신합니다.
그런 처신은 재물을 주님으로 착각한 데서 기인합니다.
재물이 인간의 주인이 되어 호령하면, 인간은 사람들 앞에 기고만장하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다 재물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살 의욕을 잃습니다. 재물의 노예가 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의 재물’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세상의 ‘작은 일’을 버리고
아버지의 ‘큰일’을 실천하는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