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는고로 자기 집의 늙은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다 못해 참지 못하고 아내의 몸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방법, 인본주의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내 사라에게서 낳은 것이 이삭입니다.(창 17장 19절) 하나님께서 이삭이라는 이름까지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노년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아들 이삭은 부모의 온 희망이요 소망이요 행복이요 기쁨이요 사랑 덩어리요 전 재산입니다.
우리가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에서 인본주의 신앙은 신본주의 신앙을 항상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고 환난 핍박을 준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신앙은 영에 속한 신앙을,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을, 비 진리의 신앙은 진리의 신앙을,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은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을, 옛 사람은 새 사람을 항상 핍박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기준은 사역을 찾아가고, 하나님 기준은 하나님의 의사를 자기의 의사로 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쳐라!’ - 가슴이 떨리고 하늘이 캄캄해지고 털썩 주저앉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 자기의 전 재산을 바치란다면 다 바칠 수 있고, 자기의 목숨을 바치란다면 할 수 있겠는데 사랑의 원료 뭉테기인 아들을 아버지의 손으로 잡아 번제물로 드리다니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요 이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신앙의 세계를 듣기는 듣는데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와 비슷한 신앙사상을 현실에서 찾아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건을(진리운동, 복음운동, 주님의 구원운동에 관한 사건들) 붙잡고 오셔서 ‘네가 아끼고 사랑하고 너의 희망으로 소망으로 행복으로 감추어 둔 그것을 내어놓아라’ 하면 주겠습니까? 자기 집부터 장만하고, 자기 노후대책부터 장만하고, 그 다음에 넉넉할 때에 복음에 투자이지! 안 그렇습니까? 다 그렇게 하던데! 그러나 아브라함은 첫 마디에 기쁘게 순종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입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라’ 하는 이 말씀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까? ‘아들을 주겠다’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네 자손들이 하늘과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될 것이다’ 라는 이 말씀과 잘 연결이 되는데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아들을 주겠다’는 언약의 말씀과는 연결이 안 됩니다. 말하자면 뜻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악령, 귀신의 말로 안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겠느냐 그 말입니다.
평소에 인격적 결합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시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친구라 할 정도인 이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지 말라고 하면 아브라함으로서는 귀신의 말로 들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화성이 어찌 그 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2천 년 전에 계시기록 완성으로, 성문계시로서 다 기록하여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와 같은 짓은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귀신의 장난인데도 계시 받았다고 자기 몸도 주고, 자기 재산도 주고, 자기 목숨도 내어주는 귀신에게 홀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있노라고 흉내를 내는 건지, 자기가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말인지?
아브라함은 일찍 순종입니다. 말씀순종에 머뭇거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삼일 길을 모리아 산을 향해 가면서 얼마든지 신앙 믿음이 변질될 기간도 됩니다. 아들과의 대화를 보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 혹시 이 아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눈치를 채고 도망가려고 물은 건지, 참말로 몰라서 물은 건지? 아니면 이삭 자기가 번제물이 되어야 되겠다는 성령의 감화가 있었는지?
어쨌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하여 제물로 바쳐지기까지 시종일관 말없이 순종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아무 반항이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인간적인 감정, 시비가 없었고, 인간 잔머리 굴리는 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교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 어찌 저렇게 하나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이 되도록 키웠을까?
2. 세상 바람을 잘 타는 재간꾼으로 기르지 않았고.
3.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어찌 저렇게 키웠을까?
참말로 부럽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의 호적에다 입양신고를 하고 하나님 앞에 바친 그 아들 이삭은 죽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다시 받은 아들, 그리고 생명계대, 훗날에 메시아까지 받는 그 축복!
아브라함이 자기 물질적 재산이 문제입니까? 세상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내가 가진 재산도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대로 쓰십시오’ 하며 전부는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을 하고 살고, 주시는 대로 천국저축주의로 등기이전해 놓고 삽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가로막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롯은 어떻습니까? 우선적으로 요단 들을 택하고, 아내와 두 딸이 소돔 고모라 성에 쇼핑을 갖다 오더니 금은 보화로 치장할 것이 많습니다. 노래방도 있고, 남자들만 불러내는 전화방도 있고, 사교댄스장도 있고, 남녀혼숙 찜질방도 있고, 롯이 구미가 당기는 비밀 이발소도 있고, 무슨 세미나 무슨 세미나도 많습니다. 두 딸이 어느 새 소돔 고모라의 깡패를 신랑감으로 삼았고, 양을 키우던 종들도 소돔 고모라 바람에 불려 ‘내 세상이다’ 하며 살고, 시대의 유행에 민감하고 시대바람을 잘 타는 자식들. 그 어미, 그 아비에 그 자식!
소돔 고모라 성에 유황불이 떨어지는 날 세상재물이 아까워 뒤를 쳐다본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아비와 두 딸은 동굴에서 살더니 아비에게 술을 먹이고 소돔 고모라의 술집에서 하던 짓을 해서 영원히 씻지 못할 부끄러움과 수치만 남겨 놓은 가련하고 처절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여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대바람 잘 타는 가정, 시대바람 잘 타는 교회, 시대바람 잘 타는 지도자, 롯의 정신 사상을 닮은 자들이 많습니다.
三 야곱은 또 어떤가?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왜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나요?
1.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가야 되겠다는 것이다.
2. 장자가 되어야겠다는 것.
3. 두 사상이 싸우고 있다는 것.
어머니 리브가 복중에서부터 두 형제가 얼마나 싸우는지 어머니의 사정을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성질과 성격, 소원 목적이 완전히 딴판입니다. 에서는 세상이 좋아하는 호탕한데가 많고, 야곱은 오직 하나님의 축복만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고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는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고 서원을 합니다.
거부가 되어 돌아오면 십일조를 비치겠다고 했고, 20년이 되어 두 아비와 자식들과 남녀 종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선두에서 망을 보며 가던 종이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고 하니 야곱의 간이 얼마나 콩알만해졌겠습니까? 야곱이 20년 동안 재물을 모을 때에 에서는 반대적으로 무엇을 키우고 있었을까 하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잡고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야곱이, 하나님이? 아이와 어른이 씨름을 하면 누가 이깁니까? 아버지가 아이에게 져줄 정도로의 사랑입니다. 힘대 힘으로 하면 이기지만 사랑이니까 집니다. 여기서 욕심쟁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꾸어집니다.
‘물질욕심, 세상욕심, 그 축복이 이루어진들 내가 기른 군대 앞에 다 빼앗기는 것이다. 너는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느냐? 그렇다면 다른 것 없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다스릴 것이다. 이스라엘로 바꾸어져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자로, 진리의 다스림을 받을 자로 바꾸어져라!’ 말하자면 진리로서 사람이 만들어지자 그 말입니다.
그 후에 형과 화해를 하고 야곱은 집도 짓고 우리간도 짓고 노후대책 터를 잡아 놓고. 그런데 예배처소는 천막을 쳐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붙이길 ‘엘엘로헤 이스라엘’ 이라고 했는데 이 뜻은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만 붙이면 참 신앙입니까?
사랑스런 딸 디나가 색동옷을 입고 이방인 세겜동네 아가씨들을 사귀러 갔는지, 세겜동네 청년들에게 미팅을 할 마음으로 갔는지, 옷 자랑하러 갔는지? 왜 갔는지는 몰라도 세겜 땅 추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또 통혼을 하자고 나옵니다. 통혼을 하면서 전도하면 되겠지요? 그것보다 더 좋은 전도가 없지요? 통혼을 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될까요, 개판 이스라엘로 될까요? 할례를 시켜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싹 다 죽여 버렸습니다.
야곱이 ‘정신을 차리고 벧엘로 올라가자, 너희 중에 이방 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옷을 다시 입고 벧엘로 올라가자’ 했습니다. 벧엘은 창세기 13장 3, 4절에 조상 아브라함이 예배 드린 곳이요, 야곱이 하나님과 약속한 곳입니다.
기본신앙을 가진 사람도 신앙인이지만 빨리 그 신앙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꼭 가다가 중도에서 딴 짓 하다가 얻어맞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속을 썩이는지! 꼭 자식이 어떻게 되고, 자기가 만신창이가 되고, 집안 꼴이 어떻게 되어야 정신을 차리는 건지? 얻어맞기 전에 속이 바꾸어져야 합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첫댓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4: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