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양록(看羊錄)>
적중봉소(賊中封疏)
록(錄)
임진(壬辰)ㆍ정유(丁酉)에 침략(侵掠)해 왔던 모든 왜장(倭將)의 수효(數爻)
가강(家康)이라는 사람은 관동(關東)의 대수(大帥)이다.
지금(只今) 내부등원(內府藤原)이라 칭(稱)하는데, 원의정(源義定)의 11대(代) 손자(孫子)다.
의정(義定)이 일찍이 관백(關白)의 직(職)을 맡았으므로 그 자손(子孫)들이 관동(關東)에 대대(代代)로 사는데, 그의 식읍(食邑)이 8주(州)에 걸쳐 있다.
그 사람됨이 날쌔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는 까닭에 온 나라 사람이 감(敢)히 그 서슬에 맞서지 못했다.
중략(中略)
가강(家康)의 사읍(私邑)은 관동(關東)에 있고
[관동(關東)에서 왜경(倭京)까지의 거리는 먼 곳은 20일(日) 길이고 가까운 곳도 15일(日)은 걸립니다.]
휘원(輝元)의 사읍(私邑)은 산양(山陽)ㆍ산음(山陰)에 있는데,
[산양(山陽)ㆍ산음(山陰)에서 왜경(倭京)까지의 거리는 먼 곳은 15일(日) 길이 넉넉하고, 가까운 곳도 7~8일(日)은 걸립니다.]
왜인(倭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관동(關東)에서 왜경(倭京)에 이르기까지 가강(家康)은 쌀 가마로 길을 만들 수 있고, 산양(山陽)ㆍ산음(山陰)에서 왜경(倭京)에 이르기까지 휘원(輝元)은 은전(銀錢)으로 다리를 만들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옛날의 이른바, 연(燕) 나라ㆍ조(趙) 나라의 수장(收藏)과 한(韓) 나라ㆍ위(魏) 나라의 경영(經營)으로도 능(能)히 이보다 훨씬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여러 왜(倭)들은 이 두 왜(倭)에 견준다면 만(萬)에 하나도 대적(對敵)하지 못하지만, 차차(次次)로 미루어 보면 대개(大槪)는 상상(想像)할 수 있겠습니다.
[천석(千石) 거리의 토지(土地)를 가진 자(者)는 정병(精兵) 50명(名)을 기르고, 만석(萬石) 거리의 토지(土地)를 가진 자(者)는 정병(精兵) 5백(百) 명(名)을 기릅니다. 갑병(甲兵)의 수효(數爻)는 곡식(穀食) 수효(數爻)에 의거(依據)하면 알 수 있습니다.]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위에 인용(引用)된 내용(內容)은 가강(家康) 곧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とくがわ いえやす)가 공식적(公式的)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명분(名分)을 얻은 후(後)에 에도(江戸; えど)로 옮겨 막부(幕府)를 개설(開設)하기 이전(以前)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원 의정”(源 義定)의 11대(代) 손자(孫子)라고 기록(記錄)되었지만, 이는 왜국(倭國)에서 왜인(倭人)들이 강항(姜沆)에게 말해준 내용(內容)을 그가 그대로 기록(記錄)한 것에 불과(不過)합니다.
다시 말하면, 강항(姜沆)이 그 혈통(血統)의 사실(事實) 관계(關係)를 직접(直接) 확인(確認)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위의 기록(記錄)에 나오는 “원 의정”(源 義定; みなもと の よしさだ; 미나모토 노 요시사다)에 관(關)하여 살펴보면,
그는 다른 이름으로 ‘안전 의정’(安田 義定; やすだ よしさだ; 야스다 요시사다)이라고 하는데, 헤이안(平安; へいあん) 시대(時代) 말기(末期)~카마쿠라(鎌倉; かまくら) 시대(時代) 초기(初期)의 무장(武將)이며, 카이(甲斐; かい) 원씨(源氏; げんじ; 겐지)인 ‘원 의청’(源 義清; みなもと の よしきよ; 미나모토 노 요시키요)의 4남(4男)[또는 3남(3男)]이라 합니다.
다만, 그의 형(兄)인 ‘원 청광’(源 清光; みなもと の きよみつ; 미나모토 노 키요미츠)의 양자(養子)가 되었다는 학설(學說)도 있습니다.
또한 ‘원 의청’(源 義清)은, 카와치(河内; かわち) 원씨(源氏)의 일족(一族)이면서 카이(甲斐; かい) 원씨(源氏)의 원조(元祖)가 되는 ‘원 의광’(源 義光; みなもとの よしみつ; 미나모토 노 요시미츠) 곧 ‘신라삼랑 의광’(新羅三郎 義光; しんらさぶろう よしみつ; 신라사부로- 요시미츠)의 3남(3男)[또는 차남(次男)]이라고 합니다.
카이(甲斐) 원씨(源氏)는 세이와(清和; せいわ) 원씨(源氏)에서 유래(由來)한 카와치(河内) 원씨(源氏) 계통(系統)의 일문(一門)입니다.
[출처=위키백과(일본어), http://ja.wikipedia.org/wiki/%E5%AE%89%E7%94%B0%E7%BE%A9%E5%AE%9A]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가문(家門)의 족보(族譜)에 대(對)해서는, 일본(日本)의 연구자(硏究者)들 사이에서도 가모(假冒)의 가능성(可能性)이 제기(提起)되었습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에도(江戸)에서 막부(幕府)를 개설(開設)하기 이전(以前)에 그의 가문(家門)은 벌써 원씨(源氏)를 위칭(僞稱)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씨(源氏; げんじ; 겐지) 가문(家門)이 최초(最初)로 성립(成立)된 이후(以後)에 세월(歲月)이 더욱더 흐름에 따라, 특(特)히 일본(日本)의 관동(關東) 지역(地域)에 터를 잡은 유력(有力)한 무사(武士) 계급(階級)들이 대체(大體)로 원씨(源氏)를 가모(假冒)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日本)에서는 고대(古代)로부터 ‘씨’(氏; うじ; 우지)의 개념(槪念)에 이러한 내용(內容)이 포함(包含)되어 있습니다.
특정(特定)한 ‘씨’(氏; うじ; 우지)를 명분(名分)으로 내세우며, 비록 혈통적(血統的)으로 그 씨족(氏族)은 아니지만, 그 씨족(氏族)으로 의제(擬制)하는 전통(傳統)도 있었습니다.
원씨(源氏)는 그 계파(系派)가 많아서, 지금(只今)에 와서 어느 원씨(源氏) 가문(家門)이 진짜인지를 구별(區別)하기 어렵습니다.
물론(勿論), 그 당시(當時)에 원씨(源氏)의 진정(眞正)한 후손(後孫)들도 존재(存在)하였을 것입니다.
하여간(何如間),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조상(祖上) 족보(族譜)가 100% 진실(眞實)이라 하여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이성계(李成桂)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한반도(韓半島) 고려(高麗)?에서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이주(移住)한 고려인(高麗人)들?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看做)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관동(關東)에서 왜경(倭京)에 이르기까지 가강(家康)은 쌀 가마로 길을 만들 수 있고, 산양(山陽)ㆍ산음(山陰)에서 왜경(倭京)에 이르기까지 휘원(輝元)은 은전(銀錢)으로 다리를 만들 수 있다”라는 대목의 기록(記錄)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산양(山陽)ㆍ산음(山陰)은 관서(關西) 지방(地方)에 속(屬)하였고, 왜경(倭京)은 관동(關東) 지방(地方)과 관서(關西) 지방(地方)의 사이에 위치(位置)하였습니다.
일본(日本)의 관동(關東) 지방(地方)은 쌀 재배(栽培)를 비롯한 농업(農業) 중심지(中心地)이었고, 관서(關西) 지방(地方)은 무역(貿易)을 통(通)한 상업(商業) 중심지(中心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日本)의 관동(關東)과 관서(關西) 지역(地域)을 어디로 비정(比定)할 수 있을까요?
첫댓글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일본인이 아니었던가요? '고려인'으로 보이기도 하던가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이성계(李成桂)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한반도(韓半島) 고려(高麗)?에서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이주(移住)한 고려인(高麗人)들?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看做)하기는 어렵습니다.
===> 저는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고려인이라는 것은 저 멀리 고구려 시절이 아니라
근래의 이조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도쿠가와가 왜 고려인인가는 그의 시조인 사가천황의 계보를 찾아보면 파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의 행적을 뒤져보면 추적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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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섭 선생님이 이렇게 주장하셨습니다.
도쿠가와가 아니라... 도쿠가와 조정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건 제가 만나본 적이 없는 일본인이 이렇게 주장했다는 것을 옮긴 것입니다. 도쿠가와와 반도와의 관계를 앞으로 더 들여다 볼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그 분을 만나봐야 겠죠. 저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제 전공도 아닌 분야만 잡고 않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도쿠가와가 왜 고려인인가는 그의 시조인 사가천황의 계보를 찾아보면 파악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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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고려인(高麗人)이라고 주장하셨어요.... 안 보이십니까???
이제 와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황당합니다.
도쿠가와는 고려계입니다. 열도 고려계이지요.
(일본)열도 고려계의 본래 출신지가 어디냐고요?
본래 출신지? 고려계면 고(구)려겠지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고(구)려계인지, 신라계인지, 백제계인지, 가야계인지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추측(추론)에 불과합니다.
일본(日本)에서는 고대(古代)로부터 ‘씨’(氏; うじ; 우지)의 개념(槪念)에 이러한 내용(內容)이 포함(包含)되어 있습니다.
특정(特定)한 ‘씨’(氏; うじ; 우지)를 명분(名分)으로 내세우며, 비록 혈통적(血統的)으로 그 씨족(氏族)은 아니지만, 그 씨족(氏族)으로 의제(擬制)하는 전통(傳統)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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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일본에 교환으로 왔던 한 공무원으로 부터 들은 것인데...
자기가 있는 부서의 한 일본인이 자기 조상은 대대로 도쿠가와 정권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조상은 고려인이고... 당시 도쿠가와 정권의 신료들은 다 고려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일본인은 그 공무원분과 아주 친하게 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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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 대해서는.....
그 한국인 공무원이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다시 한 번, 김병섭 선생님이 그 일본인에게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일본인의 조상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계기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른바 "도래인"(渡來人)인지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여건이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지요...
꼭 확인해 보세요... 책의 저자가 사실 관계를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검증하시라는 뜻입니다.
다행히 이 부분은 책에 안 넣었습니다. 님의 이해를 돕고자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해를 돕고자 주장하신 것인데, 오히려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사실 관계를 꼭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님의 이해를 못 구하였으니... 님께는 문제겠지만... 다른 분들께는 보다 많은 것을 알려드렸으니 도움이 되었지요.
책이 많이 팔리길 기원합니다. 고생하셨으니 돈을 버셔야죠...
중요한 "사실 관계"는 저자가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실수가 없거든요...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이기에 책에서 뺀 것입니다. 책에는 근거가 그래도 명확한 것만 실어야 신빙성이 높아지지요.
네, 당연히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