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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다말은 어떤 자인가?
다말은 유다의 큰며느리입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있고, 둘째 아들은 오난, 셋째 아들은 셀라였습니다. 큰아들 엘은 하나님 앞에 악한 짓을 하니까 하나님이 죽였습니다. 엘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 오난 역시 하나님이 죽였습니다. 아들을 낳아 봐야 형님 아들이 되고 내 아들은 안 될 것이니 일부러 딴 곳으로 설정을 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 되어 하나님이 그도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죽인 것을 보면 장자 엘도 육적 만족만 취하고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셀라는 아직 어린고로 유다가 며느리 다말보고 ‘친정 집에 가서 있거라, 셀라가 크면 남편으로 주마’고 했는데 셀라가 장가갈 때가 되었는데도 다말에게 안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셀라마져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안 준 건데 사실 유다는 두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사실을 알지를 못한 것입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동네 양털 깎는 곳으로 내려왔을 때에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밤에 시아버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허리끈과 도장과 지팡이를 증거물로 잡은 것입니다. 그 후로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속일 수가 없습니다. 결국 누가 그랬다는 것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일반 도덕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추한 죄를 지은 이 다말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려져 있을까? 유다에서 장자 엘에게로 내려와서 또 그 다음 아들로 내려가야 할 그것이 있습니다. ‘장자 엘이 죽고 차자 오난도 죽고 셋째 아들도 또 죽을까봐 안 주니 시아버지 유다에게로부터 직접 받아야 되겠다. 그것을 받으려다가 돌에 맞아 죽어도 좋다!’
그게 뭐기에 죽음보다, 목숨보다 귀중한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계대입니다. ‘이것만큼은 내가 빼앗기지 않겠다,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비상수단을 써야 되겠다. 죽어도 받고 죽자!’ 다말은 창녀 짓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五 라합은 어떤 자인가?
라합이란 자랑하는 이란 뜻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입니다. 낮에는 물 팔고 밤에는 몸 팔며 고달프게 먹고 사는 여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으로 숨어 들어왔습니다. 이 소문이 여리고성 내에 퍼져 그 성의 군인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까지 수색하러 온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이미 두 정탐꾼이 오지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술손님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 소문이 믿어지고, 여리고성의 미래가 멸망된다는 소문도 알게 된 것입니다. ‘기회는 이 때다’ 하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두 정탐꾼을 숨겨 살려 보낸 것입니다.
그 후에 두 정탐꾼들과의 약속대로 기생 라합에게 속한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온 자들은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에 모두 살아난 것입니다.
사회적 일반적 타락적 선악과를 따먹은 도덕적 개념으로 보면 기생 라합은 천하지만 그러나 ‘나에게 복음소식을 갖고 온 이 두 정탐꾼만은 내가 목숨을 걸고 살려야 되겠다. 그들 보기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내가 그들을 죽이는 데로 내어주지 말고 살려야 되겠다’ 하고 비상수단을 쓴 것입니다. 들키면 죽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비상수단을 써서 살린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이란 세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소원 목적으로, 그 물질적 가치 판단, 평가성을 가지고, 그 기준을 가지고 지금도 계속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로 죽은 타락적 기존적인 지식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여리고 세상입니다.
여리고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생 라합이 자기들을 속였으니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니, 그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예수 믿는 기독자들이 볼 때도 거짓말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왜? 그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자들입니다. 계시적으로 보면 진리와 성령입니다. 교훈적 계시적으로 보면 진리이치, 생명이치입니다. 이룰 구원의 사상입니다. 이것을 결과적으로 미리 보면 여리고를 죽이려고 한 것이고, 기생 라합을 살리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살리는 것은 거짓말 같은 참말이요, 들어온 이것을 죽이는 것은 참말 같은 거짓말입니다.
기생 라합은 어느 쪽 말을 들어주어야 자기가 살고 안 죽겠습니까? 안 죽는 것뿐만이 아니고 어느 소속, 어느 입장으로 살겠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1. 여리고 군인들의 말: 두 정탐꾼을 죽이자, 내어놓아라! 진리영감을 죽이자.
2. 기생 라합의 마음: 두 정탐꾼을 살리자, 죽어도 안 내어놓겠다. 진리영감을 살리자.
기생 라합의 말이 옳습니다. 교훈적인 측면으로 볼 때에 여리고 군인들은 진리복음을 죽이는 운동, 기생 라합은 진리복음, 하나님 소식을 살리는 운동.
기생 라합에게 들어온 이들을 어떻게 하면 죽게 되고, 어떻게 하면 살겠습니까? 그들의 목숨은 누구에게 달렸습니까? 기생 라합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들은 살게도 되고, 죽게도 됩니다. 여리고가 하는 그 말대로 내어주면 두 정탐꾼은 죽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볼 때에 결국은 기생 라합도 죽습니다. 여리고성의 그 기준, 그 척도를 받아들이면 기생 라합에게 들어온 진리와 영감은 죽고 맙니다. 결국은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심판에 걸려들고 맙니다.
여리고성의 사람이 변장술을 써서 이스라엘 옷을 입고 세상기준으로 말할 때 라합이 그것을 들어주면 라합의 신앙생명은 죽고 맙니다. 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여리고성의 그 도덕기준으로 말한다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기생 라합의 신앙생명은 결국 죽고 마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살려면 죽기를 각오하고 두 정탐꾼을 살려야 합니다. 비상수단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六 롯에 대하여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의 동리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흉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적단들에 의한 인위적인 흉년입니다. 농사를 지어 놓으면 ‘우’ 하고 달려들어 다 훔쳐 가는데 이것을 막을 만한 힘도 능력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연약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남편 엘리멜렉의 큰아들 기룐, 아내 나오미, 작은아들 말룐이 모두 먹고 살기 위해서 ‘잘 살아보세’ 하고 하나님도 모르고 우상만 섬기는 모압 땅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남편이 먹지 말아야 할 물을 먹어서 그런지, 그 땅의 물이 체질에 안 맞아서 그런지 사람이 누렇게 뜨더니 정신이 들락날락하고 시들시들하더니 그만 픽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큰아들 작은아들 장가보내어 손자를 안아볼까’ 하고 희망을 걸었더니 두 아들도 아버지 뒤를 따라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과부 셋만 땡그러니 남았습니다.
며느리들은 모압여인들이라! 세상 누림성으로 사는 족속들인데 시집 올 때 빈 손 들고 왔을까요? 지금으로 말한다면 축하금이 얼마가 들어왔다는 둥, 칼라 TV 오디오 냉장고 자개장 차단스 화장품이 얼마 짜리라는 둥 진주 목걸이 귀고리 팔고리 발고리 코고리가 얼마 짜리라는 둥 방청객들 앞에서 100년 해로 축복을 받고 연회를 열고 했는데 그 살림살이 다 팔아먹고 10년도 못 가서 거기신세에다 과부거지가 셋이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내려가서 깨가 쏟아지게 살 줄 알았는데 베들레헴 신앙을 떠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 놓았으니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가정과 사람을 쳐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냐, 아니면 체면이고 위신이고 뭐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올라갈 것이냐? ‘여기서 청산을 하자! 며느리들을 다 보내자! 큰 아가, 너희 고향 너희 집으로 가라’ 하니까 큰며느리 오르바는 제 살길 찾았다는 듯이 대문을 나서자 마자 총알처럼 사라집니다. 그도 그걸 것이 시어미 오르바 집에는 희망 있는 구석이 보여야지. 아들이 있나, 재산이 있나? 참으로 막막한 집입니다. 그 뒤 오르바의 소식은 어디 가서 듣겠습니까? 천국이 아니면 지옥에 가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아가 너도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이제 늙어서 아들을 낳을 수도 없고, 재산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다. 나는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겠다. 너는 아직 어리니 너의 길을 다시 찾아서 살 수 있다. 가거라’ 하고 모압지방을 떠나 베들레헴 고향으로 향해 가려고 하는데 이린 룻은 한사코 따라 나섭니다. 뭘 보고 따라나서느냐 그 말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어머니가 묻히는 곳에 나도 묻힐 것이요, 그러니 돌아가라고 더 권하지 마소서’ - 코가 찡해집니다.
1. 어린 룻은 그 가정에서 하나님을 발견을 했고.
2. 나오미의 가정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진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하나님을 믿는 뼈대가 있는 신앙사상 정신을 내가 가져야 되겠다’ 어린 룻의 비장한 결심입니다. ‘가라고 더 이상 권하지 마소서’ 어린 룻은 인간 사는 계산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행복의 설계 노후대책의 계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내가 풀어드리자,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기쁘게 해 드리자’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뭉클할까요? 룻의 그 걸음걸이를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실까요?
다말과 룻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기본구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성화구원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을 어떻게 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 하면, 말하자면 기본구원으로 해석을 한다면 성경이 안 맞아진다. ‘너희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라 ~ 하나님의 은혜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는 이 성경은 삭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계시록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하는 말씀은 다 삭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기본구원이 있는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중생을 시켰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독권적 사역이요 주권적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우리 인간의 의사나 노력이나 보탬이 전혀 없습니다. 영(靈) 중생은 순간적 찰나적입니다. 자기 속에 일어난 영적 사역은 자기가 느끼지를 못합니다. 느낀다 하는 것은 언제 살아났건 산 증거입니다.
영이 중생이 되었다고 예수 믿는 그 날부터 성경의 뜻을 100%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수십 년을 믿었어도 성경을 100% 다 모릅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그 날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닫고 영적인 기능과 기능 면이 서서히 서서히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못 깨달으면 예수를 수십 년을 믿고 충성봉사를 해도 영 중생은 했지만 영적 기능과 지능 면에서는 항상 똥싸고 오줌싸고 깔고 뭉갭니다. 믿는 나이는 먹어들어 가는데 자라지 못하면 그 신앙은 정상은 아닙니다. 비정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영이야, 순이야, 바둑아’ 할 수는 없습니다. 공부 잘 할 수 있는 이치를 가르치면 아는 것이 실력으로 올라갑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인도자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사, 진리이치가 안 나오면 날마다 ‘주여, 주여’는 찾는데 믿음성장이 되지 않습니다. 인도자가 성경을 모르고 충성봉사한 일의 크고 작은 것을 잣대 삼아 가르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거짓 목자로서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본구원을 얻은 자는 이제는 성화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면 지혜 지식이 자라고 몸이 자라야 정상이듯이 한 주일 두 주일, 1년 2년 믿어 갈수록 깨닫는 면이 성장하고 자라야 합니다.
사실 성경은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것이지 남아 있는 애굽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실존성을 전제를 하고 주는 것이지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지 안 믿는 사람은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버립니다. 성경을 깨달으려고 보지 깨닫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안 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영이 산 자들에게 깨닫고 자라라고 주는 것이지 영이 죽어 있는 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봐야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을 받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영이 중생된 무리들입니다. 그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 간다’ 하게 되면 성경의 이치가 안 맞습니다. 성경은 교회에게 주는 것이요, 깨달음이 성장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다말의 추행만 보는 것은 일반 도덕성적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은 계시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인물들 속에 무슨 사상이 흐르고 있느냐? ‘낳고 낳고 ~’ 하는데서 아들 낳고 미역국 먹은 것만 보이느냐? ‘낳고 낳고’ 하는 속에 어떤 생명이 흐르고 있느냐 하는 이것을 볼 줄 알아야 다말의 비상수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계대 속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무한한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진리이치, 생명의 이치, 복음의 이치를 한 이치라도 깨달으려고 자기 위신, 자기 체면, 자기를 부인하고 인정 정실, 물질선, 생명선을 초월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내가 얼마나 비상수단을 썼느냐? 그렇지 않고 예수 믿고 예수를 이용하여 자기의 부귀 영화, 명예, 육 운동, 세상운동, 사망운동을 하며 자기의 발판을 삼는 자 많습니다.
비록 남 보기에 천한 기생 라합이지만 자기 구원될 진리생명, 참 복음소식을 알고 있는 이 기생 라합을 무엇으로 꾀이면 호락호락 넘어가겠습니까? ‘집을 사 주마, 시집 보내 주마, 자가용 사 주마 여사장 만들어 주마’ 기생 라합은 그런 것에 안 넘어 갔는데 오늘날 기독자들은 어찌 그리 잘 넘어가는지!
어떠한 사건 환경이 부딪치더라도 진리생명은 버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고. 예수 안 믿는다가 아니라 예수 믿기는 믿는데 신앙정조 버리면 믿는 가치가 없어집니다. 예수 믿기는 믿는데 진리생명, 말씀이치 버리면 예수 믿는 효력이 어디 있습니까? 사단 마귀의 운동은 예수 믿는 성도에게 진리생명, 신앙생명 죽이는 운동을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세상의 도덕성을 가지고 와서 종교적인 여리고를 건설을 시키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룻이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 부러워하고 자랑스럽겠지만 알거지가 되어 가지고 올라가면 그런 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룻은 이방 여자로서 남편 잡아먹고 시아버지 잡아먹은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등뒤에서 얼마나 수군거리겠습니까? 룻은 그 수모를 다 각오했고, 평생 과부로 살아갈 것도 각오를 했습니다. 룻기 1장 13절에 나오미의 말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1장 16절의 룻의 말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어린 룻은 시어머니의 가정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진 것을 발견하고 그 진노를 풀어드리려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감동이 됩니다. 이런 진리를 위한 비상수단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계대에 끼어 드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는 기본구원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이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화구원으로 풀어야 이 성경을 통해 이 사건을 주신 목적인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는데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