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봄 당시 정당에 서울시 청년단장을 맏고있으면서 당생활을 할때 지금의 상암 월드컵 경기장자리에서 우리나라 최고큰 골재장이 운영되고 있었고 그옆엔 78년도 부터 난지도 쓰레기 매립이 시작되어 94년 봄에 매립이 끝나고 김포로 이전하게 될때쯤 골재장 사장선배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동네 유지선배들 에게서 듣게 되었고 선배들이 자리를 만들어서 미팅을 가지게 되었다 이유인 즉슨 난지도 쓰레기장이 문을 닿게 되면서 이제 쾌적한 주거공간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골재장에서 비산먼지가 아파트로 날아들어 민원을 제기하게 되자 그걸 나더러 해결해 달라는 부탁과 동시에 회사 관리부장 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난 속으로 아파트 총회장 그리고 부녀회 회장 또한 같은당 식구로서 밀접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여서 어느정도 민원을 해결할수 있을거 같아서 승낙을 하고 관리부장 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과 만나 대책을 논의하고 자주 술자리도 만들게 되면서 결국 부녀회장과 무촌이 되면서 부녀회장이 나서서 내일을 봐주기 시작하였고 또한 부녀회 행사에는 내가 나서서 물심양면적극적으로 도와 민원은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고 조건으로 현장에 비산먼지가 날아가지 않도록 망을 설치하여 한결 쾌적한 환경읗 만들게 된것이다 그결과 골제회사 형님께서 나에게 별도의 수익을 얻을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는데 그것은 돌을깨고 골재를 생산할때 부수적으로 나오는 석분< 돌가루>를 얼마든지 팔아먹을수 있는 특혜를 받게 되었고 난지도 매립이 끝나면서 시내에서 토목공사로 나오는 흙들을 저멀리 김포까지 운반하기엔 단가가 맞지않아 난지도 주변에 흙들을 논과밭에 매립을 하는데 그위에 석분을 깔아야만 땅이 단단해 져서 석분을 찾는 덤프업자들이 내게 연락이 오게 되었고 난 그당시 우리현장에 15톤 덤프트럭 에 석분한차를 싣어가면 만원의 석분비를 받을수 있는 수익이 발생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석분말고 흙과함께 섞여서 나오는 흙들은 주변에 논을 매립하게 되면 필요해서 그또한 차당 일만원씩 팔아먹었던 그러니까 땅집고 헤엄치는 결과였던 ...
그러다가 집앞에 학교부지로 묶인땅 3천평을 일년에 일천만원 주면서 학교가 들어설때 까지 임대를 하였다 그곳에 1천평은 테니스장으로 임대를 하고 남어지 땅에는 회사에서 나오는 흙 천여대를 매립하면서 회사에서 돈을 지원 받아서 그곳에 청년 봉사단 사무실을 짓고 동네 후배들 40여명을 모아서 자율방범및 치안관련 봉사를 하면서 그당시 청소년들이 유행했던 본드흡입및 부탄까스 흡입으로 인해 사고치고 하는걸 예방하기 위하여 청년회를 가동하였고 그로인해 많은 청소년들을 선도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축구 크럽을 만들어 주말에는 학교에서 축구를 통해 건강과정신을 .. 그때 후배중에 왼손 손목이 절단된 후배가 있었는데 대학까지 선수생활을 했었고 지도자 자격증 까지 있어 울딸이 다니는 ㅇㅇ초교에 아버지 회라는걸 만들어 선생들과 친해지고 교장샘과도 막연한 사이가 되면서 이학교에 축구부를 창설하기에 이르는데 교장의 강력한 반대로 난관에 부딫칠때 나의 그녀 부녀회장이 이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맏고 있어서 그녀의 노력으로 결국 축구부가 창설되었고 손목없는 후배를 축구부 감독으로 선임을 하게 되었다
첫댓글 사연 없고 상처 없는 인생 없다더니
지존옵빠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긴 밤을 새워 들어도 끝이 읍땅께.
근뎅 그렇게 잘 나가던 천하의 지존옵빠가
왜 독립꾼으로 사냐구?
무엇 때문에?
그것도 길냥이나 쓰다듬으며......
내가 괜히 열 받네.
열 관리 하랑께~
@운선 ㅎㅎ
독립군 되고부터. 내삶이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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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살다보니 그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