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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x왕자)
코코…….
그녀를 부른다.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차분하고도 단호한, 어떤 산과 호수, 얼음보다도 고요한. 그녀는 올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념, 한 꺼풀 얇은 유리막 안에 가둬둔 그녀의 본성을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알아본다. 그녀는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껏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던 내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선다.
코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내 차가운 손과 달리, 자유와 야성을 간직한 그녀의 손을 붙잡는다. 우리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눈 내리는 산을 넘어 둘만의 은밀한 동굴로 숨어들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간혹 모닥불이 타는 소리와 서로의 옷이 닿아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함께 이곳을 떠나자고. 태어난 그날부터 우리를 짓눌러온 온갖 굴레들을 벗어 던지고 자유로워지자고. 누구도 우리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곳으로 가자고. 청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나보다 먼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되는 일이야. 우리에겐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앞으로 불행해질 사람들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코코, 하지만 너는 이대로 불행해지기엔 너무나도……, 귀엽다. 내가 구하고 싶은 것은 오직 너뿐이었다. 너 하나만 이 매몰찬 세상에서 구할 수 있다면 사실 다른 건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코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눈이 내린다. 새하얀 세상을 끊임없이, 더욱 새하얗게 물들이며. 너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른 털을 빗어내린 긴 꼬리를 언제나처럼 허리 위로 곧추 세우고, 포도나무 앞을 평생토록 떠나지 못하는 한 마리 붉은여우처럼, 그렇게 동굴 밖으로 나갔다.
재판관은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을 놓았다.
“마을을 위한 일입니다.”
나는 서류를 한 번 훑어보고서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왕자님…….”
“이누이트족 또한 우리의 주민입니다.”
“이보다 나은 수가 있습니까?”
재판관은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한숨을 내쉬곤 고드름처럼 엉겨붙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민심을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일이 어떻게 되어도 저희 법원은 왕자님을 지지할 생각이지만…… 군인들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쉬버링이 북방의 소국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명분 없는 쿠테타가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지나친 생각입니다. 가스트 장군은 분명 생각하는 방식이 극단적인 부분은 있으나, 아버님 때부터 수십 년간 충성을 바쳐온 군인이기도 합니다.”
“……왕자님, 갈수록 점점 굶주리는 국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탁상 위에 손을 얹곤 시선을 낮추었다. 내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함이었다.
“쉬버링은 1년 내내 눈이 그치지 않는 척박한 땅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지면 국민들은 미워할 대상을 필요로 할 겁니다. 마음속에 갈길 없는 미움이 눈처럼 가득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재차 내 눈앞으로 들이민다. 서류는 낱장의 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더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통에, 정말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상황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마을의 이누이트족을 모두 격리해야 합니다. ”
“……혐의도 없는 이들을 단지 우리와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잡아 가두는 게, 정말 부끄럽지 않은 일이란 말씀입니까?”
“아니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의 반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고한 설인이 더 이상 희생당하지도, 어린 이누이트족이 돌에 맞아 목숨을 잃지도 않도록. 왕자님이 다른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은 더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왕자님, 힘 있는 사람에겐 누구보다 앞장 서서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행동해야 하는 순간에 행동하지 않는 권력은 죽은 권력과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 뒤 결심을 굳히고 펜대를 집어 들어 서류 위로 손을 옮겼다.
“재판관, 제 생각은 다릅니다.”
종이 위로 익숙하게 펜을 움직인 뒤 마지막 방점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죽은 권력이란, 바로 부끄러운 일 앞에 주저할줄 모르는 권력입니다. 서명은 하겠지만 내용은 수정하겠습니다. 이누이트족들은 감옥이 아니라 그들의 마을에, 군인들이 감시하기 어려운 밤중에만 격리됩니다. 또 두 마을을 잇는 통로는 24시간 언제나 군인들이 지키도록 명령합니다. 잊지 마시길,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하루 빨리 범인을 잡는 겁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재판관은 서명을 끝낸 서류를 두 손으로 받아든 뒤 예를 갖추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이 노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자님, 부디 강녕하시기를.”
구름이 짙은 새벽, 홀로 설산을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하늘과 땅이 만나 온 세상이 백지가 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일까. 간혹 쉬버링을 찾는 등산가들은 새벽에 오르는 산길을 ‘저승길’이라고들 부른다. 새벽녘 설산은 그들을 적어도 ‘이승’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데려간다.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알면서도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길까.
명분과 허울만 남은 오지 마을의 왕자에겐 눈도 귀도 인격마저도 필요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인형놀이, 내가 먼저 끝내지 않으면 평생토록 이어질것만 같은 그런 삶이었다. 이런 운명 말고는 정말 달리 아무런 삶도 선택할 수 없다면, 나는 그저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았다.
‘저승길’을 오르기로 결심한 게 아주 어릴 때였는지, 혹은 어느 정도 몸이 자란 뒤였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산을 오르다 고개를 위로 쳐들자 그곳은 하늘도 땅도 방향도 없는 기이한 세계였다. 거센 바람 소리마저 귀에 익어 고요를 헤치는 것이라곤 내 작은 심장소리와 숨소리 뿐이게 됐을 때, 나는 몇 번인가 등산가들을 통해 들었던 ‘가장 흰 어둠’을, ‘가장 시끄러운 고독’을 보았다.
이토록 차갑고 거대한 세계에 나는 아직 꺼지지 않은 잔불처럼 홀로 던져져 있는 것이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짐승이 된 듯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보았다. 폭풍 속에 사람 한 명 만큼의 목소리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순식간에 눈 속으로 거두어졌다.
결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다 빠져 자리에 엎어지듯이 웅크렸다. 곧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 넘쳤다. 뜨거워서, 가슴 한구석이 너무나 뜨거워서 당장이라도 불타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건 꿈이었을까? 더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두 눈을 부릅떴을 때, 나는 한 그루 포도나무를 보았다.
맑은 하늘에 투명한 빛이 내리쬐었고, 내 머리맡에서 붉은 포도나무 하나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본다.
알알이 불꽃을 품은 듯한, 아니 나무 전체가 천천히 타오르고 있는 듯한, 어쩌면 당장 잿더미가 되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풍경.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더는 아무것도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은 정말로 고요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문득 눈 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서…… 한 마리의 붉은 여우가 느린 속도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코코, 나는 너를 보고 첫눈에 반했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천국에서 나를 데리러 온 천사인줄 알았다니까?
-정말, 이럴 때 그런 이야긴 그만둬.
나와 코코는 서로를 끌어안고 장난을 쳐댔다. 모닥불의 온기가 추위로 발갛게 부어오른 우리의 몸을 포근하게 녹여주었다. 그저 웃고,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시간, 모닥불의 주홍색 불빛이 그녀의 머리칼과 흰 옆얼굴, 둥근 어깨 위로 아롱거리며 빛났다. 그녀의 눈, 생명을 품은 보석과도 같은 눈. 내가 고독하기만 한 이곳 쉬버링 설산에서 얼어붙은 몸뚱이로 태어난 것은 오로지 그녀의 온기를 더욱 절실히 느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정말 예뻐. 코코.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감정적으로 큰 동요를 일으킬 때만 드러나곤 하는, 그녀가 가진 두 번째 색이었다.
그녀의 얼음은 지금까지 어떤 작은 생명의 목숨도 거두어가지 않았다. 단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그와 동시에 어떤 치명적인 상처나 병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그리고는 긴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얼음이 녹아내리면, 겨우내 몸을 감추고 있던 풀들이 봄을 맞아 다시금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듯, 겨울잠을 끝낸 생명이 다시금 숨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토록 상냥한 마법을 두고 누군가는 마녀의 저주라고 떠들어댔다.
-나를 봐줘, 그 눈, 내 앞에서는 감추지 않아도 돼.
-아니야.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 앞에서도 방심하게 될지 몰라.
-코코…….
그날 내가 본 풍경은 그녀가 만들어낸 붉은 얼음이었다고 코코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날 내가 보았던 건 그녀의 영혼, 잠시나마 설산의 얼음이 내게만 비춰준, 오로지 그녀에게만 깃든 저승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향해가는 곳, 그렇기에 그토록 그녀가 이루고자 하고 또 보고자 하는 풍경. 끔찍한 현실 속에는 존재할 수 없지만, 언젠가 먼 훗날에 그녀의 혼이 돌아가게 될 고향.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묵묵히 눈길을 나아가는 한 마리 짐승이 있다. 세상에 홀로 남은 짐승, 잔인한 대지 위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짐승이다. 그녀는 생명이 허락하는 한, 갈비뼈 깊숙히 새겨진 본능이 기억하는 자신의 포도나무를 향해 걷는다. 그렇게 얼어붙고 피 흐르는 다리로 자신만의 저승을 향해 나아간다.
-코코, 나는 널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아.
-나는 외롭지 않아. 지금도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걸.
-코코. 내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네가 소중해.
-…….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내가 할 말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는 듯이.
-사실은 네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 왕국도, 이 세상도…… 모두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흔들리는 동공을 속눈썹 아래로 감추며, 그녀가 새하얀 이마를 내 품안에 묻었다.
-기쁘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코코, 네가 쫓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정말 이런 세상에도 있을까?
나는 시선을 들어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규칙도 찾아볼 수 없는 그림자들이 단지 무정형한 불길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어지러지고 있었다.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믿는다면…… 나도 그걸 믿을게. 대신 딱 한 가지만 내게 약속해줘.
-어떤 약속?
-만약 네가 정말 외로워진다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상처받는다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고 지금처럼 내 품에 머리를 기대러 와줘.
-그건…….
-괜찮아. 누가 좀 비난하면 어때? 나는 사람의 마음따윈 모른 채로 태어난 눈사람이고, 너는 그런 눈사람과 사랑에 빠진 자유로운 짐승인걸. 나는 나고. 너는 너. 우리는 그외에 다른 누구도 아니야.
그래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남들처럼 생각하려고, 남들과 같아지려고 무던히 노력했으나 결국 내게 있어 타인은 길가에 놓인 눈덩이와 같았다. 그저 제멋대로 뭉치고, 떠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안개처럼 사라져 있었다. 누구의 결국 삶이든 다르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는 세상에, 의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났다.
-코코, 나도 너와 같은 저승에 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기에 코코, 너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네가 나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는 길 잃은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어디든, 네가 가는 곳이라면 함께할 거야. 나도 세상 그 무엇보다, 왕자 당신이 더 소중해.
코코. 혹시 나의 이 사랑은 죄인 게 아닐까? 나는 이승을 살아가는 네게 죄를 저지르고 있는 걸까?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네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코코, 나는 언젠가 벌을 받게 되더라도 좋다. 처음부터 온기 같은 건 모르는 채로 태어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따뜻함이라곤, 이런 잘못된 방식뿐이니까.
우리는 언제나 이방인이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발을 헛디딜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말았으니까.
코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첫댓글 옛날에 썼던 걸 우연히 발견해서… 올려봅니다. 저랑 취향 비슷한 사람은… 역시 없겠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기억 어딘가에 있는 시의 한 구절 같네요 ㅎㅎ
그래서 다음편은요??
아름다운 이야기다.....
자 그럼 이제 마녀는 불에 타야겠지?
감사합니다 ㅎㅎㅎ
이 코코는 화형당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