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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 잠언 21,1-6.10-13
복 음 : 루카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신부가 본당의 어느 어르신 때문에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사건건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누구 만났는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어제는 왜 늦게 사제관에 들어왔냐고 물으신답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려는 이 어르신께 대한 불편함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르신은 왜 스토커처럼 본당 신부에게 집착하실까요?
이 신부가 자기 아들 같아서 배려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에 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너무 서운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남이란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즉,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입으로는 상대를 배려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도 자기 관점에서 나오는 ‘배려’라는 이름일 뿐입니다.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책에서,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알아서 해주는 것은 지나친 간섭이 됩니다.
때로는 답답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진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알아서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답답하고 간섭하고 싶지만, 우리를 위해 꾹 참으며 말없이 함께하실 뿐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짜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봉헌합니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도 불의의 폭력을 저지르는 박해자들을
벌하지 않는 주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단순히 주님을 믿고 있다는 이유로
망나니의 칼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갈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며 배교 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진짜 사랑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찬미를 외치면서 기쁘게 순교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의 삶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진짜 사랑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의 순교자 모습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순교적 삶, 주님의 전사
-희망의 이정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6)
9월 순교자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의무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날이 되면 저는 19년 전 2003년 9월 20일
미국 미네소타주 소재한 성 요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머물 때,
미사 후 축하받았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많은 미국 수도자들로부터 한국 순교성인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였습니다.
참으로 하나인 교회, 하나인 믿음의 가톨릭교회 공동체임을 절감한 날이었고,
한국 순교성인들이 참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19세기 박해시대, 한국에서 1만여 명이 순교하기는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매일 미사책에 나온 영문으로 된 오늘 한국 순교들에 대한 짧게 요약된 소개는
전 세계 교회 사제들이 읽을 것이며 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오늘은 축일은 19세기 수차례에 걸쳐 목숨을 바친 한국 순교자 103명을 기념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첫 한국 사제였고, 성 정하상은 평신도 선교사였다.
3명의 주교와 7명의 사제들 외에, 전 그룹이 모든 연령층에 걸친 영웅적 평신도들로 이루어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에 사도적 여행 중 이들을 시성 하였다.”
순전히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용단에 의해 교황청 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 베드로 대 성전에서 시성식의 전통을 깬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과 같은 각별한 은총의 시성식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장충동 분원에서 청원자 신분으로 공부할 때였고 여의도 행사장에 참석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이리하여 한국은 세계 가톨릭 교회 내에서 제3위의 성인 숫자를 보유하게 되었고,
즉시 연상된 것이 산티아고 순례자 숫자였습니다.
2014년 제가 산티아고 순례 시 매년 한국 순례자들은 1위 내지 3위 사이를 맴돌고 있었고,
알베르게 숙소마다 설명문은 유럽어 아닌 말은 유일하게 한국어 하나뿐이었습니다.
참 대단한 보석 같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성인들 숫자와 산티아고 순례자 숫자의 순위가 비슷한 데서
한국인들의 구도求道적 열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성지순례 코스의 순교유적지를 봐도
한국은 전 국토가 거룩한 성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퇴장 성가 시 부를 성가 283장 최민순 신부 작사, 이문근 신부 작곡의 순교자 찬가는
언제 불러도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합니다.
1.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 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 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 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1절만 인용했습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3절까지 인용하고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내용의 곡입니다.
가능하면 오늘 순교성인 대축일에 3절까지 꼭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용사로, 주님의 전사로 살다가 전사戰死한 우리 순교자들은 우리를 부단히 분발케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만 25세 꽃다운 나이에 순교의 월계관을,
성 정하상 바오로는 만 44세 한창 중년 나이에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고,
저는 이분들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으니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순교자들은 우리 모두 나태함을 분연奮然히 떨쳐 버리고 벌떡 일어나
주님의 전사로서 늘 새롭게 영적전투의 파스카 삶을 살게 합니다.
얼마 전 노인들을 돌보는 자매로부터 들은 내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90세 초반의 미신자 할머니라 합니다.
“갈 길을 모르겠어, 어디로 갈지 갈 길을 모르겠어.”
죽음을 예견하지만 어디로 갈지 답답하고 막막하다는 고백이었다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중 목적지를 가리키던 곳곳에 있던 무수한 이정표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 중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삶의 이정표, 희망의 이정표는 얼마나 절대적인지요!
삶의 이정표가, 희망의 이정표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잊고,
혼란 중에 갈 길을 잃고 뿌리 없이 방황하는, 표류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주님을 믿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에게 매일 미사보다,
또 오늘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순교성인들보다
더 좋은 삶의 이정표, 희망의 이정표도 없을 것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한국 순교성인들 대축일에
우리는 순교적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한결같이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을 까요?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항구한 샘솟는 사랑이 자발적 기쁨으로 항구한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만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의로운 이들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난 중에도 내적 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으니,
바로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믿음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인 우리들은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들임을 깨닫습니다.
여기 세 개의 대신덕對神德 신덕, 망덕, 애덕에다
사추덕四樞德인 지덕(현명), 의덕(정의), 용덕(용기), 절덕(절제)가 더해진다면
최상급의 주님의 전사에 아름답고 훌륭한 순교적 삶이 될 것입니다.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항구히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열정의 사랑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언제 읽어도 백절불굴의 힘을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고 알기에
비로소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하고도
한결같은 순교적 사랑이, 순교적 삶이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순교적 삶을 살라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들 예외 없이 적용되기에 ‘모든 사람’이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구원의 길은, 생명의 길은, 진리의 길은, 참삶의 길은,
성인이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우리 삶의 이정표, 희망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언제나 우리 앞서가시는, 우리와 함께 가시는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 사랑의 힘이 이기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운명의 십자가를,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하루하루 날마다 끝까지 자발적 기쁨으로,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각자의 고유하고 유일한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에 우울하거나 어둡고 심각한 것은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기쁨, 평화와 희망, 겸손과 지혜가 넘쳐야 합니다.
온갖 유혹의 탐욕, 분노, 질투, 나태, 허영, 교만, 원망, 절망, 실망은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를 가능하게 하며,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합니다.
제 사랑하는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 보기에는 힘들고 어려운 것도 지나가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곤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즐겁고 행복한 것도 지나가면 한여름 밤의 꿈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진인사대천명’하라고 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2019년 8월 21일에 한국에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신문을 만들고, 홍보하는 일입니다.
의욕을 가지고 신문을 홍보하려고 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워싱턴, LA, 밴쿠버’로 신문홍보를 하기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겪었던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했습니다.
미사가 중단되었고, 가게도 문을 닫았고, 신문홍보도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순교자 대축일 미사도 중단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힘들고 암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쉼표를 찍은 것이지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퀸즈 정하상 성당은 사제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우드사이드, 롱아일랜드, 베이사이드 그리고 평화신문의 사제들은
자주 모여서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자전거를 함께 타기도 했고, 캠핑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제에게는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김상균 다니엘 신부님은
건강이 좋지 못해서 부득이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에서 제게 주일 미사를 부탁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주일미사를 도와드렸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다닐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드리기로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도 길어졌고,
부르클린 교구의 요청도 있어서 2년이 넘는 지금까지 주일미사를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제게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사제들과의 친교와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의 만남은
제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시련과 고통이라는 쉼표를 찍으셨다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 앞에 좌절하거나, 낙담하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도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축복과 은총이라는 쉼표를 찍으셨다면 겸손과 감사들 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과 은총을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며
교만하게 지내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웃의 시련과 고통을 외면하는 것도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인은 언제가 기뻐하고, 항상 감사드리며, 늘 기도해야 합니다.
3년 만에 한국순교자 대축일을 함께 봉헌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내년에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한국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련과 고통 그리고 순교라는 쉼표를 찍으셨습니다.
100년이 넘는 ‘박해’라는 쉼표를 찍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표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들판에 새싹이 피어나듯이
순교자들이 흘린 피에서 신앙의 꽃이 피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곳은 성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1984년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3위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그때 교회를 박해했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풀잎 끝에 맺혀있던 이슬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 성당들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퀸즈 성당은 정 하상 바오로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비록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살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한국 순교자들은 고난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순교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한국 순교자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들을 성인품에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순교자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 나에게 시련과 고통이라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은총과 축복이라는 십자가가 있다면
그것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시련과 고통 그리고 은총과 축복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에 쉼표를 찍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박해도, 위험도, 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맺어진
하느님과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는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하였다.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위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오늘의 참된 순교 정신이란
나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포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랫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중에 많은 분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당하고 돌아가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짐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포기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한 것이다.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 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 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안에” 머물러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범주에 넣어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이다.
복음의 같은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도 보도하고 있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그런데 이 병행 대목들의 배치가 루카 복음과는 다르다.
마르코 복음은 이 대목을 전하기에 앞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3,21)고 함으로써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예수가 미쳤다는 말은 예수께서 혹시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모함에 의한 것이다.(마태 12,24; 마르 3,22)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 범주에 넣기 위해서 루카가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보도한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한 비유,
즉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가 “하느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11절)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되는 것이다.(15.18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서 하느님 나라에 들게 될 것이므로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가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과의 가족관계는 이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제시하는 가족관계는 혈통이나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 점을 나자렛에서 온 예수의 형제들은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성모님은 예외이다. 성모님은 벌써부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자렛의 형제들은 예수를 만나보기 위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찍이 예수를 눈으로 보았으나(4,20),
예수의 실체를 보지 못한(4,22-23) 사람들이 아니던가?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밖에”(20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신다.
보려는 사람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잠언 21,2-4)
세상에서 불행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자신이 틀린 길, 멸망의 길, 막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확실하고 안전하고 보장된 행복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바르고, 건강하고, 정의로운 삶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바르고 확실하게 보여도
하느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확실한 길은 어떻게 식별할까요?
요즘에 교황님께서는 수요 일반 알현 중에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을 하고 계신데요.
이냐시오의 자서전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인은 3인칭으로 자서전을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사를 공상할 때에는 –물론 기사들의 삶을 말합니다.- 당장에는 매우 재미가 있었지만,
얼마 지난 뒤에 곧 싫증을 느껴 생각을 떨치고 나면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는 일, 맨발로 걷고 초근목피로 연명해 가는 성인전에서 본 고행을
모조리 겪는다고 상상을 해보면 위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흡족하고 행복한 여운을 맛보는 것이었다.“(『자서전』, 8항)
곧 성인전은 그에게 행복한 여운, 기쁨의 여운을 남겼습니다.
성인의 이 체험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세상사를 생각할 때 매력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그 뒷맛이 무엇인가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우며 황폐해진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처음에는 일종의 거부감을 일으키지만
-”나는 지루한 성인전은 읽지 않을 거야“-,
받아들이기만 하면 알지 못했던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이 평화론운 느낌은 오래 지속됩니다.
두 번째 측면은 생각의 귀착점입니다.
처음에는 상황이 그다지 명확해 보이지 않습니다. 식별에는 발전 단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를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경험의 결실을 위한 규칙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식별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전제를 제시합니다.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원수(사탄)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서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 더욱 키워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성령)은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 방법을 쓴다“ (『영신수련』, 314)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식별에 대한 교리 교육2.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사례-
이냐시오의 식별보다 더 쉽고 확실한 길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사랑하고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계명에서 벗어나고, 죄를 짓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정신 건강과 행복한 삶, 문제없는 인간관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유행하는 지식을 쌓고, 삶의 기술을 익히고, 시대정신을 따르면,
크게 불편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고 사탄이 제시한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19-21)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모든 이를
어머니와 형제, 가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친척들에게 선을 긋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 속 최고의 주인공은 성모님이 맞습니다.
그래도 성모님께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조금 섭섭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십니다. 입을 다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어머니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침묵으로 동의하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겸손하게 숨어 살기를 원하셨던 성모님과 그런 성모님의 뜻을 아시고
지혜롭게 숨겨주신 예수님의 따뜻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훗날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순간 성모님을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십니다.
가족의 완성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부를 때 완성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