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3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오늘 하루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이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을지라도 매일매일이 주님과 함께 연합하는 날이라면 결코 같지 않은 새로운 날인 줄 믿습니다.
나의 죄됨을 그냥 두고 보지 마시고 공의로 심판하셔서 주님의 자녀답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나를 장악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시고 내 죄가 주님 안에서 정결케 되어 참된 성결을 유지하며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오늘도 덧입게 하소서.
주님께 바랄 것은 긍휼밖에 없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죄의 세력에 무참히 짓밟히고 넘어지는 지극히 연약하고 비참한 자이오나 이 죄인, 다시 한 번 주님을 힘입어 일어나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오니 나를 받아주소서.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님과 함께 죽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임을 믿으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대하 29:29-36
제목 :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신앙을 지키며 성결케 하는데 더욱 열심인 레위인들이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자들이다.
29.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30.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
31. 이에 히스기야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제 스스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여호와께 드렸으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 하니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오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또한 번제물도 가져오니
32. 회중이 가져온 번제물의 수효는 수소가 70마리요 숫양이 100마리요 어린 양이 200마리이니 이는 다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리는 것이며
33. 또 구별하여 드린 소가 600마리요 양이 3천 마리라.
34. 그런데 제사장이 부족하여 그 모든 번제 짐승들의 가죽을 능히 벗기지 못하는 고로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 일을 마
치기까지 돕고 다른 제사장들이 성결하게 하기까지 기다렸으니 이는 레위 사람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음이라.
35. 번제와 화목제의 기름과 각 번제에 속한 전제들이 많더라.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이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
36.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 나의 묵상
역대기 상·하는 원래부터 나뉜 것이 아니라 후대에 편리를 위해서 나눈 것이다.
그래서 역대기서 한 권인 이 성경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후에 정확한 저자는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학자요 선지자인 에스라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전해진다.
저자가 역대기서를 저술한 목적은 포로귀환 후에 바로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인하여 성전 건축이 지체와 정체를 거듭하면서 늦어지자 여호와 신앙의 구심점이 성전에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기록되었다.
이처럼 포로기 이후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했던 것처럼 아하스 왕이 더럽히고 퇴락시킨 성전을 히스기야 왕이 다시금 성결케 하여 보수하고 세우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히스기야 왕 당시에 제사장이 부족하였다는 의미는 아하스 시대에 제사장들이 성직을 버리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났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제사장 직분을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으며 그 직분을 알아주지도 않았으니 제사장 직분을 버리고 나가서 막일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성전을 성결케 하고 속죄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도 받았으니 이제 히스기야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를 원했다.
이를 위하여 물론 히스기야도 감사 제물을 드렸을 것이지만, 왕 외에도 백성들이 가져오는 제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원래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것은 제사장 몫이 아니었다.
제물을 가져와서 하나님께 제사하기 원하는 제주의 몫인데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제사장이 부족하여 번제 짐승들의 가죽을 능히 벗기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가장 보편화 된 해석은 백성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제물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그 수효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무엇보다 제사장들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형제들인 레위 사람들이 짐승 잡는 일을 도왔다.
그런데 이 일을 돕는 레위인들이 제사장들보다 더 성심이 있었다고 말하는 의미는 전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당시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입에 풀칠하는 일에 급해서 제사장 직분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아나선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신앙과 삶을 적당히 타협하여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정치적으로 도용하기도 하였으며 슬그머니 내려놓고 자기 유익을 위하여 감추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보다 성결함에 있어 더 올바르고 열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결한 레위인들은 겉으로는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히스기야의 개혁을 위한 숨은 일꾼들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시대에 바알을 섬기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고하며 바알의 선지자들을 상대했던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하였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보이지 않는 7,000명의 용사를 남기셨다.
(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7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또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었을 때 북쪽에 속한 사람들 중에 여호와를 진심으로 찾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치하에서는 도무지 신앙생활이 힘들 것 같아서 그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고 레위 사람들을 따라서 남유다로 망명을 하였다.
(대하 11:13-16)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레위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을들과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을 해임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 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주전 2세기 경에는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정치와 결탁하여 매관매직을 하면서 제사장들이 급속하게 세속화 되었다.
물론 구약의 절기에 의하면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속죄해야 하지만, 당시 시대성에 맞추어 타락하고 세속화 된 대제사장들은 더 이상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경건한 사람 곧 10만 명 당 한 명 꼴로 율법적으로 철저한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일컬어 팔레시아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팔레시아로 지성소에 들어가는 이들을 향하여 그들이 의로운 자가 아니라고 하셨다.
오히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사는 세리를 향하여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것이다.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제는 이처럼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아버지 품인 성소에 거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메어 다심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을 찢어 참 성전된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셨다.
주님은 날마다 이 지성소에 들어가셨으며, 이 땅에 있는 건물 성전은 참 성전의 모형일 뿐이다.
참 성전은 창세전 아버지 집이며 그것은 그 나라에 있다.
(계 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이처럼 성전 된 자들은 눈으로 보이거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늘 준비하신다.
제사장들보다 더 성결함에 열심이었던 레위인들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고, 엘리야 혼자가 아님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의 용사들을 준비하셨으며, 스스로 의롭다고 자청하여 지성소에 들어갔던 자칭 경건한 자들 대신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무시 당했던 세리를 준비하셔서 그를 의롭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며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 등에게 온갖 수욕을 받으셨던 주님, 그런데 그 분이 정작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생명을 죄인된 나에게 주시고자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휘장을 찢으시고 나로 하여금 왕과 제사장이 되어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셨으니 이것이 은혜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롬 5:15-18)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가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인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 곧 영생이다(롬 6:23).
나는 이 영생을 오해한 자였다.
그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정도로만 알았던 이 영생이 그토록 엄청난 생명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그래서 나의 신앙은 언제나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러면서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책만 했던 나의 인생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얻은 자이다.
그렇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지라도 아들을 힘입어 담대하게 일어나 아버지 집인 성소로 나아간다.
오늘도 그 성소로 나아가기 위하여 주님 안에서 말씀으로 교제하며 사귐을 갖는다.
내 영혼이 은총을 입어 주의 보혈로 중한 죄짐을 벗었으니 이제 나는 어디에 있든 그곳이 지성소요 아버지 집이며 나의 거할 처소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을 주님이 맡아 주옵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받아 주시되 이 땅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나를 장악하소서.
교회가 심한 분란 가운데 있나이다.
다 저의 부덕의 소치이오니 이 종을 벌하소서.
저로 인함임을 아나이다.
나를 멸하소서.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하오니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주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다윗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의 손에 나를 드리오니 나를 받으소서.
그리고 나를 통치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