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에 나온 문예지 창작과비평이 200호를 맞았다. 계간지로 발행을 하니까 일 년에 4권, 결호 없이 50년을 발행하면 200호가 된다.
줄여서 창비로 칭하는 이 잡지는 1966년에 창간되었다. 암울했던 시대를 거치면서 한때 출판금지를 당하기도 해서 한동안 창비를 발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창간 57년을 맞이한 올해에서야 200호가 나온 것이다. 창비 말고도 한국에는 수많은 문예지가 있지만 유독 창비는 내게 특별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나는 등 격동의 시대에 나는 10대 후반이었다.
동무들이 학교에서 삼각함수와 미적분을 배우는 동안 나는 가리봉동에서 공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절임에도 어떤 꿈을 품고 살았다기보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놀러다니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공장에 내 또래가 없어서 대여섯 살 차이 나는 선배들과 어울렸다.
가리봉동에 야학이라는 게 있어서 몇 번 가 봤으나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재미가 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다.
어느 날 우연히 창비를 알았다. 야학을 지도하는 대학생 형 중에 풍물을 하는 선배가 있었다.
노동자 축제에서 그가 꽹과리를 기가 막히게 쳤기에 나는 그 소리에 홀딱 반했다. 흔히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었지 싶다.
내 누이처럼 그도 늘 나에게 공부할 것을 권했고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이 와야 한다고 했다.
천성이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였던 나는 그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렸다.
그 형의 동지들이 모이는 사무실에 갔더니 창비가 몇 권 꽂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활자 중독자라서 읽을거리가 있으면 뭐든 반가웠다.
創作과批評 한자 제목에다 필자도 전부 한문이라 낯설었지만 관심이 갔다. 그 선배가 가져가서 읽어도 좋다고 했다.
그 동안 삼중당 문고로 세계 문학을 몇 권 읽기는 했어도 나는 주로 공장 기숙사에 굴러다니는 샘터나 겉장 떨어진 선데이서울을 읽었다.
그런 내게 창비에서 읽은 천승세, 현기영 소설은 충격이었다. 詩는 어려워서 지나쳤으나 소설은 빠짐없이 읽었다.
선배 사무실에 꽂혀 있는 창비를 다 읽고 나자 연재하고 있는 장편 소설의 앞 부문이 궁금했다.
청계천 헌책방을 가서 과월호 창비를 구해 장편 소설의 빠진 이야기를 연결해 읽었다. 이후 창비는 나의 필독서가 되었다.
틈틈히 창비 과월호를 구하러 갔던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상계와 씨알의소리도 알았다.
창비에서 이문구, 황석영, 윤흥길 등을 읽었고, 함석헌, 리영희 선생과 경제학자 정운영, 박현채 선생 등의 사상을 접했다.
나의 독서 편력이 소설에서 사회과학으로 확장되면서 세상 보는 눈이 점점 넓어졌다. 창비로 私淑을 한 셈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 스승이 없는 나는 창비가 선생이랄 수 있다.
창비는 200호 기념 표제를 <새로운 25년을 향하여>로 정했다. 보통 비전 제시는 50년이나 100년을 내다보는데 왜 25년일까.
좋게 보면 너무 먼 곳을 보지 말자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25년 후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요즘 내렸다 하면 물폭탄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면 옛날 비가 아니다.
누구나 생태계 교란과 기후 위기를 말하지만 실천은 미비하다.
코로나보다 더한 놈이 나와야 정신을 차릴지는 모르겠으나 기후 위기와 함께 AI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번 창비 작품들도 시가 보는 미래와 소설이 보는 미래다. 이번 호 최진영의 소설에는 섹스 없이 유전자 맞춤 디자인으로 태어난 아이가 나온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월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변화는 천지 차이다. 창비는 2026년에 창간 60주년이 된다.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1966년에 태어난 사람이 환갑이 되는 2026년까지는 내가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행여 25년 후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그건 운명이면서 행운일 것이다.
오래 전에 만난 잡지 창비가 내 운명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어도 새로운 다짐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냥 살지 않겠다는 경각심을 키워 줬다고 할까.
어쨌든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창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잘 헤쳐온 지금처럼 말이다.
첫댓글 창비가 유현덕님 삶의 지침서가 된 듯 보입니다.
흔들리는 사춘기 감성에 올바른 잣대를 지닐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는 친구처럼 한결같이 유현덕님 곁을 지키고 있나 봅니다. ^^~
수피님이 마치 제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적절한 댓글을 주셨습니다.
우연히 만난 창비지만 제 삶의 지침서가 된 것은 분명하네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전환점을 제게 마련해줬다고 할까요.
성경책 읽듯이 꼼꼼하게 읽었던 창비가 지금 저의 일부를 만들었다고 보네요.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함박산 님이 삼중당 애독자였군요.^^
당시 가난한 이들에게 삼중당 문고는 범우 사루비아 문고와 함께 단비같은 책이었지요.
투르게네프부터 법정 스님까지 그 문고들이 끼친 영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답니다.
아마 함박산 님 필력도 삼중당에서 출발했지 싶습니다.
삼중당 동지 만나서 반가워요.ㅎ
네 좋아요. 책 을 읽는 것 삶에 뿌리가 되어요
네, 책을 많이 읽는 부지런한 자연님도 보기 좋습니다.ㅎ
신동아,사상계,창작과 비평..
1970년대에 자주 접한 추억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자신의 인생에
나침판 역할을 하는 그 무언가를
우연히 만나기도 하죠.
깔끔한 글
매력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가을님과 같은 잡지를 공유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어떤 잡지보다 저에게 창비가 끼친 영향력은 크답니다.
거기에 실린 서평을 읽고 나서 그 책을 읽게 되고
읽고 나면 다른 호기심이 생겨 연관 서적을 찾게 되고
제 지식의 대부분은 제도권 교육이 아닌 야생에서 배운 거랍니다.ㅎ
현덕씨가 책을 많이 읽어서 ㅎㅎ
똑똑하단말씈 ㅎㅎ
듣고 보니 쬐끔 맞는 말 같기는 하네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선생은 없지만 책이라도 있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요.
요즘 독야청청 왕성하게 빛나는 지존님의 필력에 박수 보냅니다.
화이팅요.
긴 글을
천천히 정독하며 읽어 봅니다~
유현덕님의
좋은 친구인 창작과 비평...
나는 활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몇 문장으로 끝내도 충분히 좋은 것을
길게길게 쓴 글이라고 하면서~
짧은 글이 아니면 클릭하지
않거나 ,모르고 클릭했을 때는
휘리릭 넘어가 버릴 때가...
피케티 님의 솔직한 댓글이 마음에 스며듭니다.
짧은 글은 다른 사람이 많이 쓰니 저라도 길게 쓰려고 하네요.^^
행여 클릭했다가 너무 길거든 그냥 후딱 지나가셔도 괜찮습니다.
누추한 글이지만 많은 사람이 읽기보다 읽고 싶은 사람이 읽었으면 한답니다.
지금 피케티 님이 끝까지 읽은 것처럼 말이죠.ㅎ
@유현덕
사실~
제가 글쓰기 + 읽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카페 놀이터에서 쓰는 글이
원고지 7장 분량쯤 넘어가면
엄청나게 긴 장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옛날에 읽었던
우리나라 단편소설 제외하고,
평생 읽은 책이 몇 권이 안 됩니다)
까지 학습, 시사, 과학, 문예 등 다양한 내용을 실어 청소년들의 성장기에 정서 순화, 학습 활동, 여가 선용에 크게 이바지했던 잡지가 <학원>이었다.
고1(1974)부터 고3까지 받은 학생기자 위촉장과 고3 때 <학원>에서 공모한 연작소설에 당선되어 받은 상패도 나는 간직하고 있다.
민순님의 화려한 필력과 수상 이력에 별책 부록까지 딸린 댓글 잘 읽었습니다.
소년조선일보는 제가 인천에서 신문배달 할 적 연재 만화를 열심히 봤더랬지요.
언급하신 문예지 학원이 여러 시인들의 등용문이었다는 것을 박재삼 산문에서 읽은 것 같습니다.
저도 80년대 중반쯤엔가 복간된 학원을 잠시 구독한 적이 있네요.
이후 다시 폐간이 되었으나 괜찮은 잡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순수 문예지 학원의 역사를 알려주셔서 공부가 되었네요.
민순님의 건필을 빕니다.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비플렛 님의 진지하고 똑똑한 댓글에 공감합니다.
당시 가리봉동에는 위장 취업한 대학생이 있었더랬지요.
비플렛 님 말씀처럼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그들이 편한 길 두고 가시밭길 걷기를 자처한 것은 분명하네요.
님이 언급한 노동자들이 홀대 당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저는 마음 부자로 제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산답니다.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행복한 노동자랍니다.ㅎ
@유현덕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세상'
박정희시대엔
이 말만 나오면
무조건 남영동에
끌려 갔었지요.
그 시대에는
그 뜻은 완전히
곡해되어 있었고
미운 상대에게는
지금 좌파라고 씌우듯 위장취업내지는 의식화되었다고
씌웠었지요.
지금은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말은
잘 쓰질 않지만
노동자도 회사의
일원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국가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고,
국민이듯이
회사의 주인은
회장 또는
오우너라고 불리는
개인만이 아니라
주주와 일하는
사람들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혜전2 혜전님은 아주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군요.
나이들수록 보수화되어 간다는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며 산답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살면 위기에 뭉치기가 훨씬 수월하겠지요.
오랜 기간 노동자로 살았지만 고용주였던 시절도 있었으니 늘 겸손하려고 합니다.
답이 늦었지요? 제가 이렇게 사네요.ㅎ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접하면서
그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하고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는데
창비가 유현덕님께는 큰 역할을 한것 같습니다
그제 ebs에서 우주로켓 위성에관한 강연에
스푸트니크 라이카 익스플로러~더욱 눈반짝 들었어요 덕분에 ㅎ
그렇군요.
스푸트니크 라이카도 기억하시고 아주 똑똑한 정아님이셔요.^^
제 글이 정아님께 조금이나마 영향을 줬다니 기분 좋습니다.
근본 없는 제 인생에서 여러 터닝포인트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창비랍니다.
정아님이 언급하신 언제 누구를 만나고 겪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기도 하듯이
사람으로 인한 저의 인생 전환점도 차차 이야기해볼까 하네요.ㅎ
전 신 동아 마이 훔쳐 읽었지요
책도 왜그리 귀 했던지 그 시절엔
좋은 글 읽었습니다.
예전에 신동아가 시사 잡지의 선두였을 때도 있었다지요.
책이 귀했던 시절 운선님의 활자 허기를 신동아로 달래셨다니 다행입니다.
모진 세월 잘 이겨냈으니 친근한 활자들과 오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