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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1933년 제네바 호텔 식당서
우연히 운명적으로 만나
1934년 결혼식 이후
이승만의 비서, 동지로 한평생
나이, 인종, 국적, 극한의 역경을 초월한
‘세기의 로멘스’
‘운명적 사랑’
신혼여행을 마친 이승만 부처가
하와이에 정착하기 위해
1935년 1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을 때 모습.
연합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의 병상을 지킨 프란체스카 여사.
4.19 정신을 칭찬하며
자진 하야 후
휴식 차 떠난 하와이행,
그러나 어지러운 국내정치와
反이승만 여론으로
망명길이 되고 맙니다.
귀국을 간절히 바라다
1965년 90세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승만 기념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첫 만남 &
눈에 비친 이승만 대통령
30년전에 작고하신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님께서
88세에 남긴 멋진 뒷이야기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첫 만남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중,
그 가운데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첫 만남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인연의 시작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때는 1933년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으며,
이듬해 10월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신랑 이승만 박사는 59세,
신부 프란체스카 여사는
34세였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긴
우리민족의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
장문의 글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탄생시키고
대한민국 위상의 초석을 이룬
국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뇌물 받고 걸려서 자살한
노무현정신은 무엇인가요?
위대한 이승만정신은
언급하는 지도자가 없네요.
슬픈 현실속에 위대했던
그러나 잊어버리려고 밀어내 버린
건국대통령 이야기를 다시 새겨봅니다.
30년전에 작고한 여사가
88세에 남긴 멋진 뒷이야기
프랜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첫 만남
내 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될 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전시관과 기념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 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장수 하셨던 아버님을
보필하시는 중에
그 생활이나 식사관리,
건강상의 비결 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듯 싶은데요"
하고 조르는 바람에
나의 두서없는 말을
며느리가 받아쓰기로 하여
이글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55년전
1933년에
내가 리박사를 처음 만나게된 곳은
▲ 1933년 2월 21일 저녁,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우연히 처음 만난 제네바 호텔 드 루씨.
바로 앞 레만 호수를 건너는
몽블랑 다리가 보인다.(자료사진)
호텔 드 루씨(Hotel de Russie)의 레스토랑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반에 있던
호텔 '드 루씨'의 식당이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빠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당시 리박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있던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학정을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동포들의 애절한 입장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각국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는 등
각방으로 활약중이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
저녁식사를 하려고
4인용의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 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리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
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락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리박사의 첫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워크라우트(sauerkraut)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 그것이 주문한
메뉴의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 골라 주문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 전에
불어로 "본 아뻬띠!"
(Bon Appetit! 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 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마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은 힘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기 직전에
우리 독서클럽에서 보내주어 읽었던
『코리아』라는 책속의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한국말이 생각났다.
내가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
하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이나 놀라면서 반가와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을 알아주는
외국인이 드물었고
또 알아도 일본의 악선전으로
잘못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자기 조국 '코리아'를
그것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무척 기쁘게 한 것 같았다.
그때 지배인이
베른에서 온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그 분은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하고 급히 자리를 떴다.
▲ 제네바 국제연맹 건물 앞에 선 이승만,
오른쪽 사진은 10대시절 프란체스카 도나
(Francesca Maria Barbara Donner,
1900~1992).ⓒ뉴데일리DB
첫 눈에 끌리다...
기품 있는 신사의 뜨거운 ‘독립 열정’
다음날 나는 신문에 실린
그분의 사진과
신문 한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나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서
내 이름은 쓰지 않은 채
그분에게 전해달라고
호텔 안내에게 맡겼다.
그런데 답장이 왔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리승만'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차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속에서
정식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면서도
외로운 한국 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세 딸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하여
사업을 계승시키려고
나를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언어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가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연마해온
나의 특기를 가지고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이 항일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어머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한국의 애국자에게
마음을 쓰며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더우기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 대용으로 날 달걀에다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저명인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예정을 앞당겨
곧바로 나를 데리고
'빈'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분과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몰래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 맛나는
사워크라우트 한병을
그분에게 전해주도록
호텔 고용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이승만 인터뷰 기사.
'라 트리뷴 도리앙'신문 1면 전면에 가득찬
동양신사 독립운동가의 열변에 감동한
프란체스카는 신문을 오려 이승만에게 전한다.
‘일급 비서’ 만난 이승만,
4개국 항일연대 협력체 구상
그 후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회사를
수신처로 하여
제네바의 그분과 서신 연락을 했다.
바로 그 해 7월초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리박사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한국의 독립문제로
만날 사람이 많아 늘 바빴고
나도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빈'의 명소와
아름답고 시적인 숲속을 거닐기도 했다.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 『국역 이승만 일기』표지.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표지ⓒ뉴데일리DB
비엔나 숲 속의 데이트...
‘사랑’을 알고 결혼 약속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했더니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을 보내게 되다니'
하며 회한섞인 한숨을 지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나는 그분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커플이 밤을 지낸
비엔나 숲속의 에르메스 궁.
오른쪽은 이승만이 약혼선물로 준
'어머니의 참빗'(이화장 전시중).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음해인 1934년
10월 8일 하오 6시 30분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텔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님과 존 헤인즈 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분의 동지들과
동포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우리들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 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모든 것을 참고 이해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노력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남편은 그간 해외에서
30여 년을 독신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과 한개로 하루를 견디며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심지어는 생일날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혼후에는 생일날만은
꼭 미역국과 쌀밥과 잡채와
물김치를 차려서 기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아내가 만들어주는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그분은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하며 감사했다.
프랜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2.
신혼시절
지금와서 회상해보면
우리들의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온 민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독립투사의 국제결혼에는
남다른 어려움과 말 못 할 사연이 많았다.
▲ 지난해 처음 발굴한
이승만-프란체스카 결혼사진.
오른쪽은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환영레이를 목에 건 신혼부부ⓒ뉴데일리DB
뉴욕서 결혼...하와이에선
“서양부인 데려오지 마시오”
특히 결혼 직후
나를 가장 서글프게 했던 일은
하와이 동포들이 나의 남편에게
'혼자만 오시라'고
초청전보를 보내왔을 때였다.
그분을 보필했던 동지들이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두번씩이나 보내왔을 때
나는 수심 가득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기소신대로 행동하는 남편은
하와이 여행에
서양부인인 나를 동반해주었다.
남편은 하와이로 가는 배 안에서
몹시 마음을 죄고있는 나에게
'이번에는 우리를 환영해 줄 동지가
아무도 없겠지만
다음 여행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이박사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동포구경꾼들이
부두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이박사가 데리고 온 서양부인에 대한
동포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당시 하와이에 있던
한국동포 1천명 이상이 모여
큰 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이 뜻밖의 모임에서
우리부부에 대한 동포들의 노여움이
다소 풀린 것 같았다.
우리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동포들은 자기집으로 우리를 초대하거나
맛있는 한국음식과
김치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김치와 고추장을 먹어보고
그 매운맛에 정말 혼났다.
김치도 매웠지만
고추장은 입 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김치와 고추장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이기 때문에
만드는 법을 자세히 배워두었다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곧
김치부터 담가보았다.
내가 담근 첫번째 김치맛은
남편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성공작이었으나
고추장은 실패작이었다.
이후로도 내가 담근 김치는
남편은 물론 당시 장기영 씨와
임병직 씨를 위시한
한국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다.
지금의 유학생들과는 달리
김치를 담가 먹기 힘들었던
한표욱 씨 같은 동포 유학생들에게도
나는 김치를 담그면 가끔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신혼생활을 시작할 무렵
남편은 나에게 '한국의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나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 대견해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친정이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남편들은 미국 남자처럼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일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거나
아내가 남편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고 그분은 여러 번
나에게 일러주었다.
아뭏든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고
그분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 결혼반지,
진주가 박힌 위 반지는 이승만이 산 것,
아래 다이어몬드가 박힌 반지는
프란체스카가 산 것.
오른쪽 장도리와 드라이버는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것.(자료사진)
하와이 최대의 한인 결혼잔치...
“김노디는 어디로 가나?”
신혼초에 우리는
미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그때 윤치영 씨 내외를 방문했었는데
윤치영 씨 부인이 내게
예쁜 한복을 선사해서 입어보니
참으로 잘 어울렸다.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무척 흐믓해 하였고
나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이후 내가 한복을 즐겨 입게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우리의 결혼식때
나에게 한복웨딩드레스를
지어입도록 부탁한 남편의 뜻을 따라
남궁엽 씨 부인과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하얀 천으로
한복을 만들다가 그만 실패해서
마음 아팠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다행히도 아들 인수가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가 아름다운 한복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돌아가신
남편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한국의 아름다운 신부들이
서양식 웨딩드레스보다는
한복웨딩드레스를 입는다면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 하고 생각해 본다.
신혼시절 남편과 내가 방문했던
미주의 우리동포들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떤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을 빨리고 있는 엄마와 아기가
다 영양실조에 걸린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가슴 아파하던
남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보내는
한국동포의 뜨거운 애국심에
나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남편이
왜 3등열차나 3등 선실만을
골라서 타고 다니며
그토록 오랫동안 필사적인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는지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신혼살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했었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적게 먹고 재치있는 여자로
생각되어 아내로 맞았다'고 농담을 했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한 성격에다
건강하고 패기에 넘치는
59세의 신랑에 비해
34세밖에 안 된 나는
신경성 위병에다 변비로
신혼초에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후 매일 새벽
남편이 권하는 냉수를 마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보니
내 병은 완쾌되고 건강도 좋아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때나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보던 성경을
우리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가끔 읽어주곤한다.
우리가 결혼하자
남편의 비공식 여권을 내줄 때마다
신경을 써야 했던 미국무성의
미시즈 시플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으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하여 나는 남편의
조국독립에 대한 집념과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한국인 특유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언제나 압도 당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됐지만
그분과 결혼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나는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남다른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분이 끝까지 미국시민권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인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내 건 30만달러의 현상금이
목에 걸린 채 비공식 여권을 가지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하와이와 상해, 제네바, 모스크바 등
오대양과 각 대륙을
종횡무진 나그네 생활을 하였었다.
그리고 중국인 시체를 운반하는
배 안에 누워서
태평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서른살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30여 년을 줄곧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신혼시절 내가 마련한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여
남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그분이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남편이 가정의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엄수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맨 처음 내가 한국에 왔을 때도
나는 남편이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고
이 일로 인해 남의 빈축도 샀고
남편으로부터 여러 번
책망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남편은 늘 학생처럼
열심히 단어를 외우며
꾸준히 공부를 했다.
나와 결혼한 후 80이 넘을 때까지도
남편은 계속 공부를 하며
틈나는대로 붓글씨를 연습하는
성실한 노력가였다.
남편이 붓글씨를 연습할 때는
언제나 내가 곁에서 먹을 갈아드렸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함께
쉬지 않고 노력하며 일하는 남편은
아프거나 늙을 틈도 없는 것 같았다.
프랜체스카 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 3.
가난한 독립운동가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로 자란 나에게는
낯선 미국에서의 궁핍한 결혼생활이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것이었다.
생활이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남편은 언제나 그분 특유의 유머로
사람들을 곧 잘 웃기고
여유를 보이는 낙천가였다.
"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이며
봉황은 아무리 배고파도
죽순 아니면 안 먹는다"는
한국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던
남편으로부터
나는 가난한 생활을 품위있게 이겨내는
지혜와 절도를 배웠다.
한국독립지도자의 위신을 지키며
모든 면에서 남모르는 내핍생활을
지속했던 독립운동시절에
우리는 하루 두끼를 절식할 때도 있었다.
나와 단 둘이 식사할 때는
남편은 늘 기도를 했다.
"우리가 먹는 이 음식을
우리동포 모두에게
골고루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루 한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머리 숙여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하게 느껴져서
목이 메인 일이 이제는
먼 옛날 얘기가 되었다.
신혼시절의 내 꿈은
하루속히 한국이 독립되어
고달픈 독립운동가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었다.
지금도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릴 때면
워싱턴에 살던 시절
남편과 함께 눈을 치우던 일이 생각난다.
우리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집 앞의 눈을 치웠다.
그당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은
우리집 단 하나 뿐이었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남편과 같이 했던 일은
내 가슴속에 줄거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 200달러 짜리 중고차 윌리스를 몰고
미국 대륙을 횡단한 이승만.
모스크바의 하룻밤,
소련은 일본 압력에 비자 취소
독립운동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땅을 누비고 다닐 때였다.
남편은 이곳저곳의 강연시간과
방송이나 신문기자와의
약속시간에 대느라고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태풍처럼 질주했다.
그의 과속운전은
먼 거리를 짧은 시간에 가야 하는
바쁜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껏 달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혁명가적 기질 탓으로 보였다.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기 위해
남편이 차를 몰고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달리던 때의 일이다.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남편은 그 격렬한 과속운전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러워서
과속을 제지했지만
남편은 아랑곳없이
대낮에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마구 달렸다.
곧 두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우리차의 뒤를 따라왔다.
남편은 더욱 무섭게 속력을 내며 달렸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지고
등과 손에 땀이 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으나
남편은 태연하고 의기양양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끝까지 따라왔던
두 대나 되는 기동경찰의 오토바이에
붙잡히지 않은 채
남편의 차는 정시에
프레스클럽 강연장에 도착했다.
남편이 연단에 올라서서
열변을 토하며
청중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수십번 박수갈채를 받았다.
강연장 입구에서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벼르고있던 두 대의 기동경찰도
어느새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들도 남편의 연설에
무척 감동된 모양이었다.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 남편을
붙잡을 생각도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 못 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
하고 그들이 남편을 향해
승리의 신호를 보내고
웃고 돌아가자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때부터 자동차 운전만은
꼭 내가 해야 되겠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남편으로부터
자동차운전을 배웠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살았구나" 하고 정신이 드는
남편의 차에는
나 이외엔 누구나 타기를 꺼렸다.
그러나 내가 운전할 때는
비단결처럼 곱게 몬다고
남편은 나를 "실키 드라이버"라고 불렀다.
운전대를 잡으면
폭풍처럼 격렬하게 달리지만
붓글씨를 쓰거나 시를 지을 때는
남편은 잔잔한 물결처럼 조용했다.
늘 젊고 건강했던 남편의 특이한 성품은
무엇에나 열중하면
그일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책을 보거나 붓글씨를 쓸 때
한번 정신을 집중하면
옆에서 창문이 깨져도 몰랐다.
일평생을 온갖 풍상 다 겪으며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해온 남편이
그토록 건강했던 것은
늘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지내는
어릴 적부터의 생활습관과
편안하고 욕심없는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낚시질 할 때는
고기를 낚아서는 도로 놓아주고
오직 낚시질만을 즐겼다.
남편이 항상 낚은 고기를
도로 물에 놓아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왜 애써 잡은 고기를 놓아주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남편은 "나는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즐기려고
낚시질을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항상 바쁜 일정을 나누어
주말이면 남편은 한국학생이나
동지들과 낚시하러
포토맥 강변이나 호수가로 나갔다.
미국에서 낚시할 때면
남편은 가끔 한강변의 광나루 낚시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와 함께 미국 각지를 돌아다닐 때도
남편은 늘 자기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려서 연날리기하며
뛰어놀던 남산과
복숭아꽃이 만발하던 고향집과
동네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따먹던 복숭아와 사과 얘기를 할 때는
마치 소년 같았다.
어디 가나 남편은 철 따라
나무와 꽃가꾸는 일에
열심이었다.
남편이 어찌나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잘 가꾸는지
일류 정원사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남편을 아는 수목전문가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일을
남편에게 물어오기도 했다.
남편은 늘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사람은 흙을 밟으며
흙냄새를 맡아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하면서
"항상 우리나라의 나무와 흙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하라"고 일러주었다.
남편은 미국이나 하와이의
동포어린이들과 함께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잘 불렀고 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ad0APU247w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님편은 늘
"욕심 내고 화 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해롭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선의 비결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히 갖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남편은 말해주었다.
미국에서 남편은
많은 사교모임에 나갔지만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청년시절 집안 어른들로부터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는데
구국운동할 때부터
술과 담배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해방후 귀국해서
가끔 윤석오씨 와 이기붕 씨 집에서
정성껏 담가보낸 막걸리를
"불로장수주"라고
남편은 나에게도
조금씩 권하며 즐긴 적은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후
"굶는 국민이 있는데
어찌 쌀로 만든 막걸리를
마실 수가 있겠는가"고
막걸리는 물론 다른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언젠가 어느 애주가 친척이 와서
나에게 "만일 대통령이 술을 좀 마셨더라면
한국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술과 담배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우리 역사에도
보탬이 됐으리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남편은 가슴에 울분이 쌓이면
장작을 열심히 팼다.
장작패는 일은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해왔다고 했다.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 없는 설움과 냉대를 받으며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려 온 남편에겐
장작패는 습관이야 말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건강을 지켜준 비결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화나 울분은 참는 것보다
빨리 풀어야 건강에 좋다고 한다.
독립운동하던 시절이나
대통령 재임시나
남편은 틈나는 대로 나와 함께
맨손체조를 하거나
산책을 했고 정구를 즐겼다.
너무나 감동적인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 여사의 회고록입니다.
뒷부분이 잘린 것 같은데
연결해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와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누리고 사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이승만, 박정희 두 분의
영웅 대통령 덕분입니다.
좌파 위정자들이
두 분의 은혜를 애써 감추고
폄훼하는 것은
오직 집권을 위한 기만전술입니다.
두 분 대통령의 영웅적인 업적이
알려지면
북괴의 김일성이 너무 초라해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비교도 안 되지만
오직 집권과 공산화를 위해
우리 국민 3백 여만명을 죽인
6.25전쟁만 해도
그 놈은 만고의 역적입니다.
그런자를 미화하고
추앙하는 좌파들은
그들 역시 역적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유민주 동지들은
이 자료를 그저 읽고
고개를 끄떡일 뿐만아니라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읽혀서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확립하는데 애써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료를
20여 개 단톡방 수천명에게
널리 전파할 예정입니다.
우리 다 같이
우리나라 자유민주 정체성을 지키는데
합심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퍼온 글 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분들에게 전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출처: 이애란 페북
100년전 이승만대통령의 동영상
1921년도 자료
(미UCLA대학 영상자료실)
1942년 이대통령의 육성도 포함
▶️https://youtu.be/7b8S3Z4y9JM
100년 전 기록해 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연설 영상을
수집하기까지.
전 과정 공개
KBS 현대사 아카이브 프로젝트,
우리의 기억 l 230210 KBS1 방송
1921년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국제회의가 열리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하지만 KBS가 발굴한 영상 속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워싱턴이 아닌 샌프란시스코의
한 건물 앞에 서 있다.
왜 워싱턴이 아닌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상에 담겼을까?
영상의 수집 과정과 함께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본다.
또한 KBS는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귀중한 오디오 자료를 찾아냈다.
바로 1940년대 ‘미국의 소리’ 전파를 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육성이다.
독립을 갈망한 국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던 희귀 자료를 최초 공개한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식민지 개발의 성과를 과시,
선전하려는 의도로
백무선, 남만주, 목포 등의
지역을 배경으로 영상을 만들었다.
당시 고향을 잃고 한반도 북쪽의
국경 마을과 만주로 떠난
이주민의 모습을 최초로 공개하며
1930년대의 서울, 금강산 등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항공샷을 소개한다.
해방 후에서야
우리는 우리가 찍은 공식적인
영상 기록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전진대한보’라는 기록 영상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총 54편 중 확보된 영상은
20여 편.
제작진은 해외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 일부로 추정되는 영상을 발굴했다.
나머지 부분을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당위성을 살펴본다.
한국전쟁기 전후에도
일상은 계속됐다.
어린이날 행사,
6.25 전쟁기
춘천에서 열린 결혼식 장면 등의
일상을 담은 영상과 함께
1957년 한국의 농촌을 지원하기 위해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가
취재한 영상을 공개한다.
또한 미 공보원에서는 이른바
‘문화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를 제작했다.
‘교육제도’와 같은 문화영화의
제작 배경과 숨은 의의를 알아본다.
옮겨온 글 편집
청산 노승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