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대동강이 동쪽으로 흐를 리가 있겠는가. 평양의 대동강은 절대로 동쪽으로 흐르지 않고, 서쪽으로 흘러서 황해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대동강이 패수라면 분명히 이 기록에 서쪽으로 바다에 흘러든다(西入海)라고 해야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동쪽으로 흘러들어간다(東入海)는 강, 그것은 북경(北京) 동북쪽으로 흐르는 강인 백하(白河)가 곧 패수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보다 조금 위쪽에 있는 난하가 패수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그보다 후세에는 그렇게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틀림없이 백하이다. 중국어로 백(白)자는 빠이로 발음하는데 패(浿)자도 역시 빠이로 발음한다. 따라서 백하가 패수임이 틀림없다.
아편 전쟁 무렵에 저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바로 이 백하를 거슬러 올라가 북경에 있는 청조의 이궁(離宮)을 약탈한 바로 그 백하가 패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도 패수의 서쪽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고 했다. 패수가 대동강이 아니라는 것은 중국 측 기록인 ‘수경’ 이외에도 이익의 ‘성호사설’, 연암의 ‘열하일기’, 이조말엽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지어진 ‘흠정 증보 문헌 비고’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그 말썽많은 기자 조선도 평양이 아니다.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하고 의심을 품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후대에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을 높이고 섬기려고 가짜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또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보면 조선(朝鮮)은 영평부(永平府) 경내(境內)에 있다고 했다. 영평부는 한때 중공의 등소평이 도사리고 않았던 북경 경내이다.
[치우천-여기서 조선은 이성계의 조선이 아니라 단군의 고조선을 말함]
1780년 북경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온 실학자 연암 선생의 그 유명한 열하일기에도 아래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연암선생은 패수를 확인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다 죽은 동이족인 백이숙제의 무덤도 보고 기자(箕子)의 사당도 보았다는 기록을 열하일기에 적어 놓았다.
연암의 마지막 도착지는 연평부였다. 영평부는 북경 안에 있었으니까 북경은 바로 우리 땅이오.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본고장이었다. 그러니까 서기전 1세기 내지 2세기까지만 해도 우리민족의 역사 활동의 중심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바로 이 지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착같이 식민사관을 고집하느라고 서안평이 의주 건너 안동에 있었다는 트집을 부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한서지리지 하에는 분명히 ‘요동군에는 현(縣)이 18개 있는데 그 중에 서안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서 지리지라는 책은 만리장성 이남의 땅이름만을 다룬 책이다.
따라서 서안평이 만리장성 이남이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그런데도 식민사학자들은 억지를 일삼고 있다.이밖에도 이러한 기록은 많이 있다.
이것은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쳐들어올 때 좌12군 우12군 합해서 24군 2백만 대군이라는 군사가 출발한 장소를 기록한 것이다. 낙랑등도라 했는데 그 당시는 물론 낙랑군은 멸망하고 평양이 고구려 수도라고 할 때, 평양을 치러 오는 군사가 출발 지점이 낙랑등도라니 식민사학자들 말대로 낙랑이 평양이라면 평양에서 출발하여 평양을 치러 왔다는 말밖에 안된다. 누방은 낙랑군 속에 있는 현이다. 장잠은 현도에 속하는 현이다. 현도가 함남 평북 일대라면 이것도 말이 안된다.
우12군은 점제에서 나와 숙신 갈석에서 출발한 것이다. 만리장성 모퉁이 갈석산에서 평양을 치러온 것이다. 이처럼 사대사관으로 정통있는 삼국사기를 보아도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한서지리지에서 말한 대로 ‘요동군에는 현이 18개 있는데 그 중에 서안평이 있다’는 기록은 요동군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만주땅 요동이 아니라 만리장성 이남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것을 모르는 일부 사학자들은 낙랑군을 만주지방에서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일조차 있었다.
또 그때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흔히 패수(浿水)라고 하면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대동강으로 잘못 알았었는데 이것도 이와 비슷한 잘못이다. 물에 관한 중국 최초의 기록인 수경(水經)이라는 책을 보면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든다
(浿水出 樂浪郡 樓方縣 東方過 於臨浿縣東入海)‘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낙랑군이니 누방현이니 하는 딴이름은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평양 근처가 아니라, 만리장성 이남의 북경일대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상 인용글)
치우천의 생각..
제가 소장하는 역사책에 수경주水經注의 일부 구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수경주는 북위의 지리학자 역도원이 편찬자 미상의 지리서인 수경에 주석을 단 책입니다.
윗 책에서 소개된 수경의 구절과 비교해보니까 다른 부분이 몇 군데 있군요.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浿水는 낙랑樂浪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누방현의 ‘누’자가 樓와 鏤..어느 글자가 맞을까...
동방東方과 동남東南이라..흠..임패현을 지나는 방향이 동쪽인지 동남쪽인지 헷갈리겠군요.
과過와 임패현臨浿縣 사이에 於자가 있고, 東入과 海사이에 于자가 빠졌군요.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지 원..역시 한문은 매우 골치 아픕니다.
최소한 조선이 아닌 고려시대에 한글이 나왔다면 우리 역사가 뒤죽박죽이 되는 일은 없을 텐데..
윗 책의 저자가 인용한 정관정요貞觀政要 9권에 수나라의 고구려원정에 관한 기록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삼국사기 영양왕 본기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정관정요에 없는 지명들이 몇 개 보입니다.
영양왕 23년(612)...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帶方·襄平等道 絡繹引途 摠集平壤
(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堤奚) ·답돈(踏頓) ·숙신 ·갈석 ·동이(東)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한다)
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조선,옥저,답돈 등이 왜 정관정요에 기록되지 않았을까..
전체적인 내용에선 큰 차이가 없지만 삼국사기가 지명들을 거의 빠짐없이 기록한 모양..
근데..중국인이 패浿와 백白 두 글자 모두 똑같이 빠이라고 발음한다는 사실이 재미있군요.
그러고보니 중국인의 사성四聲 중 입성入聲이 실제로는 중국인 사이에서 없어진 발음이라는 건 어느 글에서 본 것 같은데..
맥(貊, 북방의 고구려를 뜻함), 박(亳, 은나라의 수도), 막조선, 박달임금, 예맥 등 입 안의 혀가 안으로 구부러지면서 발음하는 입성이 한국어에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발음을 하지 않고는 한국어를 할 수 없죠. 그게 진짜 고대 동이족의 입성일까요.
그러고 보니 은나라도 시조인 설이 알에서 깨어났다는 난생설화가 있습니다. 그럼 은나라도 동이족??
북경어는 거의 받침 끝소리가 없이 발음하는 것 같군요.
북경어보다 광동어가 진짜 중국어일지도 모릅니다.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화하족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아 대부분 강남으로 피했으니..아마도 광동어에는 입성이 남아있을 것 같군요
아주 오래되어서 책 제목이 기억 안 나지만..그 저자의 말에 따르면 주나라 경왕이 박고薄姑를 포고浦姑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춘추[공자가 쓴 역사서]에 나온다고 합니다.
박고를 포고라고 불렀다면...은나라와 달리 주나라 사람은 입성을 못하기 때문일까..
춘추시대에 나오는 주나라 경왕이라면..전국시대의 주나라 경왕敬王은 확실히 아니고, 경왕景王이 맞을 겁니다. 박고와 포고는 인명이라기보다는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지 도서관에 가서 춘추의 원문을 확인해 봐야겠군요.
하북성의 백하가 고대의 패수일까..
삼국사기에서 패강浿江, 패하浿河, 패수浿水 등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에 패수는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 있었던 모양..
하북성의 지도를 보니까 조수潮水와 백하白河라는 두 강이 합쳐진 강이 보이는데 바로 조백신하潮白新河라고 합니다. 이 강이 동쪽의 발해만으로 흘러 갑니다.
조백신하 동쪽에 난하가 있군요..그럼 조백신하가 패수???
이 강을 넘고 북경을 돌파하면 화북 평원이 펼쳐져 있으니 기마병에게 아주 유리하겠군요.
패수가 낙랑에 있고 패수 동쪽에 조선의 왕검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니..
패수가 지금의 백하이고 요하가 지금의 난하라면..번番조선은 하북지역..정확하게는 발해만 일대를 장악한 나라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번조선을 계승한 위만조선도 만주와 중원 사이의 통상로를 장악한 덕분에 엄청난 부를 독점했을 겁니다.
연나라 왕 노관(한고조 유방의 친구이자 건국공신)이 패수를 번조선과의 국경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생각나는군요.
유방이 죽은 후 노관은 신변에 위험을 느껴 연왕의 자리를 버리고 흉노로 망명했으나,
노관의 부장인 위만은 동행하지 않고 북쪽의 흉노가 아닌 동쪽의 번조선으로 망명합니다. 이때가 BC 195년입니다.
이듬해인 BC 194년에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의 마지막 임금 기준은 바다(발해)를 건너 한반도로 도망쳐 마한을 세웁니다. 이 마한도 나중에 백제에게 병합됩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하북성 난하 동쪽에 있는 번조선의 왕검성 근처에 환도성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고구려의 도읍지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왕검성)이고, 옛날 조선의 땅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환도성은 평양성과 가까이 있는 군사 수도였던 모양..
산상왕 때 국내성(길림성)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가 패수를 넘어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기회를 노렸으나, 동천왕(산상왕의 아들) 때 위나라 관구검에게 환도성이 함락당했죠. 다시 반격해서 설욕을 갚았지만..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도 강이나 바다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동북아시아는 고대 로마와 달리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서 수레가 다니기에 불편했고, 길이 멀면 운송비용이 그만큼 높아지니 배에다 화물을 실어 운반하는 게 더 이익이 많을 겁니다.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한반도 서해안 일대를 장악한 동이족이 강과 바다를 통해 서로 왕래하여 해운업海運業이 번성했습니다.
배가 닿는 곳 어디든지 바다와 육지의 부富를 얻고 물자가 유통되니 동이족의 나라들이 융성했다는 건 당연합니다.
지나족의 조상인 화산족의 발상지는 섬서성 서안(장안)의 화산華山(중국 오악 중 하나로 유명한 명산)입니다.
원래 지나족은 해변을 멀리 했는데, 춘추시대부터 해변의 이익을 깨닫게 되면서 절강, 강소, 산동 등 대륙 동해안 일대에서 동이족의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중화주의 사상으로 동화시키고, 계속해서 고조선의 영토를 침략한 겁니다.
훗날 한국이 통일되고 나서 육지와 바다 중 하나를 고르라면 바다로 진출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해운의 이익을 상실하면 문명이 진보하기는 커녕 후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디선가 중국인이 북방민족을 약화시키려고 라마불교를 도입시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요사 지리지에서 요녕성 요하의 지류에 패수가 있다고 하죠..이 강은 요양의 남쪽에 있고, 요하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어요. 또 서남쪽에 있는 발해만으로 가니까 동쪽으로 흐른다는 기록과 맞지 않지만, 고구려를 멸한 당나라가 평양성 남쪽에 패수가 있다고 기록했으니..요양은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성이죠.
대륙평양설에 근거를 들자면 바로 광개토대왕비... 보면 평양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한성(?)을 치는 구절이 있는데 한반도의 평양에서 한성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광개토대왕의 허를 찌르는 '전술'이었다라고 합니다. 근데 이 뱃길이란데 양면의 칼이라 이런 도박을 할런지...
제 생각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있는 돈황부 평양인거 같은데.... 그다음 한반도 평양이 바로 하평양. ....중국 지도를 보면 돈황부 평양 동쪽에 Tian, 즉 장안(지안)도 있습니다...허허허 그렇게 생각하면, 장군총은 아마 장안성의 수도건설을 추진한 안장열제가 아닐지... 진실은 저 너머에..-_-
첫댓글 번조선의 상국이던 고조선은 진眞조선, 진국이라고 불리기도 했음..흠..여진족女眞族의 진眞자와 똑같군요.
음....평양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중국에는 평양이 10여개, 만주에는 5여개가 있습니다) 패수가 북경(하북 기주성?) 위의 강인것은 분명합니다. 그 당시는 한수가 대동강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요, 사실입니까?
한수는 '한나라 한'자를 써서 지금의 황하강, 지금의 한강은 아리수, 지금의 요하는 압록수, 지금의 난하가 요하라고 어디서... 그럼 그 광개토대왕의 '한수를 넘어서 백제를 쳤다'는 기록은 중국땅에서 벌어진 일?
요서지리지에 보면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요양은 지금의 요하끝에 있는... 그러면 근초고왕때 백제가 평양까지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데 그러면 백제 그 당시의 영역은 한반도 대부분과 지금의 요동까지?
'여진'의 발음은 '누우신', '쑤우신'이라고 하네요. 즉 眞은 '신'의 음차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요사 지리지에서 요녕성 요하의 지류에 패수가 있다고 하죠..이 강은 요양의 남쪽에 있고, 요하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어요. 또 서남쪽에 있는 발해만으로 가니까 동쪽으로 흐른다는 기록과 맞지 않지만, 고구려를 멸한 당나라가 평양성 남쪽에 패수가 있다고 기록했으니..요양은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성이죠.
또 하나 한반도의 평양은 고구려의 부수도 '하평양'일수도... 사서에 보면 왕이'하평양순시'라고 나오는데 그냥 대충 평양'아래'를 돌았다라고 합니다. 근데 어순상 맞지가 않죠. 그래서 '하평양'을 하나의 명사로 봐야한다는...
대륙평양설에 근거를 들자면 바로 광개토대왕비... 보면 평양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한성(?)을 치는 구절이 있는데 한반도의 평양에서 한성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광개토대왕의 허를 찌르는 '전술'이었다라고 합니다. 근데 이 뱃길이란데 양면의 칼이라 이런 도박을 할런지...
그런데도 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이득이 되는 상황. 즉 거리가 멀다라는...
어느 글에서 한반도 평양은 장수왕이 세운 南평양이라고 합니다. 담덕열제(광개토태왕)가 배를 타고 백제의 한성까지 쳐들어갔다면 적의 본거지를 치는 전법이 아주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고구려도 백제 못지 않게 강력한 수군을 보유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 한성이, 위례성을 말하는지, 한성(어딘지 몰라유~)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수군 별동대가 위례성 앞 관미성(강화도?인천?)을 함락시키고 위례성을 포위한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위안은, 진실은 저 너머에~~~~ (ㄴㅡ_ㅢㄱ~~ 살려주삼~ㄴ-_-ㄱ~~ㄴ-_-ㄱ)
제 생각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있는 돈황부 평양인거 같은데.... 그다음 한반도 평양이 바로 하평양. ....중국 지도를 보면 돈황부 평양 동쪽에 Tian, 즉 장안(지안)도 있습니다...허허허 그렇게 생각하면, 장군총은 아마 장안성의 수도건설을 추진한 안장열제가 아닐지... 진실은 저 너머에..-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