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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 용문산 용문사(龍門山 龍門寺)를 찾아서 ⑤
-대웅전과 마당의 풍경-
10월 13일(음 9.9)일 은행나무의 위용에 감탄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12시경 걸음을 옮겨 대웅전으로 향했습니다.
용문사 안내도
용문사 안내도를 자세히 보세요.
그런데 이 안내도는 오래되어 다시 그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 한 안내도입니다. 미륵불이 자리했던 자린엔 관음전이 새롭게 조성되었고 범종각은 관음 전 옆에 새롭게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 미륵불은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또한 템플스테이건물도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용문사 홈페이지에 있는 전각배치도
이곳에도 안내도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재의 상태가 반영되지 않았네요.
용문사에 대하여
용문사에 대하여 일주문을 들어오면서 자세히 안내를 해드렸는데 다시 안내판이 있어 다 시 한번 그 대략적인 내용의 전문을 옮겨 봅니다.
용문사(龍門寺)
『신라(新羅) 신덕왕(神德王) 2년(913)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며 일설(一說)에는 경순왕(敬順王 927~935 재위)이 친히 행차(行次)하여 창사(創寺)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禑王) 4년(1378) 지천대사(智泉大師)가 개풍(開豊) 경천사(敬天寺)이 대장경(大藏 經)을 옮겨 봉안(奉安)하였고, 조선(朝鮮) 태조(太祖) 4년(1395) 조안화상(祖眼和尙)이 중창 (重創)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母后)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沈氏)를 위하여 보전(寶殿)을 다시 지었고, 세조(世祖) 3년(1457) 왕명(王命)으로 중수(重 修)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處安) 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鳳城 大師)가 중창(重創)하였으나 순종(純宗) 원년(1907) 의병(義兵)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 군들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翠雲) 스님이 큰방을 중건(重建)한 뒤 1938년 태욱(泰旭) 스님이 대웅전(大雄 殿), 어실각(御室閣), 노전(爐殿), 칠성각(七星閣), 기념각(記念閣), 요사(寮舍) 등을 중건하 였으며, 1982년 선걸(禪杰)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대웅전(大雄殿), 범종각(梵鐘閣), 지장 전(地藏殿), 관음전(觀音殿), 요사(寮舍), 일주문(一柱門)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佛舍 利塔), 미륵불(彌勒佛)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權近)이 지은 보물 제 531호 정지국사(正智國師) 부도(浮屠) 및 비(碑)와 천 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용문사 안내도에서 축대를 따라 조금 걸어가면 계단이 나옵니다.
자비무적(慈悲無敵)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 글씨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면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자비로운 마 음을 가지는데 누가 나를 해치려 하겠습니까? 무엇인가를 가지려 할 때 다툼이 생기고 적이 생깁니다. 대웅전에 오르기 전 자비무적이란 글을 새긴 까닭을 가슴에 새기며 대웅 전으로 향합니다. 자비심은 불자가 늘 지녀야 할 마음입니다. 자비문중에는 적이 없습니 다.
용문사를 둘러보니 일주문부터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선생의 편액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예가인 일중(一中) 선생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백과사전에 있는 전문을 옮겨 봅니다.
『김충현(金忠顯, 1921년 4월 2일 ~ 2006년 11월 19일) 서예가. 호는 일중(一中). 서울 출신. 1943년 중동학교를 졸업.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했고, 1953년 국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5년 한국 서예가협회 상임위원이 되었고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 이사장으로서 1천5백여 회원들에게 서예를 지도하기도 했다.
7세 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쓰기 시작했고 현재는 후한(後漢) 조전비서풍(曹全碑書風)의 예서(隸書)를 썼다. 궁체(宮體) 한글은 국내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김응현(金膺 顯)과 중계(仲季)의 형제간으로 그들의 사백(舍伯) 김문현(金文顯) 등 3인 모두 삼절(三絶) 로 불릴 만큼 일가(一家)의 서풍(書風)을 이루었다.
주요작품으로 <4·19의거 희생자 묘비> <권도원수 행주대첩비명> <이충무공 한산도제승 당비> <병천 유관순 기념비>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비> <백범 김구선생 묘비> <사육신 묘비> <의암손병희선생 묘비> <월남 이상재선생 묘비>가 있다.』
백과사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운달산 김룡사, 도솔산 선원사, 모악산 금산사, 능가산 내소사, 소백산 구인사, 팔공산 파계사, 용문산 용문사, 내장산 내장사, 김천 직지사 등 수많은 사찰의 편액을 썼습니다.
대웅전 모습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1984년 중건 되었습니다.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삼면의 벽에 천불을 봉안하였습니다.
대웅전의 주련은 다음과 같습니다.
佛身充滿於法界 불신충만어법계 부처님 몸 온 우주 법계에 가득하사 普現一切衆生前 보현일체중생전 일체 모든 중생 앞에 두루 두루 나투시고 隨緣赴感靡不周 수연부감미부주 인연따라 감응함에 두루 하지 않음 없네. 而恒處此菩提座 이항처차보리좌 허나 여기 보리좌에 항상 앉아 계신다네.
대웅전 편액. 완당 김정희(金正喜) 선생 글씨. 완당(阮堂)이란 낙관이 보입니다.
이 글씨는 추사 선생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봉은사 대웅전 글씨를 본떠 판각한 것이라 합 니다.
우선 대웅전에 들어 예를 올렸습니다.
우보처 보현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문수보살
벽면엔 천불(千佛)이 봉안 되어 있습니다.
천수천안관음탱화(千手千眼觀音幀畵)
신중탱화(神衆幀畵)
칠성탱화(七星幀畵) 불기 2529년(1985) 조성.
대웅전 꽃살문
난간의 은행나뭇잎 문양
대웅전 앞 풍경
대웅전 마당의 은행잎 모양의 화단
대웅전 마당 남쪽의 모습. 종무소입니다.
대웅전 앞의 텅빈충만님
대웅전 마당에서의 화광님
대웅전 앞 마당가에 자리한 삼층사리탑. 1989년에 조성
이 사리탑은 대웅전 앞 마당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옆은 곧 철거할 듯한 구 범종각이 있습니다. 사리탑에 대한 정보가 없고 1989년 에 조성했다는 것이 다입니다. ^^
화광님 여기 서 보세요.
대웅전 마당의 은행잎 모양의 화단
멀리 관음전과 구종각과 향나무
앞에 보이는 전각은 지장전입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마당의 주변을 살핀 후 지장전으로 향했습니다. 지장전에서는 어떠할 까 다음을 기대해 주세요. (계속)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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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웅전 오르는 계단 앞에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오네요. _()_
자비무적 가슴에 새겨 봅니다.
자비무적. 자비로운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다. -석가세존-
_()_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
우리는 사랑할 원수가 없다. -불자-
자비로운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다시 보는 용문사 새록새록~~ 못보고 지나친것 다시금 보고 느끼면서 즐감 하고 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다시 보시니 지나온 장면이 떠오르시죠 감사합니다. _()_
은행나무 감상이후 오랜만에 왔네요. 그동안 후기가 많이 올라왔는데 이제 봅니다.감했습니다. _()_
계단 앞의 자비무적이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이 말씀이 부처님 말씀이군요. 명필 일중거사의 글씨군요.
일중 김충현 선생의 소개 감사합니다. 대웅전을 참배하는 마음으로 살펴봅니다. 현판과 주련의 소개 잘 보았습니다.
대웅전 마당을 수놓은 은행잎 모양의 국화화단도 인상 깊습니다. 모델 텅빈충만님, 화광님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용문사에 오면 이 자비무적의 글씨가 인상적인 모양입니다.
감하셨다니 감사합니다. _()_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는 사찰순례하다 보면 친근하게 만나곤 합니다.
대웅전과 경내풍경 잘 봤습니다. _()_
대웅전 앞에 국화를 이렇게 수놓은 것이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용문사는 해마다 산사음악회를 열고 등 많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감명 깊게 본 _()_
있습니다. 몇 년 전 산사음악회에서 장사익 선생이 찔레
적이 있습니다. 그 생각이 납니다.
화단을 예쁘게 조성해 놓았네요._()_
비구사찰인데도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았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