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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페이지를 조금 넘는 1부 여명편을 한 달 반 조금 넘게 연재를 했습니다. 여명편은 아시다시피 이 소설에 바둑에서의 말인 포석을 깔기 위해서 연재한 부분이었습니다. 전반에 전쟁신을 제외하면 온달과 공주의 첫 만남을 중심으로 연제했는데 동시에 고구려의 문화를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애썼는데 썩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솔직히 온달의 울보 달래기와 정치이야기가 거의 다였습니다.)
다음편인 2부은 전란편입니다.
연제는 하던 대로 토요일 아침 8시에 올리겠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 날 2부 126패이지 탈고했는데 도움주신 분이 많았습니다. 전쟁사와 유목민족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매주 채팅으로 저의 질문에 답해주신 모 관리자분 너무 감사드립니다.
특히 매번 답글과 격려 메일을 보내 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연제가 막힐 때마다 리플 보면서 힘을 얻어 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달리겠습니다.
지난 이야기
돌궐과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된 영강 2년 봄
불패의 장군 이계찰대는 요해에 주둔한 안수의 2만 고구려군을 전멸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총동원태세를 갖추고 반격을 준비한다.
이문진의 부탁으로 아가씨를 모시고 있던 온달은 전란의 소식을 듣고 놀라한다. 태학에 모든 학생이 돌아와서 전선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온달은 갑자기 아가씨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있었던 일과 자신의 미숙함을 깨닫게 되는데…….
이문진 박사는 마지막까지 온달의 졸업을 주장하였다. 학문은 부족하지만 전장에서 고승장군을 구출하였고 몇몇 재치있는 작전으로 고흘 장군을 도운 공적에 역사와 전사를 많이 깨우친 점을 높이 평가해야한다는 견해를 조리 있게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태학 내에서 명궁으로 이름이 높았다는 점이 다른 박사들이 온달의 졸업을 허락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어두운 밤, 길에서 만난 이문진과 온달은 태학근처에 주막에서 사제 간의 술자리를 가졌다.
“아가씨는 아마 돌아오시지 못할 것이다. 너도 한 달 내로 돌궐로 출정할 것이고.”
이문진은 온달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 그는 아가씨가 명화공주님이었다고 온달에게 말할까라고 생각했지만 묻지를 않아서 말기로 하였다. 사실 이때 온달은 아가씨의 정체를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달은 이문진이 사직했다는 말을 이 자리에서 듣게 되는데.
“이런 돌궐과의 전쟁이 터진 중대한 시국에 어찌 태학을 떠나시는 것입니까?”
온달이 놀라며 하는 말을 들은 이문진은 말을 피하고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오늘따라 술도 못하시는 박사님은 과하게 마셨다. 태왕폐하에게 버림을 받은 후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 론가로 떠날 생각이었다.
이문진은 온달의 거듭되는 말을 피하고 연달아서 술을 자신의 목에 부었다. 그는 상당히 거나하게 취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헌칠한 온달을 보았다. 제자인 온달은 이제 돌궐과의 치열한 전쟁터로 떠날 것이다.
‘물론 이 놈은 전장을 격은 애이니까 잘해내겠지.’
하지만 나머지 3000여명의 제자들은 생지옥 같은 곳에서 수많은 피를 뿌릴 것이다. 선대 양원태왕의 대혼란시기 태학에서 1000명의 졸업생중 절반인 600명이 출정한지 3년 동안에 백제, 신라, 돌궐, 북제과의 전쟁과 내란에서 전사했다. 그 당시 있었던 박사들은 제자들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치하했다고 하지만 책만 읽고 살아온 이문진 박사는 도저히 그런 말을 할 만한 강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죽는 것인가? 자식 같은 나의 제자들이…….’
박사는 온달의 따뜻한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온달은 갑자기 박사님이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자신의 두 손을 잡고 있으니 너무 술을 취하셨다고 생각했다.
“박사님 너무 취하…….”
“달아 살아서 돌아와라.”
그리고 이문진 박사는 온달을 쳐다보면서 너무나도 인간적인 말을 하였다.
“절대 죽으면 안 된다. 살아남아야한다.”
보통 고구려인은 이 나라를 위해서 죽은 것을 제일로 공으로 친다. 하지만 이문진 박사님은 오히려 살아남으라는 말을 하시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산다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나약한 모습이었다.
“그래, 나는 이 나라 고구려를 지키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제자들이 지킨 것은 주씨가문같은 권신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 이문진은 주씨가문의 개니까.”
이문진은 그 동안에 태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나라를 위해 왜 죽어야하는 지 가르치셨다.
천제의 아들이시자 하백의 외손이신 대국의 건국자 시조 추모성왕
요녀 소서노를 추방하고 나라의 정통을 세우고 나라를 설계한 유리명왕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 대소의 목을 취하고 천하의 영토를 정벌한 군신 대무신왕
영웅이자 신이신 그 분들이 만든 대고구려
하지만 그 가르침을 전하는 박사님의 마음속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죽어가도 지금 영광스러운 고구려를 지키는 것에는 그는 인내할 수 있다.
하지만 선대 양원태왕기에는 자신의 제자들이 피 흘리며 지킨 것은 이 나라 고구려가 아니라 탐욕스러운 주씨가문이다.
권신들의 영광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주씨가문이 사라진 지금이라고 해도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태왕께서 즉위하여서 나라가 많이 안정이 되었다고는 하였지만 아직도 이 나라는 강력한 왕권에 눌려있는 것일 뿐이지 모든 정치파벌들은 폭주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왕권조차도 고흘장군의 군부에 절대적인 권위와 고필장군의 중리부에 정보 사찰만 없다면 태왕께서도 힘을 잃고 양원태왕시기 대혼란으로 돌아갈 것이다. 평민층이 태왕을 지지하고 있다지만 그들이 근원적으로 뭉치기에는 중심인물이 없었다. 막강한 외척 주씨가 사라진 힘의 공백기에 또 다른 주씨가문을 꿈꾸는 수많은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하고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왕실과 귀족 양쪽 모두에게 소외당하는 지식인들.
온달이 창조리의 책을 읽으면서 이 나라의 많던 지식인들이 어디로 갔는가의 답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 그 답은 시대에 절망하고 있는 이문진 박사님이었다.
양원태왕의 혼란기에 고구려의 수많던 지식인들은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형제간의 치열한 왕위계승전쟁은 외척 주씨가문의 독재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양원태왕은 즉위하였으나 사실상 주씨가문의 허수아비였고 따라서 왕권은 땅에 떨어졌다. 수많은 지식인들은 필사적으로 주씨가문의 독재를 막기 위해 목숨을 각오하고 태왕에게 간언했지만 곧 그들은 그 말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말았다. 자신들의 독재에 제일 위협적인 세력은 지식인들이라는 것을 잘 아는 주씨가문은 자신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은 모두 학살했다.
고구려 학문의 전당인 태학 앞에는 외척 주씨에 반대한 박사들의 목이 일제히 걸렸다. 특히 친 왕실경향이었던 불교세력들은 양원태왕때 고구려역사에서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주씨가문은 왕권수호를 위해 나선 모든 스님들을 절에 가두어 놓고 불을 놓았다. 그 때 불타는 절에서 만 명의 고승들은 불경을 외우며 내부 왕실의 안녕과 고구려의 불국정토를 기원하여 죽어갔다고 한다. 그 불속에서 은사와 불경을 잃고만 이 나라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은사를 잃은 어린 스님들은 목탁만 두드릴 줄 알았지 교리는커녕 부처님이 돌아가신 날도 모르는 괴이한 상황이 나왔다. 다른 학문들도 주씨가문에 파괴되어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폭압적인 무력에 무너지고 만 지식인들은 불타는 조국을 버리고 동족 국가인 백제와 신라 바다건너 왜로 망명하거나 초야로 묻혀 세상을 한탄하면서 죽어갔다. 평양천도로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장수태왕께서도 천도를 반대하는 귀족들은 숙청했지만 천도를 반대하는 지식인들은 용납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학문은 계속 발전했고 최전성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주씨가문은 고구려건국이래 최악의 기형적인 정권이었기 때문에 가문의 영속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지식인 사회를 완전히 파괴해고 말았다.
남은 사람들은 세상에 입을 다문 주씨가문의 어용(御用)지식인들 뿐이었다. 그런 때에 주씨가문에 대항했다가 패배한 스승의 애제자였던 이문진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어용문인이라는 치욕적인 말을 들어가며 잔악한 주씨가문에 무릎을 꿇었다. 이문진은 스승의 원수인 주씨가문을 위해 시를 썼고 글을 올려야만 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선대 양원태왕께서 고통 속에 돌아가시고 총명한 태자 양성이 즉위했을 때 이문진 같은 어용지식인들은 자유로운 해방(解防)의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태왕 양성은 주씨가문에 어용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나라에 남은 학자들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갈 때 무엇을 하였는가. 주씨가문의 충복만 있도다.”
태왕은 끝까지 왕실에 충성한 불교세력들만 총애하고 고흘장군을 내세워 군부를 연명안과 고필의 중리부를 통해 정보를 각각 장악하는 정책을 피었다. 그리고 어용학자들은 모조리 거부했다. 어용학자들은 태왕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였던 주씨가문들의 찌꺼기라 생각한 것이었다.
스승인 이문진의 비명을 들이면서도 온달은 솔직히 어용지식인들이 태왕폐하에게 버림받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어용문인이 되면 마음을 바꾸어 태왕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 재건을 위한 큰 계획보다는 태왕폐하 찬양의 시나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온달이 만난 태왕께서는 자신에 대한 찬양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았다.
[짐은 너를 깨우쳐주기 위해서 활을 쏘았지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려고 쏜 것이 아니다]
그때 활터에서 태왕께서는 찬양을 낯간지러운 소리라고 말하셨다. 그분은 남의 아부에 흔들리는 분이 아니시다. 당연히 어용지식인들의 찬양시도 우습게 들릴 수밖에.
사실 어용문인인 이문진도 결국 주씨가문과 손을 잡는 순간 그들과 한통속이 되었다. 이문진도 어느 순간부터 자리에 안주하여 시대를 외면하고 방안에서 자기가 원하는 책만 쓰고 있었다.
“태왕폐하 저희들이 그렇게 잘못했사옵니까? 하지만 저희들도 이렇게 개처럼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문진 박사님은 울고 있는 눈에는 분노가 있었다. 시대를 잘못만난 스승의 한을 본 온달은 눈물이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시울이 불거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때 태학을 떠난 이문진은 20년간 재야에서 은거하며 백성들과 살게 된다. 책만 읽고 살았던 그는 말로만 듣던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보았고 체험하였다. 안정기라는 평원태왕시기도 백성들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15년간 계속된 돌궐과의 전쟁 이어서 벌여진 후주의 대전(大戰), 4부 귀족과 신흥무관파 군부간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백성들과 함께 살며 울고 웃었다. 그는 낮에는 백성들과 밭을 땀을 흘리며 갈고 밤에는 이 나라의 역사를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렇게 이 나라 민초가 되었던 이문진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것은 태자 대원(大元)이 태왕으로 즉위한 이후였다.
태자는 미천태왕의 고사를 들려주며 용기를 준 스승을 20년 동안 잇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태왕이 된 대원은 이문진을 빨리 찾은 또 하나 이유는 군부실력자들인 온달과 연자유가 이 나라에 남겨놓은 엄청난 후유증 때문이라 한다. 그때부터 이문진은 양원태왕과 평원태왕에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을 왕권약화와 나라에 대한 자긍심에 대한 상실이라 생각하고 강력한 왕권중심과 고구려의 신성함을 널리 알리는 역사기술을 남기어 태왕 대원과 내부 왕실에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생을 바쳤다.
온달은 많이 취한 이문진을 배웅하고 태학에 돌아오면서 밤하늘을 보고 읊조렸다.
“힘만이 통용되는 어리석은 시대에 파괴되고 썩어빠진 학문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 이제부터는 오직 강력한 무력(武力)만이 이 나라 고구려를 바꿀 수 있다.”
온달과 태학 전학생 3000명은 그로부터 5일 뒤 졸업하게 되었다. 배치될 부대편성과 자위관등 부여등 정신없는 4일이 지나고 태학에서의 마지막 밤이 다가왔다. 모든 학생들은 서로를 축하하며 밤을 보냈다. 온달과 설연, 마위는 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청동대루미(다리미정도..)로 정성껏 다려서 입어보고 한껏 뽐내보았다. 무엇보다도 절풍에 관직을 표시하는 깃털이 2개있다는 것에 그들은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관등이 올라가면 깃털수도 늘어날 것이다.
“설연이 조금 만 더 공부했으면 선인(先人)으로 임명되었을 것인데?”
관복을 입은 온달의 말에 설연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말하기를
“싫다네! 그러면 우리 대장이신 온달을 부하로 모시게 되잖아.”
사실 졸업생중에 명문귀족의 자제들과 성적이 100등내로 우수한 학생들에게도 최하관등인 자위가 아닌 한관등 위인 선인을 받는 특혜를 주었다. 3년 전에 졸업한 연자유와 강이식같이 좋은 성적에 아버지가 나라에 공훈을 세우고 태왕의 총애까지 받으면 아주 소형까지 오르는 예도 10년에 한번 꼴로도 있었다. 하지만 설연은 102등을 하였기 때문에 아쉽게 탈락했다. 온달은 최하위권이었기 때문에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런데 그 여자랑은 잘 되었는가?”
“응? 무슨 여자?”
설연과 마위는 온달 자신이 4일전에 여자 보러 간다며 나갔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그 말은 온달이 아가씨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둘러대래서 그냥 나온 말이었다. 온달은 말을 피했지만 둘의 집요한 공세에 그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말을 불었다.
“너 미쳤냐? 애를 건드려!”
마위의 말에 버력 화를 내면서 말하자 온달은.
“아 진짜 아가씨를 잠시 모시게 된 거야. 그런 일없었어! 이 자식아!”
그러자 설연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온달의 말에 동의는 했지만 한다는 소리가.
“야 마위! 성격이 곧은 온달이 애를 건들이겠냐? 지금 잘 꼬셔놓고 어른이 되는 3년 뒤를 기약하는 거겠지!”
그 말을 들은 온달은 주특기중 하나인 꺾기를 설연의 허리에 행하였다.
“아 아프다고 온달 아니 대장 그만할게! 관복 꾸겨져! 다시 다림질 해야되자나”
설연은 온달에게 몸이 거의 꺾인 상황에서 항복을 선언했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한다? 안한다?”
온달은 분노의 꺾기로 설연을 더욱 조였다.
“안 해. 안한다고.”
설연은 항복하였다.
졸업식 날이 밝았다.
수많은 졸업생 가족들이 태학내로 몰려들었다. 설연과 마위의 부모님과 아내들이 오자 온달은 인사만 하고 그 자리를 피하고서 혼자서 태학의 대로변 나무 그늘에 앉았다.
“자식들 저렇게 예쁜 마누라는 언제 얻었데.”
그 말을 하고선 검은 관복을 입고 있는 총각 온달은 가죽신발을 신은 발로 땅바닥을 두 번 쳤다. 그가 외롭거나 괴로울 때 하는 버릇이었다.
사실 태학에서 졸업할 때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지만 날짜가 너무 급하게 결정되었다. 게다가 맹인이신 어머니가 오시는 것에 힘드실 것 같아서 이야기만 전해드리고 졸업은 혼자하기로 했다. 온달은 그냥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홀로 졸업식 시작을 기다렸다.
“혹시 이번에 자위로 오르신 온달님이십니까?”
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렸다.
“그렇소이다만.”
온달은 모르는 사람이라 머리를 기우뚱하며 말을 하였다.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잠깐 오시지요.”
“무슨 일이오!”
온달은 질문을 했지만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서 일단 따라갔다.
‘혹시 고흘 장군님이신가?’
그를 지금 이곳에서 고흘장군님 밖에는 만날 사람이 없었다. 사병이었던 자신을 태학에 보내주신 장군님은 때마침 평양에 계시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졸업고과가 너무 안 좋아서 그 분을 뵙기는 민망하다고 생각했다.
‘도망가고 싶군!’
여인은 어느 서재로 그를 이끌고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에는.
수백 명이 되는 시종과 군인들이 한 여자아이들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모두가 고급스러운 비단이었지만 가운데 큰 키를 가진 여자아이의 옷에 비하면 평범하게 보였다. 여자아이는 화려한 의자에 가장 붉은색에 금수가 촘촘히 놓여서 빛나는 상의에 여러 가지 색이 잡혀있는 주름치마에 순백보다 흰 포를 입고 앉아있었다. 양팔에는 화려한 팔지가 열 개씩 차고 있었고 귀에는 금귀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녀는 단호한 눈빛에 단아한 코 그리고 피같이 붉은 입술을 가진
“아가씨?”
온달은 며칠 전까지 태학에서 같이 있던 아가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놈 아가씨라니 무엄하다! 어서 공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그녀를 태학으로 대리고 왔고 온달과 자주 이야기를 했던 사호라는 자가 온달을 크게 꾸짖었다. 온달은 그 말을 듣고도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사호가 했던 말을 한 두 세번 생각했을까?
‘공주님?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인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온달을 본 아가씨는 웃으며 화를 내는 사호에게 아무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정체를 고백했다.
“저는.........”
단아한 아가씨는 그냥 말하려다가 목이 매인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단호하면서도 어린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면서 마음을 잠시 진정시킨 다음에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나라의 시조이신 추모성왕의 24대손(광개토태왕릉비문 기준)이자 태왕폐하의 둘째 자식인 명화공주 고단희라 합니다.”
‘어?’
아가씨 아니 명화공주의 말을 다 들었어도 온달은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온달은 분위기가 너무 근엄하니 서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냥 자동적으로 그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공주님 신 온달이 그동안에 많은 무례를 범하였나이다.”
명화공주는 당황한 나머지 생각 없이 줄줄이 나오는 온달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제가 온달님께 섭섭한 것은 없사옵니다. 제가 오히려 그대에게 피해를 주었지요. 게다가 생일날 한 약속도 제가 어기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약속을 못 지킨 이유를 이어 말하였다.
“저도 그날 나오려 하였지만 아...버지이신 태왕....폐하께서 허락 하시지 않았사옵니다.”
공주님이 어떤 말을 해도 지금 온달에게는 들리지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전쟁터같이 복잡한 곳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이 충돌하고 있는 곳이랄까?
‘그러면 태왕폐하의 따님이신 명화공주님이시라 말인가?’
머리를 땅위에 박은 온달은 아가씨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너무 황망해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고개를 드세요.”
어린 공주에 말을 해도 온달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 믿어지시지요. 저도 이런 식으로 만나기는 싫었습니다.”
공주는 창문으로 밖에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 창문에는 따스한 봄을 함께 즐기는 나비 두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만약 나의 신분을 알았으면 인형극도 안 하실 것이고 저잣거리도 가지 못했고 어린 시절 이야기도 안 들려 주셨을 것이고 같이 밥도 못 먹었겠지요?”
온달이 아가씨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녀의 마음 근처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공주는 시선을 창문에서 이번에 자위에 오른 온달에게로 돌렸다.
“헤어질 때도 공주가 아닌 아가씨로 남아야 서로에게 편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헤어질 수 있을 것인데....”
그 말을 들은 온달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드는 것을 보니 이제는 마음이 진정이 드십니까?”
명화공주은 어머니의 자결로 찢어진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같이 슬퍼해준 온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자기를 그렇게 생각해준 사람은 오라버니인 태자와 온달밖에 없었다. 사실 공주의 마음속에 고통을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누구에도 해줄 수는 없었다. 아무 말 못하는 공주는 보고 온달은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먼저 보이고 둘이 함께 괴로워했다.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명화공주.
조국 고구려에게 버림받고 어머니와 함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온달.
어찌 보면 그 둘은 가슴속에 슬픔을 공유하고 함께 운 것일지 모른다.
“제가 매일 밤에 우는 바람에 어머님 생각이 났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격식 있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공주는 아직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온달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하였다.
“그건.....건.”
“저 때문에 그대가 고통스러워했으니 저게 온달님께 용서를 구하는 의미에서 좋은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하면서 공주님은 일어서서 시종들에게 그분을 모시고 오라하였다.
온달은 무슨 만남인지 의아했다.
‘고흘 장군님?’
그러자 반대쪽 문이 열리고 시종들에 부축을 받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어머니.”
온달의 얼굴은 금세 눈물이 나올 것같이 슬픔에 가득 찼다. 그 분은 고구려에 마지막까지 충성한 자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신라군에 두 눈을 잃으셨다. 그리고 평양으로 필사 탈출 후 자식인 온달을 위해서 몸을 던지며 무엇이든 하신 분이었다. 그 고생 때문에 40대이신대 머리는 다 하얗게 새시고 얼굴에는 주름투성이였다. 그런 어머니를 명화공주님께서 태학에 모시고 온 것이었다.
“달이냐 정말 달이가 있느냐?”
눈이 안보이시는 어머니는 앞을 손으로 내밀며 아들을 찾았고 그 모습을 본 온달은 어린아이처럼 한걸음에 달려가서 그녀의 팔을 매달렸다.
“어머니 저 달이옵니다. 이번에 태학에 졸업을 하고 자위(自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한동안 몸을 떨더니 초점 없는 눈에는 눈물이 낮다.
“아이고 내 새끼 결국 해냈구나!”
이제야 마음을 놓인 어머니는 그동안에 학업 때문에 아들을 외면했던 것을 슬퍼하며 자식의 얼굴을 부여잡고 비벼 되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매우 차가웠지만 아들에게는 전해오는 사랑 때문에 온달은 따스함으로 느꼈다.
이제부터 온달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연씨, 강씨, 을지씨 함께 고구려후기를 이끌어갈 명문 온씨 가문의 첫 걸음이었다.
“어머니 절 받으시옵소서.”
관복을 정제한 온달은 어머니에게 떨어져서 공손히 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아들의 장성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들의 효심이 느껴졌다.
모자의 상봉을 서서 본 공주님의 눈에는 이슬이 맺어있었다.
그 눈물은 부러움에 뜻이었다.
공주 자신에게는 이제 없는 어머니를 미천하지만 온달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았다. 소녀는 온달의 어머니와 온달에 감동적인 만남에서 알 수 없는 큰 만족을 하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비록 사병이셨지만 이 나라인 고구려와 한수의 백성들을 지키려다 신라군에게 목숨을 잃으셨을 것이다. 너도 아버지처럼 이 나라에 목숨을 다해 간악한 돌궐과 맞아 싸워야 한다. 알았느냐?”
마음을 진정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자식인 온달에게 당부하였다.
드디어 태학의 졸업식이 열렸다. 오늘은 태왕께서 직접 친림하시어 축사를 해주시기로 하였지만 돌궐과의 전쟁준비로 결국 왕실의 대표가 대신 태왕의 글을 대독하였다. 그 대표가 태왕의 친딸인 명화공주이었다. 원래는 태왕은 전쟁준비로 시간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직접 축사를 할 생각이었지만 명화공주가 스스로 찾아와서 자신이 가서 출정하는 장교들을 치하고 싶다는 사정하자 허락하였다.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던 명화공주가 직접 가서 부탁을 하자 궁궐 내 모든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하지만 명화공주는 단지 자신을 모셨던 온달에게 은혜를 갚으려 한 것이었다.
“소수림왕께서 초석을 닦으시고 이 태학을 창립하신지 182년 동안 수십만의 학생이 이곳을 졸업하여 칼을 잡고 전쟁터로 출정하였다. 선대 양원태왕때는 한 기수가 3년 동안 절반이상인 600명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겠는가?”
커다란 강당에서 삼천 명의 졸업생들이 정렬하여 태왕폐하의 말씀을 대신하고 있는 명화공주를 보았다. 그녀는 12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삼천 명에 건장한 졸업생을 앞에 두고 말을 함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앞을 주시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을 대독하였다. 기품 있고 단아한 그녀를 보면서 학생들은 과연 천손의 후예답다고 생각하였다. 오늘에 태왕의 축사는 평소와 다르게 고구려를 이끌어가는 인제들에게 말하기 보다는 전선에 나가는 군인에게 하는 논조에 가까웠는데 앞으로 있을 돌궐과의 치열한 전쟁 때문이었다.
“추모성왕께서 건국하시고 500년이 이어온 이 나라인 고구려의 영광과 그 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수백만 백성들이다. 그 영광과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짐 또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도다.”
밑에 있는 온달은 명화공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했다. 천손이신 공주님에게 자신의 옛 과거를 다 이야기 했다는 생각에 보기가 민망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문진박사님과 인형극을 하던 중에 공주님이 너무 울 때 자신이 인형을 양손에 끼고.
[까르르 까꿍]
그 때 온달의 엉뚱한 행동에 황당해하던 공주님의 얼굴을 생각하니 얼굴에 새빨개졌다.
‘내가 그동안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온달이 공주님과 헤어질 때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동안 웃으셨는데 그 미소의 의미가 그것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온 것에 대해서 공주님께 깊은 감사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강당의 주변에서 공주님의 시종들과 함께 있으며 태학의 졸업식을 들으며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어머니는 자신을 모시고 온 분이 공주님인 것은 모르고 계신 것 같았는데 아마 공주님 쪽에서 비밀로 하셨을 것이다. 아셨다고 해서 믿을 수 있을까? 온달 자신도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는데.
“이제부터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대 고구려의 장교들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적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고 짐에게 절대 충성하며 오직 백성들을 하늘같이 여기어라! 추모성왕과 수많은 이 나라의 영웅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것이다.”
“대 고구려 만세 태왕폐하 만세.”
명화공주의 말이 끝나자 삼천여명의 장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그들은 이제 돌궐전쟁을 앞두게 되었다.
온달은 졸업식을 마친 후 그는 5일간 어머니와 함께 보낸 후 이별을 고했다. 어머니는 헤어질 때는 오직 한 말씀만 말하셨다.
“나는 내 아들이 잘할 것이라 믿는다. 어서 가라!”
온달은 어머니께 절을 올리고 집을 나온 뒤에 자신이 배속된 동부대인 발안의 부대로 가기 전에 자신을 태학에 보내준 은인인 고흘장군님을 찾아뵈었다.
“너도 1년 반 동안 많이 변하였구나! 하하하!”
고흘장군은 태학에서 졸업을 축하하고 고과는 안 좋지만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되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너무 고과가 안 좋았던 온달은 태학을 보내 주신 고흘에게 이 말을 들으면서 상당히 민망했다. 하지만 고흘은 온달의 따뜻한 손을 잡으면서 전쟁터로 떠날 마음의 준비나 잘해두라고 하셨다.
이번에 왕실과 귀족간의 합의로 군통수권을 맡는 막리지로 취임하신 고흘은 동시에 대 돌궐전쟁에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자신의 휘하에 안수장군의 대패에 책임이 고흘에게도 있었지만 태왕은 그의 직접적인 잘못은 아니라며 묵인했다. 그 뒤에 열린 대로회의에서 대로급 귀족들은 고흘장군의 막리지 임명 동의조건으로 평양귀족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동부대인 발안과 북부대인 구성에게 부사령관과 병부의 요직임명을 요구했다. 이로써 이번전쟁은 고구려 내에 대립 중이었던 왕실과 귀족이 돌궐이라는 외적을 앞두고 연합군을 편성한 셈이었다. 그것 때문에 상당히 고구려 내에 말들이 많았는데 왕실세력에 중심인물인 고흘과 평양귀족세력의 거두인 발안은 칼부림을 할 정도로 대립적 관계였기 때문에 지휘권이 일체화되지 못하고 혼선 빚지 않을 까라는 걱정이었다.
사실 온달도 그것이 염려되어서 조심스럽게 그 말을 하자 고흘장군님은 별로 개의치 않으셨다. 고흘 그가 선대왕이신 양원태왕때도 언제나 완벽한 준비 하에 출정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안 듣는 귀족들의 사병을 억지로 끌고 전투에 나선 것이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14년간 그냥 주어진 어려운 상황에서 다 해내었다. 하지만 온달은 고흘장군의 맞상대인 돌궐의 이계찰대가 그동안과 정면승부를 하던 것과 달리 전혀 다른 전략으로 나온 것이 마음에 큰 걱정이었다. 게다가 고흘은 이전에 이계찰대와 두 번 직접 대결하여서 모두 승리는 하셨지만 내용적으로는 무승부에 가까웠다. 온달은 돌궐 내에 모든 용장들이 상승의 고흘장군에게 완패 당했지만 돌궐의 유일한 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계찰대만은 시원한 승리를 한 번도 못했다는 견해를 말하였다.
고흘장군은 인자한 눈으로 이번 원정에 문제점을 제시하는 온달을 보았다. 어찌 보면 고작 20살에 자위밖에 안 되는 온달이 건방진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너무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화나기보다는 나를 정말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온달은 윗사람이라 할지라도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인 있으면 비위를 맞추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갔다.
고흘은 온달에게 이번 원정에 문제점에 대한 대비를 정성껏 말해주었다. 이렇게 말하면서 고흘은 자신이 준비하는 원정을 다시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자신도 온달을 가르치면서 재점검을 한다고 할까?
다만 고흘은 자신의 명예 때문인지 이계찰대와의 무승부는 절대 인정안하셨다. 자신의 완벽한 승리라는 것을 온달에게 전술적으로 설명해주었고 그도 그것에는 공감하였다.
‘양쪽 모두 똑같은 사상자 숫자가 나왔지만 이계찰대는 자신이 이루려했던 목표는 다 이루지 못했으니까!’
원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시종들이 따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검은 칠기에 담아 들여왔다. 고흘은 차를 마시는 온달을 보고 말을 꺼냈다.
“명화공주님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 말을 들은 온달은 작은 동요에 들고 잇던 잔 안의 찻물이 요동쳤다.
“아 그...렇사옵니다.”
대답을 하면서 온달의 얼굴은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님께서 너를 만나고 많이 안정되셨다고 들었다. 태자전하께서 너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다.”
태자의 말을 전해들은 온달은 너무 송구스러워했다.
“제가 공주님께 너무 많은 무례를 범한 것 같사옵니다.”
“괜찮다. 그건 걱정하지마라! 어린 공주님께서는 너에게 마음을 두고 있더구나. 하하하.”
고흘의 농에 민망한 온달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에 붉은 물이 퍼져나갔다. 사실 듣는 온달은 상당히 거북했다.
‘미천한 제가 어떻게! 그리고 공주님은 겨우 12살입니다.’
막리지 고흘은 전쟁준비로 매우 바빴기 때문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온달의 두 어께를 잡았다. 그리고선 그 분은 마지막으로 졸업을 축하하고 이 나라는 젊은 장교들에게 달렸다고 말씀하시고 집을 나서셨다. 온달도 바로 부대로 가려 하였으나 고흘의 젊은 부인이신 대씨께서 식사 한 끼는 먹고 가야한다고 말하셔서 저녁을 먹고 갔다. 그런데 같이 있었던 고흘 장군님의 장녀로 보이는 미한 아가씨의 말솜씨에 밥을 제대로 못 떴다. 후일 온달이 태자를 지키는 태자지유당주(太子脂諭幢主)로 임명되었을 때 태자비가 되어있는 그녀를 보고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온달 자신이 배속된 동부대인 발안의 부대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명화공주의 이별을 알리는 서신과 종이에 싸져 있는 물건이 있었다. 공주도 앞으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것을 간직하라. 행운이 있을 것이다.”
온달과 명화공주가 처음 만났을 때 그 둘을 연결해주었던 팔찌 한쪽이었다.
[아까전은 죄송합니다. 아! 아가씨 두고 가신 것이 있지요]
그 때 장문고에서 공주님이 흘리고 온달이 주운 팔찌
온달은 그 팔찌를 자신의 왼팔에 끼었다.
‘이제는 다시는 못 뵙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팔찌의 아름다음을 감상했다.
단기 2899년 서기 566년 영강(永康) 2년 평원태왕 8년 병술(丙戌)년 3월
돌궐의 전쟁에 대비하여서 겨울에 편성을 완료한 평양의 중앙군 5만과 백제와의 전쟁에서 조련된 남방 방면군 5만과 합류하여 10만 대군이 40만 평양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돌궐이 침공한 거란족이 사는 요해(遼海)지역으로 출정하였다. 총사령관은 상승의 명장인 막리지 고흘 장군, 부사령관은 동부대인 발안과 북부대인 구성이었고 태왕의 총애를 받던 연자유와 강이식도 이 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계찰대 전쟁으로 고구려 군부에 주목받는 인재로 떠오르며 귀족과 군부와의 권력투쟁과 후주와의 전쟁 등 12년간 수많은 파란을 일으킨 평민출신 하급 장교 온달도 이 날 북쪽으로 떠나게 되었다.
고구려 돌궐간의 마지막 대전(大戰)인 이계찰대 전쟁의 시작이었다.
사실 온달은 북쪽으로 떠나면서 몇 개월 만에 명화공주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자기도 몰랐을 것이다.
병술년 그해 고구려는 두 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첫째는 상승의 명장인 고흘장군이 돌궐의 이계찰대에게 대패하였다는 것과
둘째는 연자유와 강이식이 필두가 된 신흥무관파가 왕족과 귀족들을 밀어내고 군부의 실력자로 역사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요동성 화의 때문이었다.
그리고 요동성 화의에 시발은 온달의 하극상사건이었다.
1부 여명편 끝
글쓴이 저작권자 김원식
이 소설에서 시나리오 각색, 도용, 표절을 절대 금합니다.
2부 전란편 1편은 토요일 오전 8시에 올리겠습니다.
첫댓글 재밌게 보고 있어요 ^^;;
재밌게 읽어주시는 것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꾸벅^^
난 또 오후 8시인줄알고 기다리려했는데 -_-; 혹시나 해서 들어와보니 있었네요! 온달을 형님으로 모시는 친구들이랑 있을때 얘기도 재미있네요 ㅋㅋ
오전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하하 저도 온달 3인방(온달, 설연, 마위)이 이야기에 재미를 주어야 글 쓰는 것이 잘 풀립니다. 아껴 읽어주시니 너무 감사드립니다. 꾸벅^^
그런데, 중간에 주씨가문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을 죽여서 고구려의 여러 학문이 쇠퇴했다는게 사실인가요?
창작입니다. 다만 그 안장태왕시기~양원태왕기에 불교세력이 전멸에 가까울정도로 타격을 입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고구려에서 왕권중심사상을 가진 세력이 완전히 쇠퇴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구려 지식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 것으로 추측합니다.고구려에서 불교세력은 소수립왕때부터 장수태왕(문자명왕)까지 영향력이 강했는데 소장님께선 장수태왕, 문자명왕의 왕칭에도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을 하십니다. 하지만 후일인 평원태왕기에는 불교세력의 대부로 보이는 대대로 왕고덕조차도 불교교리에 기본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상이지만 고구려도 무왕이나 진흥태왕같이 불교로 통한 왕권강화를 추구했나
안장태왕의 의문사이후 왕권이 약화되면서 불교도 동시에 쇠퇴한것으로 보입니다.(평원태왕의 불교진흥책과 연개소문의 노장사상도입을 생각하면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가 보입니다.-참조: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하나의 학문&사상&종교가 전멸에 가까운 상황에 몰렸다는 것은 고구려 내부에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저는 그것을 빚대어서 고구려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리려 한 것입니다. 고구려가 국내외적인 대혼란에 빠진 뒤 자유로운 학문적 분위기(?)가 아닌 각 세력간에 이해관계에 묻혀서 지식인들이 말을 못하고 사는 분위기. 즉 정치파벌간에 투쟁에 지식인들이 휩슬려서 쇠퇴하는 상황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무슨 아직 하산할 정도 아니 스승님을 찾아서 산도 안 올라간 아마추어입니다. 아직 원문도 못 읽습니다. 하하^^ 하여간 매우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꾸벅^^
매번 잘 읽습니다~~
재미 있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꾸벅^^
불교의 쇠퇴는 그러한 정치적 투쟁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 하나로는 고구려 고유의 추모왕신앙이 불교의 영향으로 나름의 체계를 갖추게 된데다가 더 이상 불교가 국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왕실의 지속적인 지원이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는 전호태 선생님의 연구성과를 비롯해 고구려 불교에 대한 연구성과들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즉, 정치적인 투쟁의 결과로만 불교의 쇠퇴를 그릴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사상적인 변화에서도 그 현상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요. 암튼,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 건필하십쇼~
저도 사실 고구려에서 백제와 신라 달리 고유적인 추모왕신앙(?)이 불교와 달리 밀려나지 않았는지 궁굼했는데 결론은 못내리고 그냥 머리 속에 지워버렸는데 그래서인지 소설 쓸때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물론 고구려에 추모신왕에 대한 표현에 심혈을 기울이기는 했습니다)(아직도 고구려에 고유신앙이 강했는지 저도 막연한 대답뿐...입니다. 즉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한번 질문으로 올려야 되는데.) 나중에 최종수정을 하여서 탈고할때 참조하겠습니다. 이런 지적은 대환영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쓰는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가 '고구려를 제대로 알리자'입지다.
이런 역사적 내용이나 문화사를 쓰면 사실 논란도 붙기 때문에 저도 부담이 갔지만 역사컨텐츠에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 쓰기로 했습니다.(요즘사극처럼 궁정여인네들이 아들 왕위로 올리려고 싸우는 것이나 삼각관계사랑이야기를 쓰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어느정도 차용하겠지만 이야기의 주로 쓰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마추어(원문을 못읽기 때문에)이고 소설도 이번이 처음이기때문에 이렇게 카페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듣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실수하거나 다른 반론이 있을 때는 꼭 조언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적해주신 麗輝님에게 매우 감사드립니다. 건필하겠습니다.^^ 꾸벅